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영어: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1882년(고종 19년) 조선과 미국 간에 조인된 조약이다.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 간에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처음에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수호 조약을 맺으려고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領事) 곤토(近藤眞鋤)로 하여금 동래부사를 방문하고 자기의 내한 목적이 통상수호에 있음을 밝히고 서계(書契)를 조정에 올려 주기를 청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내에서 김홍집을 비롯한 원로대신들은 미국에 대한 지식과 통상의 이익을 인식케 되었다.
이때에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고,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하기 위하여 구미 여러 나라와의 수호 통상을 권고하고 있었다. 이때 슈펠트는 이홍장에게 조선과의 수호 통상을 알선해 주기를 청했다. 그동안 수차의 회합과 사신 파견 등을 거쳐 1882년(고종 19) 음력 3월 슈펠트 제독은 청나라 사신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 등과 인천에 도착하여 그들의 알선으로 정부의 전권대관 신헌, 부관 김홍집 등과 음력 4월 6일(양력 5월 22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구미(歐美)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며,이후의 다른 구미 국가와의 통상 조약 내용도 이것과 비슷하다. 최혜국 조항, 치외법권 인정 등의 모순점도 보이지만 상당히 우호적인 점도 보이고 있다.
이 조약에 따라서 그 이듬해 음력 4월 7일(양력 5월 23일)에 초대 미국 전권공사(全權公使) 푸트(H. Foote)가 인천에 도착하여 13일 조약에 비준(批准)하였다. 그 후 음력 6월에 조선 정부에서도 민영익을 전권대신에 임명하고 부관 홍영식·서광범 등을 미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전문 14조로 된 조약의 주요 내용중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1905년 7월,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며 조선과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출처: 위키백과]
더글러스 맥아더
더글러스 맥아더(영어: Douglas MacArthur (더글러스 매카서)[*], 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며 외교관 겸 사회운동가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와 미국 육군참모대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지휘관이었다.
주요 이력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필리핀 식민지의 통치자였으며, 1945년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극동군의 지휘관을 지냈다. 또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역시 그의 관리 대상이었다.1937년 퇴역하고 필리핀 명예 육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1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복귀한 후 1944년 미국 육군 원수 계급을 받아 진급하였다.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항복이 있은 후 일본에 주둔하다가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군이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인민군들을 남북으로 양분시켰다. (인천상륙작전 참고)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군 점령사령부 원수를 지냈다.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된다. 북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잘 언급되지 않으며, 상륙작전으로 일어난 전투의 일부인 "월미도 방어전투"라는 표현만 자주 사용한다. 월미도 전투에 대한 기념행사도 한다.코드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쓰고자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들 중 크롬 광석에서 따와 지었다. 작전 후에는 Battle of Inchon(인천 전투)으로 불리고 있다. 인천시의 현용 영자 표기인 Incheon이 아니라 당시 정식 표기인 Inch'ŏn에 기반한 Inchon을 사용했다. 부산 교두보 전투의 영어 표기가 Battle of Pusan Perimeter인 것처럼.
배경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된다.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계속 승리하며 겉보기에는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이 소련에게 공여받은 250여대의 T-34전차의 경우, 서울에서 탱크 쇼크에 맛을 들인 북한군 수뇌부에 의해 제대로 된 제병 합동 전술을 만들지 않고 무의미하게 기갑전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별다른 전술 없이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회용으로 소모해버린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점령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자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 워커 중장의 우주방어(방어전략)로 간신히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산을 저지선으로 선택할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게되어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상륙작전의 결정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에 나섰다. 한강변에서 전선을 확인 후 지상군 투입을 결정한다.
한국군은 보급부대나 체계에 있어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유사시 작전계획도 세워져 있지 않으며 설사 계획이 갖춰져 있더라도 퇴각 중에 발생한 손실로 제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이다.
