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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해설서를 열심히 읽었지만 원전 앞에서 낭패한 이들을 위한
‘원전디딤돌’ 시리즈 1탄!
현대 철학을 위한 최고의 종합,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내 힘으로 읽는다!
철학 원전을 직접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참고서이자 작은 격려가 될 '원전디딤돌'의 첫번째 책.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개념과 논의들을 알기 쉽게 충실히 설명하면서도 칸트의 문장과 문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서술하여, 독자들이 원전 내용의 전모를 파악하는 동시에 원전을 직접 읽어 낼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했다.
칸트의 철학은 현대 철학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자 최고의 종합으로 칸트의 책들을 읽지 않고 현대의 철학을 논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칸트 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으로 그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책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서문’에서 시작하여 감성론, 범주와 도식론, 오류추리, 이율배반과 순수이성의 ‘이상’에 이르기까지 『순수이성비판』의 내용 전체를 칸트 이후의 철학적 성과를 참조하면서 꼼꼼하게 다루고 있는 해설서로, 철학으로부터 스스로의 사유를 길어 내려는 독자라면 원전을 읽기 전에 꼭 거쳐야 할 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서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1부 『순수이성비판』의 구조와 과제
1강 『순수이성비판』의 구조
인식의 구조 | 인간 이성의 운명과 비판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 대상과 인식의 일치 | 인식의 두 가지 원천 | 3대 비판서의 주제
2강 초월론 철학의 과제
합리론과 경험론을 넘어 |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 순수이성의 원천과 한계 | 초월적 철학
2부 초월적 감성학
3강 경험적 직관과 시공간
경험적 직관 | 순수직관으로서의 시공간 | 시공간에 대한 기존의 입장들
4강 시공간 개념에 대한 증명
공간이 순수직관인 이유 | 시간이 순수직관인 이유 | 시공간 개념에 대한 초월적 해설 | 철학적인 것에 대하여
5강 초월적 감성학의 의미
초월적 관념성과 경험적 실재성 | 논리적 구별과 초월적 구별
3부 초월적 논리학 1 : 분석학
6강 감성과 지성
인식의 두 원천 | 초월적 논리학과 초월적인 것 | 초월적 분석학과 초월적 변증학
7강 초월적 분석학과 판단의 문제
순수지성(개념)의 요건 | 순수지성 개념들을 발견하는 초월적 단서 | 무한판단의 문제
8강 범주에 대하여
범주, 지성의 순수개념
9강 직관과 범주의 접속 문제
초월적 연역에 대하여
10강 순수지성 개념의 연역(초판)
경험 가능성을 위한 선험적 근거 | 직관에서의 포착의 종합 | 상상력에서의 재생의 종합 | 개념에서의 인지의 종합 | 대상=X와 초월적 통각 | 선험적 인식에 있어 범주들의 가능성 |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
11강 순수지성 개념의 연역(재판)
주관성이 정초하는 객관성 | 지성과 상상력의 관계 | 통각, 지성의 근본 기능 | 인간과 신과 동물 | 객관적 타당성 |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 자연의 법칙은 나의 범주에 있다
12강 도식론과 판단의 원칙론
판단력에 대하여 | 도식론의 문제의식과 라이프니츠의 충분이유율 | 시간의 도식 | 양의 범주의 도식 | 성질 범주의 도식 | 관계 범주의 도식 | 양상 범주의 도식 | 도식에서 해방된 범주
13강 선험적 종합판단의 원칙들
원칙론의 문제의식 | 수학적 원칙과 역학적 원칙
14강 현상체와 예지체
지성의 땅과 가상의 바다 | 개념의 경험적 사용과 초험적 사용 | 예지체에 대한 오해 | 예지체의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 |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반성 개념의 모호성
4부 초월적 논리학 2 : 변증학
15강 순수이성과 형이상학
초월적 가상에 대하여 | 초월적 가상과 순수이성 | 초월적 이념
16강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나는 생각한다’ | 실체성의 오류추리 | 단순성의 오류추리 | 인격성의 오류추리 | (외적 관계의) 관념성의 오류추리 | 순수 영혼론의 결산 | ‘나’(영혼)의 속성과 범주의 관계 | 매개념 다의의 오류 | 훈육으로서의 이성적 영혼론
17강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순수이성의 안락사 | 우주론적 이념들의 체계 | 첫번째 이율배반 | 두번째 이율배반 | 세번째 이율배반 | 네번째 이율배반 | 에피쿠로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대립 | 이율배반의 이유와 비판의 척도 | 변증학 해결의 열쇠로서의 초월적 관념론 | 우주론적 논쟁에 대한 비판적 판결 | 이율배반의 가상적 상충 | 순수이성의 규제적 원리 | 수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 역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18강 순수이성의 이상
