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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간의 역사는 어떠한 조건에서 존재하는가?“
굳게 닫힌 서랍 속에서 다시 꺼내진 유고들이
보여주는 역사, 그리고 비-역사의 조건
역사의 가능 조건들을 그 마지막 피난처까지 몰아붙인
알튀세르의 비-역사적, 비-현재적 사유의 궤적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1963~1986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역사에 관해 쓰거나 생산한 다양한 텍스트들을 엮어낸 유고집.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는 무수한 이유들로, 하나의 결과로 태어나지 못한 채 알튀세르의 서랍 속에 들어갔던, 즉 그 자신이 단 한 번도 출간하지 않았던 문서들이 다시금 꺼내져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초안과 스케치, 담화(구두 발언), 소책자, 동료들을 위한 노트 등 다양한 형태로 작성된 총 아홉 편의 텍스트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이해되어온 알튀세르의 사유가 실은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한 철학적 실천들이었음을 생생히 드러낸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로 수용된 알튀세르 안에 존재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면모들, 혹은 철학자인 동시에 역사학을 사유했던 이로서 보여준 마르크스주의와 역사학의 마주침에 관한 통찰들은 지금 여기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 사상의 역량 전체를 온전히 다시 취하도록 한다. 이로써 우리는 또 다른 지평에서 그 사유의 궤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유고들에서 알튀세르는 역사학 내지는 역사주의/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하며 역사의 조건들을 성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역사, 즉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결과들의 역사’가 결과가 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억압된 수많은 비-역사의 조건과 결부되어 있음을 사유하는 것, 그리고 그 사유를 통해 인간의 역사가 어떠한 조건에서 존재하게 되는가의 질문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 바로 이것이 ‘역사에 관한 글들’에서 알튀세르가 집요하게 행하는 태도다.
어떤 의미에서는 알튀세르 그 자신의 비-역사를 이루기도 하는 이 모든 텍스트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것이 알튀세르는 물론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의 형태가 아닌, 비-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여행일 것이며,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의 현재성이 증명될 것이다.“
굳게 닫힌 서랍 속에서 다시 꺼내진 유고들이
보여주는 역사, 그리고 비-역사의 조건
역사의 가능 조건들을 그 마지막 피난처까지 몰아붙인
알튀세르의 비-역사적, 비-현재적 사유의 궤적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1963~1986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역사에 관해 쓰거나 생산한 다양한 텍스트들을 엮어낸 유고집.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는 무수한 이유들로, 하나의 결과로 태어나지 못한 채 알튀세르의 서랍 속에 들어갔던, 즉 그 자신이 단 한 번도 출간하지 않았던 문서들이 다시금 꺼내져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초안과 스케치, 담화(구두 발언), 소책자, 동료들을 위한 노트 등 다양한 형태로 작성된 총 아홉 편의 텍스트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이해되어온 알튀세르의 사유가 실은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한 철학적 실천들이었음을 생생히 드러낸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로 수용된 알튀세르 안에 존재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면모들, 혹은 철학자인 동시에 역사학을 사유했던 이로서 보여준 마르크스주의와 역사학의 마주침에 관한 통찰들은 지금 여기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 사상의 역량 전체를 온전히 다시 취하도록 한다. 이로써 우리는 또 다른 지평에서 그 사유의 궤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유고들에서 알튀세르는 역사학 내지는 역사주의/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하며 역사의 조건들을 성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역사, 즉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결과들의 역사’가 결과가 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억압된 수많은 비-역사의 조건과 결부되어 있음을 사유하는 것, 그리고 그 사유를 통해 인간의 역사가 어떠한 조건에서 존재하게 되는가의 질문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 바로 이것이 ‘역사에 관한 글들’에서 알튀세르가 집요하게 행하는 태도다.
어떤 의미에서는 알튀세르 그 자신의 비-역사를 이루기도 하는 이 모든 텍스트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것이 알튀세르는 물론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의 형태가 아닌, 비-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여행일 것이며,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의 현재성이 증명될 것이다.“
목차
편집자 노트 | G. M. 고슈가리언 ·7
문학사에 관한 대화(1963) ·31
역사에 관한 보충노트(작성일 미상, 1965~1966?) ·87
발생에 관하여(1966) ·93
어떻게 실체적인 무언가가 변화할 수 있는가?(1970) ·103
그레츠키에게(일부 발췌, 1973) ·109
피에르 빌라르에게 보내는 답변 초고(작성일 미상, 1972? 1973?) ·121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1975) ·129
역사에 관하여(1986) ·151
제국주의에 관하여(일부 발췌, 1973) ·157
일러두기 ·159
마르크스의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맺는 관계에 관하여 ·163
생산양식이란 무엇인가? ·185
주요모순 ·250
경쟁이라는 허상, 전쟁이라는 현실 ·253
야만? 파시즘은 이 야만의 첫 번째 형태였다 ·270
몇몇 오류와 부르주아적 허상에 관하여 ·278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하여 ·298
제국주의와 노동자운동에 관하여 ·320
‘순수한 본질’ ·327
해제 | 알튀세르의 비-역사, 알튀세르의 비-현재성(진태원) ·343
옮긴이의 말 ·359
문학사에 관한 대화(1963) ·31
역사에 관한 보충노트(작성일 미상, 1965~1966?) ·87
발생에 관하여(1966) ·93
어떻게 실체적인 무언가가 변화할 수 있는가?(1970) ·103
그레츠키에게(일부 발췌, 1973) ·109
피에르 빌라르에게 보내는 답변 초고(작성일 미상, 1972? 1973?) ·121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1975) ·129
역사에 관하여(1986) ·151
제국주의에 관하여(일부 발췌, 1973) ·157
일러두기 ·159
마르크스의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맺는 관계에 관하여 ·163
생산양식이란 무엇인가? ·185
주요모순 ·250
경쟁이라는 허상, 전쟁이라는 현실 ·253
야만? 파시즘은 이 야만의 첫 번째 형태였다 ·270
몇몇 오류와 부르주아적 허상에 관하여 ·278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하여 ·298
제국주의와 노동자운동에 관하여 ·320
‘순수한 본질’ ·327
해제 | 알튀세르의 비-역사, 알튀세르의 비-현재성(진태원) ·343
옮긴이의 말 ·359
저자 소개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계속 질문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 아닐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곧 변화한 것은 무엇이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등을 묻는 셈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에 따라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돌아오지 않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여전히 건재하고, 착취와 배제,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각종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는데 말이야. 당연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또 당연히 자본주의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되고, 그것은 또다시 생산양식, 생산관계, 계급투쟁 같은 질문을 수반하게 되겠지. 그런 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어법은 오늘날의 사상 조류와 잘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질문이나 주제는,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역시 여전히 현재성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p.350~351
“이론적, 정치적 등등의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수한 이유들로 인해 결과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유산되어 그의 서랍 속으로 들어갔던,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비-역사를 이 루는 텍스트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일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것이 알튀세르는 물론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의 형태가 아닌, 비-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여행일 것이며,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의 현재성이 증명될 것이다.”