맥아더 원수 전선시찰 보고 전문 中
준비되지 않은 국군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계획(연합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에게 북한군의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과 상륙지점을 연구를 지시하고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에 상륙훈련을 지시했다. 또한, 7월 4일 상륙작전을 위한 공식 회의를 소집했다. 인천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일명 블루 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이었다. 이 작전계획 역시 인천상륙작전으로 7월 22일에 실시하려고 했다. 인천으로 들어와서 교통로의 중심인 서울지역을 장악하면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을 수 있다는 건데, 그때는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게다가 상륙전 준비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블루 하츠 작전은 7월 20일에 공식적으로 폐기된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펼쳤을 때 맥아더 장군은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병력에 많은 제한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법으로 폐기했던 블루 하츠 작전을 바탕으로 다시금 상륙작전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OPERATION CHROMITE, 인천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사령관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끈 상륙작전의 귀재이다. 장군의 산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고립시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의 와해를 예상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따라서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일본 점령 사령관으로서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한반도에 진주해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했고 그 자료를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때 대부대를 인천으로 들여보냈던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상륙작전을 실시해야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덤으로 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므로, 매우 비효율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후퇴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터널이 많아진 21세기 현재에나 어느 정도 가능한 얘기다.[10] 게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는 산지와 인구밀집 지역을 피하기 위해 고가도로인 곳이 상당히 많다. 이런 가도에 탱크와 장갑차량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붕괴 위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포병이나 공군의 과녁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작전계획
작전계획이 '100'이라는 것은 기본 계획이라는 뜻이다. A, B, C, D는 각각의 방책인 것이고 A부터 가장 최우선책, B가 차선책, C와 D는 예비 및 우발계획이다.
작전계획 100-A : 미 8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먼저 반격을 해서 올라갔을 때, 군산에서 상륙함으로써 양측이 서로 협조된 공격을 하는 것이 작전계획 100-A의 기본 전제이다. 그러나 당시 미 8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제조건이 달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천에 상륙하는 작전계획 100-B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작전계획 100-B(인천 상륙)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은 '작전계획 100-B'이며 이를 작전명으로 암호화 한 것이 '크로마이트(CHROMITE)'이다.
작전계획 100-C(군산 상륙)
작전계획 100-D(주문진 상륙) : 별도의 주문진 상륙 계획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천으로 상륙을 하고 인천상륙작전이 북한군의 저항에 의해서 충분히 원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낙동강 방어 작전에 투입되었던 국군 2개 사단을 별도 TF로 구성해서 주문진 지역을 타격하여 양측(인천-주문진)에 연결 작전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인천의 험준함
이에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시였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북한군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
큰 조수간만의 차 :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수치는 9m, 최소 수치도 7m라서 대한민국 2위의 수치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 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밀물 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하므로 북한군의 반격 시 탈출하기도 힘들다.넓고 긴 갯벌 :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 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위 두 항을 이유로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높은 해벽 : 상륙지 주변에 모래사장[12]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배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사닥다리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항구에 인접한 시가 : 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를 직접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거의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좁은 단일 수로 : 만조 시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수로가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한다. 이는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그냥 고정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어수로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 제독은 "성공률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20년 6월 12일 국방TV 프로그램 '순삭밀톡'에서 6.25 전쟁 70주년 특집을 다루며 인천상륙작전 기밀문서 등을 소개하였는데,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을 대단히 낮게 보고 있었다거나 미 수뇌부와 맥아더 장군과의 마찰이 대단히 첨예하였다 등의 이야기들은 기밀문서가 해제되기 전 인천상륙작전을 다루던 소설 등에 의해 과장, 왜곡된 부분이 크다고 지적하였다.