존재론적 증명의 불가능성 | 우주론적 증명의 불가능성 | 물리신학적 증명의 불가능성 | 이념들의 규제적 사용 | 이성의 변증성과 그 궁극적 의도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1부 『순수이성비판』의 구조와 과제
1강 『순수이성비판』의 구조
인식의 구조 | 인간 이성의 운명과 비판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 대상과 인식의 일치 | 인식의 두 가지 원천 | 3대 비판서의 주제
2강 초월론 철학의 과제
합리론과 경험론을 넘어 |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 순수이성의 원천과 한계 | 초월적 철학
2부 초월적 감성학
3강 경험적 직관과 시공간
경험적 직관 | 순수직관으로서의 시공간 | 시공간에 대한 기존의 입장들
4강 시공간 개념에 대한 증명
공간이 순수직관인 이유 | 시간이 순수직관인 이유 | 시공간 개념에 대한 초월적 해설 | 철학적인 것에 대하여
5강 초월적 감성학의 의미
초월적 관념성과 경험적 실재성 | 논리적 구별과 초월적 구별
3부 초월적 논리학 1 : 분석학
6강 감성과 지성
인식의 두 원천 | 초월적 논리학과 초월적인 것 | 초월적 분석학과 초월적 변증학
7강 초월적 분석학과 판단의 문제
순수지성(개념)의 요건 | 순수지성 개념들을 발견하는 초월적 단서 | 무한판단의 문제
8강 범주에 대하여
범주, 지성의 순수개념
9강 직관과 범주의 접속 문제
초월적 연역에 대하여
10강 순수지성 개념의 연역(초판)
경험 가능성을 위한 선험적 근거 | 직관에서의 포착의 종합 | 상상력에서의 재생의 종합 | 개념에서의 인지의 종합 | 대상=X와 초월적 통각 | 선험적 인식에 있어 범주들의 가능성 |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
11강 순수지성 개념의 연역(재판)
주관성이 정초하는 객관성 | 지성과 상상력의 관계 | 통각, 지성의 근본 기능 | 인간과 신과 동물 | 객관적 타당성 |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 자연의 법칙은 나의 범주에 있다
12강 도식론과 판단의 원칙론
판단력에 대하여 | 도식론의 문제의식과 라이프니츠의 충분이유율 | 시간의 도식 | 양의 범주의 도식 | 성질 범주의 도식 | 관계 범주의 도식 | 양상 범주의 도식 | 도식에서 해방된 범주
13강 선험적 종합판단의 원칙들
원칙론의 문제의식 | 수학적 원칙과 역학적 원칙
14강 현상체와 예지체
지성의 땅과 가상의 바다 | 개념의 경험적 사용과 초험적 사용 | 예지체에 대한 오해 | 예지체의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 |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반성 개념의 모호성
4부 초월적 논리학 2 : 변증학
15강 순수이성과 형이상학
초월적 가상에 대하여 | 초월적 가상과 순수이성 | 초월적 이념
16강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나는 생각한다’ | 실체성의 오류추리 | 단순성의 오류추리 | 인격성의 오류추리 | (외적 관계의) 관념성의 오류추리 | 순수 영혼론의 결산 | ‘나’(영혼)의 속성과 범주의 관계 | 매개념 다의의 오류 | 훈육으로서의 이성적 영혼론
17강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순수이성의 안락사 | 우주론적 이념들의 체계 | 첫번째 이율배반 | 두번째 이율배반 | 세번째 이율배반 | 네번째 이율배반 | 에피쿠로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대립 | 이율배반의 이유와 비판의 척도 | 변증학 해결의 열쇠로서의 초월적 관념론 | 우주론적 논쟁에 대한 비판적 판결 | 이율배반의 가상적 상충 | 순수이성의 규제적 원리 | 수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 역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18강 순수이성의 이상
존재론적 증명의 불가능성 | 우주론적 증명의 불가능성 | 물리신학적 증명의 불가능성 | 이념들의 규제적 사용 | 이성의 변증성과 그 궁극적 의도
책 속으로
우리는 ‘이건 귤이야’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끝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귤이나 가축, 들판의 곡식이나 바다의 어류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자원’들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경험 불가능한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귤은 분명 경험적인 대상이지만, 이 세계의 존재 목적이나 창조주에 대한 생각은 영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영역에 대한 생각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신들림 같은 현상을 들어 신에 대해 경험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건 그저 개인적인 신체적 경험에 불과할 뿐이고, 그 개인적 경험이 신에 대한 인식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경험적이자 경험 초월적인 영역도 우리 사고 안에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학’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사고할 수는 있다는 점, 그런 점에서 우리 이성의 한 부분으로서 분석하고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영역이 되겠습니다.
