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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태양이 빛나면 씨앗은 싹트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이는 에이브러험 링컨이었던가. 우리나라를 비추는 태양이 덜 빛나서일까, 튼실한 씨앗이 뿌려지고 그 어둠 속에서도 나름 빛이 있었지만 정작 빛이 들어오고(광복) 난 뒤에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지체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씨앗’도 ‘텃밭’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잊혀져 갔던 ‘씨앗의 텃밭’에 물을 주고 견고한 역사의 한줄기를 자리매김한 이는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이었다. 국권이 피탈되고 일제에 강점된 후 무력한 민중 앞에 홍암 나철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로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의 정신이다.
홍암 나철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 농성하면서, 조선침략의 원흉들에게 흉계를 중단할 것을 엄중하게 힐책하였다.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후 다시 도일,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조선침략을 규탄하고, 숙소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서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로 중광(重光)하였다. 단군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단군교를 단순히 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면서 역사적, 사상적인 이론으로 새롭게 정립(중광)하였다.
홍암 나철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 농성하면서, 조선침략의 원흉들에게 흉계를 중단할 것을 엄중하게 힐책하였다.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후 다시 도일,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조선침략을 규탄하고, 숙소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서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로 중광(重光)하였다. 단군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단군교를 단순히 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면서 역사적, 사상적인 이론으로 새롭게 정립(중광)하였다.
목차
글머리에_ 태양이 빛나면 씨앗은 싹트는가/김삼웅
추천의 글(1)_ 주춧돌이요, 마당이요, 집터/박민자
추천의 글(2)_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나근세
추천의 글(3)_ 대종교는 민족정신과 전통의식의 담지자(擔持者)/민인홍
1장 나라 쇠퇴기의 출생과 성장
전라도 보성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승 왕석보에게서 개화, 진보교육
2장 민족의식 갖고 사회 참여
입산수도하며 단군 연구
일본 편든 미국에 따지러 시도하다
3장 국권회복 투쟁에 나서다
일본 건너가 침략 원흉들 질타
을사늑약 소식 전해 듣고
비밀결사 자신회 조직
을사육적 처단에는 실패했으나
10년 유배형, 옥사자와 순국자도
정부전복, 대신암살기도사건으로 몰아
4장 대종교 중광에 나서다
유배에서 풀려나 기인에게 단군 관련 책 받아
항일구국의 방략 민족종교로
5장 단군교를 중광하고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
단군교 중광의 이유 밝혀
병탄 속에서도 교인 6천 명 증가
대종교 모태 삼아 민족정신 중흥코자
대종교와 민족사학 ‘일란성 쌍둥이’처럼
대종교에서 제정한 ‘개천절’ 국경일로
6장 중광 이후 교단의례 등 마련
‘어아가’와 ‘5대 종지’ 제정
교도가 지켜야 할 17개항
7장 만주에 무장독립운동기지 설치
만주독립운동의 전위 중광단, 그리고 북로군정서
‘신리대전’ 짓고 단군고적 탐방
8장 국학의 길을 열고
국문(한글)운동의 선구 역할
『삼일신고』와 『신단실기』 펴내
대종교인 주시경의 한글연구 이끌어
총독부, 대종교 경전 등 사서 압수
대종교인 박은식의 역사인식
신채호의 선교사상과 대종교 인연
대종교 경전 주관한 민족사학자
대종교중심 독립운동 주도한 신규식
9장 만주로 이전한 총본사
동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 옮겨
종교제례 치루고 민족교육문제 협의
10장 일제에 맞선 순국, 순교의 길
총독부의 잔인한 대종교 탄압
구월산에서 마지막 단군의례
순명조천(殉命朝天)의 길
한님의 공덕 빛내달라
11장 일본총리와 조선총독에 경고
일본총리 오쿠마에게 주는 글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주는 글
