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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베버

동방박사님 2021. 12. 16.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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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막스 베버는 페르디난트 퇴니스와 게오르그 짐멜과 더불어 현대 독일 사회학의 창시자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세기말 전환기를 이끈 사상가로 꼽힌다. 특히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가 소멸되면서 첫손 꼽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퇴장하자 더 각광받고 있다.

『막스 베버』는 막스 베버의 부인인 마리안네 베버가 쓴 막스 베버 전기인『Max Weber-Ein Lebensbild』조기준 박사가 우리말로 초역한 것이다. 전 19장 및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78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인 원전은 베버의 조상, 친가 및 외가의 가계·가업·신앙 및 가풍, 베버의 탄생·유년·학생 및 군대시절, 결혼, 교유, 대학재직 시의 학생과의 관계, 그의 학문적 활동, 이병罹病과 투병, 19세기 말의 독일의 사회상, 이에 대한 베버의 견해와 정치활동, 공산주의의 대두와 혁명, 제1차 세계대전, 베버의 군복무, 독일의 패전과 강화의 전말 등등, 한 인간으로서,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세기의 전환기에 처한 한 위대한 사상가로서 베버의 모습이 그 실상을 보듯 그려져 있다.

초역본은 전 9장 총 270여 쪽으로 원저서를 대폭 압축한 것이다. 옮긴이는 이 책을 초역하면서 원저서가 의도하고 있는 전체적인 구상을 손상하지 않고, 또 원저서의 문장을 마음대로 개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전 9장으로 축약하였다. 원저서의 약 절반을 송두리째 삭제한 것이 아니라 원저서의 장을 몇 장씩 합편하여 편성한 것이다. 서술내용의 압축에서는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전체적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가계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서술과 또 베버와 그의 가족 및 친지들이 주고받은 장문의 서간문을 대폭 줄였다. 그 밖에도 베버의 사상이나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지장이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는 부분도 함께 정리했다.

목차

역자후기
다시 책을 내며
Chapter 1 가문과 유년 시대
Chapter 2 학생시대와 군대생활
Chapter 3 도약의 제1보
Chapter 4 결혼-젊은 교수의 생활
Chapter 5 새로운 창조의 국면
Chapter 6 국면의 확장 및 사회적 투쟁
Chapter 7 혁명 전 시대의 정치가
Chapter 8 혁명 후 시대의 정치가
Chapter 9 베버의 서거
막스 베버 연보

저자 소개

저자 : 마리안네 베버 Marianne Weber
마리안네 베버는 1870년 8월 2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열일곱 살에 대도시에 유학하여 완전한 교양인이 되었으나 남성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여성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란 쉽지 않아 다시 외어링하우젠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녀는 막스 베버 집에 기거하면서 막스 베버와 가까워지게 된다. 마리안네 베버와 막스 베버는 5촌간이다. 마리안네 베버는 사랑하던 이종사촌과 헤어진 막...
 
역자 : 조기준
조기준은 1917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났다. 호는 이산移山. 애초 철학자를 꿈꾸었던 그는 일본 조치上智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대, 서울대, 고려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조기준은 독일 역사학파와 막스 베버의 경제사학 및 방법론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해 한국 경제학계에 새로운 학풍과 연구 방향을 제시하여 학문적 기틀을 세우고 경제사의 지평을 넓힌 학자로 평가받는다. 조기준은 또 독일 베를린대학교...
 
