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소크라데스 / 학자 정보
출생 기원전 470/469년 경 / 사망 기원전 399년/400년 ? / 종교 그리스 다신교 / 시대 고대 그리스 / 학파 고대 그리스 철학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Socrates,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 와 '젊은 세대들을 타락시킨 죄' 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을 당했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생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석공소를 운영한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 초기에는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고, 청년에서 40세까지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원로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졌다며 자신 대신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흔히 소크라테스라 하면 악법도 법이다 라며 담담히 사약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가 후에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하나인, 에우렐이 말년에 작성한 파타모닐리아에 묘사한 내용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약을 몇 번이고 뒤엎어서 결국 마지막에 간수장이 간수들을 시켜 억지로 사약을 먹여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사상
고대 그리스 철학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를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찾았던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일종의 심연의 의식이다. 불가의 참나, 도교의 원신 등과 일맥상통 한다. 다이몬이 영어로 데몬이 되었고, 이것은 악마를 뜻하게 됐다. 이는 모든 이교도 학자, 신비주의자 일체를 이단으로 여긴 후대의 기독교도들에 의해서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도덕론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한 개인윤리 타락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 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론은 그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후 '스토아학파'에 의해 계승됐으며, 기독교의 윤리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기독교 윤리관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혼 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만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 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
변론과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및 파이돈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기에 이는 진의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산파술 / 문답법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知)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미적 범주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적어도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책소개
이 책에서는 해당 텍스트와 직접 관련된 번역?주석서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참고문헌을 활용해 풍부한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일반 독자의 이해 수준에 맞추고 아울러 크세노폰의 연구 입문자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수준의 주석들이므로 크세노폰 연구의 초석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목차
1권
2권
3권
4권
옮긴이 해제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그러나 철학자 스펜서가 지적했다시피 고대 그리스 문명을 되살렸다고 하는 근대 서양의 르네상스 시기에 인문학자들이 소크라테스와 관련해 주로 참고한 책은 플라톤이 아니라 크세노폰의 책이었다고 한다. 또한 20세기에도 크세노폰의 책들은 고대그리스어의 초급 강독 교재로 많이 채택되어 왔다. 따라서 서양에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세우는 데는 플라톤보다는 오히려 크세노폰이 더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또한 그리스 고전기의 쇠퇴 후 이어진 헬레니즘 시기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해도 주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을 통해 얻어졌다. 특히 소크라테스를 자신들의 이상형으로 꼽는 스토아 학파의 소크라테스 이해는 바로 크세노폰의 책으로부터 얻어졌다.
다른 한편 한 사람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보고와 이해는 상당 부분 일치하면서도 또 상당 부분 다르다. 같은 부분은 당연히 동일한 인물에 대한 보고이기 때문이지만, 다른 부분은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언행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끈질기게 천착하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반면, 크세노폰은 군인이자 역사가로서 또 전통적인 지자(智者)를 지향하는 인물의 시각을 가지고 소크라테스를 본다. 따라서 그에게 비친 소크라테스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고 도덕적 원칙과 신의 명령에 따르는 도덕군자이며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적극적인 실천가였다.
어차피 한 인물에 대한 보고와 평가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좌우될 수밖에 없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재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인물에 대한 다양한 보고를 참고하여 입체적인 상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플라톤 연구만 이루어지고,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아 일방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만 부각되는 형편이다.