--- pp.21~22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관점 전환이 칸트에게도 일어난 건데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대상이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라, 관찰자인 우리가 대상에게 가는 식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이라고 부릅니다. 칸트의 생각은 경험(태양) 대신 우리의 선험적 인식(지구)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간주하자는 것입니다. 대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대상을 재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관찰자로서 선험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바로 그 선험적 인식의 작동 방식을 칸트가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 p.31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직관 그대로 존재하는 그런 사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물 자체의 관계도 우리에게 현상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감각하는 주관적 성질을 제거한다면 시공간적으로 주어지는 대상들의 관계들(동시적 발생, 잇따른 변화 등등), 그리고 시공간 자체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오로지 현상으로서,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로서가 아닌 현상으로서 우리 안에 실존할 수 있습니다.
--- pp.95~96
또한 이 두 능력은 그 기능을 서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들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판단(인식)에 오류가 생겼다면 그것은 감관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의 문제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감관들은 ‘마음의 수용성’이기 때문에 경험적 직관들을 받아들일 뿐 그것에 대해 사고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칸트에게 감관은 오류의 장소가 아닙니다. 감성과 지성은 인식에 있어 두 요소이지만 이 둘의 기능과 성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요소의 이종성이야말로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이해에서 핵심적입니다. 이처럼 본성을 달리하는 것을 불투명과 투명처럼(로크) 정도와 강도의 차이로 생각하면 칸트 철학을 오독하게 됩니다.
--- pp.104~105
칸트는 지성의 땅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땅인 것처럼 속이는 가상이 발생하기 쉽다고 말합니다. 가상이 가상인 줄 모르고 지성의 땅에서 무모하게 벗어나는 모험에 대한 감행, 바로 이것이 칸트가 지금까지 비판했던 당시의 형이상학적 상황입니다. 칸트는 지금 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바다는 “가상의 본래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상임을 알고 모험하는 것과 모르고 모험하는 것은 다르겠죠? 칸트의 ‘비판’은 지성의 자리와 가상의 자리에 대한 명확한 구분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삶에 분명히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인식에 기초합니다.
--- pp.258~259
‘신은 전능하고 존재한다’는 판단은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는 판단처럼 그저 개념상으로만 모순이 없는 분석명제에 불과합니다. 달리 말해 개념적으로는 언제나 그 존재가 가능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낱 가능성을 표현하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그 대상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거기에 뭔가 새로운 것이 보충된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신이 가능적인 신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하지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즉 종합적이지 않습니다.
