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동북아역사 [역사지식여행]/3.중국근대사 (1913~1945)

[웹북] 양무운동 (1861~1895) - 청말기

동방박사님 2024. 9. 2.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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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

 

나라 말기의 근대식 조선소 복주선정국 ( 福州船政局).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는 열강의 침략적인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등으로 여지없이 약체를 드러냈으며,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국번, 이홍장 등 한족 출신 관료들이 근대적인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한편, 장지동, 성선회 등은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에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군수 공업의 육성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지만, 1870년대 이후에는 광공업이나 교육 등 다른 부문까지 근대적 개혁이 확산되었다. 이로써 청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 사회에 근대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안팎의 여러 장애에 부닥쳐 제한된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가장 커다란 한계는 전국적 차원에서 통일된 계획 아래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무파는 중앙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사중심의 근대화에 너무 치중했을 뿐, 사회, 정치 체제의 근대화는 무시되었다. 그 결과, 때마침 일어난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어 그 약체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구체제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의 지도자에게 물려주었다.


양무운동과 양무파 관료의 성격

청조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양의 군사적 위력을 알게되었고, 더욱이 내부에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안팎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부국''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의 근대 산업을 일으켜 난국을 타개하려는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내걸고 목종(穆宗) 동치제(同治帝)가 즉위한 동치 연간(1861~1874)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한다. 이 운동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소급된다. , 아편전쟁에 참패하였을 때 이미 위원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저술하고 그 서문에서 서양의 장기(長技)를 배워 서양을 제압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이 청조의 고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시기는 1861년의 신유정변으로 서태후와 공친왕 혁흔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면서 청일전쟁(1894)으로 일본에 패할 때까지의 약 30년 동안을 말한다. 이 시기 청은 서구 열강에 대적할만한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낡은 제도와 전통,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개혁하지 않아 청불전쟁(淸佛戰爭)과 청일 전쟁(淸日戰爭)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860년의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으로 함풍제는 열하(熱河)로 도망쳤으며, 연합군은 청조의 위신을 짓밟기 위해 원명원을 불태워 버렸다. 아편전쟁 이후 청조의 위기는 그 절정에 이르고 황제의 명을 받아 사태수습에 나선 공친왕은 연합군의 요구를 거의 받아들여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한편 함풍제는 열하에서 병사하고 6살에 동치제가 즉위했다. 이 무렵 궁정내부에 '신유정변'이 발생하여 서태후가 섭정을 하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의정왕(議政王)과 군기대신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1861년 청조는 구미열강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할 총리아문을 설치하였다. 총리아문은 단순한 외교문제만을 취급하지 않고 통상을 포함하여 무기의 구입까지 서양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군기처와의 관계는 명문규정은 없으나 군기대신이 총리아문의 장관인 총서대신을 겸하여 군기처의 분국(分國)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신정권의 권력핵심에 해당하였다. 유럽 열강은 이 같은 타협적인 서태후와 공친왕 정권에 대하여 협조정책을 취하고 청조와 태평천국군에 대해 취하던 중립적 자세를 버리고 청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제공하면서 근대적 산업기술과 자본협력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대외관계를 수습한 청조의 관료들은 서구의 근대적 무기를 이용하여 태평천국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영국으로부터 군함의 도입과 영국식 군사훈련을 계획하였고, 군기대신 문상은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은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였다.

특히 양무운동은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을 이끌고 태평천국을 진압한 증국번과 이홍장 그리고 좌종당 등 지방에 있는 한족 관료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권력의 핵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의 추진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양무운동시기의 권력의 중심은 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친왕은 신설된 총리아문의 장관으로 구미외교를 전담하여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이었다. 그는 군기처내에서 문상 등 일부 관료의 지지를 얻었으나 반대파의 견제를 받았으며 청불전쟁의 발발(1884)과 함께 탄핵을 받아 사임하게 되었다.

