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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4·19는 ‘좌절된 혁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혁명이고, 더 나아가 5·16으로 꽃피워지고 ‘완성된 혁명’이다. 5·16은 4·19로 인하여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고, 4·19는 5·16으로 계승되면서 비로소 혁명적 성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4·19와 5·16의 상호관계를 가장 정확히 표현했던 선각자 함석헌 옹은 5·16 발생 직후 4·19의 학생은 ‘잎’이고, 5·16의 군은 ‘꽃’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4·19의 ‘잎’과 5·16의 ‘꽃’은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예언했었다.
물론 그 예언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대한민국에서 ‘한강의 기적’과 신생 독립국과 개발도상국의 모델이란 열매로 맺어졌다.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대혁명은 ‘대한민국 건국’
5천 년 한반도 역사 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졌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도입한 48년 체제야말로 ‘민주화’이고 ‘민주주의 대혁명’이다. 이때 선거와 삼권분립이 도입됐고 개인 기본권이 보장되었으며 한국인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태어났다. 개인들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복수정당제에 의한 정당정치가 시작되었고 한국인은 ‘백성’에서 ‘국민’으로 탈바꿈했다. 수천 년의 봉건제와 식민 지배를 끝내고 우리 민족이 최초로 인류 보편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라는 혁명적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1948-1960) 12년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 국가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 12년을 딛고 한국은 다시 4·19와 5·16을 거쳐 다른 비약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고, 근대 산업화를 기반으로 산업경제의 고도화와 정치 사회의 성숙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다. 1945-1948년간 전개된 건국 과정과 건국 체제의 연속선에서 4·19와 5·16의 역사적 성격과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현대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본질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4·19를 의거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혁명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부터 정치적 논란이 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4·19의 역사적 의의가 부각되어야 하는지, 5·16의 역사적 의미가 더 부각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도 정치적 의도에 따라 편의적으로 평가되어 오기도 했다. (pp.13-14)
저자는 『4.19와 5.16 - 연속된 근대화 혁명』에서 한국 근·현대 정치사, 특히 4·19와 5·16을 규명하는 데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4·19와 5·16은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계승적인 것이며 양자 모두 대한민국 건국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를 발전시킨 상호 보완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저서가 밝힌 4·19와 5·16의 의의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합의 수준을 제고하고 진정한 의미의 국민 형성(Nation Building)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번영 체제를 향한 4.19와 5.16의 연속 혁명
봉건 체제를 해체시키고 근대 체제를 만드는 과정은 서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근대 국가들에서도 결코 단기간에 걸쳐지는 역사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된지 2년 만에 3년의 가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전후 복구와 순탄치 않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착 기간을 거쳐야 했다.
건국이라는 나라 만들기가 일단락 된 195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는 또 다른 염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화국도 아니고, 자유와 민주도 아니며, 언론 자유 확립과 선거권 확대도 아니었다. 물론 복수 정당제와 경쟁적 정당구조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거나 잦은 선거를 통한 정치 지도자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열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 취직도 하고, 삶의 질도 향상시키고 싶다는 염원이었다. 단기간에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가고자 하는 바람이 결집되고 있었고, 그 연장선에서의 폭발이 4·19와 5·16이라는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p. 26)
4·19는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분출된 정치적 저항이긴 하지만 4·19가 표출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근대화된 국가를 향한 번영 민족주의이다. 배고픔, 빈곤, 실업, 무질서, 기성 사회에 대한 실망, 원조에 의지하는 민족적 비굴함,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의 부재,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염증 등이 현실적 극복 과제였다.