 
 

책 속으로

이 책은 마리안네 베버Marianne Weber의『Max Weber-Ein Lebensbild』(Heidelberg, 1926)를 초역抄譯한 것이다. 저자 마리안네 베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막스 베버의 부인이다. 마리안네와 막스는 이종남매간이었으나 그들은 1891년에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의 베버 가에서 처음 상봉했고, 그로부터 약 1년 반 뒤인 1893년 가을에 결혼했다. 이래 막스 베버가 서거한 1920년까지 27년간 그들은 잠시도 서로 떨어져본 일이 없는 생애의 동반자였다.
베버는 타고난 체구골격은 장대했으나 체질은 병약했고 특히 신경성 질환에 오래 시달려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그 때문에 베버는 습기 차고 음산한 독일의 겨울을 피하여 이탈리아 등 남부지방을 자주 여행했는데, 이 베버의 요양 차 여행에는 항상 마리안네가 동반했다. 1904년에 베버는 미국을 여행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도 마리안네는 베버와 동행했다. 이와 같이 마리안네는 항상 베버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병을 간호하면서 생애의 길동무가 되었다.
베버는 성격이 호탕하고 사교적이었으며 학문적 토론에 대해서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그가 대학에 재직할 때나 또는 사회정책 잡지를 편집하고 있을 때에는 많은 학생·학자 및 정치인들과 상종했고, 그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였다. 이럴 때면 마리안네는 으레 그 회합에 동석하여 그들의 담화를 경청하였다. 마리안네는 베버의 일상 가정생활의 동반자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세계에서도 항상 동반자였던 것이다.
마리안네 베버가 쓴 이 전기가 베버의 생애·성격·가정·교우관계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 형성 및 학문 활동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는 마리안네와 베버는 가정의 동반자인 동시에 베버의 사상세계에서도 함께 호흡하고 있었음에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마리안네는 베버 서거 후 베버의 유고 정리 및 그의 저작집 편집에도 베버의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맡아서 했다.
여기에 번역 출간하게 된 마리안네의 베버 전기는 전 19장 및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78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다. 그 내용은 베버의 조상, 친가 및 외가의 가계·가업·신앙 및 가풍, 베버의 탄생·유년·학생 및 군대시절, 결혼, 교유, 대학재직 시의 학생과의 관계, 그의 학문적 활동, 이병罹病과 투병, 19세기 말의 독일의 사회상, 거기에 대한 베버의 견해와 정치활동, 공산주의의 대두와 혁명, 제1차 세계대전, 베버의 군복무, 독일의 패전과 강화의 전말 등등, 이 전기에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한 독일국민으로서의 그리고 세기의 전환기에 처한 한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베버의 모습이 그 실상을 보듯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베버의 인간상은 그의 부인이었고 생애의 동반자였던 마리안네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와 같이 이해 깊게 서술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버의 사상에 관해서는 K. Jaspers『Max Weber』(1921), K. Lowith『Max Weber und Karl Marx』(1932), J. Winckelmann『Max Webers Versta?ndnis von Menschen und Gesellschaft in Max Weber, Gedachtnisschrift der Ludwig-Maximilians-Universita?t Mu?nchen』(1966) 등이 있으나 그의 인간상과 사상을 서술한 전기로는 이 마리안네의 저작이 유일하다.
마리안네 베버는 부군보다 30여년을 더 살았으며 그 동안 베버의 유작을 정리 편집하는 일을 돕는 한편 문화영역에 대한 저술생활을 하다가 1954년에 여든네 살로 타계했다.
마리안네 베버의 저작으로는 여기에 초역한 막스 베버 전기 외에『회상기』(Lebenserinnerungen, 1948) 등 수 편이 있다.
이번에 삼성문화문고에 수록된 이 초역본은 전 9장 총 300여 쪽으로 원저서를 대폭 압축한 것이다. 모든 초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초抄함에 있어서도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많은 고민을 겪었다.
우선 이 책을 초역하면서 원저서가 의도하고 있는 전체적 구상을 손상해서는 안 되겠고, 또 원저서의 문장을 역자 마음대로 개필하여도 안 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이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초역하려고 노력한 것이 이 초역본이다. 원저서가 전 19장 및 종장으로 구성된 것을 이 초역본에서 전 9장으로 한 것은 원저서의 중장 약 반을 송두리째 삭제한 것이 아니라 원저서의 장을 몇 장식 합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제1장 조상, 제2장 생가와 소년시대로 되어있는 것을 이 초역본에서는 하나의 장으로 묶어서‘1. 가문과 유년 시대’로 재편성했다.
서술내용의 압축에서는 역자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원저서의 서술에서는 가계에 관한 상당분량의 서술이 있었고, 또 베버와 그의 가족 및 친지들과의 장문의 서간문이 인용되어 있다. 이런 것은 대폭 잘라도 좋다고 믿었다. 그 밖의 서술에도 베?의 사상이나 활동을 이해하는데 삭제하여도 크게 지장이 되지 않을 것이라 믿어지는 것이 있어 이런 곳을 줄이고 보니 전체 서술의 의도를 크게 손상하지 않고도 압축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원저서의 서술을 대폭 압축하다 보니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잘 되지 않아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 밖에 번역에 있어서도 용어의 부적당·생활감정의 차이에서 오는 이해의 착오 등이 없지 않으리라 믿으나 이러한 미흡한 점은 독자의 질정을 받고자 한다. ---역자 후기 중에서

