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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대한 모순의 문호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에 있어서 신은 먼저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해방하는 신이다. 그런가 하면 잔인하고 희망을 주지 않으며 불을 가져오는 신이고 “나를 하느님으로 만드시오!” 빌기도 하는 그런 신이다.하나의 대륙처럼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작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기후와 풍토를 포용하는 위대한 모순의 작가이기 때문에 그를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도이면서 이교도요, 아나키스트이자 휴머니스트요, 금욕적인 성인으로 까지 칭송받았다. 카잔차키스의 작품 활동의 폭은 무척 넓어 철학적 수필, 기행문, 비극을 비롯해 단테 《신곡》, 괴테 《파우스트》 같은 고전을 근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카잔차키스에 있어서 신은 먼저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해방하는 신이다. 그런가 하면 잔인하고 희망을 주지 않으며 불을 가져오는 신이고 “나를 하느님으로 만드시오!” 빌기도 하는 그런 신이다.하나의 대륙처럼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작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기후와 풍토를 포용하는 위대한 모순의 작가이기 때문에 그를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도이면서 이교도요, 아나키스트이자 휴머니스트요, 금욕적인 성인으로 까지 칭송받았다. 카잔차키스의 작품 활동의 폭은 무척 넓어 철학적 수필, 기행문, 비극을 비롯해 단테 《신곡》, 괴테 《파우스트》 같은 고전을 근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목차
프롤로그…11
1 아, 프란치스코 신부님!…12
2 영혼의 마지막 숨…28
3 다시 태어나다…49
4 하느님의 이름으로!…68
5 영혼의 위대한 연인…91
6 주님,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125
7 영혼의 구제를 위해…166
8 온 세상에 가난과 사랑과 평화를…204
9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244
10 고난의 향기…287
11 하느님의 길…323
12 거룩하신 아버지여…353
13 부활, 그것은 죽음…383
14 성스러운 발자취…413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신의 참모습을 찾아서…448
니코스 카잔차키스 연보…469
1 아, 프란치스코 신부님!…12
2 영혼의 마지막 숨…28
3 다시 태어나다…49
4 하느님의 이름으로!…68
5 영혼의 위대한 연인…91
6 주님,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125
7 영혼의 구제를 위해…166
8 온 세상에 가난과 사랑과 평화를…204
9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244
10 고난의 향기…287
11 하느님의 길…323
12 거룩하신 아버지여…353
13 부활, 그것은 죽음…383
14 성스러운 발자취…413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신의 참모습을 찾아서…448
니코스 카잔차키스 연보…469
저자 소개
출판사 리뷰
‘이방인’의 카뮈가 극찬한
교황님 애독서!
기독교도이면서 이교도, 아나키스트이자 휴머니스트!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세계적 베스트셀러!
“고난과 고행은 순수의 이상이요, 더없는 낭만과 미덕이며
천국으로 가는 단 하나뿐인 길이다!”
깊이 있는 신비주의, 풍요한 기적의 내음과 상징으로 펼쳐지는
신과 인간을 위한 성심의 길, 옛 아시시 성인 고난의 여정!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끝나자 브라질 추기경이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 했을 때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올랐습니다.
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끝없는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삶을 닮은 그의 이름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성 프란치스코 기도문〉
위대한 모순의 문호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에 있어서 신은 먼저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해방하는 신이다. 그런가 하면 잔인하고 희망을 주지 않으며 불을 가져오는 신이고 “나를 하느님으로 만드시오!” 빌기도 하는 그런 신이다.
하나의 대륙처럼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작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기후와 풍토를 포용하는 위대한 모순의 작가이기 때문에 그를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도이면서 이교도요, 아나키스트이자 휴머니스트요, 금욕적인 성인으로 까지 칭송받았다. 카잔차키스의 작품 활동의 폭은 무척 넓어 철학적 수필, 기행문, 비극을 비롯해 단테 《신곡》, 괴테 《파우스트》 같은 고전을 근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가난한 성자의 길, 피나는 고난의 여정!
《성 프란치스코》에서는 부유한 집안 아들로 태어나 탄탄한 일생이 보장되었던 한 사나이가 어떻게 무슨 연유로 가난한 성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피나는 고난의 여정이 풍요한 기적의 상징, 신비주의 문학으로 펼쳐진다.
