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란
-통신사란 조선국왕이 일본의 막부장군(바쿠후 쇼군)에게 보낸 외교사절로서, 조선후기에 총 12회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통신사는 조선후기만이 아니라 조선전기부터 파견되었으며, 통신사의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1429년부터이다.
通信이란 ‘信義를 通한다’는 의미로, 당시 왜구에 의해 유린되는 양국관계를 신의가 통하는 통신사를 파견하여 우호ㆍ교린관계로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면 각 지역마다 수많은 일본문인들이 통신사의 숙소에 모여들어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동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았으며, 이러한 흔적은 일본의 곳곳에 남아있어 우호관계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한일양국에서 통신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오랫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70년대 이후에야 선린외교와 문화교류의 사절로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1. 조선전기의 통신사
① 조선전기, 무로마치 막부와의 교류
14세기 중엽 중국에서는 한족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명을 건국하였다. 한편 14세기말 한반도에서는 새롭게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 때 일본에서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남북조를 통일시키고 무로마치 막부의 세력이 가장 강력한 시기를 맞이했다.
15세기 초, 조선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 명과 사대관계를 가지면서 국내를 안정시켰다. 일본도 두 나라와 좋은 관계를 가지려 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당시 중국과 조선 연안을 어지럽히는 왜구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막부에게는 조선 명과의 무역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에 막부는 적극적으로 왜구를 단속하였다. 이와 함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명 황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그리하여 명 황제에게는 신하의 예를 취하고 조선 임금과는 대등(교린)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 조선-일본-명은 서로 국교를 수립하고 무역을 하였다. 그리고 15세기 전반, 조선과 일본은 상호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고 원활한 무역을 위해 조선은 ‘통신사’를, 일본은 ‘일본국왕사’를 파견하였다.
그 뒤, 71차레의 일본국왕사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일본국왕사는 서울까지 와서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거나, 면직물, 대장경 등을 수입해갔다.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은 처음에 보빙사, 회례사 등으로 불렸으나 1429년 세종은 처음으로 ‘통신사’라 명하여 사절을 파견하였다. (정사 박서생) 통신사는 주로 이전에 죽은 쇼군의 문상과 새로운 쇼군의 취임축하를 위해 파견되었다. 약 50명의 통신사는 교토에 도착하여 악기를 연주하며 행진하여 일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통신사는 서로 의례를 교환하며, 양국의 평화와 우호 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이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통신사란 이름으로 3회, 그 외의 명칭으로 10회 파견되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일본에서 오닌의 난 이후 쇼군의 권위가 약해지고, 다이묘들 간에 전쟁과 하극상이 빈번히 일어나 약 100년에 이르는 전란 시대를 맞이한다. 그로 인해 조선과 일본사이에는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 무역관계만이 지속되었다.
②조선전기 쓰시마의 역할
쓰시마의 번주였던 소씨(宗氏)는 조선과 일본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쓰시마는 땅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벼농사를 거의 할 수 없었다.
14세기 초반의 왜구는 쓰시마와 이키섬을 물 공급 기지로 삼아 조선과 중국해안을 노략질하였다. 쓰시마 사람들도 왜구로 참가하였다. 조선은 1419년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쓰시마를 공격하였다.
그 뒤, 세종은 쓰시마가 왜구를 단속한다면 조선과 일본의 무역에서 일본 측 창구 역할을 인정하고, 매년 쌀과 콩을 원조한다는 정책을 취해 쓰시마를 후하게 대접하고 종속관계를 만들었다. 그 이후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을 독차지하였고, 무역에서 얻은 이익으로 쓰시마 전체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쓰시마 인들이 조선에 건너와 삼포 등지에서 왜관을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다.
