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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서양사학계의 거목 주명철 교수 필생의 역작인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그 장대한 서막이 열리다!
2권은 1789년 전국신분회가 첫 회의를 열 때부터 루이 16세와 가족이 파리에 정착할 때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175년 만에 열린 전국신분회를 통해 루이 16세는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책에 동의를 구하고자 했으나 경제적 고통을 가장 많이 떠안아야 할 제3신분의 요구는 묵살한 채 각 신분 대표들의 자격심사 문제를 먼저 명한다. 이에 제3신분은 세 신분이 함께 자격심사를 하자고 주장했고 특권층은 분열했다. 절대다수의 귀족이 제3신분과 대화를 거부했지만 종교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대화를 하자는 축이 거의 3분의 2나 되었다. 그리하여 제3신분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특히 앙시앵레짐 시기에는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정치활동이 이제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됨으로써 그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날로 향상됨에 따라 여론을 형성하여 입법가들을 지지하거나 압박하면서 정치적 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은 오늘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그 장대한 서막이 열리다!
2권은 1789년 전국신분회가 첫 회의를 열 때부터 루이 16세와 가족이 파리에 정착할 때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175년 만에 열린 전국신분회를 통해 루이 16세는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책에 동의를 구하고자 했으나 경제적 고통을 가장 많이 떠안아야 할 제3신분의 요구는 묵살한 채 각 신분 대표들의 자격심사 문제를 먼저 명한다. 이에 제3신분은 세 신분이 함께 자격심사를 하자고 주장했고 특권층은 분열했다. 절대다수의 귀족이 제3신분과 대화를 거부했지만 종교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대화를 하자는 축이 거의 3분의 2나 되었다. 그리하여 제3신분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특히 앙시앵레짐 시기에는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정치활동이 이제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됨으로써 그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날로 향상됨에 따라 여론을 형성하여 입법가들을 지지하거나 압박하면서 정치적 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은 오늘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목차
시작하면서
제1부 국회의 탄생
1. 파리의 전국신분회 대표 선거
2. 파리 제3신분의 진정서
3. 전국신분회 개최
4. 국민의회 선포와 죄드폼의 맹세
5. 루이 16세, 당신만 신성한가?
제2부 바스티유 정복
1. 혁명의 중심지 파리
2. 네케르의 해임과 파리의 대응
3. 국회의 결의
4. 바스티유 정복
5. 바스티유의 피정복자들 1
6. 바스티유의 피정복자들 2
7. 바스티유의 정복자들
8. 파리 코뮌의 탄생
9. 지방 도시의 봉기
10. 대공포
제3부 인간과 시민의 권리
1. 강제위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 제헌의회의 활동 시작
3. 8월 4일 밤의 선언
4. 인권선언
5. 왕의 거부권
6. 파리 아낙들의 베르사유 행진
7. 파리로 가는 길
연표
제1부 국회의 탄생
1. 파리의 전국신분회 대표 선거
2. 파리 제3신분의 진정서
3. 전국신분회 개최
4. 국민의회 선포와 죄드폼의 맹세
5. 루이 16세, 당신만 신성한가?
