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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이병도·신석호의 일제 강점기 행적과 해방 이후 행적을 비판한 책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한국사를 난도질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병도·신석호가 해방 후 친일파로 숙청당하기는커녕 거꾸로 한국의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유지시키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 - 25p
제1장. 조선사편수회의 설치와 운영
1. 조선총독부의 수사(修史)사업 - 35p
조선반도사 편찬계획 /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 조선사편수회 설치
2. 조선사편수회의 조직과 운영 - 51p
조선사편수회 조직 / 조선사편수회 참가자의 면모
제2장. 「조선사」 편찬과 일제의 한국사 인식
1. 「조선사」 편찬 - 65p
「조선사」 편찬 방식 / 「조선사」 시기구분과 편찬 체제 / 「조선사」 간행과 소요 예산
2. 주요 참가자들(일제 관학자)의 한국사 인식 - 79p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이마니시 류(今西龍)
제3장. 해방 후 식민사학 문제
1. 식민주의사관 비판 - 89p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관 / 식민사관의 요체
2. 식민사학 극복의 한계 - 100p
3. 「실증사학」의 검증 - 103p
랑케 실증주의사학의 태동 / 일본 제국주의와 랑케 실증주의 수용 /
‘일제식 실증주의 사학’과 한국 실증주의 사학
제4장. 해방 후 역사학자들의 동향
1. 8.15 해방과 역사학계 동향 - 117p
역사학회 결성 / 조선사편수회 참여자들의 활동
2. 해방 후 좌우 대립 - 128p
은둔학자들의 연구 활동 / 사회주의계열 학자들의 활동
제5장. 이병도의 역사관과 해방 후 영향
1. 이병도의 학문과 역사관 형성 - 137p
2. 이병도 사학의 위상과 영향 - 162p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을 통해 본 이병도 사학 / 『역사가의 유향』을 통해 본 이병도 사학
3. 이병도 역사관의 비판 - 190p
고조선 문제 / 한사군 문제 / 삼한 문제 / 고대 지명 비정 / 역사연구 방법론
제6장. 신석호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1. 신석호의 학문과 역사관 형성 - 247p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시기 /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 시기 / 스승 신석호와 제자 강만길
2. 신석호의 역사관 - 264p
나오는 글 - 279p
제1장. 조선사편수회의 설치와 운영
1. 조선총독부의 수사(修史)사업 - 35p
조선반도사 편찬계획 /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 조선사편수회 설치
2. 조선사편수회의 조직과 운영 - 51p
조선사편수회 조직 / 조선사편수회 참가자의 면모
제2장. 「조선사」 편찬과 일제의 한국사 인식
1. 「조선사」 편찬 - 65p
「조선사」 편찬 방식 / 「조선사」 시기구분과 편찬 체제 / 「조선사」 간행과 소요 예산
2. 주요 참가자들(일제 관학자)의 한국사 인식 - 79p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이마니시 류(今西龍)
제3장. 해방 후 식민사학 문제
1. 식민주의사관 비판 - 89p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관 / 식민사관의 요체
2. 식민사학 극복의 한계 - 100p
3. 「실증사학」의 검증 - 103p
랑케 실증주의사학의 태동 / 일본 제국주의와 랑케 실증주의 수용 /
‘일제식 실증주의 사학’과 한국 실증주의 사학
제4장. 해방 후 역사학자들의 동향
1. 8.15 해방과 역사학계 동향 - 117p
역사학회 결성 / 조선사편수회 참여자들의 활동
2. 해방 후 좌우 대립 - 128p
은둔학자들의 연구 활동 / 사회주의계열 학자들의 활동
제5장. 이병도의 역사관과 해방 후 영향
1. 이병도의 학문과 역사관 형성 - 137p
2. 이병도 사학의 위상과 영향 - 162p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을 통해 본 이병도 사학 / 『역사가의 유향』을 통해 본 이병도 사학
3. 이병도 역사관의 비판 - 190p
고조선 문제 / 한사군 문제 / 삼한 문제 / 고대 지명 비정 / 역사연구 방법론
제6장. 신석호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1. 신석호의 학문과 역사관 형성 - 247p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시기 /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 시기 / 스승 신석호와 제자 강만길
2. 신석호의 역사관 - 264p
나오는 글 - 279p
출판사 리뷰
저자 김병기 박사는 저명한 독립운동가 희산 김승학 선생의 증손으로 현재 광복회 학술원장을 맡고 있다. 저자는 고려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해운회사 임원으로 근무하던 중 희산 김승학 선생을 비롯한 3대 독립운동 가문의 가학(家學)인 역사학을 계승하기 위해서 뒤늦게 윤내현 교수가 있는 단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독립운동사를 전공했고 『참의부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희산 김승학은 상해 『독립신문』 사장과 임시정부 학무국장(교육부장관), 참의부 참의장 등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다. 희산은 상해에서 임정 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서술할 때 사료수집을 도왔다. 이때 박은식, 김승학 두 선생은 손을 굳게 잡고 “지금은 우리가 피눈물의 역사”를 쓰지만 해방 후에는 나라를 찾은 기쁨의 역사인 『한국독립사』를 저술하자고 맹약했다. 그래서 김승학은 참의부 참의장으로서 한손에는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우는 한편 역사사료를 모으고 역사서를 저술한 역사학자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 및 국가건설론연구’ 프로젝트의 11번째 책이 『총을 든 역사학자, 김승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승학은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인 삼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통합 운동을 전개하던 1929년 말 만주에서 일제 경찰〔김승학은 반드시 왜경(倭警)이라고 쓴다〕에 체포되었다. 