2.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① 임진왜란
16세기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국내를 통일하였다. 새로운 지배자가 된 히데요시는 더 나아가 조선과 명을 정복하려하였다. 이는 도요토미가 정복자로서 야심을 충족시키고 사무라이들에게 새로운 영지를 나눠줌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워 자신의 지배를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1587년 히데요시는 규슈의 모든 다이묘를 굴복시킨 후 쓰시마의 번주 소 요시토시를 불러 “조선은 나에게 복종하고, 명나라 정복의 선두에서라, 조선임금은 일본에 건너와 신하의 예를 표하라”는 요구를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소씨는 조선이 이를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통신사 요청으로 바꾸어 전했다.
쓰시마가 수차례 강력히 요청해오자 조선은 1590년 마침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사절의 목적은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축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 통신사가 자신에게 복속하는 사절이라 믿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征明嚮導’를 요구했고, 이 요구가 조선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 생각한 소 요시토시와 그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假途入明’으로 바꿔치기하여 조선과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마저 거부하였다.
협조하리라 생각한 조선의 대답이 늦어지자 히데요시는 침략을 명했다. 조선은 전쟁이 일어난 지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등 고전을 거듭했으나, 이순신의 승리, 의병의 활약, 명군 참전 등으로 전세를 비등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강화협상을 하자는 명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1593년부터 강화협상에 들어갔다. 조선은 이 강화협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명과 일본만의 강화협상이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철수하여 왜성을 쌓고 주둔했다.
명과 일본은 4년에 걸쳐 진행된 협상을 일단 마무리하고, 1596년 명 황제의 사신이 오사카에 당도하였다. 명나라는 이 때 조선의 통신사도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고, 강화에 반대하던 조선 측은 마지못해 황신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명나라사신이 가지고 온 문서에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삼는 다는 문구만 있을 뿐, 히데요시가 요구한 ‘명과의 무역재개’, ‘조선 남부4도의 할양’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 명나라의 교섭대표 심유경과 일본의 교섭대표 고니시 유키나가가 양국 사이에서 거짓 정보만을 흘리며 강화를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히데요시는 강화결렬을 선언하고 1597년 조선을 재침하였다. 정유재란이었다.
정유재란은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사망하면서 종결되었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다이로는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즉시 철수시켰다.
② 끌려간 사람들
7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을 비롯해 농민, 부녀자 등이 끌려갔다. 노예 장사를 목적으로 하는 상인도 조선에 많이 왔는데, 각지에서 사람들을 납치하여 인신매매를 자행하였다. 납치된 사람들은 동남아시아나 멀리 유럽까지 팔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2만~3만(많게는 10만)까지 추정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이 사람들을 고국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17세기 전반에 재개된 처음 세 차례의 통신사는 ‘回答 兼 刷還使’라 불렀다
연대 | 귀환자 수 | 내용 |
1601 | 250명 | 쓰시마 번주가 자발적으로 귀환시킴 |
1604 | 1,390명 | 사명대사가 데려온 사람들 |
1605 | 123명 | 쓰시마 번에서 귀환한 사람들 |
1607 | 1,418명 | 회답겸쇄환사가 데려온 사람들 |
1617 | 321명 | 회답겸쇄환사가 데려온 사람들 |
1624 | 100여명 | 회답겸쇄환사가 데려온 사람들 |
1643 | 14명 | 통신사가 데려온 사람들 |
일본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도 하였고 (오다 주리아), 다이묘가의 첩으로, 서예가나 행정가 혹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납치되었다가 1600년에 귀환하였는데,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포로로 교토에서 생활하는 동안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하면서 그에게 조선의 주자학(성리학)을 전하였다. 이후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제일인자가 되었고, 그 계보는 하야시 라잔, 기노시타 슌안, 아라이 하쿠세키, 아메노모리 호슈 등에게 이어졌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도공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는 17세기 전반까지 자기 제조법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중국과 조선에서 수입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을 일본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본 각지의 다이묘가 자신들의 영지 내에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 각지에서 도공들을 수십 명씩 포로로 잡아왔기 때문이다. 이삼평의 아리타 도자기, 심당길의 사츠마 도자기가 대표적이다.
