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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 이성 비판 1 (2005)

동방박사님 2023. 9. 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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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냉소적 이성 비판』은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고 있다. 냉소주의가 어떤 현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지 살피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슬로터다이크는 이 책의 발표 이후 냉소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계몽이나 이성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말한다. 냉소주의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며, 계몽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우리는 냉소적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냉소주의의 극복을 위해 견유주의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냉소주의는 이성을 추구하면서 이성을 신뢰하지 않지만, 견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이성을 신뢰하지 않기에 이성 중심에 저항한다. 냉소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사유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

목차

해제-시대정신으로서 ‘냉소주의’
서론

제1부 조감-다섯 가지 예비 숙고
-01 냉소주의-허위의식의 황혼
-02 대화로서 계몽-다른 수단과 실패한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03 여덟 가지 폭로-비판의 평론
1 현시의 비판
2 종교적 환상의 비판
3 형이상학적 허구의 비판
4 관념론적 상부 구조의 비판
5 도덕적 허구의 비판
6 투명성 비판
7 자연적 허구의 비판
8 사적 허구의 비판
-04 폭로 이후-냉소의 어스름:계몽 윤리의 자기 부정에 대한 소묘
1 계몽의 계몽된 방해
2 계몽의 파손
3 이미 반쯤 열린 문을 박차는 헛수고
4 마르크스주의의 비가:마르크스 안의 ‘균열’과 알튀세
5 불투명한 삶에 대한 감정
-05 ‘잃어버린 뻔뻔함을 찾아서’
1 그리스적 뻔뻔함의 철학:견유주의
2 이상주의 바람을 향해 오줌누기
3 시민적 신견유주의:예술
4 편을 바꾼 뻔뻔함으로서 냉소주의
5 이중 첩자 이론
6 뻔뻔한 사회사
7 구체화 또는 분열
8 정신분열적 사회의 심리정치학
9 몰염치한 행복
10 폭탄에 대한 명상

제2부 세계 과정에서 냉소주의
1. 인상학적인 고찰
-01 시대정신의 정신.신체 의학
1 혀, 내밀다쪾
2 심술궂은 웃음을 흘리는, 비뚤어진 입
3 꼭 다문 독살스러운 입
4 크게 벌리고 큰 소리로 웃는 입
5 명랑하고 고요한 입
6 눈길, 눈가리개
7 유방
8 엉덩이
9 방귀
10 똥, 쓰레기
11 생식기
-02 냉소주의자의 진열장
1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개차반, 철학자, 백수 건달
2 익살꾼 루키아노스, 또는 비판은 진영을 바꾼다
3 메피스토펠레스, 또는 늘 부정하는 정신과 지식에 대한 의지
4 종교재판관 또는 예수 사냥꾼인 기독교 정치가와 냉소주의 정신으로부터 제도 이론의 탄생
5 세인 또는 현대의 산만한 냉소주의의 가장 사실적인 주체

저자 소개

저자 :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년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철학.독문학.역사학을 공부하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현대 자전문학의 철학과 역사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이래 자유작가로 활동하면서 시대 진단을 비롯해 종교철학.심리학.문화.예술 이론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책을 펴냈다. 현재 카를스루에 조형대학의 교수이자 총장으로 있다. 또한 빈 조형예술아카데미 문화철학연구소장, 제2독일 텔레비전(ZD...
 
역자 : 이진우(李鎭雨)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 『탈현대의 사회철학』 『도덕의 담론』 『이성은 죽었는가』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 『이성정치와 문화민주주의』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슬로터다이크 논쟁을 중심으로』(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
 
역자 : 박미애(朴美愛)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Patriarchat durch konfuzianische Anstandsnormen,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슬로터다이크 논쟁을 중심으로』(공저)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과 『모차르트』를 비롯해, 『꿈의 노벨레』(A. 슈니츨러), 『동화 속의 남자와 여자』(베레나 카스트)...

출판사 리뷰

▣ 이 책에 대하여

철저하게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의 철학적 사유

냉소적 이성 비판?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슬로터다이크라는 낯선 철학자가 칸트의 후예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칸트와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근대 계몽주의와는 철저하게 거리를 둔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다. 그와 더불어 우리 역시 이제 더 이상 계몽이나 이성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냉소적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냉소주의가 바로 계몽주의의 극단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계몽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우리는 더욱 냉소적이 된다.
그러면 ‘냉소’가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한 방법을 놀라움과 즐거움을 통해 제시해주고 있다.