--- p.350~351
“이론적, 정치적 등등의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수한 이유들로 인해 결과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유산되어 그의 서랍 속으로 들어갔던,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비-역사를 이 루는 텍스트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일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것이 알튀세르는 물론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의 형태가 아닌, 비-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여행일 것이며,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의 현재성이 증명될 것이다.”
--- p.362
출판사 리뷰
유고집의 형태로 당도한 역사에 관한 질문들
역사적 시간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들을 설명하는 짧은 노트들인 〈역사에 관한 보충노트〉(1965~1966?), 〈발생에 관하여〉(1966), 〈어떻게 실체적인 무언가가 변화할 수 있는가?〉(1970), 〈역사에 관하여〉(1986),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피에르 빌라르Pierre Vilar가 출간한 비판, 즉 자신의 역사에 관한 개념화에 대해 빌라르가 제기한 우정 어린 비판에 알튀세르가 답신으로 보낸 〈피에르 빌라르에게 보내는 답변 초고〉(1972? 1973?), 담화 및 토론의 스타일로 행한(그러나 대화라기보다는 사실상 독백에 가까운) 문학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문학사에 관한 대화〉(1963), 소련의 어느 철학자이자 언론인의 요구에 응해 역사주의historicisme에 관한 자신의 정의를 써내려가는 〈그레츠키에게〉(1973), ‘마르크스와 역사Marx et l’histoire’라는 세미나 혹은 강의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197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유고집의 주축이 되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화를 제시하는 《제국주의에 관하여》(1973)라는 소책자까지.
어떤 점에서, 이 유고집에 실린 위 아홉 편의 원고들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원리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사와 역사학에 관한 텍스트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작성된 시기도 집필 의도나 염두에 두는 대상 독자도 다른 이질적인 형태의 글들이 모여 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상이한 텍스트들을 함께 읽는 방식을 모색해볼 수 있는데, 바로 알튀세르가 역사에 관해 끈질기게 제기하는 질문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는 단연 역사이론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내포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유고집의 형태로 한데 엮인 이 텍스트들은 인간의 역사란 무엇이며 어떠한 조건 속에서 존재하는가에 대한,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 집단/사회구성체 내부에 뿌리박고 있는지에 대한 알튀세르 나름의 답변들이며, 그 답은 종종 역사를 둘러싼 기존의 개념화와 질문 자체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책의 해제(진태원)가 지적하듯, 알튀세르에게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은 “곧 변화한 것은 무엇이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등을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하여: 마르크스의 반-역사주의적 실천들
이 유고집에 묶인 글들에서 알튀세르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즉 우리가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질문할 때 그가 강력하게 염두에 두는 것은 결국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통일체로서의) 생산양식의 역사’다. 역사의 시간 내지는 역사적 시간이란 곧 문제가 되는 규정된 생산양식에 고유한 실존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역사이론의 대상은 “상이한 생산양식들의 역사 혹은 그것들의 실존 과정(발전 과정 내지는 비-발전 과정)”이다.