이런 이유로 크세노폰의 저작 번역과 그에 따른 학술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서양 학문과 문화 발전에 소크라테스를 전후로 한 아테네 고전기가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지금 현재에도 그 당시에 대한 연구는 역사, 문화, 철학 등 인문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을 낳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시에 대한 다양한 보고 경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입체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서는 고전의 세계를 오늘의 현실에 현장감 있게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 연구에 대한 반대편 날개로 기능하기 위해서라도 고전기 아테네의 쇠퇴기를 목격한 크세노폰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대한 크세노폰의 보고는 여러 책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러 책 중에서도 『소크라테스 회상』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혀 왔다. 크세노폰의 『향연』이나 『소크라테스의 변론』 등은 플라톤의 저술을 참고해서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비해, 이 책은 생전에 소크라테스와 교류했던 크세노폰의 기억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에 접근할 수 있는 책이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이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를 균형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해당 텍스트와 직접 관련된 번역?주석서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참고문헌을 활용해 풍부한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일반 독자의 이해 수준에 맞추고 아울러 크세노폰의 연구 입문자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수준의 주석들이므로 크세노폰 연구의 초석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1157?category=842291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이 책은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애는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를 가리켜 성인이라고 하며 가장 참된 철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들려준다. 또한 이 책의 전편에 흐르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이성적이고 주체적이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참다운 용기를 배우고, 인간의 양심과 자유를 지킨 그의 인간성을 통해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목차
변명
파이돈
향연
작품 해설
저자 소개
그러므로 나에게 불명예스럽고 불경스러우며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도록 요구하지 마십시오. 특히 멜레토스의 고발에 따라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로 재판을 받는 지금은 - 왜냐하면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만일 내가 설득과 애원으로 여러분의 맹세를 깨뜨리게 한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신들이 없다고 믿으라고 가르친 것이 되고, 따라서 변명을 하면서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고소를 단지 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나를 고발한 사람들이 신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신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나 나를 위해서 최선의 것이 되도록 재판해 줄 것을 여러분과 신에게 맡깁니다.
출판사 리뷰
언젠가 인류가 모두 착하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날,
나를 대신해서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다오.”
용기란 무엇이며,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毒杯)와
빚진 닭 한 마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책으이다. 제자 플라톤이 스승의 위대한 사상과 진실된 인간성을 널리 알리고 영원히 기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 외에 「크리톤」, 「파이돈」, 「향연」을 함께 엮었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애는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를 가리켜 성인이라고 하며 가장 참된 철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들려준다. 또한 이 책의 전편에 흐르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이성적이고 주체적이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참다운 용기를 배우고, 인간의 양심과 자유를 지킨 그의 인간성을 통해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 속
‘빚진 닭 한 마리’가 알려주는 지성인의 의무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나오는 닭 한 마리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헌납하라고 했다는 설, 둘째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실제 인물이 있었다는 설, 셋째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순전한 농담이었다는 설이다.
이 중 가장 유의미한 해석은 첫째 해석이다. 아테네에는 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임종의 자리에 있었던 만큼 쾌유에 대한 감사로 닭을 바칠 처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굳이 마지막 순간에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사실에는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병을 고치려다가 독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인간의 병은 고쳐져야 하는 것, 언젠가 인류가 모두 착하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나를 대신해서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다오” 하는 절실한 의미가 깃들어 있던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닭 한 마리의 뜻을 이렇게 풀이하면 ‘닭 한 마리의 의미’에서 우리는 지성인의 기본자세 또는 역할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정신적 쾌유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지성인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인간 양심의 등에’가 되는 것이 지성인의 참된 자세임을 보여준 것이 소크라테스를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한 으뜸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소피스트와 구별하고 필로소포스, 즉 애지자(愛知者)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리라. 그는 지식을 호구의 방편으로 삼는 지식상(知識商)이 아니라 참된 슬기를 깨우치고 깨우쳐주며 밝은 인류의 양심을 바탕으로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했다.
용기가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용기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뜻깊은 일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안중근 의사와 같은 위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中庸)이 용기라고 했다. 그러므로 크든 작든 위기를 맞이하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용기이며 용기 없이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물론 용기가 모든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용기 없이는 위기에 끝까지 대항하지 못한다.
