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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 우리는 왜 과학이 아니라 미신을 믿는가?

동방박사님 2022. 8. 1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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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왜 과학이 아니라 미신을 믿는가?
과학과 민주주의에 대한 칼 세이건의 뜨거운 옹호
마녀와 외계인, 도사와 법사가 출몰하고
반과학과 미신, 비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가 횡행하는 시대
흔들리는 촛불, 과학에 대한 칼 세이건의 마지막 성찰

칼 세이건 생전 최후의 저작, 완전 개역판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선정 과학 기술 도서상 수상작
2022년 세계 기초 과학의 해 기념 출간!

2022년 5월 미국 의회에서 50여 년 만에 미확인 비행 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 관련 청문회가 열렸다. 미국 국방부 차관과 해군 정보국의 부국장이 참석한 이 청문회에서 미군이 발견한 미확인 공중 현상(unidentified aerial phenomena, UAP. 미군 당국이 UFO 대신 사용하는 용어)이 2004년 이후 400건 발견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현상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곳, 즉 외계에서 기원한 사건이라는 물질적 증거는 단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다고도 보고했다. 전문가들은 UAP 또는 UFO 목격 사례 급증이 드론의 상업화와 연관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2021년 6월 갤럽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41퍼센트가 UFO가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이라고 믿는다. (이 수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8월 조사보다 8퍼센트 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실제로 외계인 납치가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 미국인 중에는 지구인 중 1억 명 이상이 외계인에게 납치된 적이 있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외계인 납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도 상당수의 미국인이 바이러스 유행이 빌 게이츠 같은 특정 자본가 또는 권력자의 음모이며, 백신 역시 접종자의 정신을 조작하기 위한 특수 물질이 들어 있다고 믿고 백신 접종을 거부했다. 한국에서도 창조론자 단체의 민원으로 생물 교과서에서 진화 관련 설명을 일부 삭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운동처럼 자연 치유를 내건 유사 과학이 유행하기도 했다.

왜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 이런 유사 과학, 미신, 반지성주의를 믿는 것일까? 근거도 없고 효력도 없는 주장과 낭설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흑 시대라고도 불렸던 서구의 중세에는 고대의 악령이 마녀로 되살아났고, 현대에는 그 악령이 외계인으로 변신해 과학의 촛불이 미치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출몰한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행성 과학자이자 과학 전도사인 칼 에드워드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펴낸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과학, 어둠 속의 촛불(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1995년)에서 과학에 대한 무지와 회의주의 정신의 부재가 낳은 이 유사 과학 유행을 그 기원과 역사로부터 현황과 대안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깊게 성찰한다. 반과학과 미신, 비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의 유행에 담긴 인간의 오랜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의심할 줄 아는 정신과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의 결합에서 탄생한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않고는 이 경신(輕信)의 풍조를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10년에 걸친 조사와 성찰, 연구와 실천의 산물인 이 책을 통해 뜨겁게 보여 준다.

핵폭탄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과학이 그 어떤 시대보다 강력한 권능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과학자에게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부여되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던 칼 세이건은 유사 과학의 범람으로부터 사람들과 사회와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누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학자들이 나서지 않고 교육 수준이 떨어지고 지적 능력이 약해지고 알맹이 있는 토론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며 세상 사람들이 회의주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면, 과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와 개개인의 자유 역시 서서히 깎여 나갈 것이고 언젠가 깊숙이 침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과학이라는 촛불이 일렁이다 힘없이 꺼지면 외로운 노파와 무고한 어린 여성 들을 화형대에서 불태워 죽였던 마녀 사냥의 장작불이 다시 타오를지도 모르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 골수성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세이건은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과학의 의미와 가치, 본질과 방법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알리는 게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과학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뜨거운 옹호와 사랑을 독자들은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책을 시작하며: 나의 스승들 … 9

