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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간첩들 (2021) - 이 책은 196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일어났던 간첩조작사건 14가지를 다룬다

동방박사님 2023. 1. 2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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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196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일어났던 간첩조작사건 14가지를 다룬다. 2020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던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칼럼 가운데 재심에서 무죄로 완결된 사건들을 추려 단행본으로 구성한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권침해 피해자들은 양심적인 학자, 민주화운동 학생, 재일교포 등이다. 이들은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들에게 본보기로 손봐줘야 할 대상이었고, 정권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강화하는 ‘북풍용’ 소모품이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 자신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인생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저자는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을 철저하게 부정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 가져와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증언을 들은 독자들에게 ‘침묵하지 않을 의무’를 불러일으킨다.

 

목차

서문 민주주의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추천사 침묵하지 않을 의무의 선순환 _한홍구
1 젊은 경제학자 권재혁 · 1968
2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 · 1974
3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 · 1977
4 신학 연구자 박재순 · 1980
5 진도 어부 김정인 · 1980
6 농협 직원 박동운 · 1981
7 역사 교사 황보윤식 · 1981
8 미법도 어부 정영 · 1982
9 오징어잡이 어부 윤질규 · 1983
10 소매유통업 사업가 오주석 · 1983
11 재일교포 통역가 김병진 · 1983
12 어부-보광스님 이상철 · 1983
13 공장노동자 심진구 · 1986
14 대학생 강기훈 · 1991
 

저자 소개

저 : 김성수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진공업고등학교 자동차과와 한국철도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1989년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이 운명한 날 사표를 제출했다. 1990년 영국으로 유학, 에섹스대학교 역사학과 학사, 석사를 마치고 셰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함석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귀국 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국제협...
 

책 속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는다. 1991년 4월부터 6월까지 분신으로 생명을 잃은 젊은이들을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나비효과’처럼 지구 반대쪽에 있던 나를 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분들에 대해 무거운 부채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유족들을 만나며 그분들의 눈물과 억울한 한을 보았다.
--- p.12

권재혁은 검사의 “1968년 3월 12일 일본국 동경 소재 오타니호텔에서 북괴 노동당 중앙위원인 천만기를 만나, 이후 노동당 입당원서를 내어 정식으로 입당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만기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한다.
이와 같은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고문조사 결과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권재혁은 1969년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다. 그리고 그해 11월 4일 사형이 집행된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고 1남 2녀를 둔 가장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당시 “중정 지하실에 잡혀 와서야 자신이 ‘수괴’라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이름을 처음 듣고, 죽은 뒤에도 ‘전략당사건의 권재혁’이라 불려야 했던 젊은 경제학자에게 술 한잔이라도 올려야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녕 그것뿐일까?”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 p.30

1973년 10월 16일 오후 2시경 최종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하 서울 법대)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직원이자 막냇동생인 최종선과 함께 이재원에 대한 간첩사건 조사에 참고인으로 협조하기 위해 중정에 자진 출두한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19일 새벽, 최종길 교수는 중정 건물 앞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중정은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는 발표를 한다. “최종길이 간첩 사실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정 남산분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 중정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북한의 고정간첩이 서울 법대에서 어엿한 교수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최종길 교수는 어떤
사람일까? 왜 박정희 정권은 한 평범한 교수를 특정해 ‘간첩’으로 조작했던 것일까?
--- p.39

보안사에 연행된 후 상당 기간 동안 전혀 잠을 재우지 않았고, 음식을 주지 않아 먹어본 기억이 없었고, 아주 밝은 불이 24시간 켜져 있는 조사실에서 거의 수십 일을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보안대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거나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찬다거나 각목으로 온몸을 마구 때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늘상 했으며 수건을 얼굴에 덮어씌운 채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해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 말할 때까지 두드려 패거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 허위자백하도록 했는데,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당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비명소리가 너무 견딜 수 없었다.
--- p.62

전두환 정권 당시 ‘한울회사건’으로 2년 반 넘게 옥고를 치렀던 이가 있다. 박재순 박사다. 당시 이 한울회사건의 1심 판사는 이인제였고 대법원 판사는 이회창이었다. 박재순 박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이에 대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2015년 박근혜 정권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그는 다시 이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다.
박재순 박사가 평가하는 대로 “양승태가 지배하는 사법부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군사독재 시절의 국가주의적 폭력과 만행을 정당화하고 옹호함으로써 역사의 시곗바늘을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시대로 되돌려놓은 사건”이다.
--- p.76