인천이 결정된 이유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것은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군산시의 경우 상륙하기는 양호하나 앞서 언급했듯이 상륙해도 북한군의 보급선을 절단하지도, 적 병력을 포위하지도 못한다. 이런 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 지 오래였다.평양 이남의 남포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은 적의 수도 턱밑이므로 방어가 튼튼한데다가 가장 중요한 원산-서울-낙동강 보급선을 막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됐다.포승면(현 평택시 포승읍)은 해군 제2함대사령부가 있는 평택항 근처로, 이 곳이 바로 대한민국 1위의 조수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아산만 유역이다. 그나마 수도에서 정서방에 다다르는 인천과는 달리 수도와의 거리도 멀고, 조수 간만의 차도 극복하기 어려워 한국사 동안 아예 버려진 땅이었다. 또한 북한군이 인천항을 폭파해서 못 쓰게 만들 시간을 준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상륙작전 시를 포함, 이후 북진할 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작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 있었다.인천이 유리한 점이 있다면 배치된 병력이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대략 1,000명 이내만 인천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김포 등 내륙으로 진입하기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아 서울 자체를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철로와 도로를 끊어 북한군의 병참로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다만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에 대해서는 맥아더 이전에, 심지어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미군 내에서 충분히 유력한 작전으로 검토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Clay Blair의 『The Forgotten War』에 따르면, 1950년 6월 19일 미 국방부가 소위 SL-17 계획을 승인, 배포했는데, SL-17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시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안정화하고 9월 30일까지 인천 인근에서 상륙작전을 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SL-17의 복사본 50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참가부대
제7합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SEVEN - 지휘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해군 중장
미군
혼성 제10군단 - 지휘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
해병대 제1해병사단 -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해병대 소장
육군 제7보병사단 - 지휘관: 데이비드 G. 바 육군 소장
한국군
해병대 제1연대 - 지휘관: 신현준 해병 대령[18](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
육군 제17연대 - 지휘관: 백인엽 육군 대령[19](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
영연방 연합군(영국군, 캐나다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혼성) - 지휘관: 윌리엄 G. 앤드루스 해군 소장
네덜란드군
한편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다.8월 20일, 캐나다 해군 구축함 애서배스칸(Athabaskan)의 상륙반이 팔미도에 상륙하여 등대 내부의 통신시설을 파괴했다.한편 미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에 배속된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해군 공작조는 엑스레이(X-ray) 작전을 수행. 미리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의 장비배치도, 배치병력, 고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월미도에서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하였다.그러나 9월 14일, 앞서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해군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군에게 생포되면,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11번함 PKG-722·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양동작전
해당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중공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이 필요했다. 양동작전이 시행된 곳으로 남한 지역에는 삼척시, 군산시, 북한 지역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마량도, 남포시 등이 있었다.인천에 상륙한다고 해서 D-day(9월 15일)에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한번에 공격한 것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졌다. 교란 및 기만작전이었다. 이를 통해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파괴했다.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다.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월미도를 비롯해서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한다. 뿐만 아니라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하여 포격을 했다.남포에는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F4U 콜세어를 동원하여 폭격을 하였다.
전라북도 군산에는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주변 약 50km 부근의 교통망에 인천과 비슷한 규모의 폭격을 가했다. 이때 도로, 교량 등을 파괴함으로써 군산을 고립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상륙작전 직전 흔히 있는 공습 패턴을 의도적으로 따라한 것이었다. 또한 9월 12일에는 미 육군 루이스 엘리(Louis Eli) 대령이 지휘하는 미-영 혼성기습부대(미 육군 제1레이더스 중대(8227부대)와 영국 해병대 제41코만도로 구성)가 군산에 상륙기습을 시도하여 가벼운 교전을 실행, 이쪽으로 침투하였다는 사실을 북한군 측에 의도적으로 노출한 뒤 철수하였다.
