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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전쟁에 연루된 생존자들이 폭로하는,
두 독재자의 무모하고 냉혹한 선택들
“모든 측면에서 용납할 수 없는 더러운 전쟁이었다.”
- 본문에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2024년부터 이어진 중동에서의 분쟁에 숱한 인명이 희생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또다시 진부한 물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역사를 승자의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제2차 세계대전 속 독소전쟁은 영광스러운 서사시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나치독일을 주축으로 세계를 위협한 파시스트 세력, 이에 맞선 민주국가들의 숭고한 헌신과 수천만의 생명을 희생한 소련의 처절한 항전, 그리고 끝내 파시즘을 분쇄하고 승리를 거머쥔 극적인 결말까지…….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전쟁은 신화가 되어 널리 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위대한 서사시의 본질은, 이토록 찬란한 프로파간다의 발칙한 민낯은 참혹할 따름이었다.
파시즘이 부상하는 동안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 영국과 프랑스는 동유럽을 자국의 노름에 쓰일 판돈으로 취급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이익을 위해 공산주의의 목적을 배신했다.
미국은 사태를 관망하다가 뒤늦게 개입하며 전쟁의 특수를 추수했을 뿐이다.
강대국들의 현실정치가 인류를 끝없는 타락으로 이끄는 동안 절망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던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전쟁에 직접 뛰어들었고, 다른 일부는 의도치 않게 휘말렸으며, 또 어떤 이들은 원치 않게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들을 부르는 말은 다양하다.
전쟁범죄자, 죄악의 공조자, 민족의 배신자, 반동분자, 무고한 희생자, 강제수용소의 수감자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시대의 비극을 목격한 그들이 바로 생존자라는 사실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시의 모습을 회고하고 기억하며 증언하였다.
때로는 일기나 자서전으로, 때로는 인터뷰로, 때로는 방송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밝혔다.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스탈린의 죄악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그들이 증언하는 전쟁의 본질은 간결하게 사악하였다.
이웃을 배신하고, 약자를 유린하며, 소수자를 짓밟는 죄악의 시기였다.
지은이가 본문에서 “모든 측면에서 용납할 수 없는 더러운 전쟁”이었다고 소리 높여 이야기한 것처럼 전쟁은 결코 미화될 수 없거니와 정당화될 수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8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쟁을 과연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역사가 진실을 망각할 때, 생존자의 후손인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최근의 계엄 사태로 과거의 공포를 다시금 마주한 우리는 거악이 구축하는 독재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30년간 세계대전을 연구한 지은이는 1248개의 증언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전쟁을 기억하는 올바른 방식이 무엇인지, 공포를 무기로 사용하는 독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는 폭군의 지배 체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하고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목차
머리말 - 5
서론 - 10
1장 비밀협정 - 51
2장 폴란드 분할 - 87
3장 상반된 운명 - 133
4장 야합의 분열 - 181
5장 절멸전쟁 - 211
6장 침공 - 241
7장 절망의 나날 - 287
8장 세계대전 - 325
9장 기아 - 371
10장 과대망상 - 409
11장 스텝을 가로질러 - 447
12장 볼가강의 혈투 - 485
13장 계속되는 전쟁 - 529
14장 가상과 현실 - 583
15장 대량학살 - 6525
16장 두 도시의 봉기 - 659
17장 패망의 나날 - 705
18장 승리와 패배 - 761
맺음말 - 789
감사의 말 - 801
미주 - 804
찾아보기 - 867
옮긴이의 말 - 884
저자 소개
저 : 로런스 리스
로런스 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호평받은 여러 책을 저술한 작가로, 영국 방송국 BBC의 역사 프로그램을 제작한 감독으로도 활약했었다.
그가 저술한 《나치: 역사의 경고(The Nazis: AWarning from History)》, 《아우슈비츠: 나치와 ‘최종 해결’(Auschwitz: The Nazis and ‘Final Solution’)》, 《제2차 세계대전: 닫힌 문 뒤에 있는 아돌프 히틀러의 어...
역 : 허승철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과 브라운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88년 브라운대학에서 슬라브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 러시아연구소(현 Davis Center for Russian Studies)에서 연구교수(Mellon Fellow)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교수 시절 하버드대학교 우크라이나 연구소(HURI)에서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역사를 공부했다. ...