역사를 끊임없이 ‘생산양식들의 역사’로, 더 나아가 그 생산양식의 본질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하는 알튀세르의 작업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나 《제국주의에 관하여》 같은 텍스트들에서 더욱더 선명히 드러난다. 특히 이 유고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소책자인 《제국주의에 관하여》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단언한다. “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고. 이는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떤 하나의 생산양식의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재생산하기에 적합한 형태들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를 생산양식의 역사로, 더 나아가 계급투쟁의 역사로 위치지우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은 그가 마르크스를 철학자이면서도 역사학을 실천했던 이로서 치밀하게 독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는, 《공산주의자 선언》(1848)의 그 유명한 선언적 구절이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해석의 결들을 겨냥한다. 그에 따르면,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 구절을 역사에 대한 일종의 진화주의적 개념화(또한 이는 역사에 대한 부르주아적 표상이기도 하다)로 독해하는 것이다. 역사가 계급투쟁을 동력 삼아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진보하고, 그 종말에 이르러 계급과 계급투쟁이 철폐된다는 식의 목적론적 사고야말로 마르크스가 단절하고자 했던 입장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과거의 형태들을 최근 형태가 함축하는 고유한 발전 정도에 이른 단계들로 간주하는, 예를 들어 말해보자면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같은 과거의 사회 형태들을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귀결될 역사적 발전 내의 특정한 단계들로 상정하는 목적론적 환상들을 분명히 거부했던 이였다. 이러한 거부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현재 사회를 설명하는 범주들을 과거에 존재했던 사회들에 그대로 투사하는” 경향과 단절하도록 이끌었다. “경우에 따라, 현재의 특정한 범주들은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과거의 어떤 사회구성체에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그 범주들이 과거의 사회구성체 속에 나타난자 할지라도, 그 범주들은 대개 위치가 바뀌어 있으며, 상이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튀세르는 목적론적 환상에 대한 비판을 개진했던 마르크스의 동력이 다름 아닌 ‘자기비판’에 있다고 본다. ‘최근 형태’의 자기비판, 즉 부르주아 사회가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과거 형태들과 최근 형태 사이에 설정된 ‘기원-목적’의 관계를 깨고 역사를 목적론과 우연성과 다른 범주들로 사유하는 데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작업 역시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자기비판’에 해당한다.
또한 (일종의 연대기적 차원에서) 시기들, 시간들, 시대들이 존재한다고, 즉 역사의 흐름이 지니는 변화 속에 “일시적 항구성”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역사주의적 원리(역사 인식의 영역에서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역사주의는 “역사이론이란 (역사철학이든 마르크스의 이론이든) 그 시대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그저 그 시대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며, 그 시대만의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그 고유한 역사적 ‘시대’의 우연성에 종속시키고 환원”시킨다. 이는 동시대 역사의 부르주아 철학자 대부분이 마르크스를 취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생산양식이 한 사회구성체 안에서 실현되고 구성된다고 할 때, 또한 그 생산관계 안에서 계급투쟁이 발생한다고 할 때, 우리는 역사적 시간을 “더 이상 변화들의 잇달음 내지는 여기 지금의 보편적인 상대주의”로 개념화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그것은 각각의 생산양식의 시간이자 생산 및 재생산의 주기들의 시간이다. 요컨대, 그 시간은 역사주의 이데올로기의 개념들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들이 부합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를테면, 역사주의 이데올로기의 ‘시간-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대상’이 부합하는 시간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맞닥뜨리는 난점들: 오류 그리고 부르주아적 허상
한편으로 우리는 마르크스의 저작, 그리고 그 저작들에서 포착되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사유에 주목하는 알튀세르의 독해를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에서 연원하는 시도로도 간주할 수 있다. 이는 사실상 《제국주의에 관하여》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한 지 100여 년이 넘어가는 시점(1973년)에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해당 저작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적 위치/입장이 아닌 대학의 강단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자본》을 독해했다는 데 있는데,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이는 결국 《자본》에 대한 부르주아적 독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론을 철학적 관점에서 수용해버린 마르크스주의자들 탓에 마르크스의 과학이 (과학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그 어떤 검토와 정정 없이 남겨졌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들은 다름 아닌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계급투쟁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와 그 동맹자들의 계급투쟁이 일종의 원인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 특히 우리는 세력 관계가 전도될 때를 제외하고는 계급투쟁에서 일반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바로 부르주아지라는 점을, 다른 용어로 말해,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권력을 쥔 계급의 지배라고 부르는 바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투쟁의 우위로 표현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 무게중심을 두는 이해 방식에 반해, 그리고 부르주아이 계급투쟁을 억압적 국가장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치 체계’로만 국한해 사고하는 방식에 반해 “노동자들이 그 끔찍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장소인 경제적 토대 내에서 행해지는 부르주아 계급투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안에서 전개되는 부르주아 계급투쟁”과 제대로 직면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계급을 의식적 주체로, 계급투쟁을 의식적 주체들의 투쟁으로 표상하는 방식은 계급투쟁이 계급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계급들은 계급투쟁이 따르는 법칙에 의해 행동하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을 간과하는 경향도 문제적이다. 이는 계급투쟁 없는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사고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 우위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모두에게 유효하다. “자본가 계급-노동자 계급이라는 쌍 바깥에서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이 쌍이 그 적대 안에서 이 적대적인 두 계급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 노동자운동 안에서 (‘분석의 오류’ 혹은 더욱 심원하게는 오도된 계급 위치, 즉 올바르지 않으며 잘못 조정된 계급 위치로 인해) 개량주의와 수정주의로 나타나고 인식되는 것은 최종심급에서 결국 〔부르주아〕 계급투쟁이 노동자운동 내부에 생산하는 효과일 뿐이다.”