4·19는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목표로 하거나 민주적 제도에 대한 요구,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삶의 질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번영 민족주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번영 지향적 민족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4·19의 방향성을 이미 예정해놓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동일한 제도와 체제 속에서 여당과 야당 간의 정치적 주역만 바뀌며 종결되었다는 것이 4·19가 결코 정치혁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4·19 혁명은 다른 민족을 배타적으로 한 국수주의나 저항 민족주의는 결코 아니었다. 강력한 근대화의 열망과 번영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담고 있었으나 그런 열망이 바로 성공적인 번영 민족주의의 실현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이승만 정부에서 더 보수주의적인 민주당 장면 정부로 바뀌었을 뿐 번영을 향한 강한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를 성공시킬 수 있는 일관되고 조직화된 제도의 힘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장면 정부에서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부정적 현상인 시위 만능과 선거 만능의 시대로 빠져 들어갔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질서 해체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타락된 상황이 전개되어갔다. 이것이 4·19가 맞이한 한계이자 과제였다. (pp. 94-97; pp.159-160)
4·19 혁명의 진정한 역사적 성격과 의미를 부각시켜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킨 것은 4·19로 집권할 수 있었던 민주당 정부가 아닌 5·16 혁명 세력이었다. 박정희는 1963년 민주적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제3공화국이 4·19 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정부임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적인 4월 혁명의 영령 앞에 나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4월 혁명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이어 5월 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5·16 주도 세력과 박정희 정부는 빈곤 극복이 5·16 정부에 부여된 혁명 과제임을 명확히 했다. 권력 투쟁적 정치에 매몰되며 근대 산업화란 목표가 좌절되고 떠내려가는 상황에서 5·16은 군부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경제 산업화와 국민의 삶의 질 제고라는 명확한 목표를 내세웠다. 우선 민주제도를 유린하는 집단 시위와 폭력 정치, 선거 중심 정치를 단절시켜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p. 160) 또한 3년에 걸친 처참한 전쟁에서 목숨을 건 전투에 참여했던 주역이었기에 박정희와 5·16 세력은 반공을 제1국시로 하여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4·19 이후 전개된 사회적 불안정을 틈탄 용공 세력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급진 행동에 강력히 대응했다. 4·19 이후 전개된 좌익 남로당 잔존 세력과 공산주의 연대 세력들의 움직임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군의 반공 강화는 국민적 불안에 대한 대응과 사회 안정 질서 확립으로 가는 기본 조건이었다. (p. 120)
박정희는 국민의 삶이 개선되고 성장의 혜택이 확대되어 누릴 수 있는 사회로 간다면 본인이 독재라고 비판받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산업 생산과 성과 중심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 곧 소모적 논쟁과 선거 중심적 정치 영역의 축소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복되는 잦은 선거는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국민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12년간 16회의 전국 선거를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p. 191) 박정희는 독재로 불리는 걱정보다는 근대 산업화가 추진되지 못하는 것을 우려했던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군 중심의 쿠데타 세력이 범하기 쉬운 폐쇄적 민족주의의 길을 결코 가지 않았으며 자율적인 시장에 기반한 기업 발전, 수출 주도형 체제를 만들어 국민들의 염원인 빈곤 탈피와 번영을 이룩하였다.
한국 근·현대 정치에 1948년 8·15는 명백한 ‘민주 혁명’이었고, 6·25전쟁 이후의 4·19와 5·16은 빈곤 타파와 경제건설을 향한 ‘산업혁명’이었다. 4·19와 5·16은 기아와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 재건과 국토 개발이라는 매우 강력한 공통된 기반에 서 있다. 둘 다 경제건설과 재건을 말하며 ‘근대화된 조국’이란 민족주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혁명을 편협한 정치적 시각과 ‘민주주의’라는 잣대로만 본다면, 그것은 1960년대에 대한민국이 만든 세계사적 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p. 194)
4·19와 5·16의 상호관계를 가장 정확히 표현했던 선각자 함석헌 옹은 5·16 발생 직후 4·19의 학생은 ‘잎’이고, 5·16의 군은 ‘꽃’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4·19의 ‘잎’과 5·16의 ‘꽃’은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예언했었다.
물론 그 예언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대한민국에서 ‘한강의 기적’과 신생 독립국과 개발도상국의 모델이란 열매로 맺어졌다.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대혁명은 ‘대한민국 건국’
5천 년 한반도 역사 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졌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도입한 48년 체제야말로 ‘민주화’이고 ‘민주주의 대혁명’이다. 이때 선거와 삼권분립이 도입됐고 개인 기본권이 보장되었으며 한국인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태어났다. 개인들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복수정당제에 의한 정당정치가 시작되었고 한국인은 ‘백성’에서 ‘국민’으로 탈바꿈했다. 수천 년의 봉건제와 식민 지배를 끝내고 우리 민족이 최초로 인류 보편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라는 혁명적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1948-1960) 12년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 국가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 12년을 딛고 한국은 다시 4·19와 5·16을 거쳐 다른 비약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고, 근대 산업화를 기반으로 산업경제의 고도화와 정치 사회의 성숙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다. 1945-1948년간 전개된 건국 과정과 건국 체제의 연속선에서 4·19와 5·16의 역사적 성격과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현대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본질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4·19를 의거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혁명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부터 정치적 논란이 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4·19의 역사적 의의가 부각되어야 하는지, 5·16의 역사적 의미가 더 부각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도 정치적 의도에 따라 편의적으로 평가되어 오기도 했다. (pp.13-14)
저자는 『4.19와 5.16 - 연속된 근대화 혁명』에서 한국 근·현대 정치사, 특히 4·19와 5·16을 규명하는 데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4·19와 5·16은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계승적인 것이며 양자 모두 대한민국 건국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를 발전시킨 상호 보완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저서가 밝힌 4·19와 5·16의 의의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합의 수준을 제고하고 진정한 의미의 국민 형성(Nation Building)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번영 체제를 향한 4.19와 5.16의 연속 혁명
봉건 체제를 해체시키고 근대 체제를 만드는 과정은 서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근대 국가들에서도 결코 단기간에 걸쳐지는 역사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된지 2년 만에 3년의 가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전후 복구와 순탄치 않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착 기간을 거쳐야 했다.