올 해는 막스 베버가 서거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국내외에서는 막스 베버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부쩍 늘었다. 몇 년 전 독일에서는 막스 베버의 새로운 전기가 출간되기도 하였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대표 저서인『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새로운 연구나 번역본이 출간되기도 하고, 또 많은 전문 연구자들이“베버를 다시 보자”는 취지하에 그의 저작물들을 다시 읽는 현상을 목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막스 베버에 대한 재조명 시도는 단지 그의 서거 90주년, 100주년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주지하듯이 막스 베버라는 사상가는 사회학이나 공공행정학이라는 학문분야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고, 법학, 경제사학, 정치학, 나아가 비교종교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분야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학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화과학 방법론이나 시각은 오늘날에도 전문 연구자나 신중하게 살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막스 베버와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을 직접 읽는다는 것은 사실 전문 연구자들도 벅찬데,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일반인들은 전문 연구자들이 쓴 해설서 같은 책을 읽는 것으로 막스 베버 읽기를 대신하고 만다. 하지만,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자기 자신의 학문적 방향 정립이나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사상가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보는 시도가 때로는 필요하다. 비록 책이 서술된 시대에 대한 생소함 때문이거나 또는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할 배경지식의 부족 등으로 저작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무엇인가 얻어내기가 무척 어려울지라도 그러한 시도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막스 베버 읽기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이 요구된다.
이 책은 막스 베버의 부인인 마리안네 베버가 쓴 막스 베버 전기이다. 해서 막스 베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일을 시간 순서로 기록했다. 그러나 단순히 막스 베버의 일상사에 관한 기술만은 아니다. 그 자신이 학자이기도 했고 독자적인 저술가이기도 했던 부인이 쓴, 막스 베버의 학문적 성장과 변천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따라서 이 책의 일부 내용도 필자와 같은 비전문가에게는 막스 베버의 저작들만큼이나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완전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정리되어 우리에게 제시되는 막스 베버의 학술 저작들과는 달리, 그가 그러한 저작들을 쓰고 또 독창적인 주장을 하게 되기까지의 사상과 지식의 형성과정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이다. 즉 그의 사상을 형성한 시대적 배경이나, 동시대에 누구와 교류했고, 또 어떤 서적들을 접하면서 그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 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번에 재출간하는 이 번역서는, 원래 필자의 선친인 조기준 박사가 1975년에 삼성문화문고 시리즈물의 하나로 번역했던 것을 다시 발간한 것이다. 경제사학자로서『한국자본주의 성립사론』이나『한국경제사』 등을 저술했던 조기준 박사는 과거 자신의 경제사학 연구 방법론 정립에 있어 막스 베버가 중요한 기초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술회한 적도 있으며, 또 이 책뿐만 아니라 막스 베버 사후 베버의 제자들이 편집하고 출간한『사회경제사』를 번역하고 강의에 활용하기도 하는 등 막스 베버에 관한 이해가 깊은 학자 중의 한 분이셨다. 필자가 어렸을 때 선친의 서재에 꽂혀 있었던 많은 책들 중에 막스 베버의 저작들이 유독 손을 많이 타서 헐어져 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책의 재출간은 출판평론가인 조성일 씨가 최근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재조명되는 막스 베버 및 그에 관한 저작들 중에서 특히 선친의 이 번역서에 주목하여, 필자에게 연락하면서 시작되었다. 필자도 경제학 연구자의 한 사람이지만, 새삼스럽게 막스 베버의 전기를 다시 찾아 읽어 보면서 막스 베버, 마리안네 베버, 그리고 선친에 대한 감상에 젖어 보기도 하였다.
책의 재출간을 위해 필자가 일하는 삼성금융연구소 및 문화문고를 담당하는 삼성문화재단 등에 문의하기도 하였는바, 친절한 답변과 함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담당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특히 이 책을 발굴하고 재출간을 기획한 조성일 선생과 이 책을 재편집하고 새롭게 벼상에 나올 수 있도록 애써준 출판사 소이연에게도 감사드린다.
---다시 책을 내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내 마리안네 베버가 쓴 막스 베버 전기
시대의 비극성과 정면으로 맞섰던 정신계의 거봉
오늘날 마르크스를 대신해 더 각광받는 20세기 대표지식인