--- pp.21~22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관점 전환이 칸트에게도 일어난 건데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대상이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라, 관찰자인 우리가 대상에게 가는 식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이라고 부릅니다. 칸트의 생각은 경험(태양) 대신 우리의 선험적 인식(지구)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간주하자는 것입니다. 대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대상을 재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관찰자로서 선험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바로 그 선험적 인식의 작동 방식을 칸트가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 p.31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직관 그대로 존재하는 그런 사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물 자체의 관계도 우리에게 현상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감각하는 주관적 성질을 제거한다면 시공간적으로 주어지는 대상들의 관계들(동시적 발생, 잇따른 변화 등등), 그리고 시공간 자체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오로지 현상으로서,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로서가 아닌 현상으로서 우리 안에 실존할 수 있습니다.
--- pp.95~96
또한 이 두 능력은 그 기능을 서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들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판단(인식)에 오류가 생겼다면 그것은 감관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의 문제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감관들은 ‘마음의 수용성’이기 때문에 경험적 직관들을 받아들일 뿐 그것에 대해 사고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칸트에게 감관은 오류의 장소가 아닙니다. 감성과 지성은 인식에 있어 두 요소이지만 이 둘의 기능과 성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요소의 이종성이야말로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이해에서 핵심적입니다. 이처럼 본성을 달리하는 것을 불투명과 투명처럼(로크) 정도와 강도의 차이로 생각하면 칸트 철학을 오독하게 됩니다.
--- pp.104~105
칸트는 지성의 땅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땅인 것처럼 속이는 가상이 발생하기 쉽다고 말합니다. 가상이 가상인 줄 모르고 지성의 땅에서 무모하게 벗어나는 모험에 대한 감행, 바로 이것이 칸트가 지금까지 비판했던 당시의 형이상학적 상황입니다. 칸트는 지금 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바다는 “가상의 본래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상임을 알고 모험하는 것과 모르고 모험하는 것은 다르겠죠? 칸트의 ‘비판’은 지성의 자리와 가상의 자리에 대한 명확한 구분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삶에 분명히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인식에 기초합니다.
--- pp.258~259
‘신은 전능하고 존재한다’는 판단은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는 판단처럼 그저 개념상으로만 모순이 없는 분석명제에 불과합니다. 달리 말해 개념적으로는 언제나 그 존재가 가능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낱 가능성을 표현하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그 대상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거기에 뭔가 새로운 것이 보충된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신이 가능적인 신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하지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즉 종합적이지 않습니다.
---p.379
출판사 리뷰
『순수이성비판 강의』/『실천이성비판 강의』
지은이 인터뷰
1. 책의 서문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도 칸트의 원전을 직접 읽어 낼 수 있도록 해설서를 집필하셨다고 밝히고 계신데요.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책을 집필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도 연결이 되는 질문인데요. 저도 원래는 현대문학을 전공했고, 철학 자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경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철학과 아예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석박사 논문을 위해서는 연구 방법론이 필요한데, 여기서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석사논문을 쓸 때는 지젝과 정신분석학을 이용했고, 박사논문을 쓸 때는 푸코의 철학을 이용했습니다. 그래도 철학에 있어서는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전문가인 것은 확실합니다. 학위를 마치고 문학에서 철학 쪽으로 방향을 틀어 혼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원전을 독파해 내야 하는 부담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세미나도 하고 해서 겨우 만들어 낸 성과물이 스피노자에 대한 해설서(『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였습니다. 이때 공부를 하고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에티카』라는 원전을 이해할 수 있게 누군가 곁에서 친절하게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해설서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심하게 고생을 했거든요. 