프란치스코는 1180년대 초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한때 남부럽지 않은 풍족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천적으로 가난을 타고난 사람들의 고통을 늘 마음에 품고 그 본질과 해결을 두고두고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지난날 성인 연구자들은 가난한 성인의 그 지복의 경지만을 강조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힘들고 험한 도정은 무시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된 투쟁이었을 것이며, 바로 그 투쟁이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뛰쳐나가는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이 아닐까. 자기해방의 실현에 바친 그 사람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의 인생에서 용기를 얻고, 그의 승리에서 큰 위안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육체에 너무나 많은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육신을 동정한다. “나의 형제 나귀여, 나의 형제인 나귀여, 나를 용서하오. 너무나 그대를 학대했소.” 자신의 눈물을 통하여 프란치스코는 자기에게 웃음 짓고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했다. 자기 국 속에 뿌린 재가 순수했고, 구비오의 양 떼를 죽이고 먹어치운 늑대도 순수했으며, 그를 따라와 매처럼 맞아들인 죽음 또한 순수했다.
맨발의 성 프란치스코가 두드리는 천국의 문!
중세는 죽음의 이미지에 얽매여 있었다. 일대 전환기의 방황?불안?광기가 온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봉건영주의 독재 압정과 교권의 탐욕?교활성, 농부들의 무지, 잔인성에 짓눌려 다시 한 번 사회 변화의 싹이 압살당할 것 같은 중세를 개혁하고자 탁발수도사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복지의료를 제공하는 한편, 르네상스에서 개화하는 학문과 독창적 사고의 역사적인 방파제가 되었다.
빈부 차가 심해진 유럽의 도시에서 일어난 종교적인 히스테리의 폭발, 프란치스코적인 맨발의 행렬은 페루자와 로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의 온 도시를 열병처럼 휩쓸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죽 채찍으로 자기 등을 치면서 참회하고 신에게 자비를 빌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난을 그대로 따르리라 결심한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순수의 이상으로 여기고, 낭만적으로 강조하는 극단적인 포교 방법을 썼었다. 도미니크파에서 의사소통의 방법인 이 가난은 프란치스코에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아시시의 성인에게 교단을 이끄는 유별난 영도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난과 구걸을 미덕으로 알고, 그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확신하고 실천한 그의 행적이 중세 도시사회에서 깊은 공감의 뿌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대지에 발가벗고 누울 때 상징과 환시의 세계!
프란치스코는 병을 앓다가 환시 속에 나타난 신과 새로운 약속을 한다. 여인의 창 밑에서 야상곡을 부르는 탕아의 생활을 청산하고, 쓰러져 가는 교회를 한 몸으로 일으켜 세우는 어려운 일을 처음 맡게 된다. 신은 말한다. “나를 보면 너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고, 너를 보면 나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다.” 환시에 신들린 성인의 생애는 ‘나는 땅을 느끼고 땅은 나를 느끼도록 대지에 발가벗고 누울 그때까지’ 온갖 고난 속에서 가난, 평화, 사랑을 설교하고 실천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그의 봉사는, ‘하느님의 곰처럼 춤을 추고’ 돌이나 야유의 세례를 받는 ‘새로운 광기’를 실천한다. 중세 사회의 무관심과 적의에 대항하여 일어선 이 평화주의자는, 그러한 ‘광기’야말로 ‘양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 소금’이라고 자부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깊은 고통을 재현한 카잔차키스는 병마와 싸워가면서 신에 심취한 위대한 성인의 일생을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고역을 같이한 동반자이자 이 작품의 해설자인 레오는 프란치스코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세속적이며 상식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중세의 물질주의적 인생관을 버리지 못하는 레오는, 어리석고 욕심 없고 가난을 택한 상인의 아들이 어떤 정신적인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한 가닥 회의 속에서 바라보고 관찰하고 마침내 감동한다.
카잔차키스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매혹된 향기!
맨발의 탁발 수도사의 구린내는 세속적인 교황(인노켄티우스 3세) 코를 싸쥐게 만들었지만,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 형제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지복의 상징(사향내, 장미 내음)이었다.
카잔차키스는 프란치스코의 위대한 정신적인 사랑이 클라라에 대한 욕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에로스적인 여인에 대한 동경이 그녀를 수녀로 맞아들이는 필리아(우애)에서 부자적인 사랑(Storge)으로, 마침내는 아무도 깰 수 없는 자비와 선의의 사랑 아가페의 경지로 승화한다.