“막스 베버와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을 직접 읽는다는 것은 사실 전문 연구자들도 벅찬데,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일반인들은 전문 연구자들이 쓴 해설서 같은 책을 읽는 것으로 막스 베버 읽기를 대신하고 만다. 하지만,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자기 자신의 학문적 방향 정립이나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사상가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보는 시도가 때로는 필요하다. 비록 책이 서술된 시대에 대한 생소함 때문이거나 또는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할 배경지식의 부족 등으로 저작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무엇인가 얻어내기가 무척 어려울지라도 그러한 시도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막스 베버 읽기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이 요구된다.”
-‘다시 책을 내며’중에서

왜 막스 베버인가?

요즘 들어 부쩍 관심을 끄는 사상가가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그다. 몇 년 전 독일에서 그에 관한 새로운 전기가 출간되었고, 또 우리나라에서는『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펴냄)를 펴낸 바 있는 막스 베버 전문연구자인 김덕영 박사가 최근 막스 베버의 대표저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 펴냄)을 번역하여 새 번역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죽은 지 90년이 되었다는 십진법적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사상이 갖고 있는 현재적 의미 때문이리라.

막스 베버는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o?nnies, 1855년~1936년와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년~1918년과 더불어 현대 독일 사회학의 창시자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세기말 전환기를 이끈 사상가로 꼽힌다. 특히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가 소멸되면서 첫손 꼽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퇴장하자 더 각광받고 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팽창으로 인해 종말한다고 예언했던 칼 마르크스의 주장이 현실에서 빗나갔음이 입증된 반면 미래사회의 모든 생활영역에서는 합리화를 바탕으로 영위될 것이며, 군사력과 산업자원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 자가 세계적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한 막스 베버의 혜안 때문이 아닐까.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나 공공행정학이라는 학문분야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고, 법학, 경제사학, 정치학, 나아가 비교종교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분야에 새로운 방향을제시한 학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화과학 방법론이나 시각은 오늘날에도 전문 연구자나 신중하게 살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막스 베버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막스 베버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도 많다. 아일랜드 더블린대학 사회학과 키어런 앨런 교수의『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삼인 펴냄)을 보면 막스 베버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막스 베버가 아니다. 이 책의 부제가 말하듯 막스 베버는‘독일의 승리를 꿈꾼 극우 제국주의자’이다. 1차 세계대전을 찬양하고 동양인과 흑인을 덜 떨어진 인종이라고 비웃는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관료제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며, 우매한 대중은 오직 카리스마적 지도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학문 연구의 궁극적 목표가 독일의 정치 교육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학문이 정치에 종속된다고 보는 학자였다는 점을 접하게 되면 우리가 그동안 그에 대해 갖고 있던 명성과 진실은 신화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이런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막스 베버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의 학문이나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는 그래서 더 필요하다.