비전문가의 어려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나서 자연스레 칸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금 칸트의 원전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렇게 난해하고 두껍고 혼란스런 책을 제대로 읽어 낸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몇 년간 칸트의 두꺼운 원전(박영사판과 아카넷판)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이 철학 공부하기의 힘겨움에서 나를 구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물론 해설서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설서의 정제된 해설과 정리가 원전의 방만한 체계와 문체를 독파해 내는 데 있어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책은 철학의 원전을 직접 읽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원전을 독파하는 데 있어 작은 디딤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처럼 철학 원전 앞에서 좌절한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앎에 대한 강한 열망이 꺾이지 않도록 작은 격려 같은, 혹은 작은 참고서 같은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급적 칸트의 원전에 있는 내용을 그 문체를 이용해 가면서, 그리고 원문을 이용해 가면서 해설을 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현란한 정리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원전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원전을 이용해 새로운 사유를 우리가 직접 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이번에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해설서를 함께 출간하셨는데요. 칸트 철학이 철학사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이번에 해설서를 집필하신 두 권의 원전은 칸트 철학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칸트는 ‘자유’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 이성의 진보와 자유를 확신했습니다. 그만큼 자유라는 실천적 주제를 칸트와 분리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칸트와 더불어 인간에게서 자유라는 것이 환원 불가능한 근본적 요소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이 자유가 바로 『순수이성비판』에서 확보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 마음의 관심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사변적 관심, 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 사변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고 실천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입니다. 사변적 관심이란 대상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칸트 이전까지 인식이란 대상에 의한 것, 다시 말해 대상에 종속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상에 종속되게 되면 우리 인식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상의 특수성과 경험적 다양성에 따라 인식이 매번 달라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칸트는 발상을 전환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르는 것이죠. 대상이 우리 의식 표면에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직접 구성한다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성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을 우리의 지성 안에 있는 ‘범주’가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 인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현상’이 아닌 ‘물자체’는 우리가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 있게 됩니다. 이를 칸트는 ‘예지계’라고 불러 ‘현상계’와 구분합니다.
이제 칸트와 더불어 인간의 현실과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와 그 경험의 한계로 작동하는 예지계로 분리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인간의 자유가 태어납니다. 현상계는 경험의 세계입니다. 이곳은 인과의 보편적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지계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예지계는 경험적인 인과율이 지배하지 못하는 세계, 따라서 자유인과의 법칙이 있을 수 있는 세계로 상정됩니다. 여기까지가 『순수이성비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사변적 관심 속에서는, 다시 말해 인식에 있어서는 결코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칸트에게 경험이란 철저히 현상과 지성의 만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사변적 관심을 넘어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거기서 우리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인 것이죠. 그리고 이 자유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입니다.
도덕법칙은 자유의 법칙이고, 무조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자유’의 명령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떤 행위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이 자유의 형식에 맞아야 한다고만 명령합니다. 실천해야 할 행위의 내용이 사라지고 그 행위가 따라야 할 규칙과 형식만을 요구하는 법칙이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입니다. 이제 칸트 이후로 자유는 더 이상 금지나 억압이 없는 무제약의 상태가 아니게 됩니다. 자유는 모든 정념적인 내용을 스스로 제한하고 오직 도덕법칙이라는 형식에 맞추는 무서운 실천적 명령이 됩니다. 자유라는 명령, 이 모순어법 속에 칸트적 윤리의 새로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칸트는 인식과 실천에서 모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달성합니다. 칸트와 더불어 인식은 대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표상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 구성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것은 계율처럼 주어진 선한 행위 목록의 실천이 아니라 형식으로 주어지는 도덕법칙의 실천적 수행이 됩니다. 칸트에게는 선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은 도덕법칙과의 일치 속에서만 결과적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선의 목록이 미리 있고 그것을 실천만 하는 행위가 윤리라면 주체적 자유라는 것은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인 도덕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철저히 주체의 자유라는 심연 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상호 이익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윤리와 같은 철학은 칸트와 완전히 낯선 것이 됩니다.
