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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가 답하다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다들, 이렇게 막 살다가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는 심정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처세법은 독선이 아니면 염세인가 보다. 그래도 잠자리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올리고 방바닥을 긁으며 우리는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군가 똑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그를 만나면 조금은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하늘이 너무 무거워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사람, 젊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북간도와 만주벌판을 헤맨 사람, 전쟁과 식민지 속의 인간군속을 보면서도 끝내 인간을 버리지 못해 시를 쓰고 세상을 꾸짖은 사람, 무無 한 자락에 세상 밖의 가치를 세상 속으로 이어 붙이려고 한 사람,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배급을 받지 못해 끝내 굶어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이다.
그에게라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라면 어떤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 그날들≫에서 만해가 대답한다.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다들, 이렇게 막 살다가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는 심정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처세법은 독선이 아니면 염세인가 보다. 그래도 잠자리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올리고 방바닥을 긁으며 우리는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군가 똑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그를 만나면 조금은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하늘이 너무 무거워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사람, 젊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북간도와 만주벌판을 헤맨 사람, 전쟁과 식민지 속의 인간군속을 보면서도 끝내 인간을 버리지 못해 시를 쓰고 세상을 꾸짖은 사람, 무無 한 자락에 세상 밖의 가치를 세상 속으로 이어 붙이려고 한 사람,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배급을 받지 못해 끝내 굶어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이다.
그에게라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라면 어떤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 그날들≫에서 만해가 대답한다.
목차
북대륙 / 아비 / 아내 / 묘당 / 자결 / 양위 / 도일 / 1910 / 유신 / 간도 / 오세암 / 모의 / 심문 / 판결 / 대학 / 양진암 / 장마 / 방할 / 용성 / 건봉사 / 피체 / 아들 / 기행 / 우당 / 단재 / 흑풍 / 폐간 / 회갑 / 학병 / 해당화 / 후기 / 연보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만해의 눈과 귀로 쓴 만해 평전
─선사 만해의 속내와 그의 날들을 복원하다
평전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흔한 평전의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다. 모든 사실은 진술되는 순간 선택되고, 선택하는 행위에는 이미 평評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하면서 평하고, 선택된 것을 다시 평하는 것이 내게는 동어반복이거나 중언부언처럼 보였다.
‘평전’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라고 나와 있다. 또 ‘평론’이란, “사물의 가치, 우열, 선악 따위를 평가하여 논함, 또는 그런 글이라고 적혀 있다. 평評이라는 한 글자에 짓이겨져 나는 오랫동안 힘들었다.
모든 진술은 끝내 사실의 진술이 되지 못하고 가치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진술하는 행위는 그 자체에 이미 진술자의 평가가 내재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따라서 흔히 보는 평전 형식은 서술자의 주관성이 이중으로 주입된 과도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결국 나는 평을 포기했다. 어쩌면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평을 감당해낼 만치 담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누군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자맥질해 들어가, 그의 눈과 귀로 세상을 훑어보거나 나눠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난 다음에 나는 비로소 편안해졌다.
언제부턴가 한 사람의 생애는 그만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비의 아비, 또 그 아비의 아비가 살던 시대부터 퇴적되었거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나 사명, 욕망이나 타락, 비굴이나 외면이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침출수처럼 뚫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주눅 들었다.
왕조가 뒤집어지고 나라가 사라져도 백성들은 고요하기만 했다. 백성들은 뒤집어진 세상에서 꾸역꾸역 살아내기만 했다. 나는 그 고요함의 정체가 너무 무서웠다. 만해의 드러난 자취보다, 어떻게든 살아남거나 살아내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에 나는 몸서리쳤다.
-[후기]
일제강점기는 진행형이다
2015년 광복 70주년, 대한한국은 일제강점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꼴통’과 ‘좌빨’이라는 날선 호칭이 횡횡한다. 조선 반도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수많은 조직과 개인들이 이념의 깃발을 들고 다투던 그때와 너무 닮았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는 단재 신채호의 통곡이 아직도 섬뜩하다.
일제강점기, 살아남으려는 온갖 방편이 와글거리는 속에서 선사禪師들은 맹렬한 화두 참구를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가파른 길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있었다. 그는 조선불교의 개혁을 역설했고, 신사조新思潮를 수용했으며, 대처제帶妻制도 옹호했다. 해방이후 반일反日과 반공反共이 한국 사회의 주도적 이념이 되면서, 불교개혁론은 친일親日의 혐의를 뒤집어썼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은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강렬했다. 또 195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불교정화운동은 쓸어버려야 할 것과 남겨둬야 할 것을 가릴 틈도 없이 밀어닥쳤다.