위대한 용기를 실증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드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신이 아테네로 보낸 아테네의 등에이며 ‘걸어 다니는 아테네의 양심’이었다. 그가 『변명』 에서 말한 것처럼, 아테네는 거대하고 기품 있는 군마(軍馬) 같으나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해서 이를 각성시키는 등에가 필요하고, 그 등에가 바로 자기라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타락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테네를 ‘세계의 중심’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의 지배적인 풍조에 비판적이었다. 아테네를 구제해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은 허위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참된 용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그가 그토록 부정한 아테네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라는 부당한 판결에 복종하였을까. 아테네의 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의 세태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음에도 왜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권력의 힘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것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했다는 사실이다. 용기 있고 철저한 부정 정신의 소유자이던 소크라테스가 태연히 독배를 마심으로써 그런 현실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용기의 또 한 측면, 즉 부당한 현실조차 인정하며 자신이 최후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선택한 소크라테스의 용기를 보여준다. 이 같은 용기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위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소크라테스에게 배워야 할 것은 결단하는 용기와
미래를 설계하는 모험하는 정신
용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며, 결단은 용기의 구체적 내용과 같다. 수 세기 동안 소크라테스의 용기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결단은 통해서 우리는 미래를 선취한다. 우리의 선택은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즉 결단은 모험이다. 여기에는 얼마나 정확하고 합리적인 현실 분석이 수행되었는가, 현실이 갖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미래는 공상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 난점이 따른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영원히 떠맡을 수밖에 없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선택한 것이 그 국가에 남기는 결과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면 결단의 무서움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결단은 진정한 용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비겁한 자는 결단을 회피할 것이며 만용밖에 모르는 자는 결단하기 전에 행동부터 시작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성실을 다 기울였다는 자신, 자신의 선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는 신념, 그것이 인류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용기 없는 자라면 이러한 결단에 도달하기 어렵고,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도피라는 안이한 처세술을 택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소크라테스에게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을 분석하며 미래를 만드는 진정한 용기의 구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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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소크라테스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을 극화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
기원전 399년 그리스 아테나이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다. 그리고 수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아직도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수 세기 전의 소크라테스가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플라톤의 대화편 중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이 출간되었다. 마리북스의 ‘원전 완역본으로 읽는 고전 시리즈, 마리 교양’의 첫 번째 책이다. 기원전 5세기경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고발을 당해 아테나이 시민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폴리스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으며 새로운 다른 신적 존재들을 믿으며 죄를 짓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 재판으로 결국 소크라테스는 70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은 바로 이 사건과 당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펼쳤던 변론을 극화한 대화편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체로 두 대화편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라고 간주한다. 소크라테스가 사망하고 나서 여러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을 저술했지만,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저술한 대화편이다. 가히 소크라테스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나이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죄목을 반박하며 스스로를 변론하는 내용으로, 크게 세 파트로 구성이 되어 있다. 고발인들의 고발 연설에 반박하는 첫 번째 변론, 1차 배심원 투표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자신의 형량을 제안하는 두 번째 변론, 사형선고를 받고 배심원들에게 하는 최후진술이다. 대부분의 한국어판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을 다룬 만큼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 제목을 정했다. 크세노폰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의 회상』을 이유로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냐는 논란은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성찰 혹은 진리에 대한 탐구를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으며,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선고가 부당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관하여, 윤리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크리톤』은 친구 크리톤의 ‘탈옥 권유 논변’과 이에 맞서는 소크라테스의 ‘탈옥 권유 반박 논변’을 담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상상으로 나누는 ‘법률과의 대화’는 지금 우리에게도 가슴을 울리는 바가 크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에 임박해 친구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서 탈옥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행위 준칙’을 바탕으로 탈옥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원칙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는다’는 행위 준칙을 이제 와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크리톤에게도 아테나이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탈옥하는 일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함께 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
목차
주요 사건과 배경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해제
《크리톤》 해제
역자 후기
참고 문헌
---「22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폴리스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으며 새로운 다른 신적 존재들을 믿음으로써 죄를 짓고 있다.”
---「41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돈에서 탁월함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탁월함에서 돈과 사람들에게 좋은 다른 모든 것들이 생겨납니다. 사적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말입니다.”