1장 가장 소중한 것 … 19
2장 과학과 희망 … 51
3장 달의 남자, 화성의 얼굴 … 77
4장 외계인 … 105
5장 속임수인가, 비밀주의인가 … 131
6장 환각 … 155
7장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 177
8장 네가 본 것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 209
9장 치료 … 229
10장 차고 안의 용 … 255
11장 비탄의 도시 … 283
12장 헛소리 탐지기 … 299
13장 사실이라는 가면 … 327
14장 반과학 … 365
15장 뉴턴의 잠 … 395
16장 과학자가 죄를 알 때 … 417
17장 의심의 정신과 경이의 감성 … 433
18장 먼지가 일어나는 것은 … 453
19장 쓸데없는 질문은 없다 … 469
20장 불타는 집에서 … 497
21장 자유로 가는 길 … 519
22장 의미의 노예 … 539
23장 맥스웰과 너드 … 557
24장 과학과 마녀 사냥 … 589
25장 진정한 애국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 617

감사의 글 … 636
참고 문헌 … 640
찾아보기 … 650

 

 

저자 소개

저 : 칼 에드워드 세이건 (Carl Edward Sagan)
 
1934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우크라이나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인문학 학사, 물리학 석사, 천문학 및 천체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 대학교 의과 대학에서 유전학 조교수, 하버드 대학교 천문학 조교수를 지냈다. 그 후 코넬 대학교의 행성 연구소 소장, 데이비드 던컨 천문학 및 우주 과학 교수,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의 특별 초빙 연구원, 세계 최대 우주 동호 단체인...

역 : 이상헌

 
서강대학교에서 칸트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기술의 대융합』, 『인문학자, 과학 기술을 탐하다』, 『따뜻한 기술』, 『싸우는 인문학』(이상 공저), 『융합 시대의 기술 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 과학과 불교』, 『철학, 과학 기술에 말을 걸다』, 『철학, 과학 기술에 다시 말을 걸다』 등이 있다. 현재 서강 대학교 전인 교육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책 속으로

나는 특히 지난 밀레니엄을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에 유사 과학과 미신이 해가 갈수록 더욱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고 요정 사이렌의 광기 어린 노래가 더욱더 크게 울려 퍼지고 현혹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전에 어디에서 그 소리를 들었던가? 어떤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편견이 세를 얻고 기근이 횡행하며 국가의 위신과 중추가 도전을 받을 때,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와 목적에 대해 번민할 때, 또는 우리 주위에서 광신적 행동이 거품처럼 일 때, 그때 예전부터 익숙한 사유 습관들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촛불이 점차 희미해진다. 초의 작은 불꽃 웅덩이가 떨린다. 어둠이 모인다. 악령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과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완벽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다. 과학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과학 그 자체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확실하게 밝혀 줄 수 있다.

아무리 만족스럽고 안심이 된다고 해도 미망(迷妄)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 우주를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사 과학은 정반대이다. 유사 과학의 가설들은 어떤 실험을 통해서도 반증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심지어는 원리적으로 반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유사 과학의 신봉자들은 방어적이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회의주의적인 검토를 하려고 하면 어느새 나타나 방해를 한다. 그리고 유사 과학의 가설이 과학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어떻게든 넘어가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음모를 꾸며 그것을 억압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몇 세기에 걸쳐 끈기 있게 집단적으로 자연을 조사해 왔고, 그 결과를 증류해 왔다. 물론 온갖 일들로 점철된 이 증류 과정을 미주알고주알 상세히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미 완성된 지혜를 화려하게 소개하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겉보기에 다루기 번거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방법이야말로 발견 자체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과학이 성공을 한 또 다른 이유는 오류 수정 장치가 과학의 핵심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류가 있으면 수정한다는 게 과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지나친 범주화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우리가 자기 비판을 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을 바깥세상에 적용해서 검증할 때마다, 우리는 과학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고 무비판적일 때, 희망과 사실을 혼동할 때, 우리는 유사 과학과 미신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과학의 위대한 계명들 가운데 하나는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을 믿지 마라.’이다. (물론 과학자들도 영장류이고, 집단 내 위계에 약한 존재라 이 계명을 항상 지키지는 못한다.)

