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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의도, 민주주의도 무너진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고 행동할 것인지
2016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푸코의 말을 통해
우리 자신과 대한민국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이 책은 1978년 5월 27일에 소르본대학교에서 프랑스 철학회 주최로 열린 푸코의 강연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198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있었던 푸코의 강연 「자기 수양」, 그리고 버클리캠퍼스에서의 강연과 함께 기획된 세 차례의 토론을 싣고 있다. 앞의 두 강연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프랑스 철학회 학회지』84주년, 2호, 1990년 4~6월, 35~63쪽에 실린 강연록을 바탕으로 삼고, 그 외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 중인 푸코가 강연에서 말하지 않은 몇몇 구절을 포함한 자필 원고와, 교정을 위해 푸코에게 보냈지만 푸코가 직접 교정하지는 않은 강연록 첫 판본을 참고해 몇 군데 수정을 가했다. 「자기 수양」과 뒤이은 세 번의 토론에 대해서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와 IMEC(프랑스 현대 출판 기록원)가 갖고 있는 녹음 자료를 바탕으로 삼았다. 「자기 수양」 강연 역시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 중인 자필 원고를 참고해 보완했다. 녹취록을 푸는 과정에서 잘 들리지 않아 이해가 힘든 부분은 원서 편집자가 추측해서 추가했으며, 푸코가 강의에 사용한 원고와 강의 녹취록을 비교 혹은 대조해 이 책의 원서 편집자가 각주를 달아 보강했다. 또한 옮긴이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서에는 없지만 한국어로 바로 옮겼을 때 이해가 힘든 부분을 추가로 설명해 독자의 이해를 높였다. 더불어 이 책에 언급된 푸코의 저작과, 국내 미번역 상태인 『말과 글Dits et ecrits』을 정리해 독자의 편의를 높였다. 푸코의 논고와 인터뷰 등을 모은 『말과 글』은 그중 일부분이 단행본 혹은 단행본 안의 한 꼭지로 번역 및 출간되어 있는 경우들이 있다. 참고를 위해 프랑스어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고 국내 번역되어 있는 경우 서지사항을 함께 표기해놓았다.
푸코의 이 두 강연은 푸코 사유의 변화와 연속성을 담은 중요한 텍스트이다. 특히 푸코 후기 사유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의 문제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제공한다. 푸코는 일상에서 개개인을 구속하는 보이지 않는 미시 권력에 주목하고 권력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푸코는 강연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사목 활동에서 발전된 권력 형태, 요컨대 개인의 일상적인 품행을 인도하는 권력 형태가 시민 사회 내에서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푸코는 이 강연에서 종합적인 방식으로 '사목적 통치성'을 분석한다.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자기 수양」은 각각 78년과 81년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진행된 강의의 연장선상이자 이전 강의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좀 더 보충한 푸코의 미공개 강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78년부터 83년 사이에 일어난 푸코의 후기 사유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푸코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독보적인 철학 체계를 어떻게 구축해나갔는지 그 시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는 푸코의 자필 원고를 한국어판으로 세상에 처음 내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정의도, 민주주의도 무너진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고 행동할 것인지
2016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푸코의 말을 통해
우리 자신과 대한민국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이 책은 1978년 5월 27일에 소르본대학교에서 프랑스 철학회 주최로 열린 푸코의 강연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198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있었던 푸코의 강연 「자기 수양」, 그리고 버클리캠퍼스에서의 강연과 함께 기획된 세 차례의 토론을 싣고 있다. 앞의 두 강연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프랑스 철학회 학회지』84주년, 2호, 1990년 4~6월, 35~63쪽에 실린 강연록을 바탕으로 삼고, 그 외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 중인 푸코가 강연에서 말하지 않은 몇몇 구절을 포함한 자필 원고와, 교정을 위해 푸코에게 보냈지만 푸코가 직접 교정하지는 않은 강연록 첫 판본을 참고해 몇 군데 수정을 가했다. 「자기 수양」과 뒤이은 세 번의 토론에 대해서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와 IMEC(프랑스 현대 출판 기록원)가 갖고 있는 녹음 자료를 바탕으로 삼았다. 「자기 수양」 강연 역시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 중인 자필 원고를 참고해 보완했다. 녹취록을 푸는 과정에서 잘 들리지 않아 이해가 힘든 부분은 원서 편집자가 추측해서 추가했으며, 푸코가 강의에 사용한 원고와 강의 녹취록을 비교 혹은 대조해 이 책의 원서 편집자가 각주를 달아 보강했다. 또한 옮긴이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서에는 없지만 한국어로 바로 옮겼을 때 이해가 힘든 부분을 추가로 설명해 독자의 이해를 높였다. 더불어 이 책에 언급된 푸코의 저작과, 국내 미번역 상태인 『말과 글Dits et ecrits』을 정리해 독자의 편의를 높였다. 푸코의 논고와 인터뷰 등을 모은 『말과 글』은 그중 일부분이 단행본 혹은 단행본 안의 한 꼭지로 번역 및 출간되어 있는 경우들이 있다. 참고를 위해 프랑스어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고 국내 번역되어 있는 경우 서지사항을 함께 표기해놓았다.