3. 원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현대 철학의 논의를 가져와서 설명하시는 부분도 많습니다. 책을 집필하시면서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조하셨는지, 오늘날 독자들이 칸트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순수이성비판』은 선험적 인식의 구성적 종합이라는 과제를 다룹니다. 감성적 표상들을 지성의 선험적인 개념(범주)들이 어떻게 종합하는지 그 과정을 다루고, 이를 ‘초월론적 관념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철학자 들뢰즈는 이 종합의 과정을 경험론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칸트의 종합론에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관념론을 경험론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죠(‘초월론적 경험론’).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칸트는 아직도 분명 현대 철학의 중요한 원천입니다. 대신 그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철학과 그를 계승하려는 철학으로 나눠져 있지요. 니체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야말로 칸트의 제자이면서도 칸트에 대한 대단한 비판자이지요. 따라서 칸트를 풍부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제가 보기엔 경험론적인 계열보다는 관념론쪽 철학을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특히 바디우나 라캉과 지젝과 같은 정신분석학 쪽 계열은 칸트 철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버전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도를 바디우가 실정적 존재와 사건의 진리의 구도로 전환하고 있다면, 라캉은 상상계와 실재계라는 구도를 생각합니다. 바디우의 책으로는 그의 철학을 확실한 구도 속에서 설명하는 『철학과 사건』(오월의 봄, 2015) 정도가 좋습니다. 그리고 라캉 정신분석학의 경우는 난해하기는 해도 지젝의 해설과 정리가 무난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라캉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을 읽으면 되고,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 체계와 라캉의 관계를 알려면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가 좋습니다. 그리고 칸트 윤리학의 경우는 문학작품을 예로 들어 날카롭게 설명하는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8)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4. 책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칸트의 개념어나 논리 체계는 여전히 ‘철학적’인 듯합니다. 칸트 철학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지침, 혹은 메시지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너무 도덕적이라고 니체에게 자주 비판받는 칸트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이성비판』 머리말(재판)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지식을 폐기해야만 했다.” 니체의 비판은 타당합니다. 칸트는 지식(앎)의 자리 바깥에 신앙(종교)을 놓아둠으로써 합리적 비판의 대상에서 종교를 제외하는 우를 범한 것이죠.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믿겠다는 그런 뉘앙스로 읽히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이 구절을 최대한 칸트식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신앙의 자리가, 다시 말해 믿음의 영역이 지식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칸트에게 앎(인식)은 철저히 사변적 관심의 세계이고, 여기서 주재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지성의 입법 아래 다양한 감성적 표상들이 종합되면서 하나의 객관적 인식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지성 말고 이성이라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절대자(무조건자)를 추리하는 능력입니다. 자유, 영혼, 신과 같은 대상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그런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러나 이 이성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경험 불가능한 것은 지성에 의해 종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이성의 세계를 경험 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때 이율배반이 발생한다고 칸트는 경고합니다. 신앙의 자리란 객관적 인식의 한계 바깥의 것이기 때문에 그 영역을 인식하려고 하는 순간, 다시 말해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가당찮은 허상에 빠져들고 맙니다. 신을 경험했다고, 자유의 나라를 인식했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광신입니다. 우리는 저 예지적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칸트에게 그 세계는 인식의 세계(지식)가 아니라 실천의 세계(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진리)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부조리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과거 근대적인 ‘혁명적’ 운동들은 대개 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우리의 앎(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전제 아래 가능했습니다. 전체주의든 파시즘이든 대규모로 대중을 동원하는 운동들은 자신의 목표를 진리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운동이 역사적인 필연적 법칙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은 부득이한 것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이 과정은 역사적 진리이기 때문이죠. 진리(라고 간주되는 것)가 명령할 때 대중의 광신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칸트는 실천(신앙)에 있어 이 진리(지식)의 자리를 비워둡니다. 윤리적 행위는 진리(지식)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라는 행위에 돌입할 때 그때는 우리의 앎이 그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입니다. 인식이 끝나는 자리에서 윤리적 실천과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 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지은이 인터뷰
1. 책의 서문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도 칸트의 원전을 직접 읽어 낼 수 있도록 해설서를 집필하셨다고 밝히고 계신데요.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책을 집필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도 연결이 되는 질문인데요. 저도 원래는 현대문학을 전공했고, 철학 자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경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철학과 아예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석박사 논문을 위해서는 연구 방법론이 필요한데, 여기서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석사논문을 쓸 때는 지젝과 정신분석학을 이용했고, 박사논문을 쓸 때는 푸코의 철학을 이용했습니다. 그래도 철학에 있어서는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전문가인 것은 확실합니다. 학위를 마치고 문학에서 철학 쪽으로 방향을 틀어 혼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원전을 독파해 내야 하는 부담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세미나도 하고 해서 겨우 만들어 낸 성과물이 스피노자에 대한 해설서(『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였습니다. 