▣ 해제-시대정신으로서 ‘냉소주의’ (이진우-계명대학교, 철학)

“시대는 온통 냉소적이 되었다.” 유명한 철학자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 하나로 시대정신을 꿰뚫는다고 했던가.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슬로터다이크란 철학자는 이 명제 하나로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냉소주의가 스며들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어떤 사람들에겐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철학자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겐 언어의 마술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슬로터다이크가 시대정신을 감지하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서구의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만은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목 자체만으로도 독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냉소적 이성 비판》이 출간되기 전까지 슬로터다이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였다. 이 책은 1983년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물론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이 책이 가진 문화적 의미와 철학적 적실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단순한 대중문화로 매도될 수 있고, 아도르노가 말하는 문화산업의 생산품일 수 있고, 부르디외가 말하는 대중적 취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83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슬로터다이크 논쟁은 그의 명제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슬로터다이크란 이름은 이제 우리의 시대정신인 냉소주의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설령 슬로터다이크 논쟁 자체가 단순한 문화적 징후에 불과할지라도, 이 징후는 분명 냉소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슬로터다이크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시대정신으로서 냉소주의’에 주목하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잡을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수사학적 현란함에 매료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어느 독일 신문이 적절하게 묘사한 것처럼―‘철학적 추리소설’로 만드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냉소주의다. 원문으로 95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은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우선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냉소주의가 계몽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본 다음, 끝으로 이 책의 강점이기도 한 수사학적 과정이 냉소주의의 철학적 원형인 견유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간단히 서술하고자 한다.
냉소주의는 어떤 현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다음의 간단한 인용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시사하고 있다.
“파멸이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가 만병통치약처럼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시대는 냉소적이 되었고, 이 새로운 가치도 단명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당혹감, 시민 가까이 숨쉬는 것, 평화 보장, 삶의 질, 책임 의식, 환경 친화, 이 모든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적절한 때를 기다릴 수는 있다. 냉소주의는 그런 우리 뒤에서 장황한 회담이 끝나고 사태가 진행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맥빠진 근대성도 ‘역사적으로 사유할’ 줄 알지만, 우리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의미 있는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여기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우리 시대가 냉소적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냉소는 분명 의심과 회의의 산물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태도를 냉소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현대인이 모든 것을 믿지 않고 쌀쌀해진 까닭이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삶과 목표와 의미를 제공했던 유토피아적 이상이 파국의 가능성으로 폭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에게 평등을 보장하리라던 공산주의는 인간의 원초적 자유를 말살하는 전체주의로 폭로되고, 인간에게 복지를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했던 기술 문명은 인간의 삶 조건인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파멸을 막기 위하여 새로운 가치들이 만들어지고 도입되지만, 그것들 역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질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주장하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알면서도 그것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이 바로 냉소주의다.
철저하게 계몽된 현대인은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 군대는 승리를 최고의 목표로 삼지만 핵폭탄이 엄존하는 시대에는 어떤 승자도 있을 수 없다는 인식과 결합하면, 군대는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파멸을 위해 존재한다는 군사냉소주의가 출현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몸은 영혼의 이정표라는 플라톤적 사랑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성해방이 오늘날 사랑 없는 섹스를 만연시킨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믿지 않는 섹스냉소주의에 감염된다. 이렇게 슬로터다이크는 현대 사회에서 출현하는 다양한 형태의 냉소주의를 주로 《냉소적 이성 비판》 2권에서 상세하게 서술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다양한 사진자료들이 현란하고 과장된 문체와 어우러져 냉소주의의 여러 현상이 시대적 징후로서 감지되는 것이다.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주의 현상 분석은 근대의 계몽주의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성의 빛을 신뢰하는 계몽주의는 결코 어두운 부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이성 중심적 계몽주의는 결정적 부작용을 수반한다. 다시 한번 섹스냉소주의의 예를 들자면, 인간의 몸을 구석구석 밝히겠다는 근대의 과학적 계몽주의는 사진기술과 결합하여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결국 몸의 신비를 파괴함으로써 사랑의 무의미함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물론, 근대의 계몽주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최종적 근거를 찾기 위해 회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묻는다. 만약 이성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종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몽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근거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시대의 회의는 결국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다음으로, 냉소주의는 계몽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슬로터다이크의 철학을 특징짓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냉소적 이성 비판’이다. 이 제목은 슬로터다이크가 칸트의 이성 비판에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이어지는 근대 계몽주의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계몽주의 자체를 철저하게 비판한 니체의 후예다. 냉소주의가 계몽주의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계몽된 현대에서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방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실제로는 계몽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철저하게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찾는다.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계몽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편 이성으로, 밝혀질 수 없는 영역은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성이 실제로 모든 영역을 철저하게 해명할 과학과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어둡고 신비로운 초월적 영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철저하게 계몽된 시대의 핵심적 특징이다.
슬로터다이크는 근대 계몽주의의 문제점을 이렇게 서술한다.
“이제 개념의 활력이나 이해의 황홀경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우리의 사유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계몽되었고, 무감각해졌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문제가 아니다. 친구(필로스)가 될 수 있는 그런 지식은 이제 없다. 이제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돌처럼 굳게 하지 않으면서, 그것과 함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이 인용문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우리의 개념은 생명이 없다. 둘째, 우리는 계몽되었기 때문에 무감각해졌다. 셋째,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철학은 정말 우리의 삶과 연관이 없는 죽은 개념의 납골당으로 변한 것인가? 니체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으로 묘사했던 개념들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인가? 위의 명제들을 거꾸로 읽으면, 우리는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써 철학이 임종을 맞고 있음을 확인한다. 철학은 근대 계몽주의를 통해 삶과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삶과 분리된 지식이 보편화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욱더 무감각해진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비판이 진행될수록, 즉 계몽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냉소적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커다란 허위의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데올로기 비판이 통상 허위의식의 계몽으로 이해된다면, 냉소주의는 ‘계몽된 허위의식’인 것이다.