푸코의 이 두 강연은 푸코 사유의 변화와 연속성을 담은 중요한 텍스트이다. 특히 푸코 후기 사유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의 문제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제공한다. 푸코는 일상에서 개개인을 구속하는 보이지 않는 미시 권력에 주목하고 권력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푸코는 강연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사목 활동에서 발전된 권력 형태, 요컨대 개인의 일상적인 품행을 인도하는 권력 형태가 시민 사회 내에서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푸코는 이 강연에서 종합적인 방식으로 '사목적 통치성'을 분석한다.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자기 수양」은 각각 78년과 81년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진행된 강의의 연장선상이자 이전 강의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좀 더 보충한 푸코의 미공개 강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78년부터 83년 사이에 일어난 푸코의 후기 사유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푸코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독보적인 철학 체계를 어떻게 구축해나갔는지 그 시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는 푸코의 자필 원고를 한국어판으로 세상에 처음 내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목차
푸코 작품 약어
머리말
들어가며
1. 비판이란 무엇인가? (1978년 5월 27일)
2. 자기수양 (1983년 3월 12일)
3.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철학과에서의 토론
4.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사학과에서의 토론
5.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불문과에서의 토론
옮긴이 해제
찾아보기
머리말
들어가며
1. 비판이란 무엇인가? (1978년 5월 27일)
2. 자기수양 (1983년 3월 12일)
3.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철학과에서의 토론
4.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사학과에서의 토론
5.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불문과에서의 토론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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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
1978년은 푸코의 지적 여정에서 결정적인 한 해였다.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통치성’이라는 주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통치성은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의 문제틀 아래서 1984년까지 푸코가 수행한 연구의 핵심을 이룬다. 1978년 4월 초 푸코는 일본에서의 긴 체류 기간 동안 중요한 강연들을 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8년 5월 27일에 프랑스 철학회 주최로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한다. 제목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강연은 여러 상황 때문에 푸코의 지적 산물 중에서 진정으로 특이한 것이 되었다. 푸코는 이 강연을 통해 그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고 설명한다. 이후 1990년 『프랑스 철학회 학회지』에 이 텍스트가 실리면서 그 제목이 붙여졌다. 이 강연은 우선적으로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가 진척시킨 견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실제로 푸코는 어떤 덕과 흡사한, 그리고 자신이 '비판적 태도'라고 부르는 어떤 것과 닮은 특정한 사유 방식, 말하기 방식, 행동 방식의 출현을 탐색한다. 푸코가 보기에 그것들의 출현은 서구 근대의 특징적인 역사적 현상과 연결된 것이었으며, 15~16세기에 시작된 인간 통치 기술들의 파급을 아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푸코는 이 강연에서 가장 종합적인 방식으로 ‘사목적 통치성’을 다시 분석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보다 석 달 앞선 것이었다.