3. 조선후기의 통신사
① 국교 재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 세력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물리치고 전국의 패권을 장악한 후, 1603년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하였다. 그는 막부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국내 안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 나라와의 평화로운 관계가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또한 통신사는 조선왕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파견되는 것으로서 이를 받는 쇼군의 권위도 높아지는 것이다. 또 통신사가 에도까지 오는 과정에 드는 비용을 각 다이묘에 부담시켰기에, 각지의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물론 막부에서 부담한 비용도 상당했는데, 한번 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은 막부의 1년 수입을 넘는 액수였다.
이에야스는 지금까지 조선과의 외교창구 역할을 맡고 있던 쓰시마의 소씨에게 시급히 조선과의 강화와 통신사 재개를 명령하였다. 쓰시마는 전쟁의 최일선 기지로서 많은 군대가 주둔하였고, 쓰시마 성인남성의 대부분이 참전하였던 관계로 황폐화되어있었다. 또 조선과의 무역이 끊기게 되어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조선과의 국교회복은 쓰시마로서도 최우선 과제였다.
조선으로서는 임진왜란으로 일방적인 침략을 당했고, 따라서 그 침략당사자였던 일본과의 강화가 마냥 탐탁치는 않았다. 강화를 중개하는 쓰시마 역시 선봉으로 조선침략에 가담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 상태를 정식으로 종결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와야 하는 큰 과제가 있었다. 더구나 강화를 요구하는 자는 히데요시가 아닌 이에야스였다.
조선에서는 일단 1604년 사명대사(송운대사) 유정을 일본에 탐적사로 보내어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게 하였다. 이에야스는 사명대사를 만나, “나는 임진왜란 때 간토에 머물러 있었고, 군사에 관한 일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 사이에 원한은 없다. 화의를 맺을 것을 청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들을 받고 조선에서는 논의가 거듭되었는데, 최종적으로 강화조건 두 가지를 일본에 요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두 가지 조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요청하는 국서를 먼저 보내고, 선왕의 능을 파헤친 범인을 체포하여 보내라는 것이었다. 두 가지 강화조건은 의외로 일찍 충족되었다.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강화의 성사와 평화가 우선이었기에 조선은 통신사(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1607년 총 467명의 1회 사절단이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일본과의 강화를 실현하고 그들의 실정을 확실히 파악하며, 잡혀간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계속된 2차(1617)과 3차(1624) 사절단도 1차와 마찬가지로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지만, 더불어 쇼군의 襲職(계승을 의미)을 축하하는 성격도 가졌고, 우호ㆍ친선을 두텁게 하는 임무도 수행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귀환하는 사람들이 적어졌고, 1636년 4회 사절단부터 1811년 12회 사절까지는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막부의 쇼군 습직을 축하하고, 양국 우호를 유지하며, 일본 국정을 탐색하기 위한 사절이 파견되었다.
② 통신사의 편성
막부에서 통신사를 요청하라는 명령을 쓰시마에 내리면, 쓰시마에서는 부산 왜관에 사람을 보내 동래부사에 이를 전달한다. 조선에서 통신사 준비를 이때부터 시작된다.