12장 남긴 글과 시문
‘이세가’와 ‘생사시’
‘단군가’에서 홍익인간 사상을 펼치다
13장 추모와 정신계승
독립운동가 신규식 ‘만장’과 ‘애사’ 지어
순국 이듬해 추모식 갖고 추모사
서훈 상향과 유해 봉환했으면
부록
대종교의 ‘대한독립선언서’
대종교와 개천절(開天節)
일제강점기, 각 종교의 친일행각
추천의 글(1)_ 주춧돌이요, 마당이요, 집터/박민자
추천의 글(2)_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나근세
추천의 글(3)_ 대종교는 민족정신과 전통의식의 담지자(擔持者)/민인홍
1장 나라 쇠퇴기의 출생과 성장
전라도 보성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승 왕석보에게서 개화, 진보교육
2장 민족의식 갖고 사회 참여
입산수도하며 단군 연구
일본 편든 미국에 따지러 시도하다
3장 국권회복 투쟁에 나서다
일본 건너가 침략 원흉들 질타
을사늑약 소식 전해 듣고
비밀결사 자신회 조직
을사육적 처단에는 실패했으나
10년 유배형, 옥사자와 순국자도
정부전복, 대신암살기도사건으로 몰아
4장 대종교 중광에 나서다
유배에서 풀려나 기인에게 단군 관련 책 받아
항일구국의 방략 민족종교로
5장 단군교를 중광하고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
단군교 중광의 이유 밝혀
병탄 속에서도 교인 6천 명 증가
대종교 모태 삼아 민족정신 중흥코자
대종교와 민족사학 ‘일란성 쌍둥이’처럼
대종교에서 제정한 ‘개천절’ 국경일로
6장 중광 이후 교단의례 등 마련
‘어아가’와 ‘5대 종지’ 제정
교도가 지켜야 할 17개항
7장 만주에 무장독립운동기지 설치
만주독립운동의 전위 중광단, 그리고 북로군정서
‘신리대전’ 짓고 단군고적 탐방
8장 국학의 길을 열고
국문(한글)운동의 선구 역할
『삼일신고』와 『신단실기』 펴내
대종교인 주시경의 한글연구 이끌어
총독부, 대종교 경전 등 사서 압수
대종교인 박은식의 역사인식
신채호의 선교사상과 대종교 인연
대종교 경전 주관한 민족사학자
대종교중심 독립운동 주도한 신규식
9장 만주로 이전한 총본사
동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 옮겨
종교제례 치루고 민족교육문제 협의
10장 일제에 맞선 순국, 순교의 길
총독부의 잔인한 대종교 탄압
구월산에서 마지막 단군의례
순명조천(殉命朝天)의 길
한님의 공덕 빛내달라
11장 일본총리와 조선총독에 경고
일본총리 오쿠마에게 주는 글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주는 글
12장 남긴 글과 시문
‘이세가’와 ‘생사시’
‘단군가’에서 홍익인간 사상을 펼치다
13장 추모와 정신계승
독립운동가 신규식 ‘만장’과 ‘애사’ 지어
순국 이듬해 추모식 갖고 추모사
서훈 상향과 유해 봉환했으면
부록
대종교의 ‘대한독립선언서’
대종교와 개천절(開天節)
일제강점기, 각 종교의 친일행각
책 속으로
*나철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그의 가슴 속에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즉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신심(信心)이 불타고 있었다. 나라가 망했다는 절망감 속에서 도존(道存) 즉 단군사상을 계승하여 광복의 희망을 찾겠다는 역사 인식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나철의 대종교 활동은 국치 초기에 국권회복운동의 모태가 되고 이와 함께 민족주의 역사학의 뿌리로 작용하였다. 대종교와 민족사학은 비슷한 시기에 상보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한다. 그리고 일란성 쌍둥이처럼 발전한다. 민족사학은 국난기 한민족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출중한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 교도이거나 관련된 인사들이다.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안확,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이 이에 속한다.
*대종교 교도인 서일(徐一)을 단장으로 채오(蔡五), 계화(桂和), 양현(梁玄) 등이 중심이 되어 무장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우리나라 중국 동북지역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효시가 되었다. 대종교가 간도 각지에 세운 학교는 단군신앙과 민족교육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모태 역할을 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이렇게 육성된 청년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1919년 만주 지역 만세운동, 1920년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뒷날 강력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한 대한정의단 등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었다.