양무운동 추진세력은 보수적 관료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치군사적 실력을 인정받아 적극적인 양무운동을 추진세력으로 발탁되었다. 증국번은 호남성출신의 학자로 상군을 조직하여 엄격한 훈련과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여 태평천국 진압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는 양광총독과 흠차대신에 1860년 임명된 후 1872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정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초기 양무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좌종당도 호남성 출신으로 태평천국의 진압에 공을 세웠고 1881, 1884년 두차례 군기대신으로 발탁되어 군수공장을 건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양무운동의 대표자 이홍장은 증국번의 막우(幕友)로 발탁된 후 회군을 조직하고 상하이 지방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는 증국번의 뒤를이어 1870년 직례총독에 임명되어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사임할때까지 직례총독과 북양통상대신에 재직하면서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청나라 말기 외교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큰 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고 한다.

양무운동의 내용

난징에 세워진 금릉기기국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이 의미하듯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군수시설을 받아들여 청나라의 '자강'을 꾀하려는 부국강병 운동으로 그 내용은 무기와 장비, 군사시설에 집중되어 있다.

1863년 이홍장은 총, 탄약, 대포, 화약등 신식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 상해(上海, 상하이)에는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남경(南京, 난징)에는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이라는 근대식 무기 공장들을 세웠다. 좌종당은 복주(福州, 푸저우)1866년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이라는 근대식 조선소를 세워 근대식 군함을 제작하였고, 1867년 심보정이 복건선정대신(福建船政大臣)에 임명된다. 그리고 만주족 귀족 출신으로 '북양삼국통상대신'으로 있던 숭후는 천진(天津, 톈진)에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이라는 근대식 무기 공장을 세워 화약과 포탄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4대 공장이 설립된 이후 각 지방에 총 24개의 군수공장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서 생산된 무기는 총, 탄약류가 대부분이지만 품질은 우수하지 못하였다. 이들 공장은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서양인 기사에 의하여 공장이 운영되었으며 중국인 관료에 대한 막대한 인건비 지출로 경영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 공장이 필요로 하는 석탄과 철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채광 시설을 갖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또 공장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번역관과 교육 기관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이 번역 보급되면서, 기술 인력이 양성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1874년 일본의 모란사 사건을 계기로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심보정은 남양 해군을 창설하여 근대적 해군을 육성하고자 계획하였으며, 이홍장 등은 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1884년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의 3대 함대를 창설했다. 함대는 중국에서 건조한 배도 있었으나 주력함은 주로 영국,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이들 해군은 회군파와 상군파로 나뉘어 통일적인 지휘계통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1884년에 터진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궤멸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밖에 유능한 지휘관 양성을 위해 톈진에 '수사학당'(水師學堂)(1880)과 무비학당(武備學堂)(1885)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서양식 군사학을 교육하였다.

또 외교관 양성을 위해 장지동은 총리아문에 동문관(同文館)1867년 설치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증국번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시켰고, 이홍장은 독일, 영국, 미국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어 군사와 무기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동문관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활동은 마건충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재들이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

외국자본주의의 중국진출에 대항하여 양무파는 민족자본과 민간기업의 양성에 힘을 쏟아 '반관반민'(半官半民)'관독상판'(官督商辦)의 새로운 기업을 육성해 나갔다. 또한 이홍장은 중국의 해운업을 독점하고 있던 외국기선회사와 경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기선 회사인 '윤선초상국'1872년 창립하였다. 1890년대초까지 타이완에 기융(基隆) 탄광, 직례성에 개평(開平) 탄광, 헤이룽장성에 막하(幕河) 금광, 후베이성에 대야(大冶)철광을 열었고 방직공장도 각지에 건설하였다. 1881년에는 중국최초의 철도가 당산(唐山)과 서각장(胥各莊)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거액의 국가 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매판자본가, 대상(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官物), 관용(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뒷날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양무운동의 한계성을 드러내게 된다.

양무운동의 역사적 성격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들은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인식하고 기존의 중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체서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양무운동의 추진 주체는 봉건관료 또는 매판관료세력이지만 그들은 청조의 전통적 관료와는 달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지방관료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조의 통치조직을 재건하여 봉건왕조의 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주된 개혁목표를 두었고 이것은 양무운동의 최대 한계점으로 작용된다.