푸코는 우선 자신이 말하는 ‘비판적 태도’의 존재 방식을 칸트가 시도한 ‘비판’의 기획으로부터 끌어낸다. 16세기 서구 유럽의 여러 사회들에서 상당히 특징적으로 보이는 통치의 일반화는, ‘어떻게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 이것을 푸코는 ‘비판적 태도’라 부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비판적 태도’가 결코 “통치받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판적 태도’는 권력의 한복판에서, 때로는 자신과 자신에 대한 통치의 과잉을 감시하고 이것을 교정하려는 자세다. 비판의 가장 일차적인 정의는,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라고 푸코는 말한다. 비판은 권위, 전통, 권력의 남용과 싸우고, 그 보충물인 관성, 맹목, 환상, 비굴함과 싸우는 것이다. 비판은 인간들의 통치를 문제 삼는 태도이며, 개인의 결정에 의거하는 투쟁의 형태 내에서 총체적 구원을 목표로 주어진다. 우리는 적어도 권위가 그것을 진실이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고 여길 때에만 수용해야 한다.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비순종의 기술이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을 둘러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 속에서 탈예속화를 본질 기능으로 갖는다. 즉, 자기 의지를 통해, 자기에 대한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기술로 정의된다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비판과 계몽의 관계
푸코의 비판에 대한 정의는 칸트가 한 비판에 대한 정의를 토대로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칸트적 비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잉 권력에 의한 통치의 일반화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칸트가 말하는 비판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통치 당하지 않기 위한 기술’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푸코는 칸트 안에서 쌍을 이루고 있는 비판과 계몽 개념을 분리하고, 후자인 계몽의 기획에 입각해 자신의 말하는 비판을 정의하고 그 전략을 설명한다. 푸코는 칸트가 자신의 논고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인류가 거기에 머물러 있고 또 머물도록 강제 당하는 어떤 미성숙 상태와 연관시켜 계몽을 정의”했다고 지적한다. 권위의 힘이나 지도를 통해 인간의 지성을 행사하는 힘을 약화시켜 미성숙의 상태에 놔두려고 하는 권위의 과잉, 이것에 대항하는 용기와 결의를 촉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다. 칸트는 종교, 법, 지식과 같은 세 영역이 인류를 미성숙의 상태에 빠트린다고 주장하고 여기로부터 탈출해 어떻게 성숙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숙고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기술하는 이 ‘계몽’이 바로 푸코가 주장하는 비판이고 그것은 통치의 일반화 내에서 어떤 종류의 저항으로 서구 세계가 고안한 ‘비판적 태도’를 만인에게 호소하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
18세기는 근대 과학과 국가의 통치가 전면에 등장함과 더불어 칸트가 비판과 계몽의 문제를 제기한 시대였다. 이 시대에 현대의 토대가 되는 통치 방식, 요컨대 권력, 진실, 주체가 세밀하게 관계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과학 기술’이라는 말과의 연관이 확실히 표현하듯이 지식, 진실의 체계는 그것이 통치 기술과 결부됨으로써 강제를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어떤 지식이 진실인가 허위인가,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 현실인가 환상인가, 정당한가 남용되고 있는가 등을 추적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는 확실히 중요하다. 이러한 방법론에서는 ‘지식과 권력’이라는 두 개념이 핵심이 된다. 이 두 개념은 어떤 행위나 그 효과의 정당성을 특정 상황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용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두 개념은 어디까지나 어떤 지식, 어떤 지배의 정당화가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예를 들어 ‘정보’처럼 인간에게 중립적이거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권력’과 결합해 비로소 그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정신병의 체계, 형벌의 체계, 범죄 행위의 체계, 성현상의 체계 등 어떤 체계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수양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주체의 해석학」 요약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 수양」은 바깥에서 오는 힘들이 우리의 사유 방식과 실존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 내느냐에 관한 푸코의 오랜 논의를 싣는다. 우리는 그 논의의 단초를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 ? 제1권 지식의 의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감시와 처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거기서 푸코는 우리를 둘러싼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에 의해 우리의 행동 방식, 사유 방식 그리고 우리의 주체성 그 자체까지가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런데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권력 관계’로 묘사하는 푸코에게 있어 힘은 늘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권력 관계는 언제나 역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푸코는 자신 있게 “권력 관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 즉 진실이나 타자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권력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저항의 지점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기 돌봄의 재발견
푸코는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의 기술들에 주목한다. 자기와 관계 맺는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기에 대해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혐오할 수도 있으며 자기의 모습을 자기가 원하는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푸코는 자기와 관계 맺는 이 다양한 기술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꽃피었던, 자기와 관계 맺는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어떤 예술 작품의 질료로 여기며 가꾸어 나가는 태도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서구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지워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지배적이면서, 인식되고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실체로서 ‘자기’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자기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이 오늘날 교육이나 의료, 그리고 심리학적 테크닉에 통합되면서 그 협소한 영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건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 전통이다.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자기와 맺는 관계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신과 맺는 관계들로 채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그리스도교 탄생 이전 시기, 즉 그리스-로마 시대로 되돌아가, 자기와 관계 맺는 기술들을 발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푸코는, 과대평가된 ‘자기 인식’의 그늘에 가려 잊히고 평가절하된 개념, 즉 ‘자기 돌봄’이라는 개념을 발굴한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자기 돌봄’은 ‘자기 인식’보다 더 중요했고, 오히려 ‘자기 인식’은 ‘자기 돌봄’이라는 목표를 위한 단계, 혹은 수단 정도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지배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이 책은 계몽 및 비판과 관련된 미셸 푸코 사상의 변화와 더불어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강연록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체’ 형성의 복잡성이다. 푸코는 주체가 역사적 절차, 합리적인 모델과의 관계, 인식 및 진실과 관계 맺는 방식, 제도, 통치받는 방식 등을 통해 구축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자기 수양은 이러한 관점을 보강한다. 또 주체에 대한 문제 제기의 핵심은 해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주체의 자격으로 우리가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는 실체와 같은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가 맺는 수많은 관계 방식에 입각해 구축되는 것이라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자기는 자기와 맺는 여러 관계 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구조화된 어떤 것도 아니다. 용기를 갖되 용기의 한계를 알고, 인식하되 인식의 한계를 아는 것,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이에 입각해 자율 정신을 형성할 수 있다는 푸코의 사상은 현재 국가의 통치하에 있는 우리 자신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자신의 자율을 달성한 인간은 이제 ‘복종하시오’라는 외부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기’라는 의지적 결단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이런 의지로부터 출발하는 것─통치의 과잉에 반해 일어나는 것, 미성숙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기획하는 자유의 열망─, 바로 이것이 어떤 지배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적으로 존재하면서 역사에 속박되지 않는 우리들의 가능성의 영역을 여는 것이다.
