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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한나라 무제 시대!
적극적 성격의 영명한 전제군주였던 무제는 모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서, 당시 중국과 중화 세계 전체에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지은이 요시카와 고지로의 아름다우면서도 독자를 배려한 쉬운 필치는 무제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실상을 생동감 있는 표현과 핍진한 묘사로 되살려내고 있다.
적극적 성격의 영명한 전제군주였던 무제는 모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서, 당시 중국과 중화 세계 전체에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지은이 요시카와 고지로의 아름다우면서도 독자를 배려한 쉬운 필치는 무제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실상을 생동감 있는 표현과 핍진한 묘사로 되살려내고 있다.
목차
1장 아교와 궁중의 여인들
2장 흉노 정벌
3장 인재의 발탁과 현량
4장 서역을 향한 꿈
5장 신선과 불로장생을 찾아서
6장 황실의 비극 (상)
7장 황실의 비극 (하)
8장 맺음말
관계 연표
옮긴이 후기
2장 흉노 정벌
3장 인재의 발탁과 현량
4장 서역을 향한 꿈
5장 신선과 불로장생을 찾아서
6장 황실의 비극 (상)
7장 황실의 비극 (하)
8장 맺음말
관계 연표
옮긴이 후기
책 속으로
나로서는 이렇듯 기세 드높았던 이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전환기였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중국의 사상사와 문학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 사회사?경제사?정치사의 영역에서도 대체로 최초의 획기적 시대였다고 하겠다.
--- p.6
하지만 문제와 경제는 모두 내치에 주력하는 온순한 천자였으며, 한편으로 흉노 쪽에서도 영웅 묵돌선우가 죽고 난 뒤였으므로, 양국 사이에는 반세기 이상이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제국의 입장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굴욕적인 평화라고 하겠다.
이러한 굴욕을 설욕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의 하나라고 의식하며 제위에 올랐던 인물이 바로 무제였다.
--- p.72
비단 무제 시대뿐만 아니라, 이후로 오래도록 중국 2천 년의 역사를 일관해온 이념이자 실천 덕목이기도 하였던 가장 중대한 한 가지 사항, 곧 정치는 반드시 교양있는 인간에게 맡겨야 하며, 그러한 교양은 유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전통은 바로 이때 확정되었다. 그리고 후세 과거제도 또한 여기에서 시초를 열였던 셈이다.
하지만 만약 이렇듯 중대한 사항의 확립이 동중서의 진언이나, 무제의 개인적 기호에 따라서만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라 하겠다. 한나라 초기 이후로 점차 높아져 간 유학에 대한 요구로 인해 그러한 형세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 p.151
연호(年號)를 가지고 햇수를 세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특수한 풍습은 한나라 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처럼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 하는 식으로 한 명의 천황이 재위하는 기간을 하나의 연호로 일관되게 지칭하는 경우는 비교적 새로운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 중국에서는 14세기 명나라 이후부터 관례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한 사람의 천자가 재위 기간에 몇 차례나 연호를 바꾸었다. 이른바 ‘개원(改元)’을 시행했던 것이다. 연호의 창시자 무제도 55년에 걸친 오랜 재위 기간에 열 차례나 개원을 단행하였다. 그중에서 처음 여섯 차례는 6년마다 연호를 바꿨다.
--- p.168~169
이렇듯 장대한 순행은 물론 대내외적으로 위세를 시위하려는 의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순행에는 외국 사신들이 대거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 또한 고대 성왕(聖王)들이 사방으로 ‘순수(巡狩)’했던 일을 흉내 낸 것은 유학적 이념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명산의 신들께 제사를 올리고, 동해의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仙山)을 멀리 바라보고자 하는, 신령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중요한 동기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순행 도중 종종 그 고장의 지방관이 행차를 영접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황제의 적극주의에 상당한 동정을 느끼는 나로서도 심히 언짢아지는 대목이라 하겠다.
--- p.215~216
유학에 있어서 문화에 대한 의식이 오로지 정신적인 방향 축으로만 쏠리게 된 것은 송나라 이후의 현상이었다. 한나라 시대 유학은 그렇지는 않았다. 문화는 반드시 육안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 증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건장궁의 건설은 무제가 자신의 가슴 속에 품었던 문화주의의 총결산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이들 대규모 건조물은 대외적으로 번속국의 사신들에게 한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당시의 의식으로는 인류 문화의 가능성을 문화의 바깥에 존재하는 불행한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교재의 역할을 하였다. 그 같은 이유에서 또한 황제가 건립하는 대규모 건조물은 태평성세의 상징으로 나라 안의 백성들에게서도 외려 호감을 사며 환영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 p.223~224
시대적 분위기의 중심이자 원천이 되었던 것이 황제의 강인한 성격이었다. 황제의 성격과 시대의 성격이 서로 긴밀하게 잘 대응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시대가 보여준 활력의 진정한 원천이었다. (중략) 요컨대 무제는 시종일관 시대 전체를 대표하며 자기 시대의 욕망을 구현?수행하는 대표 주자였다.