그런데, 양무파 관리들은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정부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진보적 관료를 제외하면 여전히 보수적,수구적 관료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서태후의 섭정은 양무운동의 성패보다는 이 운동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어떤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서 정책추진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졌다. 이는 결국양무운동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이 지방에 뿌리를 두고 지역적 차원에서 이 운동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바뀔 때마다 중단되기도 하고 지방관이 임지를 옮길 때 시설을 새로운 임지로 이전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특히 양무기업 자체가 중요한 자금원이기 때문에 기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양무운동은 이렇게 정책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중앙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지도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한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크게 패함으로써 양무운동의 한계성과 관료들의 부패함이 드러나버리게 된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하고,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독특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치 구조와 통치 방식은 근대에 만들어졌다. 마지막 왕조 국가였던 청나라 정치 체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공화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민국 시기에 고안되고 시도되었던 국가 체제의 장점을 취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현대 중국을 이해하려면 중국 근대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중국 근대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중국 근대사에 일어난 주요 사건과 정치 구조의 변화에 주목하여, 방대한 역사의 핵심을 담아냈다. 청영아편전쟁, 신유정변, 양무운동, 신해혁명 등 청나라 시기의 주요 사건들과 위안스카이의 등장, 베이징 정부를 둘러싼 권력 투쟁, 중일전쟁과 소련의 외교 전략 등 중화민국 시기의 역사적 상황들을 살펴보며, 현대 중국 체제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목차

머리말

1부 만주인의 청나라

1장 만주인의 중국 정복
여진인이라는 낙인 / 만주인 선언 / 눈부신 승리
2장 청나라 특색의 왕조 체제
팔기 우대 / 만한병용 / 이번원
3장 통합과 번영의 시대
정치의 안정 / 영토의 팽창 / 번영의 그늘
4장 청나라 중심의 천하
만주인의 세계 / 학문의 독점 / 천하 밖의 사람들

2부 왕조 체제의 균열

1장 제국의 충돌
조공 질서와 자유 무역 / 무역 갈등과 아편 밀매
청영아편전쟁 / 새로운 질서
2장 내우와 외환
인구 증가와 생존 갈등 / 태평천국 / 영프 연합군
3장 정변과 양무
신유정변 / 정치 구조의 변화 / 양무운동
4장 내정과 외교
갑신역추 / 청프전쟁 / 청일전쟁
5장 경세와 개항
경세제민 / 조약 체제 / 외국 문물

3부 청말민초의 격랑

1장 황제와 태후
무술변법 / 의화단 사건 / 신정
2장 혁명의 여정
입헌운동 / 혁명운동 / 신해혁명
3장 민국의 혼돈
정국 불안 / 제2혁명과 제3혁명 / 남북 대립
4장 시민과 군벌
5·4운동 / 중국공산당 / 군벌 전쟁
5장 민국과 세계
신구 갈등 / 비밀 결사 / 국제 관계

4부 국민당의 중국 통치

1장 국민당의 승리
국민당 개조 / 국민혁명 / 국민정부
2장 안내와 양외
위초 작전 / 만주사변 / 중일전쟁
3장 종전과 내전
일본의 패퇴 / 국공협상 / 국공내전
4장 독재와 혁명
독재 정치 / 전시 체제/ 농촌혁명

맺음말 : 중국공산당, 신중국, 인민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영옥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청나라 이후 중국의 정치 구조가 변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견제받는 권력』이 있고, 공저로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북방민족과 중원왕조의 민족인식』, 『한중 외교관계와 조공 책봉』이 있다. 번역서로 『타인들 사이의 중국인』, 『근대 만주와 대한제국』, 『중국의...