이때 팔다리가 부러지는 숱한 악형을 당했는데, 김승학은 『망명객행적록』에서 일경이 혹형을 가하면서 집중적으로 캐물은 것이 ‘상해에서 무기를 얼마나 사왔느냐는 것과 독립운동사료를 어디에 감추어 두었느냐’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희산 김승학은 일제의 숱한 악형에도 사료를 지켰고, 이런 자료와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자필이력서 등을 토대로 1965년 『한국독립사』를 출간했으나 그 직전 서거하면서 책의 출간은 보지는 못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저술한 1차 사료인 『한국독립사』는 그 내용이 방대한데다 절판된지 오래고, 국한문혼용체여서 일반 국민들은 구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읽기도 힘들었다. 이배용 원장 시절의 한중연은 김병기 원장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협약을 맺고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희산 김승학 자료를 기증받는 조건으로 『한국독립사』 해제 및 재출간 사업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이 사업은 평가에서도 좋은 평점을 얻었지만 1년 후 정권이 교체되고 문재인 정권에서 안병욱을 원장으로 임명하자마자 강제 중단시켰다. 반면 한중연 모 교수가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간행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추진하던 사업은 평가 점수가 낮아 탈락되었지만 안병욱에 의해 구제되었다. 나아가 한중연은 김병기 박사의 저서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에 대해 출간금지 조처를 내리고 광복회 학술원장인 김 원장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협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김병기 원장의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병도·신석호가 해방 후 어떻게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했는지를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두 친일매국사학자는 서울대·고려대·성균관대 등 주요 대학 사학과와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단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고, 교수들을 배출해 총독부 역사관을 국사 교과서로 만들어 초등학생 때부터 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그간 이병도에 비해 덜 부각되었던 신석호의 해방 이후 행적과 그의 총독부 역사관이 어떻게 현재까지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려대 출신의 저자는 신석호는 고려대·성균관대뿐만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해서 수많은 제자를 각 대학의 교수로 만들었는데, 그 중요한 제자가 강만길이다. 강만길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2018년)』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신석호를 시종일관 “선생님”으로 호칭하면서 극도로 존경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강만길은 심지어 “지금 와서 솔직히 생각해보면 만약 고려대학교 사학과가 아닌 다른 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신석호 선생님을 못 만났을 것이고…신석호 선생님의 후임으로 교려대학교 교수직은 계승한 일 등이 결국 한 인간의 평생을 결정하고 만 셈이다”라면서 신석호를 학문 인생의 은인으로 높이고 있다. 강만길이 노무현 정권 때 대통령 직속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병도·신석호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애꿎은 이능화만 친일사학자로 선정한 이유는 바로 강만길의 사적 인연에 의한 역사 단죄의 사유화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이병도·신석호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오른 것은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이지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정한 것이 아니다. 1990년에 간행된 『국사편찬위원회사』는 신석호의 재임기간을 1929년 4월~1965년 1월로 적시하고 있다.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이라는 것이 신석호의 솔직한 생각이다. 한국의 짝퉁 진보역사학계가 다른 분야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성토하면서도 정작 내부의 이병도·신석호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그 구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친일행위 단죄라는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문권력의 계승이라는 사적이익으로 전환시켜 친일문제를 사적으로 악용한 것이다. 3대 독립운동가 후손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제자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안병욱의 한중연과 유은혜의 교육부로부터 출간금지와 연구비 환수라는 압박과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정권교체 백 번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사회에서는 나치 역사관을 칭송하는 좌파 진보 역사학자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이 나라는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른바 짝퉁 좌파 진보 역사학자가 득실거린다.