건국이라는 나라 만들기가 일단락 된 195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는 또 다른 염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화국도 아니고, 자유와 민주도 아니며, 언론 자유 확립과 선거권 확대도 아니었다. 물론 복수 정당제와 경쟁적 정당구조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거나 잦은 선거를 통한 정치 지도자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열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 취직도 하고, 삶의 질도 향상시키고 싶다는 염원이었다. 단기간에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가고자 하는 바람이 결집되고 있었고, 그 연장선에서의 폭발이 4·19와 5·16이라는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p. 26)
4·19는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분출된 정치적 저항이긴 하지만 4·19가 표출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근대화된 국가를 향한 번영 민족주의이다. 배고픔, 빈곤, 실업, 무질서, 기성 사회에 대한 실망, 원조에 의지하는 민족적 비굴함,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의 부재,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염증 등이 현실적 극복 과제였다.
4·19는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목표로 하거나 민주적 제도에 대한 요구,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삶의 질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번영 민족주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번영 지향적 민족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4·19의 방향성을 이미 예정해놓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동일한 제도와 체제 속에서 여당과 야당 간의 정치적 주역만 바뀌며 종결되었다는 것이 4·19가 결코 정치혁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4·19 혁명은 다른 민족을 배타적으로 한 국수주의나 저항 민족주의는 결코 아니었다. 강력한 근대화의 열망과 번영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담고 있었으나 그런 열망이 바로 성공적인 번영 민족주의의 실현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이승만 정부에서 더 보수주의적인 민주당 장면 정부로 바뀌었을 뿐 번영을 향한 강한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를 성공시킬 수 있는 일관되고 조직화된 제도의 힘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장면 정부에서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부정적 현상인 시위 만능과 선거 만능의 시대로 빠져 들어갔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질서 해체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타락된 상황이 전개되어갔다. 이것이 4·19가 맞이한 한계이자 과제였다. (pp. 94-97; pp.159-160)
4·19 혁명의 진정한 역사적 성격과 의미를 부각시켜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킨 것은 4·19로 집권할 수 있었던 민주당 정부가 아닌 5·16 혁명 세력이었다. 박정희는 1963년 민주적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제3공화국이 4·19 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정부임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적인 4월 혁명의 영령 앞에 나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4월 혁명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이어 5월 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5·16 주도 세력과 박정희 정부는 빈곤 극복이 5·16 정부에 부여된 혁명 과제임을 명확히 했다. 권력 투쟁적 정치에 매몰되며 근대 산업화란 목표가 좌절되고 떠내려가는 상황에서 5·16은 군부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경제 산업화와 국민의 삶의 질 제고라는 명확한 목표를 내세웠다. 우선 민주제도를 유린하는 집단 시위와 폭력 정치, 선거 중심 정치를 단절시켜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p. 160) 또한 3년에 걸친 처참한 전쟁에서 목숨을 건 전투에 참여했던 주역이었기에 박정희와 5·16 세력은 반공을 제1국시로 하여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4·19 이후 전개된 사회적 불안정을 틈탄 용공 세력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급진 행동에 강력히 대응했다. 4·19 이후 전개된 좌익 남로당 잔존 세력과 공산주의 연대 세력들의 움직임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군의 반공 강화는 국민적 불안에 대한 대응과 사회 안정 질서 확립으로 가는 기본 조건이었다. (p. 120)
박정희는 국민의 삶이 개선되고 성장의 혜택이 확대되어 누릴 수 있는 사회로 간다면 본인이 독재라고 비판받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산업 생산과 성과 중심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 곧 소모적 논쟁과 선거 중심적 정치 영역의 축소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복되는 잦은 선거는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국민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12년간 16회의 전국 선거를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p. 191) 박정희는 독재로 불리는 걱정보다는 근대 산업화가 추진되지 못하는 것을 우려했던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군 중심의 쿠데타 세력이 범하기 쉬운 폐쇄적 민족주의의 길을 결코 가지 않았으며 자율적인 시장에 기반한 기업 발전, 수출 주도형 체제를 만들어 국민들의 염원인 빈곤 탈피와 번영을 이룩하였다.
한국 근·현대 정치에 1948년 8·15는 명백한 ‘민주 혁명’이었고, 6·25전쟁 이후의 4·19와 5·16은 빈곤 타파와 경제건설을 향한 ‘산업혁명’이었다. 4·19와 5·16은 기아와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 재건과 국토 개발이라는 매우 강력한 공통된 기반에 서 있다. 둘 다 경제건설과 재건을 말하며 ‘근대화된 조국’이란 민족주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혁명을 편협한 정치적 시각과 ‘민주주의’라는 잣대로만 본다면, 그것은 1960년대에 대한민국이 만든 세계사적 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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