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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후 6년,
김승섭이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분투한 기록
공부는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질문해 온 김승섭이 그간의 연구를 소개하는 공부의 기록이자,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고백하는 분투의 기록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들의 고통에 구체적 데이터와 정확한 문장으로 응답하기 위해 그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막막한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 분투한다. 책에는 과학의 이름으로 소수자에게 낙인을 부여했던 19세기 논문부터 국내 성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최신 연구까지, 풍부한 학술 자료가 적재적소에 소개된다. 데이비드 윌리엄스, 캐런 메싱 등 세계적 학자들과 김승섭이 만나 나눈 대화들은 한국 상황을 객관적 시각에서 돌아보게 하며,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은 현장감을 더한다.
김승섭은 말한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질문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6쪽). 그의 질문은 현실적 해결책만을 구하지도, 정치적 올바름만을 좇지도 않는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화장실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한국 여성에게 공중화장실은 불법 촬영과 폭력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공간”(124쪽)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함께 지적한다. HIV 신규 감염을 줄일 보건정책을 논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병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감염인의 사회적 존엄을 지킬 길을 고민한다. 그가 말하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을 정확한 데이터로 마주하고, 당사자의 고통을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헤아리는 모든 과정이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이미 생산되어 있는 지식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6쪽)
김승섭이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분투한 기록
공부는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질문해 온 김승섭이 그간의 연구를 소개하는 공부의 기록이자,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고백하는 분투의 기록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들의 고통에 구체적 데이터와 정확한 문장으로 응답하기 위해 그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막막한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 분투한다. 책에는 과학의 이름으로 소수자에게 낙인을 부여했던 19세기 논문부터 국내 성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최신 연구까지, 풍부한 학술 자료가 적재적소에 소개된다. 데이비드 윌리엄스, 캐런 메싱 등 세계적 학자들과 김승섭이 만나 나눈 대화들은 한국 상황을 객관적 시각에서 돌아보게 하며,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은 현장감을 더한다.
김승섭은 말한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질문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6쪽). 그의 질문은 현실적 해결책만을 구하지도, 정치적 올바름만을 좇지도 않는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화장실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한국 여성에게 공중화장실은 불법 촬영과 폭력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공간”(124쪽)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함께 지적한다. HIV 신규 감염을 줄일 보건정책을 논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병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감염인의 사회적 존엄을 지킬 길을 고민한다. 그가 말하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을 정확한 데이터로 마주하고, 당사자의 고통을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헤아리는 모든 과정이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이미 생산되어 있는 지식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6쪽)
목차
들어가며
1.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1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그럼 특권층입니다
: 흑인, 여성, 성소수자를 차별해 온 기득권의 논리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 미국의 흑인 범죄율과 한국의 난민 수용 논란
당신들의 쉽고 잔인한, 어떤 해결책에 대하여
차별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아프다
: 인종차별과 건강 연구 본격화한 사회학자 데이비드 윌리엄스
벽장을 벗어난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 정신질환 당사자 운동 강조하는 심리학자 패트릭 코리건
이동, 낙인, 정치, 합리성
2. 지워진 존재, 응답받지 못하는 고통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2
‘오줌권’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화장실로 살펴보는 차별과 배제의 역사
한국 사회의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가
: 생존경쟁 속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묻다
가장 아픈 사람이 가장 앞에 나선 싸움 ‘미투’
: 용기를 낸 사회적 약자가 겪는 2차 고통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응시하다
: 여성의 일터로 걸어 들어간 과학자 캐런 메싱
누구를 위한 반지하방 퇴출인가
3. 한국 사회의 ‘주삿바늘’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3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에이즈에 대한 인식
: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과 비과학적 낙인
균열과 혼란에서 시작되는 변화
: 김도현, 김지영 활동가와의 HIV 감염과 장애 대담
손쉬운 낙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 HIV 감염인에 대한 낙인 연구하는 보건학자 돈 오페라리오
두려움도 검열도 없는 하루
: 스무 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축하하며
누구도 두고 가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 포괄적 차별금지법 단식농성 제정 활동가 미류, 종걸
차별에 침묵하는 정치 움직이려면
: 정치권의 ‘합리적 주장’을 데이터로 반박하는 경제학자 리 배지트