책 속으로

건륭 시대 군기대신들 가운데 만주인, 몽골 팔기, 한군 팔기, 한인 등의 점유율을 산출해보면, 군기처를 누가 주도했는지 명확해진다. 건륭 시대 동안 군기처에서 한인의 비율이 높았던 때는 60년 중 6년뿐인데, 넓게 보아 몽골 팔기를 만주인으로 포함할 경우 단 3년만 한인이 군기처에서 간신히 과반을 넘었다.
만주인 군기대신이 항상 과반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만주인의 이익과 의사가 관철되는 구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륭 시대에 진행되었던 대외 원정이 실제로 그다지 큰 경제적 이익이 없었음에도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위신을 높이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었는데, 대외 원정이라는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사안이 내부의 반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군기처의 인적 구성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군기처의 만주인 대 한인 비율을 통해 만한병용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육부가 상층에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청나라가 내세운 만한병용의 실제 모습은 핵심 정책 결정 기구를 통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 건륭 시대까지 만한병용은 사실 한인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였고, 만주인은 사실상 모든 중요한 정책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 특색의 왕조 체제」중에서

청영아편전쟁의 패배로 만주인들이 세운 청나라 중심의 천하에 흠집이 생겼고, 청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외부 세계를 바라보던 질서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분명히 청영아편전쟁은 이미 만들어진 청나라의 천하가 더 큰 세계 질서 속에서 변화되는 전환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청나라 사람에게 전혀 다른 세계가 등장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미 형성된 청나라의 천하가 변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질서는 사람들의 발에 맞는 신발과 같았다. 사람들은 신고 있는 신발이 해져서 더는 신을 수 없게 되었거나, 어떤 신발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새 신발을 사게 마련이다.
청나라가 외세와 대적하기 위해 강력한 화력을 가진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도입하거나 군대를 개혁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기 도입과 군대 개혁은 팔기 제도라는 청나라의 근간에 대한 변혁을 의미했고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 가경 시대 이후 청나라의 재정은 좋지 않아서 황제들도 근검을 외치고 있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급하고 전쟁으로 재정이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군사 개혁 문제는 현안으로 대두되지도 않았다.하지만 외부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움직임도 있었다. ---「제국의 충돌」중에서

자희태후를 중심으로 한 청나라 조정은 열강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의화단의 과격한 행위를 묵인했고, 상황을 오판했으며, 왕조의 위기를 자초했다. 신축조약 이후에는 신정을 통해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신정은 지방의 중앙에 대한 신뢰와 지지보다는 불신과 이반을 더욱 부추겼다. 지방의 총독과 순무는 중앙의 무리한 요구에 불만을 가졌고, 향신들은 중앙 조정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청나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다소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한편 이미 청일전쟁 패배 이후부터 청나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시도했던 세력들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여정」중에서

1915년 8월,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안회가 출범했다. 주안회는 중국에 민주공화정을 실시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고, 일본도 입헌군주제를 통해 강대국이 되었다고 선전했다. 주안회를 비롯한 여러 관변 단체들은 입법원에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부활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제제운동을 전개했다. 그 단체들은 황제가 부활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구할 수도 중국을 지킬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세 차례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했다. 10월이 되자, 청원 단체들을 중심으로 국민대표대회가 구성되었다. 12월에는 국민대표대회의 국민대표 1993명이 입헌군주제 실시에 찬반을 묻는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단 한 표의 반대도 없이 만장일치로 입헌군주제 안건이 통과되었다.
한편 베이징에서 왕조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조직되고 있었다. 국민당은 제2혁명이 실패한 뒤에 와해되었고, 쑨원이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결성했다. 쑨원은 민주공화제를 강령으로 하여 위안스카이 토벌 계획을 세웠고, 중국 안에도 중화혁명당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중화혁명당의 위안스카이 토벌은 황제의 부활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면서 활기를 띠었다.
1916년 1월 1일, 위안스카이는 황제 즉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중화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중화민국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황제가 다시 등장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바란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이미 전국에서 황제의 부활을 반대하며 민주공화정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전국적인 항의에도 위안스카이가 미동도 하지 않자, 제3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1915년 12월, 차이어는 윈난성에서 호국군을 조직하고 성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 뒤를 이어 구이저우성이 독립을 선언했고, 이듬해에도 광시성을 시작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곳들이 늘어났으며, 독립을 선언하지 않은 성의 도독들도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제도의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3월에 다시 중화제국을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회복했다. 그렇지만 1916년 5월까지 열 개 성이 중앙으로부터 독립했고,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전국에서 사퇴 요구가 계속되었고, 6월 여름 더위가 시작되자 위안스카이는 실의 속에서 요독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민국의 혼돈」중에서