* 대종교인이었던 주시경은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애국자이고 ‘한글’이란 이름을 창안한, 그래서 세종대왕의 후계자라 하겠다. 한말 격변기부터 일제강점 초기 민족수난의 시대에 언론인, 계몽운동가, 교육자, 국어학자로서 ‘한글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한글과 국어가 지켜질 수 있었고, 널리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원류에 나철과 대종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 언론인, 민족사학자, 독립운동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 박은식은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로도 일가를 이룬 대종교인 박은식은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하였다.
* 〈황성신문〉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날카로운 필치로 항일구국논설을 집필했던 단재 신채호는 1914년 서간도로 망명하기 이전에 이미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대종교 계통의 학교인 동창학교에서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를 교수하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겸한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 간행했다.
* 대종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예관 신규식은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손문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무창봉기에 참가하면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 친교를 맺고,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여운형 등과 동제사를 조직한데 이어 1915년 대종교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상설, 박은식 등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였다. 나철과는 의형제로 지냈고 대종교 최초의 시교사(施敎師)를 역임한다.
* 일제는 경술년 병탄 이전부터 대종교를 사갈시하였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일정에 반발하며 대중으로 하여금 대일 적개심을 고취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야 국권회복의 선봉기수”라고 낙인하였다.
* 나철은 단군교를 중광하여 한 교단의 교주가 되고서도 종교적인 과도한 위상이나 위세를 보이지 않았다. 구한말 이래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개중에는 자칭 천자 또는 현신이라 부르면서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 ‘홍익인간’ 이념에는 유교의 충효사상이나 인애사상, 불교의 자비사상, 도교의 무위화사상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애사상과 호혜호조사상, 인도주의사상과 평화애호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종교도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신봉하면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철의 대종교 활동은 국치 초기에 국권회복운동의 모태가 되고 이와 함께 민족주의 역사학의 뿌리로 작용하였다. 대종교와 민족사학은 비슷한 시기에 상보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한다. 그리고 일란성 쌍둥이처럼 발전한다. 민족사학은 국난기 한민족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출중한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 교도이거나 관련된 인사들이다.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안확,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이 이에 속한다.
*대종교 교도인 서일(徐一)을 단장으로 채오(蔡五), 계화(桂和), 양현(梁玄) 등이 중심이 되어 무장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우리나라 중국 동북지역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효시가 되었다. 대종교가 간도 각지에 세운 학교는 단군신앙과 민족교육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모태 역할을 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이렇게 육성된 청년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1919년 만주 지역 만세운동, 1920년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뒷날 강력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한 대한정의단 등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었다.
* 대종교인이었던 주시경은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애국자이고 ‘한글’이란 이름을 창안한, 그래서 세종대왕의 후계자라 하겠다. 한말 격변기부터 일제강점 초기 민족수난의 시대에 언론인, 계몽운동가, 교육자, 국어학자로서 ‘한글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한글과 국어가 지켜질 수 있었고, 널리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원류에 나철과 대종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 언론인, 민족사학자, 독립운동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 박은식은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로도 일가를 이룬 대종교인 박은식은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하였다.
* 〈황성신문〉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날카로운 필치로 항일구국논설을 집필했던 단재 신채호는 1914년 서간도로 망명하기 이전에 이미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대종교 계통의 학교인 동창학교에서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를 교수하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겸한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 간행했다.
* 대종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예관 신규식은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손문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무창봉기에 참가하면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 친교를 맺고,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여운형 등과 동제사를 조직한데 이어 1915년 대종교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상설, 박은식 등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였다. 나철과는 의형제로 지냈고 대종교 최초의 시교사(施敎師)를 역임한다.
* 일제는 경술년 병탄 이전부터 대종교를 사갈시하였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일정에 반발하며 대중으로 하여금 대일 적개심을 고취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야 국권회복의 선봉기수”라고 낙인하였다.