근거의 부재인가, 의지의 부재인가
4. 우리의 삶은 당신의 상상보다 복잡하다
내 본질은 누구도 무엇도 바꿀 수 없어요
: 서지현 검사가 말하는 한국 사회 피해자의 ‘말하기’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다
: 고통의 개별성을 포착한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
헬렌 켈러의 빛과 그림자
: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의 대화
이것은 저의 싸움입니다
: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길 수 있을까? 유희경 시인과 나눈 이야기
1.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1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그럼 특권층입니다
: 흑인, 여성, 성소수자를 차별해 온 기득권의 논리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 미국의 흑인 범죄율과 한국의 난민 수용 논란
당신들의 쉽고 잔인한, 어떤 해결책에 대하여
차별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아프다
: 인종차별과 건강 연구 본격화한 사회학자 데이비드 윌리엄스
벽장을 벗어난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 정신질환 당사자 운동 강조하는 심리학자 패트릭 코리건
이동, 낙인, 정치, 합리성
2. 지워진 존재, 응답받지 못하는 고통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2
‘오줌권’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화장실로 살펴보는 차별과 배제의 역사
한국 사회의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가
: 생존경쟁 속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묻다
가장 아픈 사람이 가장 앞에 나선 싸움 ‘미투’
: 용기를 낸 사회적 약자가 겪는 2차 고통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응시하다
: 여성의 일터로 걸어 들어간 과학자 캐런 메싱
누구를 위한 반지하방 퇴출인가
3. 한국 사회의 ‘주삿바늘’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3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에이즈에 대한 인식
: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과 비과학적 낙인
균열과 혼란에서 시작되는 변화
: 김도현, 김지영 활동가와의 HIV 감염과 장애 대담
손쉬운 낙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 HIV 감염인에 대한 낙인 연구하는 보건학자 돈 오페라리오
두려움도 검열도 없는 하루
: 스무 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축하하며
누구도 두고 가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 포괄적 차별금지법 단식농성 제정 활동가 미류, 종걸
차별에 침묵하는 정치 움직이려면
: 정치권의 ‘합리적 주장’을 데이터로 반박하는 경제학자 리 배지트
근거의 부재인가, 의지의 부재인가
4. 우리의 삶은 당신의 상상보다 복잡하다
내 본질은 누구도 무엇도 바꿀 수 없어요
: 서지현 검사가 말하는 한국 사회 피해자의 ‘말하기’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다
: 고통의 개별성을 포착한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
헬렌 켈러의 빛과 그림자
: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의 대화
이것은 저의 싸움입니다
: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길 수 있을까? 유희경 시인과 나눈 이야기
책 속으로
특히 부조리한 사회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은 종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며 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당사자의 몸에 갇히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고통에 응답해야 합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지체장애인이 아침이면 직장에 출근해 일하고 저녁이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서 그들이 투표소와 극장과 병원에 가지 못할 리 없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1」 중에서
A 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트랜스여성인 A 씨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려 했습니다.
---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그럼 특권층입니다」 중에서
우리 뇌의 신경망이 첫눈에 보이는 피부색이나 성별과 같은 정보를 조합해 어떤 사람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데 0.1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중에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전 세계 어느 전문가 학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비과학적인 주장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주장하고 다니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세상이 된 것이라고. 바뀌어야 하는 건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이 아니라 전문가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어기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라고.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2」 중에서
누군가의 인권을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여성과 트랜스젠더와 장애인과 그 밖의 수많은 다양한 소수자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 역시 다음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 「‘오줌권’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한국 사회의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가」 중에서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의 삶은 절벽에 몰리게 된다. 성소수자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고, 때로는 가장 인정받고 싶은 존재인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거절당하고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3」 중에서
불법인 마약 사용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주삿바늘로 전파되는 HIV 감염 역시 함께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뉴욕시 보건담당 부서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 이 같은 노력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에이즈에 대한 인식」 중에서
김도현_제가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장애인이라는 구분과 그 범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마도 굉장히 먼 길이 되겠지만, 그 사회는 지금보다 근본적으로 진전된 단계일 거라고 생각해요.