더불어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와 관련해 부르주아적 허상을 수용해버리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이는 “노동자 계급 조직 내 지배적인 표상들의 바로 한가운데에서 부르주아 계급투쟁이 거두는 그 (일시적인) 승리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 즉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에 따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따라, 그렇게 마치 각자가 생산에 기여하는 바에 비례해 보상받는 것처럼 표상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원래 그러한 것’으로 자연화하는 부르주아적 ‘사물의 자연’을 계급투쟁의 갈등적 역사로 다시 쓴 이후에도 결코 소거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침투하는 부르주아적 개념화.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가해지는 진정한 위협은 바로 이러한 허상이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역사학이 도입했던 생산양식에 관한 설명, 즉 하나의 양식(과거의 그것)이 다른 양식(현재의 그것)을 뒤따르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을 뒤에서 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역사에 대한) 진화주의적 개념화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동시에 이것은 제국주의론을 통해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해 사유했던 레닌을 결정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비-문학사의 조건으로부터 문학사의 조건으로: 문학사의 병리학
다른 한편,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텍스트인 〈문학사에 관한 대화〉(1963)는 현존하는 생산양식의 존재 조건들이 그 비-존재의 조건들, 그리고 그 비-존재의 조건들이 결국에는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소되어버렸다는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하는,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 자신의 핵심 문제의식을 ‘문학(비평) 생산의 조건’이라는 주제 속에서 벼려낸 매우 드물고 흥미로운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은 익명의 대화자의 질문에 따라 전개되면서도,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운 형태를 띠는 이 담화는 그것을 받아적은 녹취록(타자본)의 형태로 보관되었다. 한국어판에서는 “그럼에도 이 담화가 하나의 ‘이론적’ 텍스트로서 대상의 희소성, 논리적 일관성, 분석의 명확성, 비판의 적확성, 논의의 풍부성,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론적 유효성 측면에서 놀라운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해 구어체/대화체가 아닌 일반적인 서술체로 옮겼다. 또한 중간중간 생략된 맥락을 상세하고도 충실하게 짚어내는 옮긴이 주를 추가해 독자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알튀세르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이 담화에서 알튀세르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문학사가 역사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 즉 역사를 하나의 연대기로 환원해버리는 개념화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떤 이의 문학적 산물들/작품들의 연대기학이 됐든, 어떤 이의 자서전의 연대기학이 됐든” 말이다. 그리고 역사를 이렇게 연대기로 개념화할 때, 결론적으로 저자와 (그 작품을 비평하는) 비평가 사이에는 가치상의 등급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연대기로서의 문학사는 “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논평하는 어떤 작품을 쓰지만, 저자의 작품을 논평하기 위해 쓰는 비평가는 결코 저자의 작품처럼 논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이 다른 대상들과 달리 상이한 품격과 역사적 위상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보기에 이런 식의 문학사는 정작 다음과 같은 문화적 인정 및 그 인정상의 위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혀 해명하지 못한다. 즉 여기에는 하나의 문학작품을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결정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결국 고전적인 문학사는 “어떤 한 개인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누군가로부터 논평되는 작가가 되는지는 물론, “작가와 비평가 모두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씀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가치상의 등급 차이가 생겨나는지” 모두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문학사는 연대기적 역사가 “미결 상태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는” 이 이론적 공백을 역사에 초월적인 ‘미학’으로 보충한다. 일종의 연장코드로서 미학을 동원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처럼 “절대적인 출발점처럼 주어져 있”어 결코 문제제기되지 않는 실존 작품들에 문학사를 둘러싼 모든 쟁점이 걸려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할 때, 우리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문학사의 병리학’의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문학의 반-역사 혹은 비-역사로서, “자신들이 결정적인 예술작품을 쓴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에 도달하지 못했던 무수한 저자들/작품들의 유실된 역사를 구성해보는 작업에 해당한다. 문화적 인정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이러한 작품들은 고전적인 문학사에서 성찰되지 않았던 전제들 전체를 산산조각 낸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를 동시에 충족시킬 때 비로소 문학사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문학으로 추구되었지만 문학에 이르지 못하고 유실된 것의 역사를 만들어야만 하며, 두 번째로, 문학으로서 생산되고 또 성공했던 것의 역사를, 마지막으로는 문학의 은총을 받지 못해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은 것의 역사를 만들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문학사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비-문학의 역사를 만드는 것과 동일하다. 이때 문학사가는, 좀 더 정확히 말해 문학사가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는, 자신이 다루는 미학적 대상에 대해서는 물론, 그 대상에 대해 비평할 수 있는 자로서 결정된 위치를 부여받는 그 자신,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비역사적인 상황”을 생산할 수 있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역사적 관점을 지녀야 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만이 그러한 관점과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이론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비-역사의 조건으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비-존재의 조건에서 존재의 조건으로
다시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논의로 돌아가보면, 그는 과거의 생산양식을 현재의 생산양식에 비춰 그 현재의 생산양식이 함축하는 어떤 발전 정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는 역사에 대한 진화주의적 개념화를 단호히 거부했던 마르크스의 사유에 주목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그 통찰이 “‘실정적’ 역사의 밑바닥이자 부대 비용으로서의 반-역사, 부정적 역사라 칭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이끈다고 본다. 흔히 사람들이 이해하는 역사가 “현재의 형태가 함축하는 생성의 단계들로서의 결과들의 역사이자, 역사가 보유한 결과들의 역사”라고 할 때, 그 역사는 억압되고 죽어버린, 하나의 결과로서 산출되지 못한 그런 역사를 삭제한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서구 전통 속에서 쓰인 공식적인 역사, 그것은 바로 지배의 역사이며, 이 지배의 역사는 또 다른 역사를, 즉 어둠 속에서 죽어버린 역사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르는 생산양식의 역사를 잇달아 펼쳐지는 연대기나 진화주의적 발전 단계가 아닌, 생산양식의 실존(지속적 재생산)의 조건들과 그 실존이 그 비-실존과 맺는 관계의 조건들 속에서 개념화한다. 다시 말해, “생산양식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할 수도 있으며 나타나자마자 소멸할 수도 있고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자마자 강력한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따라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는 ‘그건 원래 그렇다’는 식의 하나의 기정사실로서 제시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가 어떠한 (부르주아적) 표상들에 둘러싸여 있는지 들여다보는 면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알튀세르가 생산양식의 역사적 존재가 지니는 비밀을 그 ‘비-존재의 조건들’, 그리고 그 조건들이 말소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비-존재의 조건들에서부터 출발해 존재의 조건들을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할 때, 그는 이 관계를 무엇보다 사회주의에 관한 논의에 도입할 필요가 있음을 염두에 둔다. 즉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요소들”을 공산주의의 비-존재 조건들로 파악하면서, 또 바로 그 비-존재 조건들에서 출발해, 모색되고 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은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을 사유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이는 사회주의에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계급 및 계급투쟁과 같이, ‘다른 형태들’ 아래에서 존속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 굉장히 실제적이고 능동적으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이론을 펼쳤던 레닌을 알튀세르는 이런 방식으로 다시 취한다.