이 독특한 사랑 미학의 견고한 기초가 되는 것은 카잔차키스의 냄새의 미학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풍요한 냄새의 상징으로 이어진 구성과 대화로 읽을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 성인에 관한 다른 전기들보다 힘찬 신비주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인간의 심장은 구린내와 레몬나무 향내로 파악되며, 천국은 기쁨을 주는 찬송가이자 감미로운 향료의 세계이다. 그의 작품 무대는, 아프로디테라는 재스민 향기, 교회의 향불과 함께 생선 구운 냄새, 도시 창녀의 향수, 오물 냄새 등이 교차하는 무대이며, 교회의 뜰은 로즈메리나 인동덩굴의 향기로 표현된다. 흙냄새와 곰팡이 냄새의 교회, 젖은 대지와 바다의 냄새, 소나무 냄새가 충만함은 물론이요, 자기 살이 썩는 냄새(꿈에서의 자아발견), 구취와 함께 예수의 체취, 기적까지도 후각으로 이해되는 것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동물은 물론이요 물과 빛과 불, 그리고 태양까지 형제처럼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그에게 “자연은 곧 신이며 신은 곧 자연”이었다.
교황님 애독서!
기독교도이면서 이교도, 아나키스트이자 휴머니스트!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세계적 베스트셀러!
“고난과 고행은 순수의 이상이요, 더없는 낭만과 미덕이며
천국으로 가는 단 하나뿐인 길이다!”
깊이 있는 신비주의, 풍요한 기적의 내음과 상징으로 펼쳐지는
신과 인간을 위한 성심의 길, 옛 아시시 성인 고난의 여정!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끝나자 브라질 추기경이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 했을 때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올랐습니다.
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끝없는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삶을 닮은 그의 이름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성 프란치스코 기도문〉
위대한 모순의 문호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에 있어서 신은 먼저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해방하는 신이다. 그런가 하면 잔인하고 희망을 주지 않으며 불을 가져오는 신이고 “나를 하느님으로 만드시오!” 빌기도 하는 그런 신이다.
하나의 대륙처럼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작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기후와 풍토를 포용하는 위대한 모순의 작가이기 때문에 그를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도이면서 이교도요, 아나키스트이자 휴머니스트요, 금욕적인 성인으로 까지 칭송받았다. 카잔차키스의 작품 활동의 폭은 무척 넓어 철학적 수필, 기행문, 비극을 비롯해 단테 《신곡》, 괴테 《파우스트》 같은 고전을 근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가난한 성자의 길, 피나는 고난의 여정!
《성 프란치스코》에서는 부유한 집안 아들로 태어나 탄탄한 일생이 보장되었던 한 사나이가 어떻게 무슨 연유로 가난한 성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피나는 고난의 여정이 풍요한 기적의 상징, 신비주의 문학으로 펼쳐진다.
프란치스코는 1180년대 초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한때 남부럽지 않은 풍족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천적으로 가난을 타고난 사람들의 고통을 늘 마음에 품고 그 본질과 해결을 두고두고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지난날 성인 연구자들은 가난한 성인의 그 지복의 경지만을 강조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힘들고 험한 도정은 무시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된 투쟁이었을 것이며, 바로 그 투쟁이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뛰쳐나가는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이 아닐까. 자기해방의 실현에 바친 그 사람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의 인생에서 용기를 얻고, 그의 승리에서 큰 위안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육체에 너무나 많은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육신을 동정한다. “나의 형제 나귀여, 나의 형제인 나귀여, 나를 용서하오. 너무나 그대를 학대했소.” 자신의 눈물을 통하여 프란치스코는 자기에게 웃음 짓고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했다. 자기 국 속에 뿌린 재가 순수했고, 구비오의 양 떼를 죽이고 먹어치운 늑대도 순수했으며, 그를 따라와 매처럼 맞아들인 죽음 또한 순수했다.
맨발의 성 프란치스코가 두드리는 천국의 문!