제2부 바스티유 정복
1. 혁명의 중심지 파리
2. 네케르의 해임과 파리의 대응
3. 국회의 결의
4. 바스티유 정복
5. 바스티유의 피정복자들 1
6. 바스티유의 피정복자들 2
7. 바스티유의 정복자들
8. 파리 코뮌의 탄생
9. 지방 도시의 봉기
10. 대공포
제3부 인간과 시민의 권리
1. 강제위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 제헌의회의 활동 시작
3. 8월 4일 밤의 선언
4. 인권선언
5. 왕의 거부권
6. 파리 아낙들의 베르사유 행진
7. 파리로 가는 길
연표
책 속으로
왕은 왕국의 조화와 행복을 언급하고 번영을 얘기했지만 이미 왕과 제3신분 대표 사이의 거리만큼 귀족이나 성직자의 특권층과 평민 사이의 거리도 좁힐 수 없는 것임을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예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명 정도의 참관인은 중앙홀에서 일어나는 연극 같은 장면이 앙시앵레짐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참관인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정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앙시앵레짐 시대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그날 이후 프랑스의 정치는 대중에게 공개될 것이다. 대중은 입법가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여론으로 그들을 지지하거나 압박하면서 정치적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날 이후 혁명기 정치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 우리는 정치가뿐만 아니라 대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6월 20일 ‘죄드폼의 맹세’를 묘사한 그림에서 창에 붙어 의원들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입법활동을 직접 참관할 것이다. --- p.34
이렇게 볼 때 제3신분이 국회를 선포하고 주도하면서 왕의 의지를 꺾은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들은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라는 듯이 의원의 면책특권을 결의했다. 이로써 국회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였고 왕은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혁명’은 아직도 수많은 사건과 함께 흘러간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하나하나 일어났고, 또 이후로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돌이켜보았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고 해냈던가?”라고 깜짝 놀라는 그런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은 예전의 신성한 권력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전국신분회의 제3신분이 국회의 ‘평민’이 되었고, 왕처럼 ‘신성한 존재’가 되면서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로써 정치적 앙시앵레짐은 6월 23일로 죽었다. --- pp.60-61
이즈음에서 의문을 품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바이이와 라파예트 그리고 파리 선거인단은 왜 군중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고 귀족 관리의 목숨을 구해주려고 애썼던가? 우리가 오늘날의 낱말을 쓴다면 일종의 ‘계급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선거인단은 성인 남자 가운데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뽑은 전국신분회 대표는 여느 선거인보다 더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중략) 그들은 새로 태어나는 질서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지배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합법성’이었기 때문에 ‘정식재판’을 거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탄압당한 기억을 현실적 행위에 투영한 시위 군중은 ‘재판’이라는 과정에는 동의하더라도 이제 자신들의 세상이 된 만큼 자신들의 방식대로 재판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중은 이미 유죄판결을 하고 잡아들인 풀롱이나 소비니 같은 사람에게 형을 집행하는 일만이 남은 절차라고 보았다. 앞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시장이나 국민방위군 사령관, 선거인단의 소극적인 태도에 수없이 좌절할 것이다. --- p.165
페리스는 조세란 공공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내야 할 빚이며, 조세를 내지 않는 사람은 공화국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가혹한 세금을 걷는 세리는 늘 나쁜 사람이었지만, 페리스의 말대로 탈세자가 공화국의 도둑이라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탈세자 가운데 큰 도둑이 얼마나 많은가! 페리스는 조세의 성격에 대해 얘기한 뒤 이 원리에 맞는 조항을 제안했다. 그 뒤에 여러 의원이 잇달아 일어나서 발언했고, 결국 여러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6위원회 안을 수정한 결과로써 인권선언문의 제14조를 결정했다. --- p.258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년 전만 하더라도 왕이 법을 만들면 고등법원이 등기권과 상주권을 이용해 법을 시행하는 데 저항했다. 그런데 이제 국민의 대표들이 법을 만들면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저항하게 되었다. 왕이 입법부가 제출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앙시앵레짐의 뿌리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이 계속 거부권을 행사해 새로운 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왕도 그 행위로써 자신이 이제는 절대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임을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 모이는 사람들은 불만이 생길 때마다 베르사유로 행진하는 계획을 세우고 국회와 왕을 압박했으니 비록 국민방위군의 힘으로 그 계획을 한두 번은 무산시킬 수 있다 할지라도 왕의 권위와 운명이 점점 초라해지고 위험해지는 과정을 틀어막기란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 pp.291-292
오후 1시에 왕과 왕비는 베르사유 궁을 떠났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1682년부터 왕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된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 어물전 아낙네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에게 주인을 빼앗겼다. 왕, 왕비, 세자, 공주, 왕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공주, 프로방스 백작 부부, 세자의 가정교사 투르젤 부인이 마차에 함께 탔다. 아르투아 백작 부부는 일찍이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에 왕의 일가는 딱 그만큼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마차에 는 시메 공작부인, 왕궁의 시녀들과 하인들이 탔다. 국회의원들이 탄 마차가 행렬의 맨 뒤에 따라갔다. 모두 100여 대나 파리로 향했다. 그 곁을 호위하듯이 둘러싼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신나게 떠들어댔다.