『막스 베버』는 어떤 책인가?

『막스 베버』는 막스 베버의 부인인 마리안네 베버Marianne Weber가 쓴 막스 베버 전기인『Max Weber-Ein Lebensbild』(Heidelberg, 1926)를 조기준 박사가 우리말로 초역抄譯한 것이다.
막스 베버의 생애·성격·가정·교우관계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 형성 및 학문 활동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서술되어 있는 이 전기가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지은이 마리안네 베버가 막스 베버와 생활은 물론 사상세계에서도 함께 호흡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체험하였던 것을 고스란히 진술하였기 때문이다.
전 19장 및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78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인 원전은 베버의 조상, 친가 및 외가의 가계·가업·신앙 및 가풍, 베버의 탄생·유년·학생 및 군대시절, 결혼, 교유, 대학재직 시의 학생과의 관계, 그의 학문적 활동, 이병罹病과 투병, 19세기 말의 독일의 사회상, 이에 대한 베버의 견해와 정치활동, 공산주의의 대두와 혁명, 제1차 세계대전, 베버의 군복무, 독일의 패전과 강화의 전말 등등, 한 인간으로서,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세기의 전환기에 처한 한 위대한 사상가로서 베버의 모습이 그 실상을 보듯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초역본은 전 9장 총 270여 쪽으로 원저서를 대폭 압축한 것이다. 옮긴이는 이 책을 초역하면서 원저서가 의도하고 있는 전체적인 구상을 손상하지 않고, 또 원저서의 문장을 마음대로 개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전 9장으로 축약하였다. 원저서의 약 절반을 송두리째 삭제한 것이 아니라 원저서의 장을 몇 장씩 합편하여 편성한 것이다. 서술내용의 압축에서는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전체적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가계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서술과 또 베버와 그의 가족 및 친지들이 주고받은 장문의 서간문을 대폭 줄였다. 그 밖에도 베버의 사상이나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지장이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는 부분도 함께 정리했다.

이 책은 조기준 박사의 우리말 번역으로 1975년 삼성문화문고 시리즈물의 하나로 출간되었던 것인데, 작고한 조기준 박사를 대신하여 아들 조명기 씨와 협의하여 문장과 낱말을 요즘 식으로 손질하여 다시 출간하였다.

막스 베버는 누구인가?(이 책의 내용)

막스 베버는 1864년 4월 21일 독일 튀링겐 주 에르푸르트에서 막스 베버 1세와 헬레네 팔렌슈타인 사이에서 8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막스 베버는 공무원이자 정치가였고, 어머니 헬레네 팔렌슈타인은 신앙심이 깊은 칼뱅주의자였다. 막스 베버의 가문은 수 세대에 걸쳐 빌레페르트의 아마포亞麻布업자로 상업계에 이름을 드날린 터라 자만심이 가득한 가문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런 상업적 가문분위기는 후에 그의 저술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막스 베버는 일찍부터 스스로 손에 닿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해, 역사서와 고전작가의 작품들, 특히 철학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학교 수업은 인습적인 교조敎條를 되풀이할 뿐 두뇌에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막스 베버는 불손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냉담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1882년 봄에 치른 김나지움 졸업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얻어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호리호리한데다가 화사하지만 손발이 작고 어깨가 축 늘어진‘결핵후보자’인 그는 만 열여덟 나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전공으로 선택하였고, 역사, 경제학, 철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 문화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교수의 강의는 빼놓지 않고 무엇이든 들었다.