중세는 죽음의 이미지에 얽매여 있었다. 일대 전환기의 방황?불안?광기가 온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봉건영주의 독재 압정과 교권의 탐욕?교활성, 농부들의 무지, 잔인성에 짓눌려 다시 한 번 사회 변화의 싹이 압살당할 것 같은 중세를 개혁하고자 탁발수도사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복지의료를 제공하는 한편, 르네상스에서 개화하는 학문과 독창적 사고의 역사적인 방파제가 되었다.
빈부 차가 심해진 유럽의 도시에서 일어난 종교적인 히스테리의 폭발, 프란치스코적인 맨발의 행렬은 페루자와 로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의 온 도시를 열병처럼 휩쓸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죽 채찍으로 자기 등을 치면서 참회하고 신에게 자비를 빌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난을 그대로 따르리라 결심한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순수의 이상으로 여기고, 낭만적으로 강조하는 극단적인 포교 방법을 썼었다. 도미니크파에서 의사소통의 방법인 이 가난은 프란치스코에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아시시의 성인에게 교단을 이끄는 유별난 영도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난과 구걸을 미덕으로 알고, 그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확신하고 실천한 그의 행적이 중세 도시사회에서 깊은 공감의 뿌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대지에 발가벗고 누울 때 상징과 환시의 세계!
프란치스코는 병을 앓다가 환시 속에 나타난 신과 새로운 약속을 한다. 여인의 창 밑에서 야상곡을 부르는 탕아의 생활을 청산하고, 쓰러져 가는 교회를 한 몸으로 일으켜 세우는 어려운 일을 처음 맡게 된다. 신은 말한다. “나를 보면 너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고, 너를 보면 나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다.” 환시에 신들린 성인의 생애는 ‘나는 땅을 느끼고 땅은 나를 느끼도록 대지에 발가벗고 누울 그때까지’ 온갖 고난 속에서 가난, 평화, 사랑을 설교하고 실천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그의 봉사는, ‘하느님의 곰처럼 춤을 추고’ 돌이나 야유의 세례를 받는 ‘새로운 광기’를 실천한다. 중세 사회의 무관심과 적의에 대항하여 일어선 이 평화주의자는, 그러한 ‘광기’야말로 ‘양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 소금’이라고 자부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깊은 고통을 재현한 카잔차키스는 병마와 싸워가면서 신에 심취한 위대한 성인의 일생을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고역을 같이한 동반자이자 이 작품의 해설자인 레오는 프란치스코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세속적이며 상식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중세의 물질주의적 인생관을 버리지 못하는 레오는, 어리석고 욕심 없고 가난을 택한 상인의 아들이 어떤 정신적인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한 가닥 회의 속에서 바라보고 관찰하고 마침내 감동한다.
카잔차키스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매혹된 향기!
맨발의 탁발 수도사의 구린내는 세속적인 교황(인노켄티우스 3세) 코를 싸쥐게 만들었지만,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 형제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지복의 상징(사향내, 장미 내음)이었다.
카잔차키스는 프란치스코의 위대한 정신적인 사랑이 클라라에 대한 욕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에로스적인 여인에 대한 동경이 그녀를 수녀로 맞아들이는 필리아(우애)에서 부자적인 사랑(Storge)으로, 마침내는 아무도 깰 수 없는 자비와 선의의 사랑 아가페의 경지로 승화한다.
이 독특한 사랑 미학의 견고한 기초가 되는 것은 카잔차키스의 냄새의 미학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풍요한 냄새의 상징으로 이어진 구성과 대화로 읽을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 성인에 관한 다른 전기들보다 힘찬 신비주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인간의 심장은 구린내와 레몬나무 향내로 파악되며, 천국은 기쁨을 주는 찬송가이자 감미로운 향료의 세계이다. 그의 작품 무대는, 아프로디테라는 재스민 향기, 교회의 향불과 함께 생선 구운 냄새, 도시 창녀의 향수, 오물 냄새 등이 교차하는 무대이며, 교회의 뜰은 로즈메리나 인동덩굴의 향기로 표현된다. 흙냄새와 곰팡이 냄새의 교회, 젖은 대지와 바다의 냄새, 소나무 냄새가 충만함은 물론이요, 자기 살이 썩는 냄새(꿈에서의 자아발견), 구취와 함께 예수의 체취, 기적까지도 후각으로 이해되는 것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동물은 물론이요 물과 빛과 불, 그리고 태양까지 형제처럼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그에게 “자연은 곧 신이며 신은 곧 자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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