“이제 우리는 빵 걱정을 하지 않겠지. 제빵사, 마누라, 심부름꾼을 데려가니까.”
예나 지금이나 정부는 국민의 식량을 마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부르봉 왕가의 첫 왕 앙리 4세는 일요일에 한 끼 정도는 백성의 밥상에 닭고기를 올리게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200년 뒤의 루이 16세는 ‘제빵사’ 노릇을 하러 파리로 끌려갔다.
이렇게 볼 때 제3신분이 국회를 선포하고 주도하면서 왕의 의지를 꺾은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들은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라는 듯이 의원의 면책특권을 결의했다. 이로써 국회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였고 왕은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혁명’은 아직도 수많은 사건과 함께 흘러간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하나하나 일어났고, 또 이후로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돌이켜보았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고 해냈던가?”라고 깜짝 놀라는 그런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은 예전의 신성한 권력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전국신분회의 제3신분이 국회의 ‘평민’이 되었고, 왕처럼 ‘신성한 존재’가 되면서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로써 정치적 앙시앵레짐은 6월 23일로 죽었다. --- pp.60-61
이즈음에서 의문을 품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바이이와 라파예트 그리고 파리 선거인단은 왜 군중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고 귀족 관리의 목숨을 구해주려고 애썼던가? 우리가 오늘날의 낱말을 쓴다면 일종의 ‘계급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선거인단은 성인 남자 가운데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뽑은 전국신분회 대표는 여느 선거인보다 더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중략) 그들은 새로 태어나는 질서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지배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합법성’이었기 때문에 ‘정식재판’을 거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탄압당한 기억을 현실적 행위에 투영한 시위 군중은 ‘재판’이라는 과정에는 동의하더라도 이제 자신들의 세상이 된 만큼 자신들의 방식대로 재판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중은 이미 유죄판결을 하고 잡아들인 풀롱이나 소비니 같은 사람에게 형을 집행하는 일만이 남은 절차라고 보았다. 앞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시장이나 국민방위군 사령관, 선거인단의 소극적인 태도에 수없이 좌절할 것이다. --- p.165
페리스는 조세란 공공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내야 할 빚이며, 조세를 내지 않는 사람은 공화국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가혹한 세금을 걷는 세리는 늘 나쁜 사람이었지만, 페리스의 말대로 탈세자가 공화국의 도둑이라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탈세자 가운데 큰 도둑이 얼마나 많은가! 페리스는 조세의 성격에 대해 얘기한 뒤 이 원리에 맞는 조항을 제안했다. 그 뒤에 여러 의원이 잇달아 일어나서 발언했고, 결국 여러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6위원회 안을 수정한 결과로써 인권선언문의 제14조를 결정했다. --- p.258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년 전만 하더라도 왕이 법을 만들면 고등법원이 등기권과 상주권을 이용해 법을 시행하는 데 저항했다. 그런데 이제 국민의 대표들이 법을 만들면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저항하게 되었다. 왕이 입법부가 제출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앙시앵레짐의 뿌리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이 계속 거부권을 행사해 새로운 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왕도 그 행위로써 자신이 이제는 절대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임을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 모이는 사람들은 불만이 생길 때마다 베르사유로 행진하는 계획을 세우고 국회와 왕을 압박했으니 비록 국민방위군의 힘으로 그 계획을 한두 번은 무산시킬 수 있다 할지라도 왕의 권위와 운명이 점점 초라해지고 위험해지는 과정을 틀어막기란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 pp.291-292
오후 1시에 왕과 왕비는 베르사유 궁을 떠났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1682년부터 왕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된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 어물전 아낙네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에게 주인을 빼앗겼다. 왕, 왕비, 세자, 공주, 왕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공주, 프로방스 백작 부부, 세자의 가정교사 투르젤 부인이 마차에 함께 탔다. 아르투아 백작 부부는 일찍이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에 왕의 일가는 딱 그만큼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마차에 는 시메 공작부인, 왕궁의 시녀들과 하인들이 탔다. 국회의원들이 탄 마차가 행렬의 맨 뒤에 따라갔다. 모두 100여 대나 파리로 향했다. 그 곁을 호위하듯이 둘러싼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신나게 떠들어댔다.