이때 공부를 하고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에티카』라는 원전을 이해할 수 있게 누군가 곁에서 친절하게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해설서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심하게 고생을 했거든요. 비전문가의 어려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나서 자연스레 칸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금 칸트의 원전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렇게 난해하고 두껍고 혼란스런 책을 제대로 읽어 낸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몇 년간 칸트의 두꺼운 원전(박영사판과 아카넷판)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이 철학 공부하기의 힘겨움에서 나를 구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물론 해설서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설서의 정제된 해설과 정리가 원전의 방만한 체계와 문체를 독파해 내는 데 있어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책은 철학의 원전을 직접 읽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원전을 독파하는 데 있어 작은 디딤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처럼 철학 원전 앞에서 좌절한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앎에 대한 강한 열망이 꺾이지 않도록 작은 격려 같은, 혹은 작은 참고서 같은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급적 칸트의 원전에 있는 내용을 그 문체를 이용해 가면서, 그리고 원문을 이용해 가면서 해설을 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현란한 정리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원전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원전을 이용해 새로운 사유를 우리가 직접 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이번에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해설서를 함께 출간하셨는데요. 칸트 철학이 철학사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이번에 해설서를 집필하신 두 권의 원전은 칸트 철학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칸트는 ‘자유’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 이성의 진보와 자유를 확신했습니다. 그만큼 자유라는 실천적 주제를 칸트와 분리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칸트와 더불어 인간에게서 자유라는 것이 환원 불가능한 근본적 요소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이 자유가 바로 『순수이성비판』에서 확보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 마음의 관심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사변적 관심, 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 사변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고 실천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입니다. 사변적 관심이란 대상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칸트 이전까지 인식이란 대상에 의한 것, 다시 말해 대상에 종속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상에 종속되게 되면 우리 인식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상의 특수성과 경험적 다양성에 따라 인식이 매번 달라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칸트는 발상을 전환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르는 것이죠. 대상이 우리 의식 표면에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직접 구성한다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성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을 우리의 지성 안에 있는 ‘범주’가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 인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현상’이 아닌 ‘물자체’는 우리가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 있게 됩니다. 이를 칸트는 ‘예지계’라고 불러 ‘현상계’와 구분합니다.
이제 칸트와 더불어 인간의 현실과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와 그 경험의 한계로 작동하는 예지계로 분리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인간의 자유가 태어납니다. 현상계는 경험의 세계입니다. 이곳은 인과의 보편적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지계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예지계는 경험적인 인과율이 지배하지 못하는 세계, 따라서 자유인과의 법칙이 있을 수 있는 세계로 상정됩니다. 여기까지가 『순수이성비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사변적 관심 속에서는, 다시 말해 인식에 있어서는 결코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칸트에게 경험이란 철저히 현상과 지성의 만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사변적 관심을 넘어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거기서 우리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인 것이죠. 그리고 이 자유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입니다.
도덕법칙은 자유의 법칙이고, 무조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자유’의 명령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떤 행위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이 자유의 형식에 맞아야 한다고만 명령합니다. 실천해야 할 행위의 내용이 사라지고 그 행위가 따라야 할 규칙과 형식만을 요구하는 법칙이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입니다. 이제 칸트 이후로 자유는 더 이상 금지나 억압이 없는 무제약의 상태가 아니게 됩니다. 자유는 모든 정념적인 내용을 스스로 제한하고 오직 도덕법칙이라는 형식에 맞추는 무서운 실천적 명령이 됩니다. 자유라는 명령, 이 모순어법 속에 칸트적 윤리의 새로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칸트는 인식과 실천에서 모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달성합니다. 칸트와 더불어 인식은 대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표상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 구성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것은 계율처럼 주어진 선한 행위 목록의 실천이 아니라 형식으로 주어지는 도덕법칙의 실천적 수행이 됩니다. 칸트에게는 선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은 도덕법칙과의 일치 속에서만 결과적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선의 목록이 미리 있고 그것을 실천만 하는 행위가 윤리라면 주체적 자유라는 것은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인 도덕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철저히 주체의 자유라는 심연 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상호 이익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윤리와 같은 철학은 칸트와 완전히 낯선 것이 됩니다.