결국 한국 불교사에서 만해의 족적은 일정부분 묻어두어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선사’나 ‘스님’보다는 ‘선생’으로 부르는 것을 편해했다. 그는 우리에게 항일독립투사나, 민족대표 33인, 혹은 님의 침묵을 쓴 시인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의 적극적인 정치사회적 활동은 선사禪師로서의 모습을 희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해는 섣부른 개화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대한 문제를 망각하고 이념에 편승한 섣부른 독립의식을 경계했다. 그는 불교라는 외피와 형식을 묵수墨守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했다. 그의 입각점은 늘 행위주체의 자발성에 있었다. 그의 독립론은 나라의 독립 이전에 사람의 독립, 마음의 독립이었다. 이 책에서는 잊힌 선사, 만해를 다시 불러낸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가 답하다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다들, 이렇게 막 살다가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는 심정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처세법은 독선이 아니면 염세인가 보다. 그래도 잠자리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올리고 방바닥을 긁으며 우리는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군가 똑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그를 만나면 조금은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하늘이 너무 무거워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사람, 젊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북간도와 만주벌판을 헤맨 사람, 전쟁과 식민지 속의 인간군속을 보면서도 끝내 인간을 버리지 못해 시를 쓰고 세상을 꾸짖은 사람, 무無 한 자락에 세상 밖의 가치를 세상 속으로 이어 붙이려고 한 사람,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배급을 받지 못해 끝내 굶어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이다.
그에게라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라면 어떤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 그날들≫에서 만해가 대답한다.
만해의 눈으로 그날을 보다
만해에게 그의 날들은 어떤 날들이었을까. 한 사람의 생애는 그만의 삶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아비의 아비, 또 그 아비의 아비가 살던 시대부터 퇴적되었거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나 사명, 욕망이나 타락, 비굴이나 외면이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침출수처럼 뚫고 나온데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정치사회적 격동기의 지층들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내부사정, 한일병합 전후의 속사정,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사찰령, 만해 피격사건, 동학운동, 취처논쟁, 3.1운동 전후의 사정 등이 만해의 눈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했다.
만해는 선사禪師다. 무無를 넘나드는 선사의 아득한 내면은 종잡기 어렵다. 저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간화선看話禪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다. 이미 출판된 ≪깨달음의 신화≫와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을 통해 피력된 저자 박재현의 학술적 전문성이 이 책에 녹아들어있다. 저자를 통해 선사 만해의 속내와 그의 날들은 기어코 복원되었다.
철학자, 평전의 새로운 지형을 열다
저자는 철학자다. 이 책은 만해의 저작물 및 만해 관련 연구성과물, 그리고 한국 근대사 분야의 학술적 성과까지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등에 소장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공판기록 등 관련 자료들도 압축적으로 녹여냈다. 그러면서도 책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단순 제시하지 않고, 마치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기술하고 있다. 책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장면으로 처리하는 기술 방식을 취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저자는 역사를 밖에서 관전하지 않는다. 저자는 만해의 내면으로 들어가 있다. 연대기적 서술방식을 버린 저자는, 깊은 지층을 헤집다가 마침내 그 지층 속에 파묻혀 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만해의 생애를 철학자의 시각에서 살펴본 저작물은 기존에 없었다. 평전형식으로 몇 종의 도서가 출간되었지만, 대개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 평가한 역사적인 서술물들었다. 적어도 만해의 눈으로 함께 그의 날들을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이 유일하다.
저자는 해설자 같은 평전형식을 과감히 버렸다. 그래서 책은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기존의 평전 형식과 차별화된 글쓰기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모든 진술은 끝내 사실의 진술이 되지 못하고 가치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모든 진술이 이러하다면 진술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진술자의 가치관과 평가가 내재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흔히 보는 평전의 형식은 서술자의 주관성이 이중으로 주입된 과도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자맥질 하여 그의 눈과 귀로 함께 세상을 훑어보거나 그의 마음으로 더불어 세상을 나눠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저자 박재현에게 선禪은 그리고 만해는...
