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고려명종 4년 (1174) 금나라에 사신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회암사가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말 - 조선초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는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말에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이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 (天竺國: 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원과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것" 이라고 하였는데,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그 수기(受記)에 따라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또한 조선 초에는 무학(無學)이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태조 (太祖)도 왕위를 이양(移讓) 한후 이곳에서 머물렀다.그리고 효령대군 (孝寧大君). 정의왕후 정의황후(貞熹王后). 문정왕후 (文定王后)를 비롯한 많은 왕실 인물들이 불사 (佛事)를 후원 하였고,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들이 주석(住席)함에 다라 국가적 차원의 비호를 받는 최대의 사찰로서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양주 회암사지 揚州 檜巖寺地
사적 128호
양주 회암사지는 1997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5년까지 1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일반사찰과는 다른 궁궐건축의 구조나 방식이 발견되었다. 천보산 남쪽계곡을 흙으로 메우고 석축을 쌓아 게단식으로 평지를 조성하고 총 8개의 단지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와 유사한 건축구조는 고려 궁궐인 개성의 만월대와 행궁역활을 했던 파주의 해음원지 등이 있다. 또한 궁궐에서 사용하던 용, 봉왕무늬 기와, 청기와, 용두, 톳, 잡상등의 기와류, 왕실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 (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류 등 다양한 왕실관련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고려명종 4년(1174)에 금나라사신의 방문기록을 통해 12세기 무렵에는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왕 2년 (1376)에 나옹(懶翁)이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의 말에 따라 262칸의 규모로 중창하여 현재와 같이 거대한 사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의 스승이었던 무학(無學)이 머물렀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 궁실을 짓고 머므르면서 왕실 사찰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 왕실 인물들의 후원을 받아 최대의 왕실 사찰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명종 21년 (1566년) ~선조 28년(1595) 무렵 유생들의 방화에 의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38년 (1605년)에 선왕의 어실(御室)을 조성하고, 인조 4년 (1626년)에 종친이 불사를 크게 벌이는 등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고려 말에서 조선전기 최대의 왕실 사찰로서 종교적인 공간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왕의 별궁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동시에 살필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1964년에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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