책 속으로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군주제를 혐오했다. 1942년 3월 대화에서,
히틀러는 “10명의 왕 중 8명은 만일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식품점도 제대로 경영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세습군주제에 정반대되는 가치를 지닌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군주 대신에 러시아를 통치해야 할 집단은,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을 살해한 볼셰비키들이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손에 쥔 권력은 이들의 심장박동이 멈춘 후에야 풀어졌다.
이들의 성격과 이들 주변의 정치 구조를 보았을 때 두 사람 모두 자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기가 불가능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인정한 수준보다 훨씬 심각하게 절대왕정의 군주와 비슷했다.
--- 「서론」 중에서
우리는 히틀러가 소련 침공의 필요성으로 단지 독일의 영토 확보만 주장한 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그는 독일이 볼셰비키가 추구하는 ‘세계혁명’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 앞에서 본인을 존재론적인 위협에 관해 경고하는 예언자로 내세웠다.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적을 고려하자면 이러한 전략은 아주 영리한 방식이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볼셰비키의 팽창을 막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그들이 독일을 공격하기 전에 독일이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독일인은 제국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자기방어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동쪽의 땅을 얻게 될 예정이었다.
--- 「1장, 비밀협정」 중에서
히틀러는 폴란드인은 물론이고 유대인의 멸절을 명령하는 서류에 서명한 적이 없다.74 그가 통치하는 정부가 ‘예지력을 갖춘 정책 수행 체계’를 구축한 덕에 그는 이런 서류에 서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이 카틴 숲 학살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범죄에 관한 책임에서 무관할 수 없다. 명백한 물증이 없을 뿐, 수많은 역사학자에 의해 결정적으로 그의 죄가 증명되었다.
이념적 동기에 의해 폴란드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수백만 명의 주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이러한 정책이 야심하고 포괄적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 「2장, 폴란드 분할」 중에서
스탈린은 또 다른 어려움을 마주했다. 핀란드의 인민을 위한 ‘해방 전쟁’으로 침공을 정당화한 스탈린의 정치적 계략은 비열한 계책이란 비난을 받았다.
대다수 핀란드인은 오토 쿠시넨의 ‘민주정부’를 수용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적 풍토가 핀란드의 정치적 전통으로서 존재했음에도, 스탈린의 ‘허수아비’와 민족주의적이며 귀족적인 ‘만네르헤임’ 사이에서 핀란드인은 아무 어려움 없이 만네르헤임을 선택했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의하면 스탈린은 핀란드 침공 작전이 실패한 사안을 두고 “격노했다”
--- 「3장, 상반된 운명」 중에서
일반적으로 히틀러의 주장에 반대한 논리로 “소련의 크기가 너무 거대해 정복은 불가능하다.”가 알려져 있다.
이는 전쟁 도중과 전쟁 이후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 전체를 정복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독일군 최고위 지휘관들과 히틀러 자신은, 동쪽에서 소련 땅 전체를 차지하지 않고도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지를 모두 목격했다.
앞서 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정확하게 이를 증명했다. 이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무효가 되었지만, 이 조약을 둘러싼 기억은 계속 살아있었다.
독일은 레닌이 소련의 가장 좋은 영토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치는 똑같은 일을 왜 스탈린에게 할 수 없는가?
더불어 스탈린이 영토를 포기하게 만들면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많은 독일 군지휘관은 소련 침공이 영국 침공보다 좀 더 합리적이라고 평가했다
--- 「4장, 야합의 분열」 중에서
우리는 ‘사후적 고찰’이 스탈린의 행동을 향한 오늘날의 판단에 구름을 드리우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란 쉽다.
하물며 사건이 전개되기 전에는 선택지도 매우 다르다.
정보 수집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 정보를 믿는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다만 우리가 스탈린이 직면한 곤경을 최대한 너그럽게 이해하려 하더라도, 스탈린을 향한 처칠의 비난은 정당하다.
이에 벌어진 일에 관련된 오늘날 우리의 지식을 고려하더라도, 스탈린은 잘못된 선택을 연달아 결정하며 본인의 조국을 엄청난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한 방식이었다.
--- 「5장, 절멸전쟁」 중에서
스탈린은 특별위원회를 조직해 ‘인민의 적’을 처형하고 징벌하는 대응만 하진 않았다.
그는 음모를 꾸며 새로운 일들을 벌였다.
침공이 개시된 후 일주일 이상 지난 7월 3일이 되었을 때, 스탈린은 그제야 소련 국민을 향해 공식적으로 연설했다.