상륙 이틀 전인 9월 13일에는 강원도 삼척시 일대에 아이오와급 전함 BB-63 USS 미주리 함을 동원한 함포 사격을 가하여 적들의 눈을 돌리려고 하였다.같은 날인 13일, 낙동강 전선의 총사령관인 미 제8군 사령관 육군 중장 월튼 워커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즈음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함으로써 기자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이 10월 즈음에나 총반격을 한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도록 유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북한군 수뇌부에서는 후방에 남아있는 예비 부대를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기로 결정하였다.여담으로 양동작전의 예시로 알려져 있는 장사 상륙작전의 경우, 동일 날짜와 동일 시간대에 진행되었다는 점과 보급선 차단이라는 상륙 목적을 감안한다면 양동작전보다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진군을 위한 지원작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북한군의 예측
북한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UN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수긍했다. 중국 측에서는 서해안의 남포, 인천, 군산과 동해안의 원산 모두 후보지로 예상했다. 또한 미군이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한 군데를 찍어 집중적인 방어를 펼치기가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물론 그 가운데도 린뱌오와 같은 전략가들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유력하다고 정확한 예상을 하기도 했다. 이에 동의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조선인민군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 육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하여 기껏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날려먹는 삽질을 해버린다. 덕분에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과 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게다가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병력이 처음 상륙했을 때 당장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 뿐이었다. 그나마 가장 쓸만한, 앞서 언급한 육군 18사단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낙동강으로 가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내려가 버렸다.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 제거되었다.
인천상륙
British Pathè의 기록영상. 상륙 초기의 모습이 담겼다. 함대의 포격 엄호 속에 해안으로 돌진하는 유엔군 상륙정들.
인천 상륙작전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월미도 제압(그린 비치): 해안포와 동굴진지가 갖추어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제압해서 상륙작전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천항과 시가지 등에서 날아오는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든다.인천항 상륙(레드 비치): 인천항에 직접 상륙해서 항구를 조기에 확보한다. 가장 어려운 임무이므로 미해병대 중 가장 베테랑인 부대를 동원한다. 동시에 국군 해병대 제1연대가 UN군과 함께 상륙했다. 이때 높은 방파제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에서 나무사다리 수천개를 긴급히 제작해서 공수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사용하는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다.인천 남동부 상륙(블루 비치): 인천항에서 북한 방어군이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을 때 후방으로 우회해서 경인가도를 장악하여 인천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서울방면에서 오는 북한군의 증원군을 차단한다.상륙 하루 전 9월 14일, 인천 방면에 주둔하던 북한군은 평양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 및 격멸할 것임.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다.
참고로 연합군 함대의 인천 집결 경로는 아래와 같다.
연합군함대인천집결경로
1950년 9월 11일, 요코하마 : 미 육군 7사단
9월 11일, 고베 : 미 해병 제1사단
9월 12일, 부산 : 미 해병 제5연대, 국군 해병 제1연대
9월 12일, 사세보 : 마운트 맥킨리(인천상륙작전의 지휘함), 로체스터(제7함동기동부대의 기함)
요코하마, 고베에서 출항한 병력은 포인트 아이오와에서 사세보에서 출항한 함대와 합류한다. 이후 포인트 아칸시소에서 부산에 출항한 함대와 합류 후 9월 14일 포인트 캘리포니아를 지나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한다. 당시 규모는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이다.
팔미도 등대 점령
9월 15일 00시 05분 유진 클라크 미 해군 대위와 KLO부대, 그리고 한국 육군 및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연합작전팀이 팔미도의 등대를 무혈 점령하고 등대를 수리해 불을 켜서 상륙부대들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월미도(그린 비치) 상륙
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로켓을 퍼부었다)을 감행하였고,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한다.
방파제를 넘는 미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경, 인천, 신원미상의 미 해병대 사진병 촬영
USS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지휘부는 상륙시간(L-아워)을 06시 30분으로 확정한다. 미 해병대의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대원들은 06:00시까지 여러 척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탔다.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한다.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06시 33분이었다. 미 해군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다
전투기들이 불과 45미터 전방을 기총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추가로 2개 중대를 싣고 온다. 북한군의 저항으로는 산발적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G중대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지했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다. 그곳에서도 북한군의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다.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된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의 산업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과 연결된 방파제를 차단하였다.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미 해병대 전차소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약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한다. 투항하지 않고 동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해병들이 대동한 M4A3 셔먼 불도저 2대에 그대로 생매장 당했다. 미 해병들이 월미도를 휩쓸고 다니며 소탕작전을 계속했고, 08시 00분 미 해병대는 무선으로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한다.