따라서 관건은 사회구성체 자체를 “생산양식의 실존의 조건들과 비-실존의 조건들 사이의 모순적 쌍을 실현하는 형태들”로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본질로서의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의 조건들을 실현하거나 실현하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사회구성체”라는 이원론을 폐기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쓰레기가, 그것도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즉 역사가 치러야 하는 부대 비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명백히 이 모순이, 본질로부터 멀어지기는커녕 본질과 한 몸을 이루고 이 본질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생산양식의 본질은 모순이며, 본질과 그 존재의 조건들 사이의 모순은 생산양식의 본질에 외재적이기는커녕 모순의 주요한 발현 형태이다.”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간명한 테제(“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는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문학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문학사를 구성한다고 할 경우 해명되어야 할 것은 문학사를 구성하거나 그러려고 시도하는 누군가가 어째서 그렇게 구성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는지(그 권리의 자연스러움)이다. “하지만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의심받지 않는 이러한 권리는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그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어떤 문명(역사적 실존의 또 다른 형태들)에서는 그 권리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는 알튀세르가 이 유고집 안에서 그토록 긴 지면을 할애해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자명한 기정사실로, ‘그건 원래 그렇다’고 간주하는 부르주아식 ‘사물의 자연’론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그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리고 (문학사의 경우) ‘문학사를 구성할 권리’는 “심지어 가장 단순한 역사적 의식”에 의해서도 금세 파면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문학사와 관련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문학사를 구성하기 위해 미학적 작품에 스스로를 결부시키는 어떤 사람의 행위가 지니는 자연스러운 성격”, 즉 “이 행위의 역사적 성격”이다. 우리는 ‘그건 원래 그러니까 그렇다’는 식의 역사적 상대주의가 아닌, 전형적이고도 역사적으로 결정된 그런 관계(문학비평가가 역사를 통해 미학적인 것으로 기록되고 인정된 작품과 맺는 관계)의 역사적 가능 조건들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경유해 그 관계의 비밀을 풀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사에 관한 대화〉의 핵심 줄기를 이루는 ‘비-문학의 역사’ 그리고 ‘문학사의 병리학’에 대한 타진은 어떤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그 비-존재의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해야 한다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적 사유가 풍부하고도 적확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광기의 역사를 통해 이성의 역사를 구성한 푸코처럼, “비-문학의 역사를 구성함으로써 역사를 구성하기”. 그러나 “이성을 광기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위”시킴으로써 ‘이성-광기(비-이성)’라는 쌍 자체의 역사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정교하게 질문하지 않았던 그 “푸코를 넘어서” 비-문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방식을 모색하기.
역사적 시간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들을 설명하는 짧은 노트들인 〈역사에 관한 보충노트〉(1965~1966?), 〈발생에 관하여〉(1966), 〈어떻게 실체적인 무언가가 변화할 수 있는가?〉(1970), 〈역사에 관하여〉(1986),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피에르 빌라르Pierre Vilar가 출간한 비판, 즉 자신의 역사에 관한 개념화에 대해 빌라르가 제기한 우정 어린 비판에 알튀세르가 답신으로 보낸 〈피에르 빌라르에게 보내는 답변 초고〉(1972? 1973?), 담화 및 토론의 스타일로 행한(그러나 대화라기보다는 사실상 독백에 가까운) 문학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문학사에 관한 대화〉(1963), 소련의 어느 철학자이자 언론인의 요구에 응해 역사주의historicisme에 관한 자신의 정의를 써내려가는 〈그레츠키에게〉(1973), ‘마르크스와 역사Marx et l’histoire’라는 세미나 혹은 강의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197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유고집의 주축이 되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화를 제시하는 《제국주의에 관하여》(1973)라는 소책자까지.