그는 “동지, 인민, 형제자매, 우리 육군과 해군 장병 여러분, 나는 친구인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라는 유명한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당시에 이 서두는 무척이나 혁신적이었다. “형제자매”와 “친구”라는 단어는, 이 연설 이전의 스탈린 연설에서는 결단코 찾아볼 수 없는, 국민에게 높은 친밀감을 드러내는 단어였다.
마치 스탈린이 볼셰비키의 원칙과는 별개로 소련 인민의 ‘아버지’ 역할을 맡기로 작정한 듯한 단어였다.
달리 말해 스탈린이 좀 더 전통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접근으로 ‘회귀’하는 것과 흡사했다. 많은 소련 시민은 스탈린의 이 따뜻한 인사말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 「6장, 침공」 중에서
서유럽 침공과 소련 침공은 규모와 범위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두 공격은 한 가지 핵심 측면이 같았다.
두 작전 모두 엄청난 도박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프랑스 침공이라는 도박에서 성공했다고 소련 침공이라는 도박에서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히틀러는 모든 도박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행운은 영원하지 않다는, 이 자명한 사실을 히틀러는 잊고 있었다.
서유럽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독일군은 짧은 전격전으로 적을 제압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이 전략은 히틀러의 성격에 잘 들어맞았을 뿐만 아니라, 장기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독일군의 사정으로 인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였다.
결국은 자원 문제로 쟁점이 귀결되었다. 독일은 소모전을 버틸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941년 독일은 한 해에 5,200대의 전차를 생산했으나 같은 해에 소련은 6,500대 조금 넘는 수량을 생산했다.
1942년의 이 수치는 극적으로 변모했다.
독일은 1만 대도 생산하지 못했던 반면, 소련은 2만 4,000대를 생산했다.
여기에 영국의 저항과 미국의 자원을 함께 고려하면, 나치독일이 당면한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 「7장, 절망의 나날」 중에서
히틀러가 연설로 저지른 전방위적 공격은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그가 실제로 본인의 말을 믿기는 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그의 견해가 단순히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마음속 깊숙이 자신의 신념을 진지하게 신앙했다는 여러 흔적이 있다.
그는 상상 속 ‘유대인의 위협’에 관한 망상을 조장한 하위문화 아래서 성장했고, 유대인을 척결 대상이라 확신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입안 당시부터 소련 내 유대인을 특별한 척결 대상으로 삼은 것이 당연시되었다.
소련 영토로 진군한 처형단은 유대인을 처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부대는 전쟁 초기에 소련 당국과 정부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을 처형했다.
이때의 유대인 살해는 앞으로 벌어질 유대인 학살의 신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침공이 개시된 지 불과 몇 주 후인 7월에는 처형단이 보강되었고,
1941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독일군이 점령한 소련 지역에서는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이 총살당했다.
--- 「8장, 세계대전」 중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장 집행자들보다 훨씬 용이하게 기아 정책을 추진했다.
히틀러는 게토나 폴란드 내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스탈린도 강제노동수용소 체제를 조성했음에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두 독재자 모두 자신이 구축한 고통의 시스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막을 설치했다.
실제로, 1941년 12월에 구데리안을 만난 히틀러는 “이러한 개인의 고통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구데리안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병사들을 연민한다고 비판했다.
--- 「9장, 기아」 중에서
소련군이 왜 전투에서 패배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특히 실책의 가장 큰 책임자 본인이 자신의 실수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군사 문제에서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공세 작전의 전제부터가 잘못 설정되었고, 그는 공격 계획의 위험성을 경고한 주코프 같은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 재앙에 책임이 있었다.
특히 소련의 정보당국은 군사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서, 최정예 독일군 부대가 집결한 지역으로 소련군이 진격하는 멍청한 작전을 시행하도록 일조했다.
티모셴코와 흐루쇼프 역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티모셴코는 시시로 바뀌는 전황에 너무 늦게 대응하고, 포위 위험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계속 공세를 몰아붙였다.
--- 「10장, 과대망상」 중에서
1942년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위기의 순간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히틀러는 석탄협회 의장 파울 플라이거에게 호소 내지는 간청을 하여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다그쳤다.
그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고 대꾸한 플라이거가 히틀러 본인의 요구대로 시도하겠다고 입장을 바꿀 때까지 감정적으로 압박했다.
이와 달리 스탈린은 ‘감정 게임’을 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위협의 힘을 믿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애국주의에 호소하긴 했으나, 그의 호소에는 인간 생애를 바라보는 스탈린의 냉철한 통찰이 담겨 있다.