처 한화자가 중정에서 물고문을 받아 까무러칠 때 남편 김정인은 “마누라는 죄가 없으니 나만 죽이시오”라고 울부짖었다. “당신과 자식들만 살 수 있으면 나는 100번이라도 누명 쓸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김정인·한화자 부부는 5남매를 키우고 있었고 큰아들이 열일곱 살, 막내딸이
세 살이었다.
한화자는 또 진실위에서 “(김정인은) 가족을 사랑하는 우직한 남편이었다. 남편 김정인은 간첩 활동을 한 것이 전혀 없고 오로지 고기를 많이 잡아 처자식 먹여 살리는 데 급급한 착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우리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더 이상 진도에서 살지 못하고 목포에서 숨어 살았다.
나도 중정에 끌려가 약 2개월간 불법감금 상태에서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라고 진술했다.
한화자는 ‘간첩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에 시달리다 시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그는 목포에 정착해 식모살이, 공장 야간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남편의 누명을 벗기려면 자식들을 가르쳐야 했다”고 훗날 법정에서 진술했다.
--- p.101

그렇게 세월이 흘러 박동운은 18년간 복역 후 53세가 되던 1998년 8월 15일 가석방된다. 보안관찰대상이라는 조건이 붙은 채. 출소하고 나서도 그는 영어의 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간첩 지나간다’ ‘빨갱이 지나간다’고 수군거렸다. 그를 더욱 괴롭힌 건 그의 아내와 자녀들마
저도 자신을 간첩으로 보는 시선이었다. 결국 그는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태중에 있던 아들은 18년간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컸다. 아내는 차마 아버지가 간첩죄로 복역 중이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못했던 것이다.
2009년 11월 박동운은 사건 발생 2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 그의 모친은 요양병원 침상에서 재심 결과를 들었지만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뒤였다. 모친은 그 다음 해인 2010년 세상을 떠나기 전 “우리처럼 억울한 사람들 지발(제발)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 pp.124-125

2009년 5월 21일,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은 28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는다. 서울고등법원은 이날 ‘아람회사건’ 재심 판결에서 1981년 계엄법 위반혐의 등으로 기소돼 중형을 선고받고 징역을 살았던 박해전 등 6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재판부는 그날 판결을 하며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말부터 정권의 안정을 기할 목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아람회사건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피고인들에게 고문, 폭행, 협박 등 불법적 수단을 사용해 친목회를 반국가단체로 조작하고, 구성원들을 좌익용공세력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신군부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맞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피고인들에게 유죄판결한 원심을 파기한다. 당시 재판부는 혹독한 고문에 허위자백을 했다는 피고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늘의 법관들은 오욕의 역사를 되새기며 선배 법관들을 대신해 억울하게 고초를 당하고 힘든 여생을 살아온 피고인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힌다.”
--- pp.143-144

2018년 8월 헌법재판관들은 6대 3으로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 조작 의혹 사건에는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시작점을 ‘불법행위를 한 날’, 즉 6개월로 계산하는 민법을 적용하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헌재는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과 관련해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관련 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 중대한 인권침해·조작 사건은 “재심 무죄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라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국가폭력 사건에 대해 소멸시효 ‘6개월’을 내세운 양승태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는
의미다.
정영 등은 헌재 결정을 근거로 국가배상소송 재심을 시작한다. 그리고 2019년 4월 5일 마침내 서울고법 민사에서 정영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승소한다. 이어서 정영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도 배상청구 소멸시효를 양승태 대법원의 6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고 판결했다.
이 소멸시효 3년 판결은 국가폭력 손해배상 재심의 첫 대법원 판결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하급심 법원에서는 국가폭력 피해사건의 손해배상과 관련해 2013년 양승태 대법원 판례인 ‘6개월 시효’를 인정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나라 법원은 언제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 될까.
--- pp.160-161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평생을 살아온 윤질규는 진실위 진실 규명 결정을 근거로 곧 법원에 재심을 신청한다. 하지만 재심 신청을 하고 3개월 만인 2011년 3월 그는 한 많은 일생을 마친다. 윤질규가 운명하고 1년 반이 지난 2012년 11월 21일 서울고법 춘천 형사1부는 마침내 고인이 된 윤질규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지하는 판결을 내린다. 20대의 나이에 간첩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 끝에 억울하게 7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납북어부가 29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이로써 고인이 된 윤질규의 억울함은 29년 만에 풀렸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이승에서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통하게 죽은 그는 오늘도 말이 없다. 순박한 한 젊은 20대 어부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해 간첩으로 조작하고 인생을 망친 당시의 경찰, 검사, 판사들도 역시 아무 말이 없다.
--- pp.176-177