형식적으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협력에는 세 축이 있었다. 쑨원, 코민테른(소련), 중국공산당원들이 그것이다. 쑨원은 국민당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둥에서 쫓겨난 뒤에 정치에서 완전히 잊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는 혁명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제국주의의 포위로부터 자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원은 1922년 현재 195명에 불과한 상태였고 당을 지켜내고 당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의 지원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협력은 쑨원과 코민테른이 주도했고, 공산당원들의 생각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양당의 협력에 대한 국민당 내부의 반대는 쑨원의 권위에 의해, 공산당 내부의 반대는 코민테른의 압박에 의해 무마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당의 협력에서 쑨원이 가진 역할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는데, 이 점은 역설적으로 양당의 협력에서 취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창당했고 공산당원들은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랐지만, 내부의 반발이 잠복된 상태였다. 한편 코민테른(소련)은 카라한 선언을 통해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마음을 얻었고, 나중에는 말을 바꿔서 러시아의 이권을 계속 보유했으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과 연대하여 중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양당의 협력에 대해 국민당은 개조라고 여겼고, 중국공산당은 합작(제1차 국공합작)이라고 여겼다.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국민당이 공산당을 흡수한 것이니 개조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국민당의 승리」중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도 중국공산당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농촌 지역은 전체 중국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중국공산당은 폭넓은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려면 공산당 외의 정파나 계급의 도움이 필요했다. 해방구에서 적용된 3·3제의 원칙은 중국공산당이 처한 현실과 당시의 위상을 잘 보여주었다. 3·3제란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민족주의 성향의 소자산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산당 계열의 좌파, 중산층과 신사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파 등이 해방구 권력 기구에서 각각 3분의 1의 자리를 분점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옌안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차츰 세력을 키워 나갔다. 1941년, 옌안에서는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다. 정풍운동의 목표는 1937년 이후 혁명에 참여한 당원들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주관주의·종파주의·형식주의(당팔고) 등을 뿌리 뽑음으로써 옌안의 기풍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937년에서 1941년 사이에 군대 규모가 40만 명, 당원은 80만 명으로 늘어난 상황이었으므로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여겼다. 새로운 구성원의 대다수는 중국 북부의 성들에서 온 농민이었고, 소수는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열정을 지닌 학생과 지식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3·3제라는 형식의 통일전선전술을 통해 농촌 지역에서 영향력을 계속 확대했고,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향식 지도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농민들은 중국공산당이제시하는 희망에 찬 미래를 동경하게 되었다. 통일전선전술을 통한 지지층의 확대, 토지 개혁을 통한 경제 문제의 해결, 외부 침략자들로부터의 안전 보장 등이 점점 더 중국 북부와 중부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존재감을 높여주었다. 1945년 봄에는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있는 주민이 9500만 명이었고, 정예군이 100만 명에 달했다. 군인 수는 1937년보다 20배나 증가한 것이었고, 농민 병사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았다.
1948년 봄, 중국공산당은 농촌혁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내전에서도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농촌에서 생겨난 혁명의 열기를 도시로 확산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동북 지역에서 선양과 하얼빈이 중국공산당의 손에 들어오자, 당의 주도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노동자들이 조직되었다. 노동조합은 홍군이 점령하는 도시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냈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다만 이때부터 중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에 의해 조직되고 성장하는 독립적인 단체라기보다 당과 국가의 하위 기구로서 자리매김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독재와 혁명」중에서