저자 박재현은 한국불교의 골수로 일컬어지는 간화선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쓴 연구자다. 저자 이전에 국내에서 간화선을 학술 연구주제로 본격화한 사람은 없었다. 아울러 저자는 선禪으로 대중과 호흡하려고 오랫동안 애써왔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인문학습원에 선불교학교를 2년 넘도록 개설 운영했다. 또 불교 연구자로는 드물게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박물관 등에서 선불교와 문화 예술을 접목하여 강의했다. 또한 불교계 신문인 불교저널과 불교포커스에 ‘선과 세상’, ‘논평과 시평’을 연재하며 난해한 선禪의 문맥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고 공감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저자의 시선은 한동안 근대에 집중되었다. 경허와 만공 등 기라성 같은 근대불교의 대표자들이 그의 논문 주제로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의 눈은 근대 미시사의 주인공들에게까지 미쳤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깨달음의 신화≫(푸른역사, 2002)와 ≪한국근대불교의 타자들≫(푸른역사, 2009)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저자에게 만해는 피해갈 수 없는 대상이었다. 저자는 말言語에 대한 무한 부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듯이, 선은 끝없는 자기반성과 부정 속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선禪의 본령인 전위前衛이고, 만해의 길도 그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의 길은 선에 있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고집스럽다. 그 고집스러움이 이 책에 배어있다.
─선사 만해의 속내와 그의 날들을 복원하다
평전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흔한 평전의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다. 모든 사실은 진술되는 순간 선택되고, 선택하는 행위에는 이미 평評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하면서 평하고, 선택된 것을 다시 평하는 것이 내게는 동어반복이거나 중언부언처럼 보였다.
‘평전’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라고 나와 있다. 또 ‘평론’이란, “사물의 가치, 우열, 선악 따위를 평가하여 논함, 또는 그런 글이라고 적혀 있다. 평評이라는 한 글자에 짓이겨져 나는 오랫동안 힘들었다.
모든 진술은 끝내 사실의 진술이 되지 못하고 가치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진술하는 행위는 그 자체에 이미 진술자의 평가가 내재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따라서 흔히 보는 평전 형식은 서술자의 주관성이 이중으로 주입된 과도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결국 나는 평을 포기했다. 어쩌면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평을 감당해낼 만치 담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누군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자맥질해 들어가, 그의 눈과 귀로 세상을 훑어보거나 나눠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난 다음에 나는 비로소 편안해졌다.
언제부턴가 한 사람의 생애는 그만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비의 아비, 또 그 아비의 아비가 살던 시대부터 퇴적되었거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나 사명, 욕망이나 타락, 비굴이나 외면이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침출수처럼 뚫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주눅 들었다.
왕조가 뒤집어지고 나라가 사라져도 백성들은 고요하기만 했다. 백성들은 뒤집어진 세상에서 꾸역꾸역 살아내기만 했다. 나는 그 고요함의 정체가 너무 무서웠다. 만해의 드러난 자취보다, 어떻게든 살아남거나 살아내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에 나는 몸서리쳤다.
-[후기]
일제강점기는 진행형이다
2015년 광복 70주년, 대한한국은 일제강점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꼴통’과 ‘좌빨’이라는 날선 호칭이 횡횡한다. 조선 반도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수많은 조직과 개인들이 이념의 깃발을 들고 다투던 그때와 너무 닮았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는 단재 신채호의 통곡이 아직도 섬뜩하다.
일제강점기, 살아남으려는 온갖 방편이 와글거리는 속에서 선사禪師들은 맹렬한 화두 참구를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가파른 길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있었다. 그는 조선불교의 개혁을 역설했고, 신사조新思潮를 수용했으며, 대처제帶妻制도 옹호했다. 해방이후 반일反日과 반공反共이 한국 사회의 주도적 이념이 되면서, 불교개혁론은 친일親日의 혐의를 뒤집어썼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은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강렬했다. 또 195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불교정화운동은 쓸어버려야 할 것과 남겨둬야 할 것을 가릴 틈도 없이 밀어닥쳤다.