“이제 우리는 빵 걱정을 하지 않겠지. 제빵사, 마누라, 심부름꾼을 데려가니까.”
예나 지금이나 정부는 국민의 식량을 마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부르봉 왕가의 첫 왕 앙리 4세는 일요일에 한 끼 정도는 백성의 밥상에 닭고기를 올리게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200년 뒤의 루이 16세는 ‘제빵사’ 노릇을 하러 파리로 끌려갔다.
--- pp.322-323
출판사 리뷰
한국서양사학계의 거목 주명철 교수 필생의 역작인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그 장대한 서막이 열리다!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해야 한다.”
“우리는 노예상태에서 자유로 아주 빨리 넘어왔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에서 노예상태로 더 빨리 걸어간다.”
(루스탈로, 『파리의 혁명』)
2015년이 차츰 저물어가는 이때, 새삼스럽게도 우리는 ‘자유’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자유’의 대척점에는 ‘부자유’와 ‘억압’, ‘독재’가 자리하고 있다. 곳곳에서 역사의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려는 무망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과거에서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교훈이 오늘의 실수를 막고 미래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고립되거나 필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장강과도 같은 역사는 어느 한 개인이 이끌어온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온 인류의 집단적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는 무수한 혁명들이 있었다. 신석기 혁명(농업혁명), 철기혁명, 산업혁명 외에도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문화혁명, 쿠바 혁명, 우리의 4·19혁명, 최근 불거진 아랍권의 혁명 등 저마다 배경과 시기와 발발 원인은 다르지만 인류사에서 혁명은 늘 엄청난 변곡점을 이루어왔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원래 혁명을 뜻하는 단어 ‘revolution’[레볼루션]은 ‘천체의 운행’을 뜻했다. 그 자체로 ‘큰 변화’, ‘대변혁’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 말은 사회·정치적 측면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근본적 변화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익숙했던 삶이 송두리째, 뿌리부터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세력이라면 혁명은 당연히 불온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다수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는 피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쟁취해야 할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누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군사정변이 곧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사정변은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체주의를 지향하고 혁명은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유를 지향한다. 두 가지가 비슷하게 보일 때도 근본 원칙에서 확연히 다른 것이다.”
한국인 저술 최초의 프랑스 혁명사 대서사시
한국서양사학회 회장을 지낸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이라는 대작의 첫 두 권을 선보여 학계와 출판계의 주목을 끈다.
226년 전인 1789년 7월 14일, 무장한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그동안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논문과 관련서가 나와 있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저서와 번역서가 나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혁명이 시작된 1789년부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난 1794년까지를 무려 10권에 세밀히 다루려는 저작은 아직까지 출판된 적이 없다. 남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일어난 혁명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프랑스 혁명의 교훈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유용할뿐더러 그간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해왔다는 것을 자각하고 우리 목소리로 또 우리 시각으로 프랑스 혁명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앙시앵레짐(구제도, 구체제)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막연히 앙시앵레짐은 모두 사라져야 마땅한 모순투성이 체제였으며 루이 16세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으로만 일관한 개념 없는 왕비였다는 식의 무비판적 혹은 몰역사적 선입견을 가진 채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고 서술해온 그간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앙시앵레짐 자체에 대한 면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더불어 그간 별 문제의식 없이 일본에서 들여온 용어를 그대로 따라 써온 (혐의가 짙은) 학계의 나태한 관행에 일침을 가하면서 이제라도 우리의 관점을 확고히 세우고 학문적 비판의 날을 벼려야 함을 역설한다. 저자가 특히 비판하는 용어는 ‘삼부회’인데, 이는 일본 학계에서 ‘三部會’라고 이름붙인 것을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 편찬자들이 단순히 한글 음만 따 붙였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전국신분회’로 명명한다. 또한 흔히 외국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는 ‘망탈리테mentalites’라는 용어도 ‘집단정신자세’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으며 ‘총독’으로 번역하는 ‘gouverneur’[구베르뇌르]는 ‘군장관’이라 해야 더욱 명확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나아가 독자의 귀에 익숙한 ‘바스티유 함락’이라는 용어보다는 ‘바스티유 정복’이라는 말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정복’의 주체는 행동하는 인간이고 ‘함락’의 주체는 대상이라는 점, 그런데 역사는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물론 그 시대 사료에서 ‘함락’이라는 뜻으로 쓰는 사례를 소개할 때는 ‘정복’을 고집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높은 이상을 내걸고 실천하려는 프랑스 혁명도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고, 그렇게 해서 겨우 틀을 갖추고 조금씩 실현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것”이며, “역사는 살면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행동하는 인간의 기록이다. 인간은 기록을 통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배우고, 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는 동시에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이 인류의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라도 프랑스 혁명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2권 도입부에서 그동안 역시 별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온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근본부터 되짚어야 함을 역설한다.