바로 인간은 폭력적 위협에 가장 잘 반응한다는 적나라한 진실이 스탈린의 호소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지낸 바이바코프 같은 사람이 스탈린의 지도력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니. 아마도 이것이 가장 특이한 부분일 테다.
--- 「11장, 스텝을 가로질러」 중에서
히틀러의 청중들은 모두 나치라는 나라에서 성장했고, 어린 시절부터 총통이 거의 신비에 가까운 힘을 가졌다고 믿으며 자랐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향한 ‘믿음’을 가지라는 훈계를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벤케와 그의 동료들이 “무조건적으로 총통에게 충성할 결심”을 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계속 신념을 지킨 이유 중 하나는 그 당시 시대의 성격이다.
그들 대부분은 독일이 자원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본다면 승리가 곧 눈앞에 있었다.
더군다나 히틀러는 그들에게 평범한 승전이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영광이 될 “동방의 거대한 식민지”를 약속했다.
--- 「12장, 볼가강의 혈투」 중에서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이 소련의 도움을 원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에게는 폴란드인을 살해한 혐의 내지는 확신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부터 꾸준히 경멸하던 폴란드 망명정부를 비난하는 데에 이 사건을 이용했다.
1930년대 대숙청 당시 스탈린은 자신의 동료들이 진실을 부인하도록 종용하고자 그들을 고문했고, 고문 기술자들은 스탈린의 숙청 대상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 그들이 거짓말을 수긍하도록 부추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망명정부가 자국 시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자 스탈린은 그들을 나치 협력자라고 몰아세우며 폴란드인들에게 더한 고통을 가하였다.
오늘날의 우리는 당시 영국과 미국이 소련의 ‘거짓 비난’에 동조했다고 판단한다.
--- 「13장, 계속되는 전투」 중에서
스탈린은 발언권을 얻을 때마다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논의 주제를 거론했다.
제2전선을 즉각 형성해야 한다는 주제였다.
스탈린은 그날 밤 처칠과의 회동에서도, 이 주제를 예의주시하는 입장을 다시금 천명했다.
유럽은 여전히 처칠과 스탈린 사이에 일어난 일의 결과를 품은 채 살고 있었다.
이 회동에서 처칠은 스탈린에게 소련이 전후에 폴란드 동부를 확보하겠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해당 지역은 바로 1년 전, 처칠 자신이 대서양 헌장을 위반하지 않고는 소련이 가지도록 할 수 없다고 말한 땅이었다.
--- 「14장, 가상과 현실」 중에서
전쟁 중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 쉬운 쪽은 스탈린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시기에 극단적인 조치를 시행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더 어려운 쪽도 스탈린이었다. 히틀러는 시기를 고르는 문제에서는 단순명료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에게 학살은 인종, 혈통, 이념의 문제였다. 절대적인 가치를 둘러싼 문제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야기할 위협은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스탈린은 여러 경쟁적인 목표의 우선순위를 가늠했다.
그는 소련 내 소수민족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진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소수민족을 파괴해야 할 이념적 당위성이 없었다.
스탈린에게 소수민족 문제란 ‘해결해야 하는 과제 중 하나’였다.
그는 여러 요인을 계산해야 했다.
소련 전체에 징벌을 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15장, 대량학살」 중에서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여름에 있었던 유일한 봉기가 아니었다.
서쪽으로 850마일 떨어진 곳에서 파리 시민들 역시 독일군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1944년, 바르샤바와 파리가 겪은 운명의 차이는 극명했다.
바르샤바는 히틀러의 군대와 스탈린의 군대 사이에 갇혀버렸다.
파리는 히틀러와 서방 연합군 사이에 갇혔다.
이 차이는 두 도시의 많은 측면을, 특히나 생사를 구별했다.
--- 「16장, 두 도시의 봉기」 중에서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이 시기의 히틀러는 1941년 봄과 여름의 스탈린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적군이 공격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이 보고되었으나 독재자는 자신의 마음속 소망이 틀렸음을 일깨우는 그 진실을 멸시했다.
독재자는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지휘관,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한 지휘관을 체포했다.
측근들이 본인을 상대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배신이 임박했다는 의심을 품었다.
스탈린은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처럼 재기했으나 히틀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 「17장, 패망의 나날」 중에서
스탈린이 소련의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군비 경쟁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소련의 전기생산량은 1928년부터 1940년 사이에 10배 늘어났다.