어떤 점에서, 이 유고집에 실린 위 아홉 편의 원고들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원리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사와 역사학에 관한 텍스트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작성된 시기도 집필 의도나 염두에 두는 대상 독자도 다른 이질적인 형태의 글들이 모여 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상이한 텍스트들을 함께 읽는 방식을 모색해볼 수 있는데, 바로 알튀세르가 역사에 관해 끈질기게 제기하는 질문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는 단연 역사이론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내포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유고집의 형태로 한데 엮인 이 텍스트들은 인간의 역사란 무엇이며 어떠한 조건 속에서 존재하는가에 대한,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 집단/사회구성체 내부에 뿌리박고 있는지에 대한 알튀세르 나름의 답변들이며, 그 답은 종종 역사를 둘러싼 기존의 개념화와 질문 자체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책의 해제(진태원)가 지적하듯, 알튀세르에게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은 “곧 변화한 것은 무엇이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등을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하여: 마르크스의 반-역사주의적 실천들
이 유고집에 묶인 글들에서 알튀세르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즉 우리가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질문할 때 그가 강력하게 염두에 두는 것은 결국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통일체로서의) 생산양식의 역사’다. 역사의 시간 내지는 역사적 시간이란 곧 문제가 되는 규정된 생산양식에 고유한 실존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역사이론의 대상은 “상이한 생산양식들의 역사 혹은 그것들의 실존 과정(발전 과정 내지는 비-발전 과정)”이다.
역사를 끊임없이 ‘생산양식들의 역사’로, 더 나아가 그 생산양식의 본질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하는 알튀세르의 작업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나 《제국주의에 관하여》 같은 텍스트들에서 더욱더 선명히 드러난다. 특히 이 유고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소책자인 《제국주의에 관하여》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단언한다. “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고. 이는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떤 하나의 생산양식의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재생산하기에 적합한 형태들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를 생산양식의 역사로, 더 나아가 계급투쟁의 역사로 위치지우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은 그가 마르크스를 철학자이면서도 역사학을 실천했던 이로서 치밀하게 독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는, 《공산주의자 선언》(1848)의 그 유명한 선언적 구절이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해석의 결들을 겨냥한다. 그에 따르면,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 구절을 역사에 대한 일종의 진화주의적 개념화(또한 이는 역사에 대한 부르주아적 표상이기도 하다)로 독해하는 것이다. 역사가 계급투쟁을 동력 삼아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진보하고, 그 종말에 이르러 계급과 계급투쟁이 철폐된다는 식의 목적론적 사고야말로 마르크스가 단절하고자 했던 입장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과거의 형태들을 최근 형태가 함축하는 고유한 발전 정도에 이른 단계들로 간주하는, 예를 들어 말해보자면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같은 과거의 사회 형태들을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귀결될 역사적 발전 내의 특정한 단계들로 상정하는 목적론적 환상들을 분명히 거부했던 이였다. 이러한 거부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현재 사회를 설명하는 범주들을 과거에 존재했던 사회들에 그대로 투사하는” 경향과 단절하도록 이끌었다. “경우에 따라, 현재의 특정한 범주들은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과거의 어떤 사회구성체에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그 범주들이 과거의 사회구성체 속에 나타난자 할지라도, 그 범주들은 대개 위치가 바뀌어 있으며, 상이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튀세르는 목적론적 환상에 대한 비판을 개진했던 마르크스의 동력이 다름 아닌 ‘자기비판’에 있다고 본다. ‘최근 형태’의 자기비판, 즉 부르주아 사회가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과거 형태들과 최근 형태 사이에 설정된 ‘기원-목적’의 관계를 깨고 역사를 목적론과 우연성과 다른 범주들로 사유하는 데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작업 역시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자기비판’에 해당한다.
또한 (일종의 연대기적 차원에서) 시기들, 시간들, 시대들이 존재한다고, 즉 역사의 흐름이 지니는 변화 속에 “일시적 항구성”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역사주의적 원리(역사 인식의 영역에서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역사주의는 “역사이론이란 (역사철학이든 마르크스의 이론이든) 그 시대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그저 그 시대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며, 그 시대만의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그 고유한 역사적 ‘시대’의 우연성에 종속시키고 환원”시킨다. 이는 동시대 역사의 부르주아 철학자 대부분이 마르크스를 취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생산양식이 한 사회구성체 안에서 실현되고 구성된다고 할 때, 또한 그 생산관계 안에서 계급투쟁이 발생한다고 할 때, 우리는 역사적 시간을 “더 이상 변화들의 잇달음 내지는 여기 지금의 보편적인 상대주의”로 개념화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그것은 각각의 생산양식의 시간이자 생산 및 재생산의 주기들의 시간이다. 요컨대, 그 시간은 역사주의 이데올로기의 개념들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들이 부합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를테면, 역사주의 이데올로기의 ‘시간-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대상’이 부합하는 시간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맞닥뜨리는 난점들: 오류 그리고 부르주아적 허상
한편으로 우리는 마르크스의 저작, 그리고 그 저작들에서 포착되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사유에 주목하는 알튀세르의 독해를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에서 연원하는 시도로도 간주할 수 있다. 이는 사실상 《제국주의에 관하여》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한 지 100여 년이 넘어가는 시점(1973년)에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해당 저작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적 위치/입장이 아닌 대학의 강단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자본》을 독해했다는 데 있는데,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이는 결국 《자본》에 대한 부르주아적 독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론을 철학적 관점에서 수용해버린 마르크스주의자들 탓에 마르크스의 과학이 (과학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그 어떤 검토와 정정 없이 남겨졌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들은 다름 아닌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계급투쟁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와 그 동맹자들의 계급투쟁이 일종의 원인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 특히 우리는 세력 관계가 전도될 때를 제외하고는 계급투쟁에서 일반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바로 부르주아지라는 점을, 다른 용어로 말해,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권력을 쥔 계급의 지배라고 부르는 바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투쟁의 우위로 표현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 무게중심을 두는 이해 방식에 반해, 그리고 부르주아이 계급투쟁을 억압적 국가장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치 체계’로만 국한해 사고하는 방식에 반해 “노동자들이 그 끔찍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장소인 경제적 토대 내에서 행해지는 부르주아 계급투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안에서 전개되는 부르주아 계급투쟁”과 제대로 직면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계급을 의식적 주체로, 계급투쟁을 의식적 주체들의 투쟁으로 표상하는 방식은 계급투쟁이 계급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계급들은 계급투쟁이 따르는 법칙에 의해 행동하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을 간과하는 경향도 문제적이다. 이는 계급투쟁 없는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사고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 우위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모두에게 유효하다. “자본가 계급-노동자 계급이라는 쌍 바깥에서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이 쌍이 그 적대 안에서 이 적대적인 두 계급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 노동자운동 안에서 (‘분석의 오류’ 혹은 더욱 심원하게는 오도된 계급 위치, 즉 올바르지 않으며 잘못 조정된 계급 위치로 인해) 개량주의와 수정주의로 나타나고 인식되는 것은 최종심급에서 결국 〔부르주아〕 계급투쟁이 노동자운동 내부에 생산하는 효과일 뿐이다.”