독자 가운데에는 고등학교 시절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고 배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무조건 그렇다고 외워야 했지 왜 그렇게 정의하는지 설명을 듣지는 못했으리라. 먼저 ‘전형’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보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관찰자의 위치와 가설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데, 어찌 나라마다 다른 형태로 일어나는 혁명에 전형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독특한 역사관을 반영한 말이 분명하다. ‘전형’이라는 말은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보기라는 뜻인데, 프랑스 혁명이 각 나라마다 다른 맥락에서 일어난 혁명의 특징을 모두 갖추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 말에 대답하기 어렵다면 이제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는 말로 넘어가 다시 한번 물어보자. 프랑스 혁명이 시민혁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보기인가? 그렇다면 ‘시민혁명’이란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세계사 교과서에 그 말을 쓴 저자들은 시민혁명의 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민’을 ‘부르주아’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우리말로 ‘시민혁명’이라고 간단히 옮겼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것을 시민혁명이라고 번역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부르주아를 시민이라고 옮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부르주아 혁명과 시민혁명을 구별해야 한다. (중략) 부르주아 혁명을 시민혁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적 개념인 부르주아와 정치적 개념인 시민을 혼동한 셈이다.
이렇듯 저자는 용어 하나하나부터 면밀한 고찰과 세심한 선택을 통해 역사를 서술하는 것의 중요함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앙시앵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저자는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을 거부한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차라리 혁명을 낳고 변형되거나 폐지되거나 먼 훗날 부활하지만 그때의 사정에 맞게 변질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1789년 왕정이 타성에 젖어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는 말을 신중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으며,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한편 그 사실 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피력한다. 요컨대 역사적 대사건이었던 ‘프랑스 혁명’은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큰 산과도 같은 것이며 이제라도 우리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읽고 토론하면서 오늘의 반면교사로 삼자는 것이다. 족히 원고지 만 장 이상을 써내려가야 하는 노학자의 대장정이 학계와 출판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어 진지한 인문서, 역사서들이 더욱 많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의 시리즈 이름인 ‘리베르테Liberte’는 프랑스인들이 1789년을 ‘자유의 원년’으로 명명한 데서 따온 것으로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자유’를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사건이었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시리즈의 첫 책인 제1권은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한 마포구청 디자인·출판 진흥지구협의회(DPPA) 출판지원사업 선정작이며, 각 권에는 16쪽의 컬러 화보와 각 시대의 중요 사건을 정리한 연표가 들어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1790년을 집중적으로 다룰 제3권과 제4권은 2016년 출간 예정이며, 1791년을 다룰 제5권과 제6권, 1792년을 다룰 제7권과 제8권, 1793년부터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까지를 다룰 제9권과 제10권은 그 후 3~4년 내 완간할 계획이다.