--- 「균열과 혼란에서 시작되는 변화」 중에서
리 배지트_반동성애자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 뒤에서 작동하는 힘을 분석해야 한다. 지금은 ‘정치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 「차별에 침묵하는 정치 움직이려면」 중에서
서지현_그래서 제가 이번에 여러 언론 인터뷰에 응하며 “저 원더우먼처럼 찍어주세요”라고 했어요.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물어요. 건강 안 좋다던데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그런데 그런 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약해 보이거나, 슬프고 동정심 유발하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 「내 본질은 누구도 무엇도 바꿀 수 없어요」 중에서
나는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
--- 「헬렌 켈러의 빛과 그림자」 중에서
아무리 마음속에 분노와 슬픔이 있어도, 학자가 글을 쓸 때는 내용을 소화하고 정리해서 써야 하니까요.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어요.
--- 「들어가며」 중에서
지체장애인이 아침이면 직장에 출근해 일하고 저녁이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서 그들이 투표소와 극장과 병원에 가지 못할 리 없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1」 중에서
A 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트랜스여성인 A 씨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려 했습니다.
---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그럼 특권층입니다」 중에서
우리 뇌의 신경망이 첫눈에 보이는 피부색이나 성별과 같은 정보를 조합해 어떤 사람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데 0.1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중에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전 세계 어느 전문가 학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비과학적인 주장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주장하고 다니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세상이 된 것이라고. 바뀌어야 하는 건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이 아니라 전문가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어기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라고.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2」 중에서
누군가의 인권을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여성과 트랜스젠더와 장애인과 그 밖의 수많은 다양한 소수자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 역시 다음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 「‘오줌권’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한국 사회의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가」 중에서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의 삶은 절벽에 몰리게 된다. 성소수자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고, 때로는 가장 인정받고 싶은 존재인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거절당하고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3」 중에서
불법인 마약 사용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주삿바늘로 전파되는 HIV 감염 역시 함께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뉴욕시 보건담당 부서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 이 같은 노력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에이즈에 대한 인식」 중에서
김도현_제가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장애인이라는 구분과 그 범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마도 굉장히 먼 길이 되겠지만, 그 사회는 지금보다 근본적으로 진전된 단계일 거라고 생각해요.
--- 「균열과 혼란에서 시작되는 변화」 중에서
리 배지트_반동성애자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 뒤에서 작동하는 힘을 분석해야 한다. 지금은 ‘정치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 「차별에 침묵하는 정치 움직이려면」 중에서
서지현_그래서 제가 이번에 여러 언론 인터뷰에 응하며 “저 원더우먼처럼 찍어주세요”라고 했어요.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물어요. 건강 안 좋다던데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그런데 그런 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약해 보이거나, 슬프고 동정심 유발하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 「내 본질은 누구도 무엇도 바꿀 수 없어요」 중에서
나는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
--- 「헬렌 켈러의 빛과 그림자」 중에서
아무리 마음속에 분노와 슬픔이 있어도, 학자가 글을 쓸 때는 내용을 소화하고 정리해서 써야 하니까요.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어요.