과학은 spirituality, 즉 정신성이나 영성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심대한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가 광년으로 측정되는 광대한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인식했을 때나, 생명의 복잡성과 아름다움, 정묘함을 파악할 때 솟구치는 감정, 즉 일종의 의기양양함과 겸손함이 결합된 감정은 확실히 정신적 또는 영적이다.

이러한 노력은 과학자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양자 수준에서 자연을 기술할 때 부적절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다시 말해 일반 상대성 이론이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한 이론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확신시키는 방법으로, 그 약점과 한계를 발견하려는 단합된 노력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조직화된 종교에 대해 확고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에 어느 종교 지도자가 자신들의 믿음이 불완전하다거나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래서 교리에 숨겨진 약점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소를 세우겠는가? 일상 생활 속에서의 검증을 넘어서서 전통적인 종교적 가르침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들을 찾아보기 위해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회의주의를 세상사에 적용할 때 자칫하면 문제를 왜소화하거나 잘난 척하듯 다루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속임수에 넘어갔든 아니든, 미신이나 유사 과학의 지지자들도 회의주의자들과 동일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고, 세계의 작동 방식이 어떠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회의주의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과학자와 거의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다만, 그 탐구에 필요한 도구를 그들의 문화로부터 부여받지 못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좀 더 완곡하게 비판해도 좋지 않을까? 완전 무장을 하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검증할 수 없는 주장들, 반증할 수 없는 단정들은, 아무리 영감이나 경이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진실과 관련해서는 가치가 없다. 내가 한 이야기는 당신에게 증거 없이 믿어 달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외계인 납치 이야기가 뇌 생리학적 현상이나 환각, 아니면 어린 시절의 왜곡된 기억이나 꾸며 낸 이야기라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 문제는 인류의 한계와 관련된 문제이며 인간의 속기 쉬운 본성과 신념이 형성되는 과정이나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종교의 기원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UFO와 외계인 납치라는 주제에는 과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진정한 보물이 묻혀 있다. 그러나 그 보물은 분명 인류의 고향에서 유래한, ‘메이드 인 어스(Made in Earth)’, 즉 지구제라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회의주의적 사고란, 결국 합리적인 논의를 구성하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사기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일련의 추론을 통해 나온 결론이 마음에 드는가가 아니라, 그 결론이 전제 내지 출발점에서 제대로 유도된 것인가 하는 것이고, 또 그 전제가 참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증거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편이 더 쉽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헛소리와 사기와 속임수, 경솔한 생각과 바람이 사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것은 마술 공연장과 모호한 조언을 읊는 점쟁이의 상담실에서만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정치, 사회, 종교,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한 나라에 국한된 일만도 아니다.

과학자들도 실수를 저지른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인식하고 최대한 폭넓게 여러 의견을 들으며 무자비할 정도로 자기 비판을 하는 것이 바로 과학자의 임무이다. 과학은 자기 오류 수정 기능을 가진 집단적 작업인 것이다. 이 기능은 상당히 잘 작동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학에 비해 과학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점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실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윈을 검열할 수 있을 정도라면 어떤 지식이든 검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검열을 누가 할까? 어떤 정보와 통찰은 버려도 좋고, 다른 정보와 통찰은 10년 혹은 100년 혹은 1,000년이 지나면 필요해지리라는 사실을 그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현명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분명히 기계나 제품의 안전성에 관해서는 판단할 수 있고 판단해야 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기술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그 가능성을 모두 조사해 볼 정도의 자원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을 검열해 허용되는 생각과 허용되지 않는 생각, 탐구할 수 있는 증거와 탐구할 수 없는 증거 등을 정해 주는 것은 사상 경찰의 짓거리이고, 멍청하고 무능력한 결정이며, 우리 문명을 장기적으로 쇠락의 길로 이끌 바보짓이다.