2권의 주요 내용
2권은 1789년 전국신분회가 첫 회의를 열 때부터 루이 16세와 가족이 파리에 정착할 때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175년 만에 열린 전국신분회를 통해 루이 16세는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책에 동의를 구하고자 했으나 경제적 고통을 가장 많이 떠안아야 할 제3신분의 요구는 묵살한 채 각 신분 대표들의 자격심사 문제를 먼저 명한다. 이에 제3신분은 세 신분이 함께 자격심사를 하자고 주장했고 특권층은 분열했다. 절대다수의 귀족이 제3신분과 대화를 거부했지만 종교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대화를 하자는 축이 거의 3분의 2나 되었다. 그리하여 제3신분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특히 앙시앵레짐 시기에는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정치활동이 이제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됨으로써 그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날로 향상됨에 따라 여론을 형성하여 입법가들을 지지하거나 압박하면서 정치적 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은 오늘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각 신분 대표들은 곧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이는 차후 국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이 마침내 왕에 맞서 자신들도 신성하다며 면책특권을 결의하는 동안 정치적 구심점은 베르사유가 아닌 파리로 차츰 옮겨간다. 마침내 무장한 시민군이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죄수들을 풀어줌으로써 혁명이 발발하는 역사적 장면과 함께 혁명의 기운이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는 과정, 파리에 코뮌이 결성되는 과정, 농촌을 휩쓴 ‘대공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1789년 하반기에 이르러 제헌의회의 활동이 구체화하면서 당시 의원들의 헌법 제정 과정이 매우 자세히 소개된다(시공간만 치환하면 거의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의원들이 여러 날에 걸쳐 오랜 논의 끝에 탄생시킨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비록 가진 자들의 이익을 우선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얼마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잘 담아낸 바로미터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된다(실제로 이 인권선언은 이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의 제헌헌법이 얼마나 선진적인지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 탄생되는 동안에도 민중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왕과 수구세력은 여전히 혁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왕이 민중의 신임을 받던 네케르를 해임했다는 소식에다 여전히 부족한 곡물과 치솟기만 하는 빵값에 분노한 시민들이 드디어 다시 떨쳐 일어났다. 파리의 생선장수 아낙들이 주축이 되어 저마다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손에 들고 대포까지 끌고서 왕과 그 가족이 있는 베르사유 궁으로 행진해 간 민중은 마침내 왕을 굴복시켜 파리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 편이어야 할 프랑스 수비대 병사들이 빵을 달라는 아낙들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의 편에 선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며, 왕을 만나기 전에는 그토록 왕을 원망하던 민중이 막상 왕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기절을 한다거나 왕이 파리로 순순히 가겠다고 하자 곧바로 “왕 만세!”를 외치는 장면에서는 당시 민중의 순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로써 앙시앵레짐은 과거의 유물로 묻히게 되었다. 이제 ‘제빵사’ 노릇을 하러 파리로 끌려간 루이 16세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그 장대한 서막이 열리다!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해야 한다.”
“우리는 노예상태에서 자유로 아주 빨리 넘어왔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에서 노예상태로 더 빨리 걸어간다.”
(루스탈로, 『파리의 혁명』)
2015년이 차츰 저물어가는 이때, 새삼스럽게도 우리는 ‘자유’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자유’의 대척점에는 ‘부자유’와 ‘억압’, ‘독재’가 자리하고 있다. 곳곳에서 역사의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려는 무망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과거에서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교훈이 오늘의 실수를 막고 미래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고립되거나 필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장강과도 같은 역사는 어느 한 개인이 이끌어온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온 인류의 집단적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는 무수한 혁명들이 있었다. 신석기 혁명(농업혁명), 철기혁명, 산업혁명 외에도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문화혁명, 쿠바 혁명, 우리의 4·19혁명, 최근 불거진 아랍권의 혁명 등 저마다 배경과 시기와 발발 원인은 다르지만 인류사에서 혁명은 늘 엄청난 변곡점을 이루어왔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원래 혁명을 뜻하는 단어 ‘revolution’[레볼루션]은 ‘천체의 운행’을 뜻했다. 그 자체로 ‘큰 변화’, ‘대변혁’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 말은 사회·정치적 측면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근본적 변화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익숙했던 삶이 송두리째, 뿌리부터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세력이라면 혁명은 당연히 불온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다수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는 피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쟁취해야 할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누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군사정변이 곧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사정변은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체주의를 지향하고 혁명은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유를 지향한다. 두 가지가 비슷하게 보일 때도 근본 원칙에서 확연히 다른 것이다.”