10시 00분,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한다. 이곳은 조선인민군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곧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쯤 소월미도의 점령이 완료된다. 이때까지 사상자는 미군은 부상자 17명이 전부인 반면, 북한군은 사망자 108명에 부상자가 137명이었다. 월미도 곳곳에 널려있던 동굴째로 생매장 당한 100 ~150여명을 더하면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 상륙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다.H-아워 8분 전에 미 해병대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 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다.레드 비치의 상륙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를 형성했다.
여기 탑승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익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익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다.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다.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북한군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곧바로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고, 일부 병력은 해안 경비를 맡으며 후속 상륙 병력을 도왔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미군은 인천항의 도크를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일사천리로 소탕해 나갔다.그리고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다.이어서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상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다.작전의 총 지휘는 미 육군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병력의 총지휘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다.[30]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이다.
낙동강 전선의 반격
인천 상륙작전의 시기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군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유엔군이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은 지지부진한 성과만 보였는데, 9월 20일 무렵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험산준령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다.[31] 어떤 전쟁이라도 최전선 전투부대의 보급선을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상식이다.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들은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중 만이천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만 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뒤는 쭉쭉 밀려날 수 밖에.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은 파죽지세로 저 멀리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된다.
평가
6.25 전쟁의 전세 역전
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의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었다. 더는 후퇴할 수 없던 궁지에 몰린 대한민국이 이작전으로 역전의 카운터를 때려 전황을 북한군 우세에서 국군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반격의 신호탄을 울렸다 . 이후 북한군은 종전때까지 예전같은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당시 한반도에서 38선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 가능한 교통수단은 모두 서울을 거쳐갔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38선 이남의 조선인민군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의 한국군-UN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남의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오히려 한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게 된다.많은 군사학자들도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한다. 미국의 군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펜서 C. 터커(Spencer C. Tucker)는 인천 상륙작전을 "훌륭한 성공이며 거의 결점 없이 실행되었다"(a brilliant success, almost flawlessly executed)고 극찬했다.
작전의 문제점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32] 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한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 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일본에서 저술된 6.25 전쟁에 따르면 유엔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을 이 원산 상륙으로 꼽는다. 여기서 언급한 바로는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비해서 경력과 학업성적 그리고 1920년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아주 고참이였다. 맥아더가 육참총장을 할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부관이였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2차대전 중에 맥아더는 필리핀 철수를 하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지 못한 반면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전선 총사령관으로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였고 이러한 사실에 맥아더는 약간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 된 맥아더는 실제 10군단을 미8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직할부대로서 2개의 군을 지휘하는 고집을 부렸다. 이에 따라 백두대간을 기점으로 전선을 나누어 10군단을 원산 상륙 후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원산 상륙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까지 미국 정부와 유엔군의 작전목적이 38선의 회복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북으로 진격도 안 되었고 차량이동이 기본인 10군단이 동쪽으로 진격해도 애매한 상황이였다. 이왕 병력은 빠져나와야 하고 도로는 엉망인데 북한군은 괴멸되지 않았을 거고 평양도 사수할 거니까 원산으로 상륙한 다음 평양을 치자는 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 태평양 사령부에 속하는 모든 배를 동원해서 원산상륙을 시도했지만 서울에서 병력을 다시 인천으로 빼서 다시 장비를 하역하고 병력을 탑승시킨 후 원산으로 가는 동안 이미 한국군 1사단이 먼저 원산을 점령하게 되고 이 병력들은 행정상륙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주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미 원산 앞 바다는 기뢰천지가 되어있었고 소해병력은 일본 소해정까지 다 끌고 와서도 한 달 이상을 소해 해야했고 모든 수송선은 여기서 열중쉬어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여서 유엔군 참모부는 반대했지만 맥아더가 원산상륙을 결정하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미 10군단 병력이 태백산맥은 정녕 넘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으로 진격했으면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의 성과가 더 나왔을 거라고 판단되었고, 원산상륙의 보급상의 문제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이 그렇게 빨리 후퇴할지를 생각하지 못한 결정적인 판단미스였다. 이때 참모진의 원산상륙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탄약보급선의 문제였는데 인천항과 김포공항, 경부철도로 보급선을 유지하게되는 유엔군 입장에서 부분 파손된 김포공항과 철도가 중간중간에 끊겨서 긴급복구를 했지만 아주 서행 운전해야 하며, 중간중간에 잔류한 북한군의 습격으로 보급선의 안정적 유지가 힘든 입장에서 인천항은 유엔군의 생명줄이였다.