3. 원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현대 철학의 논의를 가져와서 설명하시는 부분도 많습니다. 책을 집필하시면서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조하셨는지, 오늘날 독자들이 칸트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순수이성비판』은 선험적 인식의 구성적 종합이라는 과제를 다룹니다. 감성적 표상들을 지성의 선험적인 개념(범주)들이 어떻게 종합하는지 그 과정을 다루고, 이를 ‘초월론적 관념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철학자 들뢰즈는 이 종합의 과정을 경험론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칸트의 종합론에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관념론을 경험론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죠(‘초월론적 경험론’).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칸트는 아직도 분명 현대 철학의 중요한 원천입니다. 대신 그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철학과 그를 계승하려는 철학으로 나눠져 있지요. 니체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야말로 칸트의 제자이면서도 칸트에 대한 대단한 비판자이지요. 따라서 칸트를 풍부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제가 보기엔 경험론적인 계열보다는 관념론쪽 철학을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특히 바디우나 라캉과 지젝과 같은 정신분석학 쪽 계열은 칸트 철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버전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도를 바디우가 실정적 존재와 사건의 진리의 구도로 전환하고 있다면, 라캉은 상상계와 실재계라는 구도를 생각합니다. 바디우의 책으로는 그의 철학을 확실한 구도 속에서 설명하는 『철학과 사건』(오월의 봄, 2015) 정도가 좋습니다. 그리고 라캉 정신분석학의 경우는 난해하기는 해도 지젝의 해설과 정리가 무난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라캉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을 읽으면 되고,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 체계와 라캉의 관계를 알려면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가 좋습니다. 그리고 칸트 윤리학의 경우는 문학작품을 예로 들어 날카롭게 설명하는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8)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4. 책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칸트의 개념어나 논리 체계는 여전히 ‘철학적’인 듯합니다. 칸트 철학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지침, 혹은 메시지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너무 도덕적이라고 니체에게 자주 비판받는 칸트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이성비판』 머리말(재판)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지식을 폐기해야만 했다.” 니체의 비판은 타당합니다. 칸트는 지식(앎)의 자리 바깥에 신앙(종교)을 놓아둠으로써 합리적 비판의 대상에서 종교를 제외하는 우를 범한 것이죠.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믿겠다는 그런 뉘앙스로 읽히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이 구절을 최대한 칸트식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신앙의 자리가, 다시 말해 믿음의 영역이 지식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칸트에게 앎(인식)은 철저히 사변적 관심의 세계이고, 여기서 주재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지성의 입법 아래 다양한 감성적 표상들이 종합되면서 하나의 객관적 인식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지성 말고 이성이라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절대자(무조건자)를 추리하는 능력입니다. 자유, 영혼, 신과 같은 대상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그런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러나 이 이성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경험 불가능한 것은 지성에 의해 종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이성의 세계를 경험 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때 이율배반이 발생한다고 칸트는 경고합니다. 신앙의 자리란 객관적 인식의 한계 바깥의 것이기 때문에 그 영역을 인식하려고 하는 순간, 다시 말해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가당찮은 허상에 빠져들고 맙니다. 신을 경험했다고, 자유의 나라를 인식했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광신입니다. 우리는 저 예지적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칸트에게 그 세계는 인식의 세계(지식)가 아니라 실천의 세계(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진리)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부조리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과거 근대적인 ‘혁명적’ 운동들은 대개 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우리의 앎(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전제 아래 가능했습니다. 전체주의든 파시즘이든 대규모로 대중을 동원하는 운동들은 자신의 목표를 진리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운동이 역사적인 필연적 법칙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은 부득이한 것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이 과정은 역사적 진리이기 때문이죠. 진리(라고 간주되는 것)가 명령할 때 대중의 광신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칸트는 실천(신앙)에 있어 이 진리(지식)의 자리를 비워둡니다. 윤리적 행위는 진리(지식)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라는 행위에 돌입할 때 그때는 우리의 앎이 그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입니다. 인식이 끝나는 자리에서 윤리적 실천과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 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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