---「61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저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한 바 없다고 확신하고 있으므로, 저 자신에게 불의를 행하지도 않겠습니다. 또한 저 자신이 뭔가 나쁜 일을 당할 만하다고 스스로를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에게 그러한 처벌을 제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82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이런 임시방편적 모면은 아주 강력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반면 가장 훌륭하고 쉬운 길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대신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91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죽음을 모면하는 것보다 악을 피하는 게 훨씬 어렵습니다. 악은 죽음보다 빨리 달리니까요. 지금 저는 느리고 연로하기에, 느린 주자에게 따라잡혔습니다. 반면에 저를 고발한 자들은 유능하고 기민하지만 발 빠른 주자, 즉 악에게 붙잡혔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떠납니다. 반면 이 사람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사악함과 불의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저는 저의 처벌을 감수할 것이고, 이들 또한 자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합니다.”
---「91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이제 벌써 떠날 시간입니다. 저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나은 운명으로 나아가게 될는지는 신 외에는 그 누구도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98쪽,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설령 불의를 당할 경우에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불의로 갚아서는 안 되네. 왜냐하면 결코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124쪽, 크리톤」중에서
이렇게 하는 게 정의로운 것이네. 즉, 항복하거나 물러나거나 자기 위치를 떠나지 않고 전쟁터에서든 법정에서든 그 어디에서나 폴리스와 조국이 명하는 바를 이행해야 하는 거라네.
---「131쪽, 크리톤」중에서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 원하는 자, 즉 시민의 지위에 도달했고 폴리스 사안들과 우리의 -즉, 법률의-집행을 지켜본 자는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경우에 자기 소유물을 가지고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
---「132쪽, 크리톤」중에서
그러면 오, 크리톤이여! 내버려두세. 그리고 신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니, 이대로 행하기로 하세.
출판사 리뷰
도대체 무엇이 옳은 일이고 시민들에게 유익한 일인가?
‘나는 모른다’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모른다’로 끝맺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앎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여정임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검토하도록 이끌고 있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무지를 밝히려고 애썼던 것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없다’라는 이 신탁의 참뜻을 알기 위해 지혜자들을 만나 그들이 진짜 올바른 앎을 가지고 있는지 검토하고 확인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크라테스는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을 무지와 편견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내가 이 사람보다는 지혜롭구나. 아마도 우리 중 누구도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런데 이 사람은 알지 못하면서도 자 신이 뭔가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비록 작 은 차이이지만 나는 적어도 이 점에서 저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듯하다. 알지 못하는 바를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이런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자는 후기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원했던 바는 ‘어떤 행동을 해야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무슨 말을 해야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 일이고 시민들에게 유익한 일인가?’였다.”
“우리는 목전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탐욕의 시대, 불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법정 변론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으로 읽는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
국립아테네대학교 철학박사 오유석 교수의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쉬운 번역과 작품 해제로 생생한 현장 재현
이 책의 번역은 국립아테네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오유석 교수가 맡았다. 그는 고대 서양철학을 다룬 여러 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출간한 정통파 고대 서양철학 연구자로 ‘고대 그리스어 원전’을 완역했다.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지금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번역했다. 그동안 여러 번역본이 출간되었지만 대부분 중역이거나 가독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 현장과 그가 탈옥 대신 죽음을 택한 경위가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명과 지명 또한 고대 그리스어 발음에 충실하게 표기했다. 가령, 외래어표기법상 ‘Αθηναι’는 관용에 따라 ‘아테네’로 표기하지만, 고대 그리스어 발음인 ‘아테나이Athenai’로 표기했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시대적 배경이 고대의 법정 변론이기에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전한다.
본문 바깥에 표기된 아라비아숫자와 로마자는 ‘스테파누스 표기’에 따른 것이다. 스테파누스가 1578년에 플라톤 전집을 세 권으로 편집하여 발행했는데, 이때 세로 단을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로마자를 써놓았다. 플라톤 저서의 인용은 스테파누스 판에 들어간 쪽수와 판본의 단락을 함께 적어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스테파누스 판본의 1권 17a~42a에,《크리톤》은 43a~54e에 수록되어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작품 해제와 각주도 꼼꼼히 달았고, 본문의 내용과 어울리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비롯한 그림도 수록되어 볼거리를 선사한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970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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