--- 「이것은 저의 싸움입니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차별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아프다
지워진 존재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응급의학과 의사인 녹스 토드 박사 연구팀이 1993년 발표한 논문은 큰 논란을 일으킨다. 연구팀은 의료진의 진통제 처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이 환자의 인종이었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긴뼈 골절로 응급실을 찾은 히스패닉 환자 중에서 진통제를 처방받지 않은 비율이, 백인 환자와 비교해 2배에 육박했던 것이다. 명시적으로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의료진조차 이처럼 인종에 따른 ‘불평등한 치료’를 한 것은 무의식에 내재된 ‘암묵적 편견’ 탓이다. 문제는 암묵적 편견이 실제 차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몸을 아프게 한다는 점이다.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과의 관계가 여러 질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어떤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출생 시 법적 성별과 외모에 드러나는 성별 정체성이 다른 트랜스젠더 5명 중 1명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두려워 병원 이용을 포기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운전기사나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포기한다. 김승섭은 한국 사회가 종종 암묵적 편견을 넘어 명시적 편견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18년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온 예멘인 484명에 대한 난민 수용 논란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주장은 이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명시적 편견에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김승섭은 차별을 연구하는 과정에도 차별이 존재한다고, 모든 고통이 동등하게 주목받지는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연구에 참여한 보상으로 지급한 기프티콘에 있는 ‘트랜스젠더 연구’라는 말이 아웃팅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후 장애인 이동권 연구에서 같은 실수를 피했지만,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료에게 편의점 기프티콘을 받아도 직접 사용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한편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연구를 처음 진행했던 2015년 당시 연구자인 자신조차 해고 노동자의 아내를 ‘고통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성찰은 후속 연구와 백화점·면세점 여성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로 이어진다.
“저는 연구자이지만 제가 비평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플레이어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산되지 않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누군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47쪽)
성급한 해결책이 지워버린 당사자의 삶
정말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2022년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서울시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틀 뒤 서울시는 지하·반지하 주거를 금지하겠다는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반지하방에서 살 수밖에 없는 당사자의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김승섭은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폐지’를 연상시키는 이런 성급한 해결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1988년 미국 뉴욕시는 당사자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이른바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HIV 신규 감염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낙인에 굴하지 않고 마약중독자들에게 깨끗한 주삿바늘을 무상 제공한 것이다. 이 정책은 곧바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성과를 거둔다.
HIV 감염인 낙인을 연구하는 보건학자 돈 오페라리오는 김승섭과의 대담에서 “보건학적 개입은 개인의 삶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212쪽) 말한다. 마약중독에 대한 가치판단에 앞서 당장 생명을 지킬 길을 찾은 주삿바늘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보건학의 대전제 앞에서, 김승섭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이렇게 질문한다. “과연 모든 개인에게서 죽음보다 삶이 나은 것일까?” “‘치유’되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이들은 내내 그 멍에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가?”(176~177쪽) 그 질문은 곧 한국 사회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필요하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모든 소수자가 두려움 없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220쪽)
책에서 김승섭은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법정 증언을 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때마다 상대측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고,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 주장을 펼치며 종종 승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러한 조건 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지(97쪽) 묻는다. 사회적 합의라는 ‘합리적’ 근거를 이유로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처리할 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연구자의 질문은 큰 울림을 준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161쪽)
고유한 역사를 지닌 한 사람, 한 사람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다
책에서 김승섭은 2018년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 용산참사 피해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포착한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을 만난다. 1~3장에서 대담을 나누는 데이비드 윌리엄스, 패트릭 코리건, 리 배지트는 각각 인종차별, 정신질환 낙인, 성소수자 혐오를 겪은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피해자나 소수자에게도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욕망이 있고,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는 점이다. 서지현 검사는 “피해자야말로 행복해져야 할 사람”(254쪽)이라고 말하며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거부한다. 김일란 감독은 우리가 아는 “피해자의 모습은 일부분”(266쪽)이라며 피해자들이 지닌 입체적 면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주목할 만하다. 헬렌 켈러의 삶에는 빛나는 성취뿐 아니라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김승섭은 헬렌 켈러가 이룬 성과뿐 아니라, 한계와 모순을 함께 본다고 해서 그녀의 삶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며 오히려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라고(285쪽) 말한다. 그가 이번 책에서 연구 중에 느낀 서운함이나 고충을 스스럼없이 고백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뒤 맥락을 잘라낸 채 몇 마디 말을 인용하며 사람과 사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시대에”(8쪽)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참사나 재난에서도 각 인간은 고유하거든요. 개인마다 고유한 관계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욕구와 고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공통의 사건을 겪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여길 때가 많아요.”(300쪽)