은하들도 우리가 잘 아는 뉴턴의 중력 법칙을 따라 서로 돌고 돈다. 중력 렌즈가 존재하는 것과 쌍성계를 이루는 펄서의 자전 속도가 감소하는 것은 우주의 심연에서도 일반 상대성 이론이 성립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장소에 따라 자연 법칙이 달라지는 우주에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엄연한 이 사실 앞에서 경외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이루어진 발견들에 비추어 볼 때 환원주의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과학의 결점이 아니라 과학이 거둔 최고의 승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과학의 성과들은 수많은 종교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과학이 앞으로 무엇을 더 알아낼지 우려하는 교리와 기득권은 이것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묻는다. 만약 남성과 여성의 유전 형질이 다른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실로 사용되지 않을까? 만약 폭력 성향을 촉발하는 유전자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한 민족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예방적 차원에서 미리 제거해 버리는 행위도 정당화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정신 질환이 단지 뇌 화학적 문제라면, 현실 감각을 유지하고 행동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만약 인간이 우주의 창조주가 만든 특별한 작품이 아니라면, 만약 인간 사회의 토대가 되는 도덕 규범들이 신이 아니라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입법자들에 의해 고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우리의 분투는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이런 우려는 종교적인 것이기도 하고 세속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알고 있는 편이,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신념 체계가 과거에 범한 오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편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리 또는 진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질수록 비참한 일이 벌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어떤 것이든 사태를 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거짓말 또는 어떤 사실 은폐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더 숭고한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슬기롭지 않다. 장기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 기술을 개발하는 우리나 옛날 기술을 개발하는 조상들 역시 같은 인간이다. 우리는 지금도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약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그 기술은 전에 없던 파괴력, 심지어 행성 규모의 파괴력을 가진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과학이나 기술 쪽이 아니라 인간 쪽에도 지금까지 없었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규모로, 다시 말해 지구 규모로 새로운 도덕과 윤리를 확립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삶을 풍요롭게 해 준 과학 기술을 낳은 공로는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관계없이 과학 기술이 죽음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부터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대중에게 알리는 일, 특히 과학이 야기하는 위험이나 과학의 사용으로 생길 수도 있는 위험을 경고하는 일은 과학자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을 예언자적 사명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경고를 할 때에는 신중해야 하며 필요 이상으로 위험을 과장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수를 피할 수 없는 존재이고 위험이 진짜로 실현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엇보다도 안전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회의주의를 세상사에 적용할 때 자칫하면 문제를 왜소화하거나 잘난 척하듯 다루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속임수에 넘어갔든 아니든, 미신이나 유사 과학의 지지자들도 회의주의자들과 동일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고, 세계의 작동 방식이 어떠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회의주의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과학자와 거의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다만, 그 탐구에 필요한 도구를 그들의 문화로부터 부여받지 못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좀 더 완곡하게 비판해도 좋지 않을까? 완전 무장을 하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과학의 핵심은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두 가지 태도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하나는 아무리 이상하고 직관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모든 아이디어를 회의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터무니없는 헛소리로부터 심오한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 창의적인 사고와 회의적인 사고의 합작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겉보기에도 모순적인 이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다.

과학을 가르치기 어려운 것은, 인류가 아직 과학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과학이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과학을 소화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는 이중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만난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과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 주었고, 살아남은 수렵 채집인들도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 사례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성향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문화에서든 늘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생존의 수단이다. 그것은 우리의 천부적 소질이다. 무관심, 부주의, 무능력, 그리고 회의주의에 대한 불안 따위 때문에 우리가 어린이들을 과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로부터 인간으로서의 특권과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를 빼앗는 것이 되리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결은 오로지 한 가지이다. 일반 청중에게 이야기할 때 동료 과학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뜻하는 바를 즉각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게끔 해 주는 어휘들이 있다. 전문 용어, 학술 용어라고 불리는 게 그것이다. 과학자들이야 직업상 그런 어휘들을 쓰는 게 일상이겠지만, 일반 청중에게는 과학을 신비화할 뿐이다. 가능한 한 가장 쉬운 어휘를 써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하기 전 당신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오해할 뻔했던 부분을 기억해 내고, 그것들에 주의하면서 설명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을 무지에서 지식으로 이끌어 주었던 첫 과정들을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진정 이것이 비결의 전부이다.