--- p.285
진 제국이 단시일 내에 멸망하고 만 것은,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행사하는 데에만 급급하였지 정작 백성들에게서 존경받을 정도의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권위를 수반하지 않는 권력은 중국에서도 무력한 것이었다.
--- p.6
하지만 문제와 경제는 모두 내치에 주력하는 온순한 천자였으며, 한편으로 흉노 쪽에서도 영웅 묵돌선우가 죽고 난 뒤였으므로, 양국 사이에는 반세기 이상이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제국의 입장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굴욕적인 평화라고 하겠다.
이러한 굴욕을 설욕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의 하나라고 의식하며 제위에 올랐던 인물이 바로 무제였다.
--- p.72
비단 무제 시대뿐만 아니라, 이후로 오래도록 중국 2천 년의 역사를 일관해온 이념이자 실천 덕목이기도 하였던 가장 중대한 한 가지 사항, 곧 정치는 반드시 교양있는 인간에게 맡겨야 하며, 그러한 교양은 유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전통은 바로 이때 확정되었다. 그리고 후세 과거제도 또한 여기에서 시초를 열였던 셈이다.
하지만 만약 이렇듯 중대한 사항의 확립이 동중서의 진언이나, 무제의 개인적 기호에 따라서만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라 하겠다. 한나라 초기 이후로 점차 높아져 간 유학에 대한 요구로 인해 그러한 형세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 p.151
연호(年號)를 가지고 햇수를 세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특수한 풍습은 한나라 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처럼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 하는 식으로 한 명의 천황이 재위하는 기간을 하나의 연호로 일관되게 지칭하는 경우는 비교적 새로운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 중국에서는 14세기 명나라 이후부터 관례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한 사람의 천자가 재위 기간에 몇 차례나 연호를 바꾸었다. 이른바 ‘개원(改元)’을 시행했던 것이다. 연호의 창시자 무제도 55년에 걸친 오랜 재위 기간에 열 차례나 개원을 단행하였다. 그중에서 처음 여섯 차례는 6년마다 연호를 바꿨다.
--- p.168~169
이렇듯 장대한 순행은 물론 대내외적으로 위세를 시위하려는 의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순행에는 외국 사신들이 대거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다. 또한 고대 성왕(聖王)들이 사방으로 ‘순수(巡狩)’했던 일을 흉내 낸 것은 유학적 이념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명산의 신들께 제사를 올리고, 동해의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仙山)을 멀리 바라보고자 하는, 신령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중요한 동기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순행 도중 종종 그 고장의 지방관이 행차를 영접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황제의 적극주의에 상당한 동정을 느끼는 나로서도 심히 언짢아지는 대목이라 하겠다.
--- p.215~216
유학에 있어서 문화에 대한 의식이 오로지 정신적인 방향 축으로만 쏠리게 된 것은 송나라 이후의 현상이었다. 한나라 시대 유학은 그렇지는 않았다. 문화는 반드시 육안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 증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건장궁의 건설은 무제가 자신의 가슴 속에 품었던 문화주의의 총결산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이들 대규모 건조물은 대외적으로 번속국의 사신들에게 한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당시의 의식으로는 인류 문화의 가능성을 문화의 바깥에 존재하는 불행한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교재의 역할을 하였다. 그 같은 이유에서 또한 황제가 건립하는 대규모 건조물은 태평성세의 상징으로 나라 안의 백성들에게서도 외려 호감을 사며 환영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 p.223~224
시대적 분위기의 중심이자 원천이 되었던 것이 황제의 강인한 성격이었다. 황제의 성격과 시대의 성격이 서로 긴밀하게 잘 대응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시대가 보여준 활력의 진정한 원천이었다. (중략) 요컨대 무제는 시종일관 시대 전체를 대표하며 자기 시대의 욕망을 구현?수행하는 대표 주자였다.
--- p.285
진 제국이 단시일 내에 멸망하고 만 것은,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행사하는 데에만 급급하였지 정작 백성들에게서 존경받을 정도의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권위를 수반하지 않는 권력은 중국에서도 무력한 것이었다.
--- p.292
출판사 리뷰
무려, 국내에서 네 번째 출간되는 한 무제 평전!
