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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전무후무한 역사를 이어왔다는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기원은 백제 부여씨며 왜국은 백제의 속국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강전투에서도 패하자, 백제 부흥의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왜왕 천지는 이제는 백제의 속국이 아닌, 정상적인 국가로 독립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지 못한 국호 「倭國」을 「日本」으로 바꾸고, 최초의 율령, 최초의 호적, 최초의 학교, 새로운 관제, 등 독립국으로서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분주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왜국이 속국이 아니었다면 수백년 이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들이,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야 뒤늦게 마련되었던 것이다. 속국 혹은 식민지 「倭國」이, 백제 멸망 이후 비로소 독립국 「日本」으로 새출발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강전투에서도 패하자, 백제 부흥의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왜왕 천지는 이제는 백제의 속국이 아닌, 정상적인 국가로 독립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지 못한 국호 「倭國」을 「日本」으로 바꾸고, 최초의 율령, 최초의 호적, 최초의 학교, 새로운 관제, 등 독립국으로서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분주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왜국이 속국이 아니었다면 수백년 이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들이,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야 뒤늦게 마련되었던 것이다. 속국 혹은 식민지 「倭國」이, 백제 멸망 이후 비로소 독립국 「日本」으로 새출발하였다.
목차
머리말
1장. 천황 즉위식의 칼은 백제 대왕의 하사품
1. 즉위식에서 사용된 백제의 칼
2. 즉위식의 삼종신기는 고대 한국에서 기원
3. 파적검, 호신검과 백제의 도교
4. 신으로 모셔진 칠지도
2장. 백제 왕자들의 도왜
1. 백제 왕자 도왜 기사의 개요와 도왜 목적
2. 태자 전지(?支)의 도왜
3. 왕자 곤지(昆支)의 도왜
4. 왜군 호위병을 거느리고 귀국한 백제의 왕자들
5. 백제의 왕자들의 빈번한 도왜
6. 백제 멸망 시 왜국의 이변과 백제 구원정책
3장. 왜왕 무(武)와 상표문
1. 상표문
2. 왜왕 정복의 허구성
3. 왜 5왕은 『일본서기』의 왜왕일까?
4. 왜왕 무(武)는 한국 남부지방을 지배하였을까?
5. 왜 5왕은 누구인가?
6. 개로왕의 상표문
7. 『수서』 「왜국전」의 왜왕
8. 여왕 비미호(卑彌呼)와 신공왕후
4장. 새로운 국호 「일본」은 백제를 의미
1. 획기적인 대사건이 있었나?
2. 왜 백제멸망 직후 국호를 바꾸었나?
3. 국호 「왜」는 고대 한국인들이 붙인 멸칭
5장. 속국 「왜국」에서 독립국 「일본」으로
1. 율령
2. 관위와 관제
3. 지방제도
4. 고등교육기관과 역사서
5. 천지(天智)의 대변혁
6장. 백제인들이 붙인 왜국의 지명
1.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붙인 한국의 지명
2. 일본 지명에 남은 백제
3. 6곳의 백제사(百濟寺)
4. 동대사(東大寺)
5. 백제인들이 붙인 수많은 지명