한국인 저술 최초의 프랑스 혁명사 대서사시
한국서양사학회 회장을 지낸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이라는 대작의 첫 두 권을 선보여 학계와 출판계의 주목을 끈다.
226년 전인 1789년 7월 14일, 무장한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그동안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논문과 관련서가 나와 있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저서와 번역서가 나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혁명이 시작된 1789년부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난 1794년까지를 무려 10권에 세밀히 다루려는 저작은 아직까지 출판된 적이 없다. 남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일어난 혁명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프랑스 혁명의 교훈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유용할뿐더러 그간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해왔다는 것을 자각하고 우리 목소리로 또 우리 시각으로 프랑스 혁명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앙시앵레짐(구제도, 구체제)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막연히 앙시앵레짐은 모두 사라져야 마땅한 모순투성이 체제였으며 루이 16세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으로만 일관한 개념 없는 왕비였다는 식의 무비판적 혹은 몰역사적 선입견을 가진 채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고 서술해온 그간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앙시앵레짐 자체에 대한 면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더불어 그간 별 문제의식 없이 일본에서 들여온 용어를 그대로 따라 써온 (혐의가 짙은) 학계의 나태한 관행에 일침을 가하면서 이제라도 우리의 관점을 확고히 세우고 학문적 비판의 날을 벼려야 함을 역설한다. 저자가 특히 비판하는 용어는 ‘삼부회’인데, 이는 일본 학계에서 ‘三部會’라고 이름붙인 것을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 편찬자들이 단순히 한글 음만 따 붙였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전국신분회’로 명명한다. 또한 흔히 외국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는 ‘망탈리테mentalites’라는 용어도 ‘집단정신자세’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으며 ‘총독’으로 번역하는 ‘gouverneur’[구베르뇌르]는 ‘군장관’이라 해야 더욱 명확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나아가 독자의 귀에 익숙한 ‘바스티유 함락’이라는 용어보다는 ‘바스티유 정복’이라는 말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정복’의 주체는 행동하는 인간이고 ‘함락’의 주체는 대상이라는 점, 그런데 역사는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물론 그 시대 사료에서 ‘함락’이라는 뜻으로 쓰는 사례를 소개할 때는 ‘정복’을 고집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높은 이상을 내걸고 실천하려는 프랑스 혁명도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고, 그렇게 해서 겨우 틀을 갖추고 조금씩 실현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것”이며, “역사는 살면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행동하는 인간의 기록이다. 인간은 기록을 통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배우고, 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는 동시에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이 인류의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라도 프랑스 혁명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2권 도입부에서 그동안 역시 별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온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근본부터 되짚어야 함을 역설한다.
독자 가운데에는 고등학교 시절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고 배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무조건 그렇다고 외워야 했지 왜 그렇게 정의하는지 설명을 듣지는 못했으리라. 먼저 ‘전형’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보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관찰자의 위치와 가설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데, 어찌 나라마다 다른 형태로 일어나는 혁명에 전형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독특한 역사관을 반영한 말이 분명하다. ‘전형’이라는 말은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보기라는 뜻인데, 프랑스 혁명이 각 나라마다 다른 맥락에서 일어난 혁명의 특징을 모두 갖추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 말에 대답하기 어렵다면 이제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는 말로 넘어가 다시 한번 물어보자. 프랑스 혁명이 시민혁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보기인가? 그렇다면 ‘시민혁명’이란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세계사 교과서에 그 말을 쓴 저자들은 시민혁명의 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민’을 ‘부르주아’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우리말로 ‘시민혁명’이라고 간단히 옮겼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것을 시민혁명이라고 번역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부르주아를 시민이라고 옮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부르주아 혁명과 시민혁명을 구별해야 한다. (중략) 부르주아 혁명을 시민혁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적 개념인 부르주아와 정치적 개념인 시민을 혼동한 셈이다.