더불어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와 관련해 부르주아적 허상을 수용해버리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이는 “노동자 계급 조직 내 지배적인 표상들의 바로 한가운데에서 부르주아 계급투쟁이 거두는 그 (일시적인) 승리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 즉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에 따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따라, 그렇게 마치 각자가 생산에 기여하는 바에 비례해 보상받는 것처럼 표상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원래 그러한 것’으로 자연화하는 부르주아적 ‘사물의 자연’을 계급투쟁의 갈등적 역사로 다시 쓴 이후에도 결코 소거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침투하는 부르주아적 개념화.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가해지는 진정한 위협은 바로 이러한 허상이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역사학이 도입했던 생산양식에 관한 설명, 즉 하나의 양식(과거의 그것)이 다른 양식(현재의 그것)을 뒤따르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을 뒤에서 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역사에 대한) 진화주의적 개념화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동시에 이것은 제국주의론을 통해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해 사유했던 레닌을 결정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비-문학사의 조건으로부터 문학사의 조건으로: 문학사의 병리학
다른 한편,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텍스트인 〈문학사에 관한 대화〉(1963)는 현존하는 생산양식의 존재 조건들이 그 비-존재의 조건들, 그리고 그 비-존재의 조건들이 결국에는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소되어버렸다는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하는,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 자신의 핵심 문제의식을 ‘문학(비평) 생산의 조건’이라는 주제 속에서 벼려낸 매우 드물고 흥미로운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은 익명의 대화자의 질문에 따라 전개되면서도,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운 형태를 띠는 이 담화는 그것을 받아적은 녹취록(타자본)의 형태로 보관되었다. 한국어판에서는 “그럼에도 이 담화가 하나의 ‘이론적’ 텍스트로서 대상의 희소성, 논리적 일관성, 분석의 명확성, 비판의 적확성, 논의의 풍부성,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론적 유효성 측면에서 놀라운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해 구어체/대화체가 아닌 일반적인 서술체로 옮겼다. 또한 중간중간 생략된 맥락을 상세하고도 충실하게 짚어내는 옮긴이 주를 추가해 독자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알튀세르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이 담화에서 알튀세르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문학사가 역사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 즉 역사를 하나의 연대기로 환원해버리는 개념화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떤 이의 문학적 산물들/작품들의 연대기학이 됐든, 어떤 이의 자서전의 연대기학이 됐든” 말이다. 그리고 역사를 이렇게 연대기로 개념화할 때, 결론적으로 저자와 (그 작품을 비평하는) 비평가 사이에는 가치상의 등급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연대기로서의 문학사는 “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논평하는 어떤 작품을 쓰지만, 저자의 작품을 논평하기 위해 쓰는 비평가는 결코 저자의 작품처럼 논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이 다른 대상들과 달리 상이한 품격과 역사적 위상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보기에 이런 식의 문학사는 정작 다음과 같은 문화적 인정 및 그 인정상의 위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혀 해명하지 못한다. 즉 여기에는 하나의 문학작품을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결정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결국 고전적인 문학사는 “어떤 한 개인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누군가로부터 논평되는 작가가 되는지는 물론, “작가와 비평가 모두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씀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가치상의 등급 차이가 생겨나는지” 모두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문학사는 연대기적 역사가 “미결 상태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는” 이 이론적 공백을 역사에 초월적인 ‘미학’으로 보충한다. 일종의 연장코드로서 미학을 동원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처럼 “절대적인 출발점처럼 주어져 있”어 결코 문제제기되지 않는 실존 작품들에 문학사를 둘러싼 모든 쟁점이 걸려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할 때, 우리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문학사의 병리학’의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문학의 반-역사 혹은 비-역사로서, “자신들이 결정적인 예술작품을 쓴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에 도달하지 못했던 무수한 저자들/작품들의 유실된 역사를 구성해보는 작업에 해당한다. 문화적 인정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이러한 작품들은 고전적인 문학사에서 성찰되지 않았던 전제들 전체를 산산조각 낸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를 동시에 충족시킬 때 비로소 문학사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문학으로 추구되었지만 문학에 이르지 못하고 유실된 것의 역사를 만들어야만 하며, 두 번째로, 문학으로서 생산되고 또 성공했던 것의 역사를, 마지막으로는 문학의 은총을 받지 못해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은 것의 역사를 만들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문학사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비-문학의 역사를 만드는 것과 동일하다. 이때 문학사가는, 좀 더 정확히 말해 문학사가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는, 자신이 다루는 미학적 대상에 대해서는 물론, 그 대상에 대해 비평할 수 있는 자로서 결정된 위치를 부여받는 그 자신,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비역사적인 상황”을 생산할 수 있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역사적 관점을 지녀야 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만이 그러한 관점과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이론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비-역사의 조건으로부터 역사의 조건으로, 비-존재의 조건에서 존재의 조건으로