1) 고을, 2) 이마키(今來), 3) 나라(奈良), 4) 땅을 의미하는 「~타(田)」 계통의 지명,
5) 들, 6) 백제의 「부리(夫里)」, 7) 골, 8) 골짜기를 뜻하는 「~실」, 9) 멧「부리」,
10) 몰랭이, 11) 산「마루」, 12) 「우두」 봉, 13) 항구를 뜻하는 「나리」,
14) 대화삼산(大和三山)과 부여삼산(夫餘三山), 15) 모루(牟婁)
7장. 일본의 백제풍 인명
1) 고대 일본 실존 인물 이름은 대부분 백제풍, 2) ~마로(麻呂), 3) ~다리, 4) ~키,
5) ~디, 6) ~시, 7) ~비, 8) ~리, 9) ~수, 10) ~루
8장. 『신찬성씨록』으로 보는 천황가의 기원
1. 『신찬성씨록』
2. 왜국의 성(姓)과 씨(氏)
3. 황별(皇別)이 된 백제인
4. 천황가는 백제 부여씨
1장. 천황 즉위식의 칼은 백제 대왕의 하사품
1. 즉위식에서 사용된 백제의 칼
2. 즉위식의 삼종신기는 고대 한국에서 기원
3. 파적검, 호신검과 백제의 도교
4. 신으로 모셔진 칠지도
2장. 백제 왕자들의 도왜
1. 백제 왕자 도왜 기사의 개요와 도왜 목적
2. 태자 전지(?支)의 도왜
3. 왕자 곤지(昆支)의 도왜
4. 왜군 호위병을 거느리고 귀국한 백제의 왕자들
5. 백제의 왕자들의 빈번한 도왜
6. 백제 멸망 시 왜국의 이변과 백제 구원정책
3장. 왜왕 무(武)와 상표문
1. 상표문
2. 왜왕 정복의 허구성
3. 왜 5왕은 『일본서기』의 왜왕일까?
4. 왜왕 무(武)는 한국 남부지방을 지배하였을까?
5. 왜 5왕은 누구인가?
6. 개로왕의 상표문
7. 『수서』 「왜국전」의 왜왕
8. 여왕 비미호(卑彌呼)와 신공왕후
4장. 새로운 국호 「일본」은 백제를 의미
1. 획기적인 대사건이 있었나?
2. 왜 백제멸망 직후 국호를 바꾸었나?
3. 국호 「왜」는 고대 한국인들이 붙인 멸칭
5장. 속국 「왜국」에서 독립국 「일본」으로
1. 율령
2. 관위와 관제
3. 지방제도
4. 고등교육기관과 역사서
5. 천지(天智)의 대변혁
6장. 백제인들이 붙인 왜국의 지명
1.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붙인 한국의 지명
2. 일본 지명에 남은 백제
3. 6곳의 백제사(百濟寺)
4. 동대사(東大寺)
5. 백제인들이 붙인 수많은 지명
1) 고을, 2) 이마키(今來), 3) 나라(奈良), 4) 땅을 의미하는 「~타(田)」 계통의 지명,
5) 들, 6) 백제의 「부리(夫里)」, 7) 골, 8) 골짜기를 뜻하는 「~실」, 9) 멧「부리」,
10) 몰랭이, 11) 산「마루」, 12) 「우두」 봉, 13) 항구를 뜻하는 「나리」,
14) 대화삼산(大和三山)과 부여삼산(夫餘三山), 15) 모루(牟婁)
7장. 일본의 백제풍 인명
1) 고대 일본 실존 인물 이름은 대부분 백제풍, 2) ~마로(麻呂), 3) ~다리, 4) ~키,
5) ~디, 6) ~시, 7) ~비, 8) ~리, 9) ~수, 10) ~루
8장. 『신찬성씨록』으로 보는 천황가의 기원
1. 『신찬성씨록』
2. 왜국의 성(姓)과 씨(氏)
3. 황별(皇別)이 된 백제인
4. 천황가는 백제 부여씨
출판사 리뷰
倭國(왜국)이 백제(百濟)의 속국인 이유들
1. 일본의 천황가는 특이하게도 이름만 있고, 성은 없는 가문이다. 8세기부터 시작된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의 문명국에서는 유일무이한 특이한 사례일 것이다. 성을 밝히면 출신 내력이 드러나게 된다. 천황가에서는 자신의 뿌리를 꼭꼭 감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 천황가는 백제의 부여씨였다. 백제 멸망 무렵의 왜왕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이었고, 그가 백제로 돌아간 이후에는 두 아들인 천지(天智)와 천무(天武)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숨기기 위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시조인 신무부터 37대 제명에 이르기까지, 무려 37명이나 되는 허구의 왜왕을 창작하였다.