이렇듯 저자는 용어 하나하나부터 면밀한 고찰과 세심한 선택을 통해 역사를 서술하는 것의 중요함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앙시앵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저자는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을 거부한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차라리 혁명을 낳고 변형되거나 폐지되거나 먼 훗날 부활하지만 그때의 사정에 맞게 변질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1789년 왕정이 타성에 젖어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는 말을 신중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으며,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한편 그 사실 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피력한다. 요컨대 역사적 대사건이었던 ‘프랑스 혁명’은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큰 산과도 같은 것이며 이제라도 우리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읽고 토론하면서 오늘의 반면교사로 삼자는 것이다. 족히 원고지 만 장 이상을 써내려가야 하는 노학자의 대장정이 학계와 출판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어 진지한 인문서, 역사서들이 더욱 많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의 시리즈 이름인 ‘리베르테Liberte’는 프랑스인들이 1789년을 ‘자유의 원년’으로 명명한 데서 따온 것으로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자유’를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사건이었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시리즈의 첫 책인 제1권은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한 마포구청 디자인·출판 진흥지구협의회(DPPA) 출판지원사업 선정작이며, 각 권에는 16쪽의 컬러 화보와 각 시대의 중요 사건을 정리한 연표가 들어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1790년을 집중적으로 다룰 제3권과 제4권은 2016년 출간 예정이며, 1791년을 다룰 제5권과 제6권, 1792년을 다룰 제7권과 제8권, 1793년부터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까지를 다룰 제9권과 제10권은 그 후 3~4년 내 완간할 계획이다.
2권의 주요 내용
2권은 1789년 전국신분회가 첫 회의를 열 때부터 루이 16세와 가족이 파리에 정착할 때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175년 만에 열린 전국신분회를 통해 루이 16세는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책에 동의를 구하고자 했으나 경제적 고통을 가장 많이 떠안아야 할 제3신분의 요구는 묵살한 채 각 신분 대표들의 자격심사 문제를 먼저 명한다. 이에 제3신분은 세 신분이 함께 자격심사를 하자고 주장했고 특권층은 분열했다. 절대다수의 귀족이 제3신분과 대화를 거부했지만 종교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대화를 하자는 축이 거의 3분의 2나 되었다. 그리하여 제3신분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특히 앙시앵레짐 시기에는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정치활동이 이제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됨으로써 그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날로 향상됨에 따라 여론을 형성하여 입법가들을 지지하거나 압박하면서 정치적 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은 오늘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각 신분 대표들은 곧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이는 차후 국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이 마침내 왕에 맞서 자신들도 신성하다며 면책특권을 결의하는 동안 정치적 구심점은 베르사유가 아닌 파리로 차츰 옮겨간다. 마침내 무장한 시민군이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죄수들을 풀어줌으로써 혁명이 발발하는 역사적 장면과 함께 혁명의 기운이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는 과정, 파리에 코뮌이 결성되는 과정, 농촌을 휩쓴 ‘대공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1789년 하반기에 이르러 제헌의회의 활동이 구체화하면서 당시 의원들의 헌법 제정 과정이 매우 자세히 소개된다(시공간만 치환하면 거의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의원들이 여러 날에 걸쳐 오랜 논의 끝에 탄생시킨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비록 가진 자들의 이익을 우선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얼마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잘 담아낸 바로미터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된다(실제로 이 인권선언은 이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의 제헌헌법이 얼마나 선진적인지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 탄생되는 동안에도 민중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왕과 수구세력은 여전히 혁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왕이 민중의 신임을 받던 네케르를 해임했다는 소식에다 여전히 부족한 곡물과 치솟기만 하는 빵값에 분노한 시민들이 드디어 다시 떨쳐 일어났다. 파리의 생선장수 아낙들이 주축이 되어 저마다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손에 들고 대포까지 끌고서 왕과 그 가족이 있는 베르사유 궁으로 행진해 간 민중은 마침내 왕을 굴복시켜 파리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 편이어야 할 프랑스 수비대 병사들이 빵을 달라는 아낙들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의 편에 선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며, 왕을 만나기 전에는 그토록 왕을 원망하던 민중이 막상 왕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기절을 한다거나 왕이 파리로 순순히 가겠다고 하자 곧바로 “왕 만세!”를 외치는 장면에서는 당시 민중의 순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로써 앙시앵레짐은 과거의 유물로 묻히게 되었다. 이제 ‘제빵사’ 노릇을 하러 파리로 끌려간 루이 16세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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