출판사 리뷰

현대 중국 특색의 체제가 만들어진 격변의 시기

현대 중국은 독특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다. 절대 다수의 중국인들은 중국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권력을 넘보지 않는다. 대신 당과 국가는 인민들의 경제적 자유를 용인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립하고,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체제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와 20세기 전반기의 중화민국에 그 실마리가 있다. 소수의 만주인이 세운 청나라가 권력 집단과 일반인을 엄격히 구분하여 다수의 한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들었던 정치 체제와, 공화국을 지향한 중화민국이 극심한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대중의 정치적 힘을 체감한 후 만들었던 정치 체제, 이 두 국가 체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을 버리는 과정을 거치며 중국 특색의 국가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중국 근대사는 현대 중국을 구성하는 통치 방식 및 정치 구조가 만들어진 중요한 시기다.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 근대사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주요 사건과 정치 구조의 변화에 주목하여 중국 근대사의 핵심을 담아내다

364쪽으로 비교적 많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은 그러나 중국 근대사를 단순히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 이영옥 교수는 주요 사건들의 역사적 의미와, 그에 따라 정치 구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피며, 중국 근대사를 현대 중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보고자 했다. 4부 28장으로 구성된 책은 만주인이 청나라를 세우고 번영을 구가하는 시기를 1부에서 다룬 뒤, 1800년부터 1949년까지를 주요한 서술 대상으로 삼는다. 즉, 1800년대 이후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충돌하여 변화하는 시기부터는 사건을 중심으로 더 자세히 서술했다. 각 부에서 다루는 중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1부 만주인의 청나라 : 만주인이 청나라를 세우고 번영을 구가한 시기를 다룬다. 소수였던 만주인이 다수의 한인을 통치하기 위해 시행한 팔기, 만한병용, 예부와 이번원의 설치 등 청나라 특색의 통치 체제를 살펴본다.

2부 왕조 체제의 균열 : 청나라 왕조 체제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를 다룬다. 당시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청나라 중심 세계관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온 청영아편전쟁과 이후에 일어난 태평천국운동, 영프연합군의 침략, 신유정변, 정책 결정의 핵심으로 부상한 행정 기구인 총리아문의 등장 등을 살펴보며, 20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왕조 체제가 무너져간 과정을 그린다.

3부 청말민초의 격랑 :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설립된 시기를 다룬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청나라 조정이 사실상 완전히 무너진 계기가 된 의화단 사건과 신정 추진 등을 살펴보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세력들이 벌인 입헌운동, 혁명운동, 신해혁명이 어떻게 공화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는지 들여다본다. 또한 혁명의 성과를 가로채고 황제에 오르려 했던 위안스카이와 그에 맞서는 혁명 세력 간의 대립, 군벌들의 이권 다툼,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민 세력의 등장 등 당시 중국 사회에 일어난 정치적 혼란과 격변에 대해 알아본다.

4부 국민당의 중국 통치 : 중국국민당의 통치 시기와, 이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손에 넣은 시기까지를 다룬다. 대중 정당으로서 발전을 모색했던 국민당이 공산당 흡수, 국민혁명, 북벌 등을 통해 어떻게 정치 체제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살펴보고, 국민당보다 정치적 힘이 약했던 공산당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간 과정과 이때 정립된 당과 농민, 노동자 단체 간의 관계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체제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알아본다.

한국인 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중국 근대사

국내에 출간된 중국사 관련 서적의 상당수는 외국 학자들, 주로 미국과 일본 학자들의 저술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로서의 객관성을 아무리 견지하려 해도, 당시 자국의 상황과 관련지어 청나라와 중화민국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중국의 근대는 서양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 열강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에 나타난 서구나, 나중에 열강의 일원이 된 일본의 시각이 투영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외국 학자의 관점이 담긴 책들도 중국사를 이해하는 데 분명히 필요하지만, 외서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작금의 상황은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이영옥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이 책을 집필했다. 청나라 이후 정치 구조가 변하는 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있게 연구해온 저자는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중국 근대사를 바라보아 그 고갱이를 끄집어내었다. 이처럼 이 책은 중국 근대사의 핵심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과 더불어, 중국 근대사를 더 균형 있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국인 학자의 시각을 담은 중국 근대사 책이 더 많이 출간되어, 국내에 중국 근대사에 대한 신선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045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