2.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는 왜의 속국이었다. 그런데 속국인 백제의 왕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여러 차례 왜국으로 건너가 수년 혹은 수십 년, 장기간 체류한 것으로 되어있다. 반대로 종주국인 왜국의 왕자가 백제를 방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왜 일방적으로 백제 왕자들만 끊임없이 도왜하였을까? 사실은 백제 왕자들은 도왜하여 왜왕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려 30년간 왜국에 체재하였던 왕자 부여풍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인질」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5천여 대군을 호위병으로 거느리고 귀국하였다. 그 후 백강구 전투에서는 왜 전함에 올라타 2만 7천여 왜군을 총지휘하였으며, 그를 보좌한 것은 숙부인 충승과 충지였다. 그는 인질이 아니라 왜왕이었던 것이 명명백백하다. 『일본서기』를 엮은 사람도 백제의 후예였기에, 백제가 왜국을 통치한 역사의 진실이 깡그리 사라지는 사태는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인질」이나 「조공」 등으로 위장하여, 백제 왕자들이 도왜한 사실을 은밀한 암호처럼 전해주고 있다. 천황가 선조인 천조대신의 원래 고향이라는 고천원(高天原)이 백제의 암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3. 대대로 즉위식의 핵심은 삼종신기(칼, 거울, 곱은 옥)를 새 천황에게 전달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칼은 백제 대왕의 하사품이었다. 칼의 이름 「삼공(三公)전투검」과 「장군검」. 백제의 대왕에게 있어서 왜왕이라는 존재는 「삼공」과 「장군」이었던 것이다. 칠지도에서는 백제의 왕도 아닌 왕세자가 왜왕을 「후왕(侯王)」이라 부르며, “이 칼을 길이 후세에 전해 보여라”라고 명령하였다. 백제가 왜를 지배한 명명백백한 물증이다. 그뿐만 아니다. 8세기의 황궁 내에는 백제 신을 모시는 「한신사(韓神社)」가 있었다. 한편 천황 재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대상제 하루 전날 열리는 진혼제의 신악(神樂)에서는 「 …… 나 한신(韓神)은 한(韓)을 불러 모시노라! 한을 불러, 한을 불러 모시노라 ! 」라고 백제 신의 강림을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4. 백제 멸망 이전까지의 왜국은 정상적인 고대국가가 아니었다. 기본적 법률인 율령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여 준다. 백제가 멸망하자, 그제야 왜왕 천지를 필두로 한 지배층에서는 율령과 관위, 관제, 호적, 교육기관 등 정상적인 고대국가 형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맹렬한 속도로 진행하였다. 백제나 고구려, 신라에서는 수백 년 전에 완비되었던 이러한 기초작업이, 왜국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국호 왜국」도 「일본」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는 백제를 의미하는 미칭이었다. 속국 혹은 식민지 왜국이, 백제 멸망 이후 비로소 독립국 일본으로 새 출발 하였던 것이다.
5. 최근 일본에서는 『일본서기』를 믿지 않고, 백제와 왜는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근세 일제강점기 일본과 조선이 교류하였다고 강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백제인이었다. 왜국에는 곳곳에 무수한 백제풍의 지명이 있었고, 인명도 대부분 백제풍이었다. 건축이나 미술, 음악, 의복, 등 모든 부문에서 백제풍 일색이었으며, 일본어에도 무수한 백제어가 스며들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을 위시한 일본인들이 지배층이었고, 일본풍 문물이 대유행하였으며, 언어에도 무수한 일본어가 침투한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현상이다.