어떤 사회든 그 사회의 근본 가치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음 세기에도 제대로 생존하기를 바란다면 과학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의 과학은 과학이라는 업(業)에 종사하는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에 의해 이해되고 수용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을 모두의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 과학자들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 한다는 말인가.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글을 깨치는 것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노예 상태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자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읽기는 언제나 자유로 가는 길이다.

당연히 국가와 인류가 직면한 긴급한 현안들이 있다. 그러나 기초 과학 연구비를 삭감한다고 해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과학자들은 표밭이라고 보기 어렵고 로비 활동을 효과적으로 하는 자들도 아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모두의 이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기초 연구에서 손을 떼는 것은 용기 없음, 상상력 결핍, 그리고 환상의 산물일 뿐이다. 만약 지구인이 미래를 이렇게 포기하는 것을 본다면 외계인들은 충격을 받으리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자민족 중심주의, 외국인 혐오, 광신적 애국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나라가 반정부 사상을 억압하고, 잘못된 기억,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억을 시민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국가 권력의 이런 조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과학은 불온한 것으로 보이리라. 과학이 손에 넣으려는 진실은 민족적, 문화적 편견과 대체로 무관하다. 본질적으로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같은 분야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한 방에 넣으면 그들은 공통 언어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화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과학 자체가 국적을 초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세계주의자이고 인류라는 하나의 가족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을 쉽게 꿰뚫어 볼 줄 안다.

모든 나라에서 과학의 방법과 권리 장전의 의미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품위도 겸손도 공동체 의식도 거기서 싹틀 것이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몰아쳐 오는 암흑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은 그것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현대 회의주의 운동의 고전이자
평생 코스모스에 매료된 한 과학자의 과학 로맨스


이 책의 전반부는 외계인이 타고 온 UFO, 외계인에 의한 납치 사건, 재앙으로 가라앉은 대륙, 초고대 문명의 초고도 과학 기술, 화성의 인면암(人面巖), 밀밭에 몰래 그려진 정체불명의 크롭 서클(미스터리 서클), 악마 숭배, 환생한 뉴 에이지 구루, 초월 명상, 심령 수술 같은 유사 과학, 유사 종교 등의 사이비스러운 헛소리들의 허와 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유사 과학의 허실을 파헤치고 그 허무맹랑한 논리를 탄핵하며 인간이 얼마나 속기 쉬운 존재인지, 심지어 자신조차 속이고 마는지 폭로하는 회의주의 도서들은 많다.

칼 세이건의 이 책 역시 이런 범주의 책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책의 특징은 이러한 사이비스러운 헛소리들이 반복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가 무엇이고, 쉽게 속고 쉽게 믿는 경신의 풍조가 인류 역사와 사회, 문화 속에서 야기한 참극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진화사와 문명사라는 보다 큰 맥락 속에서 위치 짓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 책을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현대적 회의주의 운동의 핵심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이러한 사이비스러운 헛소리들의 바탕에는 과학의 오용, 과학에 관한 오해, 나아가 과학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진단을 바탕으로 세이건 스스로 생각하는 과학의 본질, 과학의 정신이 무엇인지 해설해 나간다. 세이건이 볼 때 과학의 핵심 정신은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고 인간의 마음과 사고는 함정에 빠지기 쉬우면 심지어 자기마저도 속이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놓고 비판 정신을 단련해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세이건은 20세기 후반 미국 사회 및 문화를 휩쓴 유사 과학 이야기에서 벗어나 수천 년간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종교인과 지식인이 온갖 논리로 옹호해 온 노예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수많은 죄 없는 노파와 소녀를 불태워 죽인 유럽 문명 특유의 마녀 사냥이 어떻게 시작되고 확산되고 소멸했는지, 과학 기술을 추앙하고 발명가를 선망했던 ‘양키적 천재성’으로 가득했던 미국의 교육이 반과학으로 돌아선 게 무엇 때문인지, 인류 역사와 문화에서 다양한 사례를 골라 소개하면서 잘못된 사고의 함정에 빠진 인간이 어떤 오류를 범해 왔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고,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회의주의적 사고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려 낸다. 칼 세이건에게 있어 과학은 반증 가능성이라는 개념과 실험을 통한 검증이라는 실천을 통해 인간이기에 가진 필연적 오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비판 정신을 고양해 간다.