1978년은 푸코의 지적 여정에서 결정적인 한 해였다.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통치성’이라는 주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통치성은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의 문제틀 아래서 1984년까지 푸코가 수행한 연구의 핵심을 이룬다. 1978년 4월 초 푸코는 일본에서의 긴 체류 기간 동안 중요한 강연들을 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8년 5월 27일에 프랑스 철학회 주최로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한다. 제목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강연은 여러 상황 때문에 푸코의 지적 산물 중에서 진정으로 특이한 것이 되었다. 푸코는 이 강연을 통해 그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고 설명한다. 이후 1990년 『프랑스 철학회 학회지』에 이 텍스트가 실리면서 그 제목이 붙여졌다. 이 강연은 우선적으로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가 진척시킨 견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실제로 푸코는 어떤 덕과 흡사한, 그리고 자신이 '비판적 태도'라고 부르는 어떤 것과 닮은 특정한 사유 방식, 말하기 방식, 행동 방식의 출현을 탐색한다. 푸코가 보기에 그것들의 출현은 서구 근대의 특징적인 역사적 현상과 연결된 것이었으며, 15~16세기에 시작된 인간 통치 기술들의 파급을 아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푸코는 이 강연에서 가장 종합적인 방식으로 ‘사목적 통치성’을 다시 분석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보다 석 달 앞선 것이었다.
푸코는 우선 자신이 말하는 ‘비판적 태도’의 존재 방식을 칸트가 시도한 ‘비판’의 기획으로부터 끌어낸다. 16세기 서구 유럽의 여러 사회들에서 상당히 특징적으로 보이는 통치의 일반화는, ‘어떻게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 이것을 푸코는 ‘비판적 태도’라 부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비판적 태도’가 결코 “통치받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판적 태도’는 권력의 한복판에서, 때로는 자신과 자신에 대한 통치의 과잉을 감시하고 이것을 교정하려는 자세다. 비판의 가장 일차적인 정의는,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라고 푸코는 말한다. 비판은 권위, 전통, 권력의 남용과 싸우고, 그 보충물인 관성, 맹목, 환상, 비굴함과 싸우는 것이다. 비판은 인간들의 통치를 문제 삼는 태도이며, 개인의 결정에 의거하는 투쟁의 형태 내에서 총체적 구원을 목표로 주어진다. 우리는 적어도 권위가 그것을 진실이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고 여길 때에만 수용해야 한다.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비순종의 기술이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을 둘러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 속에서 탈예속화를 본질 기능으로 갖는다. 즉, 자기 의지를 통해, 자기에 대한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기술로 정의된다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비판과 계몽의 관계
푸코의 비판에 대한 정의는 칸트가 한 비판에 대한 정의를 토대로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칸트적 비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잉 권력에 의한 통치의 일반화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칸트가 말하는 비판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통치 당하지 않기 위한 기술’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푸코는 칸트 안에서 쌍을 이루고 있는 비판과 계몽 개념을 분리하고, 후자인 계몽의 기획에 입각해 자신의 말하는 비판을 정의하고 그 전략을 설명한다. 푸코는 칸트가 자신의 논고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인류가 거기에 머물러 있고 또 머물도록 강제 당하는 어떤 미성숙 상태와 연관시켜 계몽을 정의”했다고 지적한다. 권위의 힘이나 지도를 통해 인간의 지성을 행사하는 힘을 약화시켜 미성숙의 상태에 놔두려고 하는 권위의 과잉, 이것에 대항하는 용기와 결의를 촉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다. 칸트는 종교, 법, 지식과 같은 세 영역이 인류를 미성숙의 상태에 빠트린다고 주장하고 여기로부터 탈출해 어떻게 성숙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숙고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기술하는 이 ‘계몽’이 바로 푸코가 주장하는 비판이고 그것은 통치의 일반화 내에서 어떤 종류의 저항으로 서구 세계가 고안한 ‘비판적 태도’를 만인에게 호소하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
18세기는 근대 과학과 국가의 통치가 전면에 등장함과 더불어 칸트가 비판과 계몽의 문제를 제기한 시대였다. 이 시대에 현대의 토대가 되는 통치 방식, 요컨대 권력, 진실, 주체가 세밀하게 관계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과학 기술’이라는 말과의 연관이 확실히 표현하듯이 지식, 진실의 체계는 그것이 통치 기술과 결부됨으로써 강제를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어떤 지식이 진실인가 허위인가,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 현실인가 환상인가, 정당한가 남용되고 있는가 등을 추적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는 확실히 중요하다. 이러한 방법론에서는 ‘지식과 권력’이라는 두 개념이 핵심이 된다. 이 두 개념은 어떤 행위나 그 효과의 정당성을 특정 상황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용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두 개념은 어디까지나 어떤 지식, 어떤 지배의 정당화가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예를 들어 ‘정보’처럼 인간에게 중립적이거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권력’과 결합해 비로소 그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정신병의 체계, 형벌의 체계, 범죄 행위의 체계, 성현상의 체계 등 어떤 체계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수양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주체의 해석학」 요약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 수양」은 바깥에서 오는 힘들이 우리의 사유 방식과 실존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 내느냐에 관한 푸코의 오랜 논의를 싣는다. 