데이터와 감정 사이에서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
김승섭은 첫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내용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보편의 지식보다는, 기댈 곳 없는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무기로 쓰이기를 원했”다고(8쪽) 말한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에 대해서도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고(294쪽) 말한다. 이를 위해, 김승섭은 사람들이 다가오기 어려운 학술 언어에 머물지도, 데이터가 뒷받침되지 않는 감정적인 글에 그치지도 않도록 섬세하게 언어를 갈고닦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각을 곤두세우기 위해 내 몸을 사건 속에 던져놓는 씨줄”과 논문과 책을 읽으며 “사건을 바라보는 통찰을 기르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을 넓히는 과정이다(311쪽).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김승섭이 ‘성실한 학자’로서 내놓은 또 하나의 무기이다. 책에서 그는 ‘예멘 난민 수용 논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투쟁’ 등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 혹은 여론이 한쪽으로 기운 사건에 대해서도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목소리를 낸다. 주제에 대한 엄밀한 태도, 원인의 원인을 파고드는 치열한 질문, 특유의 정갈한 문장은 한층 깊어졌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통해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통해 생산되지 않는 지식에 대한 학계의 책임을 물었던 김승섭이, 이번 책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그 공부가 과연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제가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숱한 시행착오와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계속 질문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 나눴던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7~8쪽)
지워진 존재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응급의학과 의사인 녹스 토드 박사 연구팀이 1993년 발표한 논문은 큰 논란을 일으킨다. 연구팀은 의료진의 진통제 처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이 환자의 인종이었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긴뼈 골절로 응급실을 찾은 히스패닉 환자 중에서 진통제를 처방받지 않은 비율이, 백인 환자와 비교해 2배에 육박했던 것이다. 명시적으로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의료진조차 이처럼 인종에 따른 ‘불평등한 치료’를 한 것은 무의식에 내재된 ‘암묵적 편견’ 탓이다. 문제는 암묵적 편견이 실제 차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몸을 아프게 한다는 점이다.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과의 관계가 여러 질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어떤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출생 시 법적 성별과 외모에 드러나는 성별 정체성이 다른 트랜스젠더 5명 중 1명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두려워 병원 이용을 포기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운전기사나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포기한다. 김승섭은 한국 사회가 종종 암묵적 편견을 넘어 명시적 편견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18년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온 예멘인 484명에 대한 난민 수용 논란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주장은 이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명시적 편견에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김승섭은 차별을 연구하는 과정에도 차별이 존재한다고, 모든 고통이 동등하게 주목받지는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연구에 참여한 보상으로 지급한 기프티콘에 있는 ‘트랜스젠더 연구’라는 말이 아웃팅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후 장애인 이동권 연구에서 같은 실수를 피했지만,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료에게 편의점 기프티콘을 받아도 직접 사용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한편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연구를 처음 진행했던 2015년 당시 연구자인 자신조차 해고 노동자의 아내를 ‘고통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성찰은 후속 연구와 백화점·면세점 여성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로 이어진다.
“저는 연구자이지만 제가 비평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플레이어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산되지 않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누군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47쪽)
성급한 해결책이 지워버린 당사자의 삶
정말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2022년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서울시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틀 뒤 서울시는 지하·반지하 주거를 금지하겠다는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반지하방에서 살 수밖에 없는 당사자의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김승섭은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폐지’를 연상시키는 이런 성급한 해결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1988년 미국 뉴욕시는 당사자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이른바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HIV 신규 감염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낙인에 굴하지 않고 마약중독자들에게 깨끗한 주삿바늘을 무상 제공한 것이다. 이 정책은 곧바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성과를 거둔다.