하지만 이 원산 상륙에 의해서 탄약 재고량이 2일치로 간당간당하게 되고 원산 상륙 후에도 이 탄약재고량은 겨우 예비분 2일치를 유지하는 상황이 청천강 유역에 유엔군이 도착한 시점의 일이다. 이때 충분한 탄약 재고량이 있었다면 평양도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청천강 패전 후에 임진강 유역까지 밀려나지 않았다. 평양 철수의 제일 큰 이유가 중공군을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보급량의 부족으로 미군의 강점인 화력을 쏟아 부울 수 없게 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대동강 방어선, 그러니깐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종심이 좁은 지역으로서 충분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방어가 가능했을것이지만, 여기서 이 보급선의 문제로 대동강 방어선을 방어하지도 않고 급하게 포기하게 된 것이다. 여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까지는 명장 소리를 들을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그 후의 북한군 잔존세력의 전력을 과대 파악 하는 바람에 한번 잘못 끼운 단추가 다른 단추까지 계속 잘못 끼우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사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수석졸업, 최연소 장군, 최연소 사단장, 최연소 참모총장 등 군인으로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한국전쟁을 빨리 마무리해서 전쟁영웅으로 명예롭게 예편한 후 미국 국민의 열렬한 인기를 등에 업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1952년 11월 미국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장기집권에 신물나서 공화당후보로 누가 나오더라도 대통령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다. 이런 야망과 쇼맨쉽, 조급함 등이 현지 지휘관이나 참모들 심지어는 트루먼 대통령의 말도 무시하고 무능한 예스맨들과 합심하여 무리하게 진격하였다가 모든 걸 망쳤고 본인도 불명예 제대에 국민적 비난으로 백악관 입성의 꿈은 날라가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산상륙을 위해서 춘천으로 급하게 진격을 안하고 10군단을 회군시킨 것은 결정적인 실수다.원산상륙으로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 원산상륙이 없었다면 대동강선으로 휴전선이 그여졌을 확률도 있다.만약에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교통 때문에 더 이상 가지를 못했고 그 당시 경부가도 말고는 장비를 가지고 후퇴할 수 없었으며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패잔병 몇 명을 더 잡을 정도지 한반도를 횡으로 진격한 것은 전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히 북한군은 잔존 빨치산의 안내를 받아 태백산맥을 따라 장비를 버리고 총만 들고 북으로 올라갔고 그 당시 우리나라 형편상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그때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준상황이였고 오히려 그 피해상황을 적게 판단하였기 때문에 엉뚱한 원산 상륙작전이 계획되었고 삽질작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인천 상륙작전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작전이였다. 하지만 너무 작전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 판단미스가 되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중공군들은 10월 10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자마자 압록강과 두만강변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공군 개입 전이라는 것은 엉터리다.마오쩌둥의 참전선언으로 긴가 민가한 트루먼 대통령이 북진명령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일단 군사학자들의 의견 중 일부는 타당하다. 김일성이 서울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서울로 진격했으면 서울 시가전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산 상륙작전의 경우 효용성 자체도 문제가 있고, 꼭 하더라도 이미 상륙한 부대를 다시 인천항에 집결시켜서 다시 배에 탑승시킨 다음, 동해안까지 빙 돌아서 항해한 다음에 상륙하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별도의 부대를 빨리 보내는 편이 바람직했다.