* 나철은 단군교를 중광하여 한 교단의 교주가 되고서도 종교적인 과도한 위상이나 위세를 보이지 않았다. 구한말 이래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개중에는 자칭 천자 또는 현신이라 부르면서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 ‘홍익인간’ 이념에는 유교의 충효사상이나 인애사상, 불교의 자비사상, 도교의 무위화사상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애사상과 호혜호조사상, 인도주의사상과 평화애호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종교도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신봉하면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태양이 빛나면 씨앗은 싹트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이는 에이브러험 링컨이었던가. 우리나라를 비추는 태양이 덜 빛나서일까, 튼실한 씨앗이 뿌려지고 그 어둠 속에서도 나름 빛이 있었지만 정작 빛이 들어오고(광복) 난 뒤에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지체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씨앗’도 ‘텃밭’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잊혀져 갔던 ‘씨앗의 텃밭’에 물을 주고 견고한 역사의 한줄기를 자리매김한 이는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이었다. 국권이 피탈되고 일제에 강점된 후 무력한 민중 앞에 홍암 나철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로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의 정신이다.
홍암 나철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 농성하면서, 조선침략의 원흉들에게 흉계를 중단할 것을 엄중하게 힐책하였다.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후 다시 도일,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조선침략을 규탄하고, 숙소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서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로 중광(重光)하였다. 단군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단군교를 단순히 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면서 역사적, 사상적인 이론으로 새롭게 정립(중광)하였다.
1910년 국치 직전 만주에 대종교 포교활동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국치 후에는 망명하여 백두산 기슭 청파호 인근에 교당을 설치, 본격적인 포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종교 활동을 독립운동과 연계하였다.
『신리대전』, 『삼일신고』 등 대종교의 경전을 저술하거나 간행하고, 국학의 뿌리인 한글의 중요성을 고취하며 교도와 교민들에게 한글 사용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54세 되는 해(1916년) 음력 8월 15일 단군교의 성지 구월산 삼성사에서 대종교의 제천 의식인 선의식을 올리고 유서를 남긴 채 순명한다.
이상룡, 박은식, 김교헌,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 민족사학의 뿌리는대종교의 ‘텃밭’에서 기원하며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입교한 분들이었다. 따라서 대종교는 우리 민족사학과 독립운동의 텃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는 육탄혈전을 통해 봉오동 전투의 승전과 청산리대첩을 이루어냈다. 뿐만 아니라 국어(임오교변, 말모이운동, 조선어학회), 역사와 국학(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임시정부(신규식, 이동휘,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문화(홍명희, 나운규), 경제(안희제) 등 독립운동의 전 영역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홍암 나철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 농성하면서, 조선침략의 원흉들에게 흉계를 중단할 것을 엄중하게 힐책하였다.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후 다시 도일,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조선침략을 규탄하고, 숙소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서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로 중광(重光)하였다. 단군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단군교를 단순히 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면서 역사적, 사상적인 이론으로 새롭게 정립(중광)하였다.
1910년 국치 직전 만주에 대종교 포교활동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국치 후에는 망명하여 백두산 기슭 청파호 인근에 교당을 설치, 본격적인 포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종교 활동을 독립운동과 연계하였다.
『신리대전』, 『삼일신고』 등 대종교의 경전을 저술하거나 간행하고, 국학의 뿌리인 한글의 중요성을 고취하며 교도와 교민들에게 한글 사용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54세 되는 해(1916년) 음력 8월 15일 단군교의 성지 구월산 삼성사에서 대종교의 제천 의식인 선의식을 올리고 유서를 남긴 채 순명한다.
이상룡, 박은식, 김교헌,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 민족사학의 뿌리는대종교의 ‘텃밭’에서 기원하며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입교한 분들이었다. 따라서 대종교는 우리 민족사학과 독립운동의 텃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는 육탄혈전을 통해 봉오동 전투의 승전과 청산리대첩을 이루어냈다. 뿐만 아니라 국어(임오교변, 말모이운동, 조선어학회), 역사와 국학(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임시정부(신규식, 이동휘,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문화(홍명희, 나운규), 경제(안희제) 등 독립운동의 전 영역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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