그런데 칼 세이건이 유사 과학 비판에 이렇게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과학자들은 유사 과학이나 비슷한 주장을 그냥 무시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두 의자 효과’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며 창조 과학자(천문학에서 UFO 신봉자들이 하는 역할을 생물학 분야에서 한다.)와의 토론을 거부한다. 연단에 두 의자가 나란히 놓인 모습이, 그리고 양측이 같은 시간, 같은 비중으로 발언하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두 의견 모두 일리 있는 대등한 의견이라는 착각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은 UFO 옹호자들과 공개 토론을 거부하고 자칭 외계인 납치 피해자들과의 만남을 피한다.

그러나 세이건은 1970년대부터 UFO 관련 공개 토론회를 개최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외계인 피랍자들과의 만남도 서슴지 않았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그에게 공개적 비난을 하기도 했고, 학계에서의 지위를 박탈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책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5장 참조) 왜냐하면 유사 과학의 뿌리에는 과학과 동일한 바람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한 대중의 기호(嗜好), 과학이 발견한 새로운 지식에 대해 알고 싶다는 대중의 열망이 그것이다. 유사 과학은 대중의 이런 바람을 바탕으로, 과학의 회의주의적 본질은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과학의 방법과 결과, 또는 그 명성만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유사 과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유사 과학은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사 과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지 않지만 갈망하는 개인적인 힘(오늘날에는 만화책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에게 부여된 힘이고 예전에는 신에게 부여되었던 힘이다.)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 어떤 경우에 유사 과학은 사람들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 주고 질병을 치료하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약속한다. 유사 과학은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며 중요한 존재라는 믿음을 다시 준다. 유사 과학은 우리가 우주와 꼭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와 결부되어 있음을 보증한다. ―본문에서

이 유사 과학이 발호(跋扈)하고 유행하는 원인을 세이건은 과학 교육을 포함한 과학 대중화의 결여로 진단한다. 그리고 책 곳곳에서 과학 대중화를 등한시하는 학계의 과학자들을 질타한다. 그렇다면 과학과 유사 과학의 차이는 무엇이고, 유사 과학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도 과학과 유사 과학의 가장 큰 차이는 과학이 유사 과학(또는 ‘무오류’의 계시)보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을 훨씬 더 신랄하게 인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류(또는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잘못)는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용기를 내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생기는 서운함이나 안타까움을 반성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가능성은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다.
……
과학을 보급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과학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발견에도 온갖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떤 오해가 있었고, 어떤 경로 변경이 있었으며,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과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연구 현장에서 어떤 갈등을 벌였는지 진짜 역사를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 교과서, 아니 대부분의 교과서가 이런 역사를 잘 다루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몇 세기에 걸쳐 끈기 있게 집단적으로 자연을 조사해 왔고 그 결과를 증류해 왔다. 물론 온갖 일들로 점철된 이 증류 과정을 미주알고주알 상세히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미 완성된 지혜를 화려하게 소개하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겉보기에 다루기 번거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방법이야말로 발견 자체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본문에서

실제로 『코스모스』를 비롯해서, 칼 세이건이 평생 펴낸 30여 권의 책들은 그의 이 진단과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가 방대한 저술들을 통해 펼친, 과학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은 과학자들의 이야기와 발견, 코스모스에 대한 탐구가 실제로는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가르침 들은 그를 20세기 최고의 과학 전도사로, 과학 저술가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사반세기가 지난 2020년대에도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하게 만들고 있다.