친일파 파묘 목소리가 드높은 정권에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 친일파들이 다시 정권을 잡아서 독립운동가를 체포해서 고문하고 죽였던 친일구조가 학계에서 그대로 재연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해방 직후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희산 김승학은 상해 『독립신문』 사장과 임시정부 학무국장(교육부장관), 참의부 참의장 등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다. 희산은 상해에서 임정 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서술할 때 사료수집을 도왔다. 이때 박은식, 김승학 두 선생은 손을 굳게 잡고 “지금은 우리가 피눈물의 역사”를 쓰지만 해방 후에는 나라를 찾은 기쁨의 역사인 『한국독립사』를 저술하자고 맹약했다. 그래서 김승학은 참의부 참의장으로서 한손에는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우는 한편 역사사료를 모으고 역사서를 저술한 역사학자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 및 국가건설론연구’ 프로젝트의 11번째 책이 『총을 든 역사학자, 김승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승학은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인 삼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통합 운동을 전개하던 1929년 말 만주에서 일제 경찰〔김승학은 반드시 왜경(倭警)이라고 쓴다〕에 체포되었다. 이때 팔다리가 부러지는 숱한 악형을 당했는데, 김승학은 『망명객행적록』에서 일경이 혹형을 가하면서 집중적으로 캐물은 것이 ‘상해에서 무기를 얼마나 사왔느냐는 것과 독립운동사료를 어디에 감추어 두었느냐’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희산 김승학은 일제의 숱한 악형에도 사료를 지켰고, 이런 자료와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자필이력서 등을 토대로 1965년 『한국독립사』를 출간했으나 그 직전 서거하면서 책의 출간은 보지는 못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저술한 1차 사료인 『한국독립사』는 그 내용이 방대한데다 절판된지 오래고, 국한문혼용체여서 일반 국민들은 구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읽기도 힘들었다. 이배용 원장 시절의 한중연은 김병기 원장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협약을 맺고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희산 김승학 자료를 기증받는 조건으로 『한국독립사』 해제 및 재출간 사업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이 사업은 평가에서도 좋은 평점을 얻었지만 1년 후 정권이 교체되고 문재인 정권에서 안병욱을 원장으로 임명하자마자 강제 중단시켰다. 반면 한중연 모 교수가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간행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추진하던 사업은 평가 점수가 낮아 탈락되었지만 안병욱에 의해 구제되었다. 나아가 한중연은 김병기 박사의 저서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에 대해 출간금지 조처를 내리고 광복회 학술원장인 김 원장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협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김병기 원장의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병도·신석호가 해방 후 어떻게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했는지를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두 친일매국사학자는 서울대·고려대·성균관대 등 주요 대학 사학과와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단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고, 교수들을 배출해 총독부 역사관을 국사 교과서로 만들어 초등학생 때부터 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그간 이병도에 비해 덜 부각되었던 신석호의 해방 이후 행적과 그의 총독부 역사관이 어떻게 현재까지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려대 출신의 저자는 신석호는 고려대·성균관대뿐만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해서 수많은 제자를 각 대학의 교수로 만들었는데, 그 중요한 제자가 강만길이다. 강만길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2018년)』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신석호를 시종일관 “선생님”으로 호칭하면서 극도로 존경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강만길은 심지어 “지금 와서 솔직히 생각해보면 만약 고려대학교 사학과가 아닌 다른 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신석호 선생님을 못 만났을 것이고…신석호 선생님의 후임으로 교려대학교 교수직은 계승한 일 등이 결국 한 인간의 평생을 결정하고 만 셈이다”라면서 신석호를 학문 인생의 은인으로 높이고 있다. 강만길이 노무현 정권 때 대통령 직속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병도·신석호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애꿎은 이능화만 친일사학자로 선정한 이유는 바로 강만길의 사적 인연에 의한 역사 단죄의 사유화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이병도·신석호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오른 것은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이지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정한 것이 아니다. 1990년에 간행된 『국사편찬위원회사』는 신석호의 재임기간을 1929년 4월~1965년 1월로 적시하고 있다.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이라는 것이 신석호의 솔직한 생각이다. 한국의 짝퉁 진보역사학계가 다른 분야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성토하면서도 정작 내부의 이병도·신석호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그 구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친일행위 단죄라는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문권력의 계승이라는 사적이익으로 전환시켜 친일문제를 사적으로 악용한 것이다. 3대 독립운동가 후손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제자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안병욱의 한중연과 유은혜의 교육부로부터 출간금지와 연구비 환수라는 압박과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정권교체 백 번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사회에서는 나치 역사관을 칭송하는 좌파 진보 역사학자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이 나라는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이른바 짝퉁 좌파 진보 역사학자가 득실거린다.
친일파 파묘 목소리가 드높은 정권에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 친일파들이 다시 정권을 잡아서 독립운동가를 체포해서 고문하고 죽였던 친일구조가 학계에서 그대로 재연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해방 직후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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