통신사 파견 요청을 접수한 동래부사는 조정에 이를 보고한다. 조정에서는 먼저 통신사 파견여부를 결정하고, 파견이 결정되면 왕에게 통신사의 삼사(정사ㆍ부사ㆍ종사관)를 선정해줄 것을 상주한다. 통신사의 구성원 중 가장 중요한 삼사가 결정되고, 임명된 종사관이 사절단 편성의 책임자가 되어 사절단에 참가할 사람들을 선정한다. 양국관계가 안정되면서 부터는 문학에 재주가 있는 사람, 한시를 잘 짓는 사람, 서예나 그림에 능통한 사람, 악기 연주의 명인, 춤의 명수 등 문화 교류를 위한 다양한 인재가 선발되어 문화사절단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는 조선이 무예보다는 문예를 중요시 하는 나라임을 알리고 이를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사절단은 쇼군과 쓰시마는 물론, 에도까지 가는 중에 들르는 곳의 번주 등에게 줄 선물을 일일이 준비하였는데, 이 물품들은 각 지방관청에 할당하여 준비하였다. 선물로는 말ㆍ매ㆍ꿩ㆍ비단ㆍ붓ㆍ먹 등이 주를 이루었고 준비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회 | 서기년도 | 조선년대 | 삼사 | 인원 |
1 | 1607 | 선조 40년 | 여우길 경섬 정호관 | 467 |
2 | 1617 | 광해군 9년 | 오윤겸 박재 이경직 | 428 |
3 | 1624 | 인조 2년 | 정립 강홍중 신계영 | 300 |
4 | 1636 | 인조 14년 | 임광 김세렴 황호 | 475 |
5 | 1643 | 인조 21년 | 윤순지 조경 신유 | 462 |
6 | 1655 | 효종 6년 | 조형 유창 남용익 | 488 |
7 | 1682 | 숙종 8년 | 윤지완 이언강 박경후 | 475 |
8 | 1711 | 숙종 37년 | 조태억 임수간 이방언 | 500 |
9 | 1719 | 숙종 45년 | 홍치중 황선 이명언 | 479 |
10 | 1748 | 영조 24년 |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 475 |
11 | 1764 | 영조 40년 | 조엄 이인배 김상익 | 472 |
12 | 1811 | 순조 11년 | 김이교 이면구 | 336 |
400~500명이라는 대규모 통신사 일행에는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들이 담당한 임무와 역할에 따라 삼사에서 하관까지 8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맡은 역할과 임무는 무려 51가지에 이르렀다.
먼저 통신사를 이끄는 삼사이다. 일본에 통신사로 가는 일은 매우 힘들고 위험했기에 선발되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중국에 가는 사행과 달리 일본은 학문적으로 배울 것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서 체면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죄를 입고 탄핵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한 만큼 정사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정사는 인품이 높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선발되었고, 부사는 이를 보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종사관은 문관 가운데 글이 뛰어난 사람이 선발되었는데, 주 임무는 매일의 일을 기록한 뒤 이를 보고하는 것과 일행을 감찰하고 점검하는 역할이었다.
통사란 통역관 시험인 역과에 합격하여 정식통역관이 된 자였다. 통역관은 다양한 사람들이 서열에 따라 배치되었다. 훈도는 비록 지위는 낮았지만 일본 사정에 밝은 통역관으로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일행보다 뛰어났다.
書道로 문화교류를 했던 사람들로 제술관ㆍ寫字官ㆍ서기 등이 있었다. 이들은 문장을 써서 대화하는 필담과 서로 시를 교환하는 창화에서 활약했다.
일본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된 사람들로는 의원ㆍ화가ㆍ마상재 등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의학에 관심이 많아 의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도화서 소속의 화가도 파견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에게 그림을 많이 요청하였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기도 했다. 마상재는 말위에서 재주를 무리는 무예인데, 1636년에 일본이 최초로 요청한 후 통신사가 갈 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냈다.
그 외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깃발을 든 기수, 통신사를 호위하는 군관, 통신사 높은 관리들의 비서격인 소동들도 파견되었다. 통신사 행렬도에 머리를 땋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소동이다. 군관과 소동들이라 해도 문예부분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③ 통신사의 여정
한양(서울)에서 에도(도쿄)까지는 대략 2,000킬로미터이다. 통신사는 궁궐에서 국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도성을 나선다.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미비된 여러 준비를 하였으며 이들이 묵는 지방 관아에서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부산에 도착하면 출발날짜를 잡는다. 부산에는 이미 안내를 맡은 쓰시마의 배가 와 있었다.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에 영가대에서 무사항해를 비는 기풍제를 올리고 출항한다. 부산에서 쓰시마 북단의 사스나까지는 약 50킬로미터이다. 사스나에서 쓰시마 번주가 있는 이즈하라(당시에는 후츄)로 이동하여 며칠 동안 일정에 관한 협의와 준비를 한다.