1986년 2월 1일, 김병진은 마침내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고문받는 이들의 비명이 들리는 악몽 같은 보안사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내놓고 보안사에서 자신이 겪은 고초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을 쓴다.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으로 동시에 출간된 『보안사』가 그것이다. 1988년 일본어판 『보안사』는 [아사히저널]에서 논픽션 우수상을 받는다. 반면 한국어판이 나왔을 때 노태우 정권은 책 8천부를 모두 압수하고 김병진에게 지명수배를 내린다. 책을 펴낸 출판사는 압수수색을 받고 사장 역시 지명 수배된다. 김병진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 당하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국내 입국이 금지된다.
김병진은 그의 책에서 2년간 보안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자행되던 고문과 회유로 조작되던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끔찍한’ 진상을 폭로했다. 수사관의 실명을 고스란히 적은 이 책은 이후 간첩조작 사건의 재심 재판에서 주요 증거가 된다. 『보안사』를 재심 재판에 증거로 제출해 무죄판결을 받은 이들 중에 고맙다며 그에게 연락해 온 이들도 4명이나 된다. 김병진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다른 재일동포들이 여러 면에서 후원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도주 계획을 세우면서 아내에게 “감싸줄 선배들이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 pp.198-200

2006년 10월 18일 이상철, 아니 보광 스님은 1984년 전두환 정권기 보안부대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자신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며 진실위에 진실 규명을 신청한다. 하지만 진실 규명을 신청한 지 4개월 만인 2007년 2월 25일 심장마비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출소 후 무려 23년간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아들(당시 28세)은 뒤늦게 아버지의 차가운 시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뜨겁게 오열한다. 아들은 아버지 생전에 호적을 정리하려고까지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운명하기 한 달 전인 2007년 1월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만나기를 거부했다. 이상철은 그런 아들을 그리워하며 아들 휴대폰에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그것이 유언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실이 밝혀질 테니 하나하나 풀어나가자. 아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야.“
--- pp.222-223


이날 재판 결과에 대해 심진구의 아내는 이렇게 감회를 밝혔다.“남편이 못 보고 떠나셨어요. 구 아무개 전 안기부 수사관이 굉장히 뻔뻔하게 재판에서 진술하고. 남편이 분노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저 사람 처벌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시면서도 눈을 못 감고…. 감겨도 자꾸 뜨고…. 잔혹한 고문을 하고도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가면서 이 세상을 활보하고…. 고문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더 중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위증죄로만 판결을 해서 조금 아쉽네요.“
심진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를 고문한 안기부 요원들의 몽타주까지 그리면서 진실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수사와 처벌이 불가능했다.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는 반인륜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없이 가해자를 처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는 왜 국가폭력에 대해 공소시
효를 배제하는 법률을 아직도 제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구 아무개 전 안기부 수사관은 심진구나 그 유족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번 판결에 불복해 ‘처벌이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 pp.240-241
 