1. 일본의 천황가는 특이하게도 이름만 있고, 성은 없는 가문이다. 8세기부터 시작된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의 문명국에서는 유일무이한 특이한 사례일 것이다. 성을 밝히면 출신 내력이 드러나게 된다. 천황가에서는 자신의 뿌리를 꼭꼭 감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 천황가는 백제의 부여씨였다. 백제 멸망 무렵의 왜왕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이었고, 그가 백제로 돌아간 이후에는 두 아들인 천지(天智)와 천무(天武)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숨기기 위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시조인 신무부터 37대 제명에 이르기까지, 무려 37명이나 되는 허구의 왜왕을 창작하였다.
2.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는 왜의 속국이었다. 그런데 속국인 백제의 왕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여러 차례 왜국으로 건너가 수년 혹은 수십 년, 장기간 체류한 것으로 되어있다. 반대로 종주국인 왜국의 왕자가 백제를 방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왜 일방적으로 백제 왕자들만 끊임없이 도왜하였을까? 사실은 백제 왕자들은 도왜하여 왜왕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려 30년간 왜국에 체재하였던 왕자 부여풍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인질」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5천여 대군을 호위병으로 거느리고 귀국하였다. 그 후 백강구 전투에서는 왜 전함에 올라타 2만 7천여 왜군을 총지휘하였으며, 그를 보좌한 것은 숙부인 충승과 충지였다. 그는 인질이 아니라 왜왕이었던 것이 명명백백하다. 『일본서기』를 엮은 사람도 백제의 후예였기에, 백제가 왜국을 통치한 역사의 진실이 깡그리 사라지는 사태는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인질」이나 「조공」 등으로 위장하여, 백제 왕자들이 도왜한 사실을 은밀한 암호처럼 전해주고 있다. 천황가 선조인 천조대신의 원래 고향이라는 고천원(高天原)이 백제의 암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3. 대대로 즉위식의 핵심은 삼종신기(칼, 거울, 곱은 옥)를 새 천황에게 전달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칼은 백제 대왕의 하사품이었다. 칼의 이름 「삼공(三公)전투검」과 「장군검」. 백제의 대왕에게 있어서 왜왕이라는 존재는 「삼공」과 「장군」이었던 것이다. 칠지도에서는 백제의 왕도 아닌 왕세자가 왜왕을 「후왕(侯王)」이라 부르며, “이 칼을 길이 후세에 전해 보여라”라고 명령하였다. 백제가 왜를 지배한 명명백백한 물증이다. 그뿐만 아니다. 8세기의 황궁 내에는 백제 신을 모시는 「한신사(韓神社)」가 있었다. 한편 천황 재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대상제 하루 전날 열리는 진혼제의 신악(神樂)에서는 「 …… 나 한신(韓神)은 한(韓)을 불러 모시노라! 한을 불러, 한을 불러 모시노라 ! 」라고 백제 신의 강림을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4. 백제 멸망 이전까지의 왜국은 정상적인 고대국가가 아니었다. 기본적 법률인 율령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여 준다. 백제가 멸망하자, 그제야 왜왕 천지를 필두로 한 지배층에서는 율령과 관위, 관제, 호적, 교육기관 등 정상적인 고대국가 형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맹렬한 속도로 진행하였다. 백제나 고구려, 신라에서는 수백 년 전에 완비되었던 이러한 기초작업이, 왜국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국호 왜국」도 「일본」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는 백제를 의미하는 미칭이었다. 속국 혹은 식민지 왜국이, 백제 멸망 이후 비로소 독립국 일본으로 새 출발 하였던 것이다.
5. 최근 일본에서는 『일본서기』를 믿지 않고, 백제와 왜는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근세 일제강점기 일본과 조선이 교류하였다고 강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백제인이었다. 왜국에는 곳곳에 무수한 백제풍의 지명이 있었고, 인명도 대부분 백제풍이었다. 건축이나 미술, 음악, 의복, 등 모든 부문에서 백제풍 일색이었으며, 일본어에도 무수한 백제어가 스며들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을 위시한 일본인들이 지배층이었고, 일본풍 문물이 대유행하였으며, 언어에도 무수한 일본어가 침투한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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