쓰시마에서 오사카까지는 쓰시마 번의 안내를 받아 대선단으로 이동한다. 이동 중에 정해진 정박지 번의 접대를 받으며 항해를 계속한다. 주요 정박지는 이키-아이노시마-아카마가제키-카미노세키-카마가리-도모노우라-우시마도-무로츠-효고-오사카였다.
오사카부터는 요도가와라는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요도가와의 강바닥이 낮기에 통신사의 선박은 올라갈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막부와 각 번주가 준비한 배로 갈아타고 이동한다.
교토부터는 육로를 이용하여 하루에 대략 40킬로미터씩 나아간다. 교토의 ‘조선인 가도’를 거쳐 히코네-오가키-나고야-오카자키-하마마쓰로 가서, 가장 힘든 오이 강을 건넌다. 시즈오카를 지나 하코네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후지산이 펼쳐지는 데, 통신사들은 후지산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에도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숙박지인 시나가와에 머문 후 다음날 아침 일찍 막부의 안내로 에도의 숙박지인 아사쿠사의 히가시혼간지까지 시내를 행진한다. 통신사가 가는 길에 구경꾼은 넘쳐났는데,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거대한 퍼레이드는 사람들의 즐거운 볼거리였다. 통신사 일행의 짐을 운반하기 위해 총인원 30여만명의 일꾼과 8만 마리의 말이 동원되었으며, 한양에서 에도까지 6~9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④ 통신사와의 민간 교류
통신사가 가는 길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으며, 일행이 머무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통신사 일행을 환영하고 통신사 일행이 써주는 한시와 글씨, 그림 등을 얻고 기뻐했다. 또 조선의 유학과 의학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 생각하여 짧은 시간만이라도 만나기 위해 숙소를 방문하였다. 몰려드는 일본사람들이 너무 많아 전문가(제술관ㆍ사자관)만으로는 모자랐기에 글이 뛰어난 사람들이 총동원되기도 하였다.
통신사는 서민과의 교류도 하였다. 하지만 모든 번에서 서민과의 교류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히로시마 번이 접대한 시모카마가리의 산노세에서는 일반 주민들이 통신사가 숙박하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기 때문에 교류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후쿠야마 번이 접대한 도모노우라에서는 마을 사람들도 통신사 일행과 교류했고, 이를 위해 간단한 조선어 회화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통신사 행렬을 소재로 풍속화ㆍ두루마리 그림ㆍ인형 등이 만들어졌고 음악과 춤을 따라하기도 했다. 통신사가 들르지 않은 지역에도 인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이었음을 알 수 있고, 지금도 통신사가 입었던 복장과 연주하던 음악, 그리고 추었던 춤이 일본 각지에서 행해지는 축제의 행렬과 춤에 많이 남아 있다.
4. 통신사의 폐지
17세기 말, 에도 막부의 재정은 처음으로 적자가 되었다. 그런 시기에 막부의 정책을 담당한 사람이 아라이 하쿠세키였다. 그는 1711년 8회 통신사를 맞이할 때, 경비를 줄이고, 조선과의 의례를 더욱 대등하게 하기 위하여 통신사 접대 의례를 대폭 간소화 하였다.
그러나 아라이 하쿠세키의 이러한 조치는 일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조선조정과 통신사는 이런 조치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기에 막부 측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때 통신사와 함께 했던 쓰시마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는 혼란을 불러일으킨 이 조치에 반대하여 하쿠세키와 격론을 벌였다. 결국 이 조치는 우호를 무너뜨린 행위라 하여 양국모두에서 비판을 받았고, 9회 통신사에서는 이전(7회까지)과 동일하게 행해졌다.