1949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세계적인 중국학 학자인 요시카와 고지로의 책 『한 무제―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이 책은 국내에서만 무려 네 번째 재출간되었는데, 1979년 태양문화사, 1993년 명문당, 2008년 천지인 출판사에서 펴낸 것을 이번에 새롭게 다시 번역하여 출간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이 책이 반복 출간되는 데는 ‘한 무제’라는 인물의 중요성과 역사적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고대 역사를 다룬 책임에도 마치 현재의 인물들을 그린 듯 생생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촌철살인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왜 다시 ‘한 무제’인가?!
한 무제는 세계 제국인 중국을 이끈 제왕으로 평가받는다. 진시황이 통일을 했다고 하지만, 통일 중국의 기초는 한 무제가 세웠기 때문이다. 한 나라 7대 황제인 그는 54년(기원전 141~기원전 87)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 흉노 정벌, 남월, 민월, 서남이 등 이민족 평정을 통해 국가 안정을 꾀하고 지금의 중국 영토를 확정했으며, 장건을 서역에 파견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동서 교역과 문화의 교류를 하는 물꼬를 열었다.
또한, 연호를 시행하고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이후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한편, 재위 초기 외척의 횡포로 힘들었던 점을 염두하여 어린 황태자의 외척 세력을 미리 처단하는 등의 조처를 해 왕권 강화에 힘썼다.
이런 무제의 통치에 힘입어 이후 소제, 선제 등의 시기에 한나라는 더욱 융성할 수 있었다. 물론 무제 혼자 이런 업적을 만든 것은 아니다. 무제의 조부와 부친인 선대 황제들의 유산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권력’ 행사만을 한 진시황제와 달리 백성들에게서 존경받는 ‘권위’를 가진 ‘권력’을 지닌 황제로 한 무제를 평가한다. 창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성’에도 중점을 둔 것이다. 이것이 한 무제 리더십의 핵심이며, 이러한 리더십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약 2천 년 전의 한 무제와 그를 다룬 책이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중국의 동북공정 및 역사 왜곡으로 반중 정서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이어 중국까지 가세하고 있는 데는, 각국이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가 필수 이수 과목이 아니지 않았는가? 한국사가 필수가 아닌 상황에 세계사나 동아시아사까지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문화권’ 혹은 ‘한자 문화권’, ‘유교 문화권’으로 묶이는 이 지역의 원형이 어떻게 형성되고 만들어졌는지,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를 알고 대처하는 것은 역사 왜곡에 대처하는 정공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길에 가장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1949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세계적인 중국학 학자인 요시카와 고지로의 책 『한 무제―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이 책은 국내에서만 무려 네 번째 재출간되었는데, 1979년 태양문화사, 1993년 명문당, 2008년 천지인 출판사에서 펴낸 것을 이번에 새롭게 다시 번역하여 출간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이 책이 반복 출간되는 데는 ‘한 무제’라는 인물의 중요성과 역사적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고대 역사를 다룬 책임에도 마치 현재의 인물들을 그린 듯 생생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촌철살인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왜 다시 ‘한 무제’인가?!
한 무제는 세계 제국인 중국을 이끈 제왕으로 평가받는다. 진시황이 통일을 했다고 하지만, 통일 중국의 기초는 한 무제가 세웠기 때문이다. 한 나라 7대 황제인 그는 54년(기원전 141~기원전 87)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 흉노 정벌, 남월, 민월, 서남이 등 이민족 평정을 통해 국가 안정을 꾀하고 지금의 중국 영토를 확정했으며, 장건을 서역에 파견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동서 교역과 문화의 교류를 하는 물꼬를 열었다.
또한, 연호를 시행하고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이후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한편, 재위 초기 외척의 횡포로 힘들었던 점을 염두하여 어린 황태자의 외척 세력을 미리 처단하는 등의 조처를 해 왕권 강화에 힘썼다.
이런 무제의 통치에 힘입어 이후 소제, 선제 등의 시기에 한나라는 더욱 융성할 수 있었다. 물론 무제 혼자 이런 업적을 만든 것은 아니다. 무제의 조부와 부친인 선대 황제들의 유산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권력’ 행사만을 한 진시황제와 달리 백성들에게서 존경받는 ‘권위’를 가진 ‘권력’을 지닌 황제로 한 무제를 평가한다. 창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성’에도 중점을 둔 것이다. 이것이 한 무제 리더십의 핵심이며, 이러한 리더십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약 2천 년 전의 한 무제와 그를 다룬 책이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중국의 동북공정 및 역사 왜곡으로 반중 정서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이어 중국까지 가세하고 있는 데는, 각국이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가 필수 이수 과목이 아니지 않았는가? 한국사가 필수가 아닌 상황에 세계사나 동아시아사까지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문화권’ 혹은 ‘한자 문화권’, ‘유교 문화권’으로 묶이는 이 지역의 원형이 어떻게 형성되고 만들어졌는지,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를 알고 대처하는 것은 역사 왜곡에 대처하는 정공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길에 가장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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