우리는 그 논의의 단초를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 ? 제1권 지식의 의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감시와 처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거기서 푸코는 우리를 둘러싼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에 의해 우리의 행동 방식, 사유 방식 그리고 우리의 주체성 그 자체까지가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런데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권력 관계’로 묘사하는 푸코에게 있어 힘은 늘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권력 관계는 언제나 역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푸코는 자신 있게 “권력 관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 즉 진실이나 타자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권력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저항의 지점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기 돌봄의 재발견
푸코는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의 기술들에 주목한다. 자기와 관계 맺는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기에 대해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혐오할 수도 있으며 자기의 모습을 자기가 원하는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푸코는 자기와 관계 맺는 이 다양한 기술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꽃피었던, 자기와 관계 맺는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어떤 예술 작품의 질료로 여기며 가꾸어 나가는 태도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서구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지워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지배적이면서, 인식되고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실체로서 ‘자기’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자기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이 오늘날 교육이나 의료, 그리고 심리학적 테크닉에 통합되면서 그 협소한 영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건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 전통이다.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자기와 맺는 관계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신과 맺는 관계들로 채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그리스도교 탄생 이전 시기, 즉 그리스-로마 시대로 되돌아가, 자기와 관계 맺는 기술들을 발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푸코는, 과대평가된 ‘자기 인식’의 그늘에 가려 잊히고 평가절하된 개념, 즉 ‘자기 돌봄’이라는 개념을 발굴한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자기 돌봄’은 ‘자기 인식’보다 더 중요했고, 오히려 ‘자기 인식’은 ‘자기 돌봄’이라는 목표를 위한 단계, 혹은 수단 정도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지배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이 책은 계몽 및 비판과 관련된 미셸 푸코 사상의 변화와 더불어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강연록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체’ 형성의 복잡성이다. 푸코는 주체가 역사적 절차, 합리적인 모델과의 관계, 인식 및 진실과 관계 맺는 방식, 제도, 통치받는 방식 등을 통해 구축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자기 수양은 이러한 관점을 보강한다. 또 주체에 대한 문제 제기의 핵심은 해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주체의 자격으로 우리가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는 실체와 같은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가 맺는 수많은 관계 방식에 입각해 구축되는 것이라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자기는 자기와 맺는 여러 관계 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구조화된 어떤 것도 아니다. 용기를 갖되 용기의 한계를 알고, 인식하되 인식의 한계를 아는 것,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이에 입각해 자율 정신을 형성할 수 있다는 푸코의 사상은 현재 국가의 통치하에 있는 우리 자신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자신의 자율을 달성한 인간은 이제 ‘복종하시오’라는 외부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기’라는 의지적 결단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이런 의지로부터 출발하는 것─통치의 과잉에 반해 일어나는 것, 미성숙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기획하는 자유의 열망─, 바로 이것이 어떤 지배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적으로 존재하면서 역사에 속박되지 않는 우리들의 가능성의 영역을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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