HIV 감염인 낙인을 연구하는 보건학자 돈 오페라리오는 김승섭과의 대담에서 “보건학적 개입은 개인의 삶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212쪽) 말한다. 마약중독에 대한 가치판단에 앞서 당장 생명을 지킬 길을 찾은 주삿바늘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보건학의 대전제 앞에서, 김승섭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이렇게 질문한다. “과연 모든 개인에게서 죽음보다 삶이 나은 것일까?” “‘치유’되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이들은 내내 그 멍에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가?”(176~177쪽) 그 질문은 곧 한국 사회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필요하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모든 소수자가 두려움 없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220쪽)
책에서 김승섭은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법정 증언을 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때마다 상대측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고,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 주장을 펼치며 종종 승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러한 조건 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지(97쪽) 묻는다. 사회적 합의라는 ‘합리적’ 근거를 이유로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처리할 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연구자의 질문은 큰 울림을 준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161쪽)
고유한 역사를 지닌 한 사람, 한 사람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다
책에서 김승섭은 2018년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 용산참사 피해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포착한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을 만난다. 1~3장에서 대담을 나누는 데이비드 윌리엄스, 패트릭 코리건, 리 배지트는 각각 인종차별, 정신질환 낙인, 성소수자 혐오를 겪은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피해자나 소수자에게도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욕망이 있고,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는 점이다. 서지현 검사는 “피해자야말로 행복해져야 할 사람”(254쪽)이라고 말하며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거부한다. 김일란 감독은 우리가 아는 “피해자의 모습은 일부분”(266쪽)이라며 피해자들이 지닌 입체적 면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주목할 만하다. 헬렌 켈러의 삶에는 빛나는 성취뿐 아니라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김승섭은 헬렌 켈러가 이룬 성과뿐 아니라, 한계와 모순을 함께 본다고 해서 그녀의 삶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며 오히려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라고(285쪽) 말한다. 그가 이번 책에서 연구 중에 느낀 서운함이나 고충을 스스럼없이 고백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뒤 맥락을 잘라낸 채 몇 마디 말을 인용하며 사람과 사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시대에”(8쪽)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참사나 재난에서도 각 인간은 고유하거든요. 개인마다 고유한 관계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욕구와 고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공통의 사건을 겪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여길 때가 많아요.”(300쪽)
데이터와 감정 사이에서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
김승섭은 첫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내용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보편의 지식보다는, 기댈 곳 없는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무기로 쓰이기를 원했”다고(8쪽) 말한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에 대해서도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고(294쪽) 말한다. 이를 위해, 김승섭은 사람들이 다가오기 어려운 학술 언어에 머물지도, 데이터가 뒷받침되지 않는 감정적인 글에 그치지도 않도록 섬세하게 언어를 갈고닦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각을 곤두세우기 위해 내 몸을 사건 속에 던져놓는 씨줄”과 논문과 책을 읽으며 “사건을 바라보는 통찰을 기르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을 넓히는 과정이다(311쪽).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김승섭이 ‘성실한 학자’로서 내놓은 또 하나의 무기이다. 책에서 그는 ‘예멘 난민 수용 논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투쟁’ 등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 혹은 여론이 한쪽으로 기운 사건에 대해서도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목소리를 낸다. 주제에 대한 엄밀한 태도, 원인의 원인을 파고드는 치열한 질문, 특유의 정갈한 문장은 한층 깊어졌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통해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통해 생산되지 않는 지식에 대한 학계의 책임을 물었던 김승섭이, 이번 책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그 공부가 과연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제가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숱한 시행착오와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계속 질문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 나눴던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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