반지성주의라는 악령이 출몰하고 과학이라는 촛불이 흔들리는 시대
의심의 정신과 경이의 감성의 경사스러운 결합을 꿈꾸며


이처럼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칼 세이건의 과학관, 즉 과학의 본질, 과학의 방법, 과학의 의미, 과학의 윤리, 과학의 대중화 등에 대한 생각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필연적 오류 가능성을 전제로 한 회의주의, 반증 가능성과 실험을 통한 검증, 비판 정신을 단련하기 위한 헛소리 탐지기 등등, 언젠가 칼 세이건 연구자가 나온다면 연구하게 될 칼 세이건의 과학 사상이 핵심 개념들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칼 세이건의 정치관, 민주주의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이 책 곳곳에서 과학과 민주주의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나아가 실질적 관련성도. 과학과 민주주의 모두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기본값으로 전제하고 그 오류를 수정하는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이건은 과학과 민주주의가 동일한 것도 아니고 과학적 방법에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에서 과학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책에서도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당연히 과학과 민주주의는 작동 방식이 기본적으로 다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제도와 정책은 투표로 결정되지만, 과학적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참과 거짓을 정하기 위해 투표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과학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버팀목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은 우리를 사실의 영역으로 초대한다. 비록 그 사실이 우리의 선입견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과학은 대안적 가설들을 먼저 머릿속에서 만들어 보고 그중 어느 것이 사실과 가장 잘 부합하는지를 알아보라고 권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그것이 아무리 이단적인 것이라고 해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든 기성의 지혜이든 간에 가장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며 회의적으로 철저하게 검토하는, 매우 섬세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종류의 사고 방식은 변화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본질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이 책을 쓰던 1990년대 초중반 당시 세이건은 상당한 위기감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냉전은 끝났지만 사라지지 않는 분쟁, 세계화가 시작되었지만 거세지기만 하는 민족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위대한 승리로 한 세기가 마무리되었지만 산업의 공동화와 교육의 황폐화로 쇠락해 가는 미국, 태양계 끝까지 탐사선을 보내 지구 밖 세계의 놀라운 모습을 발견했지만 포장만 바꿔 가면서 출몰하는 유사 과학과 사이비 종교 들을 보면서 칼 세이건은 9?11 테러로 시작되고 팬데믹으로 마무리된 21세기 첫 20년의 혼란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 책의 제목과 그 부제, 즉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과학, 어둠 속의 촛불』에는 그의 우려와 희망이 짙게 배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이건은 이 책의 상당 부분을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개혁을 역설하는 데 할애한다. 그가 제안했던 구체적 개선안 가운데 일부는 이미 시효가 다해 효력을 잃었지만, 그 기본 정신만은 여전히 곱씹어 봐야 하는 통찰로 가득하다. 칼 세이건의 말이다.

의심할 줄 아는 정신과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 모두 단련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기술이다. 이 두 가지가 어린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사이좋게 결혼하는 것을 공교육의 주요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경사스러운 가족 드라마가 대중 매체, 특히 텔레비전에서 제대로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둘을 사람들이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다시 말해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을 이유 없이 배척하거나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다양한 아이디어에 너그럽게 마음을 여는 한편, 증거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을 사람의 제2의 천성으로까지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 될까? 그리고 증거에 대한 기준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든, 할 수 있다면 거부하고 싶은 것이든 똑같이 엄격하기를 요구해야 한다. ―본문에서