이전에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던 산업구조에 이토록 거대한 변화가 생겼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것은 소련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성취에 필요한 전제조건은 스탈린이 오로지 산업화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이미 1931년에 “자본주의 정글의 법칙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기 위해” 급속한 산업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18장, 승리와 패배」 중에서
두 사람 모두 ‘엄격한 아버지’ 같은 인물이었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에 철저한 확신을 가진 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전파했다.
그들의 꿈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에게도 의미 있는 미래였다.
당신이 이러한 꿈에 매혹되었다면, 당신은 삶의 목적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지배자가 제시한 유토피아는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당신이 한 세기의 사명을 완수할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확신을 선사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같은 꿈을 꾸게 만드는 사회의 압력은 거대하다.
거기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들을 자발적으로 따르던 수많은 추종자에게 영광스러운 세상이 미래에 있음을 약속했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내일의 유토피아를 위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많은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동일하다.
두 사람은 이념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성실하게 순종하는 사람조차 기꺼이 죽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당신이 그 시절에 있었다면, 소련군에 입대해 용감하게 싸운 칼미크인 출신 알렉세이 바드마예프 같은 군인도 칼미크인이라는 이유로 죽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동료가 당신이 보는 앞에서 학대를 견디다 못해 죽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당신이 나치독일에서 건실하게 생활했다더라도, 유대인으로 태어났거나 유대인으로 분류된다면 반드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폭군은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
우리가 앞서 목격한 모든 공포스러운 참극은 이토록 중요한 역사 속 교훈을 영원토록 떠올리게 할 것이다.
--- 「맺음말」 중에서
출판사 리뷰
증언으로 복원하는 독소전쟁의 모든 것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을 다룬 책은 수없이 많고 국내에 소개된 책도 다양하다.
그렇지만 기존 도서와는 달리 이 책은 전쟁에 연루된 범죄자 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
이 책이 1248개의 증언과 생존자의 구술로 독소전쟁을 복원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지은이 ‘로런스 리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로런스 리스는 30년간 세계대전을 연구한 역사가로, 한때 영국의 BBC 방송국에서 우수한 역사 다큐멘터리들을 제작한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마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현장을 답사했고, 당시 사건을 목격한 생존자들을 인터뷰하였다.
생존자의 증언, 기록이 담아내지 못한 숨겨진 역사를 발굴한 공로를 인정받은 로런스 리스는 영국아카데미영화상, 피바디상, 영국방송언론협회상, 그리어슨상,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상, 미국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관련 주제로 여러 우수한 도서를 저술하였고, 현재는 역사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지은이의 영상물이나 도서가 소개된 적이 없기에 국내 독자들은 지은이의 이름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세계적인 학자들에게서 널리 인정받았다.
히틀러와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세운 ‘이언 커쇼’, 러시아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앤터니 비버’와 ‘로버트 서비스’ 등은 이 책의 학술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였다.
특히 이언 커쇼가 원서에 남긴 추천사를 소개하면서, 지은이의 풍부한 지적 성취와 이를 표현하는 독창적이고도 유려한 문체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책은 두 명의 무서운 독재자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전쟁에서 각자의 나라를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훌륭하게 설명한다.
강력한 증언, 생생한 이야기, 설득력 있는 분석이 맞물리자 책을 읽는 내내 실제로 현장을 보는 듯한 경험을 했다.”
- 이언 커쇼
유토피아의 폭력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책의 집필 목적이 무엇인지, 책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30년간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두 독재자가 구축한 체제를 연구한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몇 가지 주제에 집중했다.
두 독재자와 두 체제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두 체제는 어떤 면에서 비슷한가?
두 독재자는 자신들의 시대를 구축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의 시대는 두 폭군을 형성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
그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관련 학자들만 공유하는 호기심에 그치지 않는다.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폭군이 군림하고 있고, 그들 중 일부는 우리의 세계를 파괴할 수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24년 12월 3일 계엄 사태를 마주한 한국인에게 ‘독재의 공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실의 위기로 부활하고 말았다.
즉 우리가 히틀러와 스탈린에 관해 공부하는 것은, 나아가 두 독재자의 시대를 탐구하는 것은 비단 과거에만 함몰되는 지적 향유로 그치지 않는다.
옮긴이 허승철 교수가 책의 말미에서 지적한 것처럼 독재 정치와 대중 선동이 다시금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오늘날, 두 폭군과 그들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참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시대적 의의가 있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 두 사람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동일했다.
두 사람은 이념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성실하게 순종했던 사람조차 기꺼이 죽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에 철저한 확신을 가진 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전파했다.