1883년에 1년짜리 지원병으로 군에 입대한 막스 베버는 새로운 남성적 생활형식에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어느 순간‘순전히 기계적인 기술’로 수천 번 내지 수만 번 반복하는 것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적응했다. 이후 수차례 장교교육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886년 5월에 베버는 사법관시보시험에 합격하여 일단 독립할 수 있게 된다. 이듬해 베를린 대학에서 골드슈미트와 아우구스트 마이첸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여 1889년에 골드슈미트 교수의 지도로 『중세상사회사서설中世商事會社序說』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학위 심사의 필수코스인 공개구술시험에서 19세기 로마사 연구의 최고권위자 테오도르 몸젠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몸젠은 이렇게 말하고 논쟁을 마무리했다.

“나는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완전하게 승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며, 반론을 더 이상 계속할 의향도 없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선뜻 찬성할 수 없는 새로운 생각을 품는 일이 왕왕 있는데, 이것이 아마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한 발짝 한 발짝 묘지로 향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아들이여, 나의 창을 들어다오. 나의 팔에는 이제 힘이 없어 그것이 무겁구나’라는 말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높이 평가하는 막스 베버에게 하게 될 것이다.”

1891년, 아우구스트 마이첸 교수의 지도 아래 『로마제정시대 농업사』라는 논문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자격인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을 받은 그는 이듬해부터 베를린 대학의 강단에 오른다. 1888년에는 역사학파에 속한 경제학자들의 모임인‘사회정책학회’에 가입하여 당시 독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는 한편 좌파 성향이 복음주의 사회 의회에 가입하는 등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1890년 독일 동부로 외국노동자들이 유입하자 이에 관한 연구를 하여‘독일 동엘베 지방의 농업노동자의 상태’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농업 경제학 분야에서 명성을 쌓는다.

막스 베버는 1893년 9월 20일 애초 사랑하던 이종사촌과 헤어지고 5촌간(막스 베버의 큰아버지의 맏딸의 딸)인 마리안네 슈니트거와 결혼한다. 그녀는 도시에서 교양을 쌓았으나 여자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외어링하우젠으로 와서 막스 베버 집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은 급속하게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막스 베버는 1897년에 뜻하지 않는 불행과 만난다. 어머니 헬레네가 아들 집에 와서 오래 머물곤 하였는데, 여기에서 소외감을 느낀 아버지가 아내의 아들 집 체류기간을 줄이려고 아들과 담판을 지었던 것. 그런데 이때 아들은 약자인 어머니 편을 들어 강경한 주장을 굽히지 않자 결국 부자父子는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화해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그런데 이 일로 머리를 식히려고 여행을 떠났던 아버지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때의 갈등은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불화가 있었는데, 전형적인 부르주아지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색다른 의견을 가지려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는 등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겪은 후 막스 베버는 우울증을 앓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한다. 심한 신경쇠약으로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투병생활까지 하게 된다.

1893년부터 그의 대표작『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집필하기 시작한 막스 베버는 병 등의 이유로 1904년 하에델베르크 정교수 직에서 물러나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저널》 공동편집인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그해 하버드 대학의 후고 뮌스터베르크 교수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독일 농업에 관해 강연하는 한편 자본주의 심장부를 직접 경험한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큰 관심을 보이며 러시아 혁명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에른스트 트뢸치, 칼 야스퍼스 등 쟁쟁한 학자들과도 교류한다. 1912년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규합하기 위하여 좌파 정당 조직에 나서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하여 하이델베르크의 군 병원에서 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한 그는 독일 제국의 확장과 전쟁에 대한 생각이 점차 바뀌어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독일의 승리를 위해 나선다.

1919년에는 뮌헨에서 사회학 학회의 회장이 되었으나 개인의 사회학 직위를 갖지는 않았다. 1920년 1월 사회주의 정치가 쿠르트 아이스너의 암살범인 우익 청년장교 아르코 백작에 대한 처형을 주장해 보수우익 학생들과 갈등을 빚자 우파의 선동으로 정계를 떠난다. 이후 전적으로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강연을 하면서 지내다가 1920년 6월 14일 뮌헨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