다시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논의로 돌아가보면, 그는 과거의 생산양식을 현재의 생산양식에 비춰 그 현재의 생산양식이 함축하는 어떤 발전 정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는 역사에 대한 진화주의적 개념화를 단호히 거부했던 마르크스의 사유에 주목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그 통찰이 “‘실정적’ 역사의 밑바닥이자 부대 비용으로서의 반-역사, 부정적 역사라 칭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이끈다고 본다. 흔히 사람들이 이해하는 역사가 “현재의 형태가 함축하는 생성의 단계들로서의 결과들의 역사이자, 역사가 보유한 결과들의 역사”라고 할 때, 그 역사는 억압되고 죽어버린, 하나의 결과로서 산출되지 못한 그런 역사를 삭제한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서구 전통 속에서 쓰인 공식적인 역사, 그것은 바로 지배의 역사이며, 이 지배의 역사는 또 다른 역사를, 즉 어둠 속에서 죽어버린 역사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르는 생산양식의 역사를 잇달아 펼쳐지는 연대기나 진화주의적 발전 단계가 아닌, 생산양식의 실존(지속적 재생산)의 조건들과 그 실존이 그 비-실존과 맺는 관계의 조건들 속에서 개념화한다. 다시 말해, “생산양식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할 수도 있으며 나타나자마자 소멸할 수도 있고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자마자 강력한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따라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는 ‘그건 원래 그렇다’는 식의 하나의 기정사실로서 제시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가 어떠한 (부르주아적) 표상들에 둘러싸여 있는지 들여다보는 면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알튀세르가 생산양식의 역사적 존재가 지니는 비밀을 그 ‘비-존재의 조건들’, 그리고 그 조건들이 말소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비-존재의 조건들에서부터 출발해 존재의 조건들을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할 때, 그는 이 관계를 무엇보다 사회주의에 관한 논의에 도입할 필요가 있음을 염두에 둔다. 즉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요소들”을 공산주의의 비-존재 조건들로 파악하면서, 또 바로 그 비-존재 조건들에서 출발해, 모색되고 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은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을 사유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이는 사회주의에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계급 및 계급투쟁과 같이, ‘다른 형태들’ 아래에서 존속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 굉장히 실제적이고 능동적으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이론을 펼쳤던 레닌을 알튀세르는 이런 방식으로 다시 취한다.
따라서 관건은 사회구성체 자체를 “생산양식의 실존의 조건들과 비-실존의 조건들 사이의 모순적 쌍을 실현하는 형태들”로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본질로서의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의 조건들을 실현하거나 실현하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사회구성체”라는 이원론을 폐기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쓰레기가, 그것도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즉 역사가 치러야 하는 부대 비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명백히 이 모순이, 본질로부터 멀어지기는커녕 본질과 한 몸을 이루고 이 본질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생산양식의 본질은 모순이며, 본질과 그 존재의 조건들 사이의 모순은 생산양식의 본질에 외재적이기는커녕 모순의 주요한 발현 형태이다.”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한 알튀세르의 간명한 테제(“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는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문학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문학사를 구성한다고 할 경우 해명되어야 할 것은 문학사를 구성하거나 그러려고 시도하는 누군가가 어째서 그렇게 구성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는지(그 권리의 자연스러움)이다. “하지만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의심받지 않는 이러한 권리는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그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어떤 문명(역사적 실존의 또 다른 형태들)에서는 그 권리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는 알튀세르가 이 유고집 안에서 그토록 긴 지면을 할애해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자명한 기정사실로, ‘그건 원래 그렇다’고 간주하는 부르주아식 ‘사물의 자연’론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그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리고 (문학사의 경우) ‘문학사를 구성할 권리’는 “심지어 가장 단순한 역사적 의식”에 의해서도 금세 파면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문학사와 관련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문학사를 구성하기 위해 미학적 작품에 스스로를 결부시키는 어떤 사람의 행위가 지니는 자연스러운 성격”, 즉 “이 행위의 역사적 성격”이다. 우리는 ‘그건 원래 그러니까 그렇다’는 식의 역사적 상대주의가 아닌, 전형적이고도 역사적으로 결정된 그런 관계(문학비평가가 역사를 통해 미학적인 것으로 기록되고 인정된 작품과 맺는 관계)의 역사적 가능 조건들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경유해 그 관계의 비밀을 풀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사에 관한 대화〉의 핵심 줄기를 이루는 ‘비-문학의 역사’ 그리고 ‘문학사의 병리학’에 대한 타진은 어떤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그 비-존재의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해야 한다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적 사유가 풍부하고도 적확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광기의 역사를 통해 이성의 역사를 구성한 푸코처럼, “비-문학의 역사를 구성함으로써 역사를 구성하기”. 그러나 “이성을 광기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위”시킴으로써 ‘이성-광기(비-이성)’라는 쌍 자체의 역사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정교하게 질문하지 않았던 그 “푸코를 넘어서” 비-문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방식을 모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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