지은이가 맺음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토피아를 추구한 폭군은 세상을 파괴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다.
“두 지배자가 제시한 유토피아는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당신이 한 세기의 사명을 완수할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확신을 선사했다. (중략)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들을 자발적으로 따르던 수많은 추종자에게 영광스러운 세상이 미래에 있음을 약속했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내일의 유토피아를 위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다.”
- 맺음말에서
지은이의 지적처럼 히틀러와 스탈린은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제시하며 수많은 인민을 통제했다.
국민을 공범으로 삼아 자신들의 죄를 희석했으며, 무고한 인민을 학살하고도 그 죄악을 영웅의 수고로움으로 둔갑하였다.
히틀러는 정치적 경쟁자들을 민족의 배신자라는 이유로 탄압했고, 스탈린은 체제의 배신자라는 이유로 수많은 동료를 살해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더러운 족속으로 규정해 학살했다면, 스탈린은 소수민족을 오지로 추방시킨 이후 그들의 목숨을 방기했다.
히틀러가 평범한 독일인을 학살의 공범으로 포섭했다면, 스탈린은 신념을 위해 삶을 바친 소련인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렸다.
죽어서도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들은 오로지 찬란한 미래로 이끄는 영도자로서 살다가 죽었다.
그 죽음이 비참하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그들에게 희생된 생명이 되살아나지도 못한 채 전쟁은 끝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목격할 모든 참극은 이토록 비참한 진실을 영원토록 떠올리게 할 것이다.
증언의 가치, 기억의 윤리
기억과 역사가 충돌할 때, 기억이 보편화된 역사에 정면으로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최근 전 세계 사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공공역사와 기억’이라는 주제는 사학계의 논쟁으로만 그치지 않는 듯하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보편화된 역사와 소외된 기억 사이의 갈등은 빈번하다
. 또한 그로 인한 여파는 결코 쉽고 약소하지 않다. 권력이 과거의 이야기를 단일한 서사로, 하나의 역사로 단정할수록 거기서 벗어난 소외된 자들의 기억은 ‘틀린 것, 오류, 잡음’ 정도로 일축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역사와 기억의 충돌 역시 마찬가지의 양상을 보인다.
그간 제2차 세계대전을 소개하는 여러 도서는 나치독일을 중심으로 구성된 추축국이라는 절대악과 그들에 맞서는 주요 강대국들의 이야기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러한 ‘보편적인 역사’에서 영국은 나치즘에 끝까지 저항한 연합국의 수장으로, 프랑스는 패전에도 굴하지 않은 혁명가로, 미국은 전쟁의 판도를 바꾼 역전의 용사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상 세 나라는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흡수하는 동안 내내 방관하거나 때로는 부추기도 하였다. 그
들에게 유대인, 집시, 폴란드인은 자국의 이익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판돈에 불과했다.
비단 연합국의 행보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수천만의 인민을 동원해 나치독일을 굴복시킨 소련은 과연 어떠했는가?
스탈린의 소련은 ‘부득이하게’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했으나 소련 역시 나치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유럽을 체제경쟁의 전초기지로 사유화했고,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공산당 지도부’라는 집단의 이름 뒤에 숨어 악행의 책임을 은폐했다.
그 과정에서 무참히 희생된 병사, 전시성폭행에 시달린 여성, 노역에 강제동원된 노동자, 터전을 빼앗긴 소수민족의 삶은 거대한 서사시에서 삭제되었다.
그들은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 소련의 영광’에 가려진 채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들이 냉전이 끝난 이후 여러 경로로 당시의 경험을 증언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기억은 역사라는 폭력에 저항하는 희생자의 마지막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비단 연합국과 소련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또한 히틀러와 나치독일의 악행을 변명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체제의 폭력과 전쟁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의 고통을 토로할 수 없었던 수많은 생존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한 지은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잡음’이 아니라 ‘숨겨지고 은폐된, 또 하나의 역사’임을 증명하였다.
이를 통해 어떤 식으로도 전쟁은 용납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중요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훌륭히 전달했다.
우수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지은이의 극적인 문체가 어우러지자 산발적으로 흩어졌던 증언들은 하나의 ‘대안 서사’로 완성되어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해체된 오늘날.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체제와 구조의 폭력 앞에 무력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 절망하는 시민들에게, 지은이는 한 가지 방법을 넌지시 귀띔한다.
신화 속에 묻힌 역사의 진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증언하라.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1312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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