끝으로,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냉소주의(Zynismus)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견유주의(Kynismus)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원상 동일한 근원을 가진 냉소주의와 견유주의는 도대체 어떤 공통점과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냉소주의와 견유주의는 모두 이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이러한 공통점은 지극히 표면적이다. 우리는 본질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냉소주의자는 어떤 자들인가? 슬로터다이크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이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고 그럼에도 ‘하던 일을 계속 한다면’―그들은 냉소주의의 현대적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하는 셈이다.” 예컨대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 대변되는 이성 중심주의가 파국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과학과 기술을 계속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냉소주의다. 간단히 말해서, 냉소주의는 이성을 추구하면서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견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이성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 중심에 뻔뻔하게 저항한다. 따라서 슬로터다이크는 근대의 계몽주의가 추구하는 ‘머리의 지식’에 고대의 견유주의가 구현했던 ‘몸의 지혜’를 대립시킨다. 견유주의는 동물적인 인간 육체와 그의 몸짓을 논증거리로 발견하고, 무언극적인 물질주의를 발전시킨다. 견유주의를 대변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디오게네스는 철학자들의 언어를 광대의 언어로 반박한다. 한마디로 뻔뻔함은 이성의 위선적 언어에 대항하는 몸의 언어이다. “뻔뻔함은 근본적으로 위와 아래, 즉 지배 세력과 반대 세력이라는 두 가지 위치를 점유한다. 이를 고풍스럽게 표현하면, 주인과 종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견유주의는 아래에서 나오는 힘이 실린 반대파의 입장에서 ‘적나라한 논증’의 과정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냉소적으로 사유하는가 아니면 견유적으로 사유하는가는 그가 어떤 편에 서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억압받는 자의 편인가 아니면 권력자의 편인가? 이성이 배척하는 사태의 입장인가 아니면 위선적 이성의 입장인가?
슬로터다이크는 이처럼 철학이 스스로 말하는 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으로 제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화 현상을 겪고 있는 이상주의가 거짓을 삶의 양식으로 만드는 문화 속에서 진리의 과정은 진리를 말할 만큼 공격적이고 자유로운(‘염치없는’) 사람들이 있는가의 여부에 좌우된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며 자신이 말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냉소주의는 위선적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슬로터다이크가 자신이 말한 것을 삶으로 구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견유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철학자가 자신이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다면, 그의 과제는 비판적 의미에서 그 이상의 것이다. 즉,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뻔뻔함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할 수 있는 표현 양식이다. 슬로터다이크의 수사학이 때때로 과장으로 치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장을 하지 않는 화가는 훌륭한 화가가 아니고 과장을 하지 않는 음악가가 훌륭한 음악가가 아닌 것처럼, 과장을 하지 않는 철학자는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다. 여기서 과장은 물론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시대정신을 겨냥하는 철학적 ‘진단’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비판’의 기능이다. 슬로터다이크 논쟁의 불씨를 다시 한번 지핀 그의 책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은 과장의 수사학을 구사한다. 우선 ‘동물농장’을 연상시키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고 뻔뻔스럽다. 휴머니즘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야만성을 잠재우고 길들이는 기능을 했다는 전제 아래,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선별하고 사육할 수 있게 만든 생명공학이 포스트휴머니즘의 도래를 의미한다는 명제는 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과장이 문제의 본질을 겨냥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철학이 놀라움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슬로터다이크는 과장을 통해 철학적 물음을 되찾고자 한다. 과장이 과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본질적인 물음이 꼬리를 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슬로터다이크는 이성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과장되었기 때문에 이 믿음을 극복하려면 또 다른 과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과장의 수사학을 철학적 사유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슬로터다이크의 글에서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가 불투명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글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론 독자가 이러한 수사학에 매몰되거나 현란한 현상 분석에만 빠진다면, 과장을 통해 도전적 사유로 이끌겠다는 슬로터다이크의 본래 의도는 빗나갈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를 단순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거나 우리의 시대정신을 꿰뚫어본 대표적 사상가로 만드는 것은 슬로터다이크 자신이기보다는 독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세 가지 명제가 관통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되었다.”
“우리는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 이 명제들이 독자를 재미있는 사유의 모험으로 이끌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