출판사 리뷰

현재진행형의 국가폭력 잔혹사
이 책은 196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일어났던 간첩조작사건 14가지를 다룬다. 2020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던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칼럼 가운데 재심에서 무죄로 완결된 사건들을 추려 단행본으로 구성한 것이다. 저자는 그 ‘간첩조작사건’ 희생자들의 인권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으로 유린되었던 ‘그때 그곳’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마치 베리길리우스가 단테를 안내해 지옥과 연옥을 낱낱이 보여주며 설명하는 것 같이, 당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로선 지독하고도 완강하게 외면하고 싶은 현장으로 안내한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무 말이 없다
책에 등장하는 인권침해 피해자들은 양심적인 학자, 민주화운동 학생, 재일교포, 어부, 공장 노동자, 신학자 등이다. 양심적인 학자와 민주화운동 학생은 자신의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들에게 본보기로 손봐줘야 할 대상이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단칼에 잠재우는 수단이었다. 재일교포와 어부는 자신을 방어할 논리나 든든한 인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정권의 위기 때 또는 선거철마다 이들을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해 대국민 발표를 하며 군부정권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강화하는 ‘북풍용’ 소모품으로 거침없이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 자신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인생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지금도 과거 인권침해 사건의 가해자들은 국회의원도 하고 변호사도 하며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며 큰소리치고 사는데 피해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병든 몸과 맘을 이끌고 투쟁하며 살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가 바꾸는 세상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베아트리체의 빛나는 모습을 향해 올라갔던 천국을 동경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 천부적으로 누려야 할 현실세계가 그런 것이니까. 책을 꽉 채우고 있는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고문 장면과 참혹한 삶과 죽음과 그 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인권유린 현장을 목도하면서, 독자들은 스스로 외면하고 침묵함으로써 이루어진 잘못이 아닌지 돌아보게 될 것이다. 증언을 들은 자에게는 의무가 발생하는 법인 까닭이다. 저자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우리의 자각과 행동이 불러올 ‘나비효과’를 간절히 바라며 독자들 한 명 한 명을 찾아가고 있다. 역사는 이런 만남의 연속 속에서 늘 새롭게 시작한다.
 

추천평

침묵하지 않을 의무의 선순환
어떤 사건을 목격하거나 피해자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침묵하지 않을 의무가 발생한다. 모든 사람이 이 도덕적 ‘의무’를 지켰다면 세상은 벌써 좋아졌을 것이다. 사실 역사학자들도 이 의무를 ‘성실히’ 지키며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다. 영국에 사는 김성수 박사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온 몸으로 이 의무를 실천하면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이 선한 의무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 속에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책을 펴냈다.

안정적인 철도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 영안실에서 큰 결심을 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함석헌 선생의 생애와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보고서 전문위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에서 국제협력팀장을 지내며 과거에 발생한 국가폭력 사건들과 마주했다. 진실위의 영문보고서 채택 문제를 놓고 그가 5.18은 반란이라는 뉴라이트 출신 이영조 위원장에 맞서 끝내 승리한 일은 용기 있는 지식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는 멀리 영국에 있으면서도 현재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한국에 오면 반헌법행위자열전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2017년 초 케임브리지대학교 초청으로 김대중 대통령 추모 강연 차 영국에 갔을 때는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그의 집에 초대받아 반갑게 만나기도 했다. 김성수 박사는 이따금 어려운 조사나 정리를 부탁하면 말 떨어지기 무섭게 제꺽제꺽 결과물을 보내온다. 농담으로 한적한 동네에 있어 할 일이 없어 그렇다곤 했지만, 참으로 보기 드문 성실함이다.

김성수 박사가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침묵하지 않을 의무를 실천하는 것은 그 자신 얼굴도 모르는 젊은이들의 희생이 그가 해외유학을 마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31년 전, 아무 대책 없이 영국 유학을 시작한 그가 영국의 한 장학단체에 장학금을 신청했을 때, 그는 신청액의 10배가 넘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때 대한민국은 이른바 분신정국이라 불리던 시절, 그야말로 하루걸러 한 명씩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던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런 처절한 이야기를 외신으로 접하던 영국 장학단체 인사들이 계속된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의 행렬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다가 한국에서 온 젊은이를 파격적으로 후원하기로 한 것이다.
증언을 들은 자에게는 의무가 발생한다. 한국이란 낯선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국 장학단체 분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오늘의 김성수가 있을 수 있었다. 그는 30년이 지난 오늘도 부단히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2020년대의 젊은 독자들에게 국가폭력, 특히 조작간첩 사건은 참으로 낯선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과 희생은 김성수 박사가 겪은 것처럼 직접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알게 모르게 독자들이 보내는 오늘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다.

아무리 국가의 본질이 폭력의 독점이라지만, 국가폭력이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의 장학단체 임원들도 그런 마음을 가졌고, 저자도 그런 마음으로 독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역사는 이런 만남의 연속 속에서 늘 새롭게 시작한다.
이 책에 담긴 조작간첩 사건이 낯선 이야기인 만큼이나, 30년 전 영국 사람들에게 한국 젊은이들이 국가폭력에 희생되고 있다는 소식도 아주 낯선 이야기였다. 김성수 박사의 장점은 이 낯선 이야기 속의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역사학자답게 단편적인 사건의 소개를 넘어 한국현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준다. 증언을 들은 사람의 책무, 침묵하지 않을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늘어가길 바랄 뿐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