그런데 이 의견에는 당시의 강원도와 백두대간의 험준함과 교통시설 미비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다. 지금도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시설이 미흡하며, 특히 대량의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철도 시설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서울에서 정동쪽 방향으로 진격할 경우, 경기도 경계를 넘어서부터는 도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지독한 산악지대를 횡단해야 동해안에 이르게 된다. 서울 탈환 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수원 방면을 맡은 부대의 일부가 서울 남쪽에서 한강을 도하해서 남산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지원한 사실이 있을 정도였는데, 소수의 기동부대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횡단한다고 하면 북한군의 저항이 없다고 해도 속도도 느리며,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간신히 길만 막은 상태라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북한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는 북진 작전에서 이미 산악지대에 아군이 맹진격하고 있었으나, 금천에 포위된 북한군이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한 것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이미 증명된다. 게다가 북한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재수 없으면 기동부대가 역습받아서 괴멸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산악전의 쓰라림은 한국군이나 UN군이 엄청나게 겪은 일이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못 따라가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리학적으로 한반도에는 추가령구조곡이란 특이한 지형이 있다. 추가령구조곡은 서울-의정부-동두천-연천-철원-평강-세포-고산-안변-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평탄하고 긴 골짜기이다. 고대부터 동해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이며 삼방협곡을 제외하고는 워낙 넓고 평탄하다 보니 분수령 혹은 분수계가 어디인지도 애매할 정도이며 백두대간이 추가령구조곡으로 인해 끊어졌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기술적으로 열악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경원선 철도를 놓을 수 있었을 정도이며 당시 많은 서울시민들이 경원선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피서를 가기도 하였다. 현재도 경원선 이외에 3번 국도가 지나가는데 이는 군사학적으로 중요한 기동로 및 보급로이며 군부대들이 겹겹이 밀집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육로를 통해서도 충분히 진출이 가능했으며 경원선 철도를 이용해 보급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상식적이지만 병력이동시 삼방협곡지역을 조심해야 하는데 경치는 아름답지만 자칫하면 죽음의 계곡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변 감제고지들을 철저히 장악해야 하며 철령고갯길도 기동은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병력을 배치하여야 한다. 위에서 춘천을 빨리 점령했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춘천을 통해서 원산으로 가는 것은 화천,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을 거쳐서 철령을 넘던지[34], 아니면 인제를 거쳐서 여러 고갯길을 넘어 동해로 빠진 다음 해안선을 따라서 북상하는데 대규모병력이 이동하기에는 훨씬 멀고, 험하고, 위험하다. 차라리 의정부에서 축석고개를 넘어 포천,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을 거쳐 철령을 넘는게 멀리 우회하긴 하지만 춘천을 거치는 것 보단 훨씬 낫다
만약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대로 평양과 원산 라인 정도에서 강력한 수비라인을 구축하고 진군했다면 아무리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맞선다 하더라도 시야가 훤히 보이는 넓은 평지에서 미군의 강력한 화망 앞에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이고, 버텨 봤자 보급난과 UN군의 폭격으로 얼어죽거나 굶어죽게 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마오쩌둥 입장에선 한반도에 주력이 고립된 상황에서 잘못하다가는 빈집털이(중국본토상륙작전)를 당할수도 있으므로 매우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하며 따라서 역사가 크게 바뀔 수 있었다. 어찌보면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욕심때문에 김일성이 인천상륙작전을 허용했다면, 반대로 맥아더는 그 욕심으로 1.4후퇴를 하게 된 셈이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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