과학 정신의 수호자 칼 세이건의 마지막 임무

이 책은 1995년 연말, 그러니까 칼 세이건이 타계하기 1년 전에 출간되었다. (판권에는 1996년 출간으로 표시되어 있다. 판매는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타계 다음 해 그의 부인인 앤 드루얀(Ann Druyan)이 그의 글을 엮어 펴낸 『에필로그(Billions & Billions)』(1997년, 한국어판 2001년 출간)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Scientific Experience)』(2006년, 한국어판 2010년 출간)을 유작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골수성 혈액암(백혈병)으로 고통 받던 그가 존명 중에, 생전에 펴낸 마지막 책이다. 2001년에 한국어판이 출판된 적이 있으나 절판되었다. 이 책은 같은 옮긴이인 이상헌 서강 대학교 전인 교육원 교수가 이전 한국어판에서 번역이 누락된 곳을 번역해 추가하고,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고 필요하면 새로 옮겨 낸 것이다. 오랫동안 코스모스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칼 세이건 독자와 팬으로부터 재출간 문의가 있었고, ㈜사이언스북스에서 정식 저작권 계약을 통해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첫 출간과 2022년 한 세대 가까이의 시간차가 있지만, 칼 세이건이 던졌던 문제 의식들, 의심의 정신과 경이의 감성의 조화로운 결합의 필요성은 그 어떤 시대보다 커진 시대가 지금일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악령은 중세 때 마녀가 되었고, 냉전 시대에는 외계인으로 출몰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다른 이름으로 다른 가면을 쓰고 횡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칼 세이건이 비합리주의라고, 반과학이라고 비판했던 정신은 지금 탈진실(post-truth) 또는 반지성주의라는 탈을 쓰고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 정신의 수호자였던 칼 세이건의 마지막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추천평

21세기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과학 기술의 위력이 크게 발휘되는 시대이다. 과학 기술의 성과물들이 우리 삶의 세부적인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이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정보 기술 덕분에 세상의 거의 모든 정보에 접근 가능한 시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지금’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탈진리(post-truth)’이다. 참과 거짓, 실재와 허상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과학으로부터 과학 아닌 것(유사 과학)을 분별해 내고, 인류에게 해악이 되는 유사 과학을 떨쳐 버릴 것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한 그의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읽으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그의 목소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 이상헌 (옮긴이)

세이건은 종교적 미신과 정크 과학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큰 경외심과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천사와 악마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심령술사가 마음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고 미래를 예측하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그러나 대용물에 불과한 이것은 과학의 진정한 경이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지나지 않는다.
- 마틴 가드너

이 웅변적이고 매혹적인 책을 덮으면서 칼 세이건의 전작인 『코스모스』의 마지막 장 제목이 떠오릅니다. “누가 지구를 대변하는가?” 이것은 수사학적 질문이지만 저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속 지구 대표는, 인류가 외계 문명에 보낼 외교 대사는 다름 아닌 칼 세이건입니다. 그는 현명하고 인간적이며 재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잘 읽히는 문장을 쓰고, 절대 어려운 문장을 쓰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쓰는 저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게 하지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친구들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세요!
- 리처드 도킨스

이 책은 합리주의에 대한 감동적인 변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처참한 수준에 이른 과학 교육, 권세를 얻어 가는 개신교 근본주의, 미국의 바보짓을 부추기는 탐욕스러운 출판 문화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기도 하다.
- [워싱턴 포스트]

회의주의를 소개하는 책은 사실 드물다. 그러나 칼 세이건의 이 책 같은 책은 더 드물다.
-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칼 세이건은 과학을 대표해 종교와 논쟁할 때도 종교를 현대 문명의 포로 취급하는 법이 없다. 그는 일반적으로 종교를 변함없이 존중한다. 하지만 원리주의의 핵심에는 무지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 [올바니 타임스]

한 남자가 비합리주의의 컴컴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외로이 서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곧 명료하고 서정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여 이 책이 되었다. 한 남자의 사적인 언명이 모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단단하게 굳은 믿음의 응고물을 녹이기 시작한다. 경이로운 글쓰기이다.
- [해켄색 선데이 레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