1787년 11대 쇼군 이에나리가 취임하자 쓰시마 번은 통신사 요청에 대해 막부에 문의했다. 당시 정무 담당자 마츠다이라 사다노부는 막부 재정의 어려움 등을 들어 통신사 요청을 무기한 연기했다. 결국 24년 후인 1811년에 12회 통신사 요청이 결정되었고, 역시 접대 간소화 등을 이유로 통신사 접대는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의 재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통신사에 대한 부담을 절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통신사에 대한 막부의 접대가 소홀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양국이 서로를 생각하는 중요도가 떨어졌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전과 같은 문화교류도 없었고, 통신사 일행이 준비해 간 종이와 붓들도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다.
12회 통신사 이후 15대까지 4명의 쇼군이 취임했지만 막부는 통신사 요청을 계속 연기하면서 결국 통신사는 끊기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에 서양 선박이 자주 출몰하였고,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어 정치적 혼란이 왔고, 막부재정이 여전히 악화일로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일본에서는 자국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국학이 일어났는데, 이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이 주변 국가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일본형 화의의식의 강화로 이어졌다. 이는 당연히 조선멸시관으로 이어졌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을 인용하면서, 조선은 옛날부터 일본에 복속했는데, 막부가 통신사는 지나치게 화려하게 대접한다며 비난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정한론’으로 모아지고 침략으로 귀결되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이후 막부는 무너지게 되었고, 1871년 메이지 정부가 번을 현으로 바꾸면서 쓰시마 번은 사라졌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가 외교를 외무성 중심으로 일원하면서 막부시대 대마도가 갖고 있던 외교권은 외무성으로 이전되었다. 1872년에는 메이지 정부가 대조선외교의 최전선이었던 왜관을 쓰시마번으로부터 접수하여 일본공관으로 점령해버렸다. 일본(메이지 정부)은 天皇, 勅 등의 대등관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한 외교문서를 조선에 보내어 회신을 요구했고, 전례에 없는 사태를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군함을 동원하여 조선을 위협했고, 조선은 어리둥절한 사이에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고 말았다.
이후의 역사는 250여 년간의 우호와 평화시대와는 상반되는 침략의 시대가 이어지게 되었다. 250여 년 전의 히데요시의 침략 시절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온 것이다. 잘잘못을 따진다는 것은 일견 위험할 수도 있지만, 과연 누구의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물론 이전의 양국관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협박조로 나온 일본 신정부의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급격히 변해가는 국제질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옛 제도만 고수하려 한 조선의 대처가 적절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파악하려 한다면, 양국의 서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문제가 발단한 것이 아닐까한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국내사정이 안정되고 그에 따라 상대국에 대한 정치적 탐색의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이후 통신사는 정형화 의례화되어 큰 변화를 겪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관심사항도 특별한 것이 새로이 생겨나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아예 에도까지 가지 않게 되었고, 통신사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우호 평화를 대표하던 사절이 끊기게 되면서 일본에서는 조선을 멸시하는 관념들이 다시 등장했고, 조선은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능력이 무뎌지게 되었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다.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교류가 중단 된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 대 국가로 나쁜 관계를 유지했던 기간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정도밖에 없다. 물론, 기간이 짧다고 해서 역사적 의미가 작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더 긴 기간의 평화의 시대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리고 전에 없는 활발한 민간교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과 아픈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면서도, 조선통신사로 대표되는 평화관계를 목표로 삼아 교류를 이어가야 하며, 그 주체는 민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종에게 “앞으로도 일본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 ?해동제국기?의 저자이자 탁월한 외교관 신숙주,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 사귀는 것이 ‘성신외교’이며 조선과의 외교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쓰시마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의 정신을 양국민들이 항상 공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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