결국 한국 불교사에서 만해의 족적은 일정부분 묻어두어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선사’나 ‘스님’보다는 ‘선생’으로 부르는 것을 편해했다. 그는 우리에게 항일독립투사나, 민족대표 33인, 혹은 님의 침묵을 쓴 시인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의 적극적인 정치사회적 활동은 선사禪師로서의 모습을 희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해는 섣부른 개화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대한 문제를 망각하고 이념에 편승한 섣부른 독립의식을 경계했다. 그는 불교라는 외피와 형식을 묵수墨守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했다. 그의 입각점은 늘 행위주체의 자발성에 있었다. 그의 독립론은 나라의 독립 이전에 사람의 독립, 마음의 독립이었다. 이 책에서는 잊힌 선사, 만해를 다시 불러낸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가 답하다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다들, 이렇게 막 살다가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는 심정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처세법은 독선이 아니면 염세인가 보다. 그래도 잠자리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올리고 방바닥을 긁으며 우리는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군가 똑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그를 만나면 조금은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하늘이 너무 무거워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사람, 젊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북간도와 만주벌판을 헤맨 사람, 전쟁과 식민지 속의 인간군속을 보면서도 끝내 인간을 버리지 못해 시를 쓰고 세상을 꾸짖은 사람, 무無 한 자락에 세상 밖의 가치를 세상 속으로 이어 붙이려고 한 사람,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배급을 받지 못해 끝내 굶어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이다.
그에게라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라면 어떤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해, 그날들≫에서 만해가 대답한다.
만해의 눈으로 그날을 보다
만해에게 그의 날들은 어떤 날들이었을까. 한 사람의 생애는 그만의 삶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아비의 아비, 또 그 아비의 아비가 살던 시대부터 퇴적되었거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나 사명, 욕망이나 타락, 비굴이나 외면이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침출수처럼 뚫고 나온데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정치사회적 격동기의 지층들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내부사정, 한일병합 전후의 속사정,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사찰령, 만해 피격사건, 동학운동, 취처논쟁, 3.1운동 전후의 사정 등이 만해의 눈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했다.
만해는 선사禪師다. 무無를 넘나드는 선사의 아득한 내면은 종잡기 어렵다. 저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간화선看話禪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다. 이미 출판된 ≪깨달음의 신화≫와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을 통해 피력된 저자 박재현의 학술적 전문성이 이 책에 녹아들어있다. 저자를 통해 선사 만해의 속내와 그의 날들은 기어코 복원되었다.
철학자, 평전의 새로운 지형을 열다
저자는 철학자다. 이 책은 만해의 저작물 및 만해 관련 연구성과물, 그리고 한국 근대사 분야의 학술적 성과까지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등에 소장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공판기록 등 관련 자료들도 압축적으로 녹여냈다. 그러면서도 책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단순 제시하지 않고, 마치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기술하고 있다. 책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장면으로 처리하는 기술 방식을 취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저자는 역사를 밖에서 관전하지 않는다. 저자는 만해의 내면으로 들어가 있다. 연대기적 서술방식을 버린 저자는, 깊은 지층을 헤집다가 마침내 그 지층 속에 파묻혀 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만해의 생애를 철학자의 시각에서 살펴본 저작물은 기존에 없었다. 평전형식으로 몇 종의 도서가 출간되었지만, 대개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 평가한 역사적인 서술물들었다. 적어도 만해의 눈으로 함께 그의 날들을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이 유일하다.
저자는 해설자 같은 평전형식을 과감히 버렸다. 그래서 책은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기존의 평전 형식과 차별화된 글쓰기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모든 진술은 끝내 사실의 진술이 되지 못하고 가치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모든 진술이 이러하다면 진술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진술자의 가치관과 평가가 내재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흔히 보는 평전의 형식은 서술자의 주관성이 이중으로 주입된 과도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자맥질 하여 그의 눈과 귀로 함께 세상을 훑어보거나 그의 마음으로 더불어 세상을 나눠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저자 박재현에게 선禪은 그리고 만해는...
저자 박재현은 한국불교의 골수로 일컬어지는 간화선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쓴 연구자다. 저자 이전에 국내에서 간화선을 학술 연구주제로 본격화한 사람은 없었다. 아울러 저자는 선禪으로 대중과 호흡하려고 오랫동안 애써왔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인문학습원에 선불교학교를 2년 넘도록 개설 운영했다. 또 불교 연구자로는 드물게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박물관 등에서 선불교와 문화 예술을 접목하여 강의했다. 또한 불교계 신문인 불교저널과 불교포커스에 ‘선과 세상’, ‘논평과 시평’을 연재하며 난해한 선禪의 문맥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고 공감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저자의 시선은 한동안 근대에 집중되었다. 경허와 만공 등 기라성 같은 근대불교의 대표자들이 그의 논문 주제로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의 눈은 근대 미시사의 주인공들에게까지 미쳤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깨달음의 신화≫(푸른역사, 2002)와 ≪한국근대불교의 타자들≫(푸른역사, 2009)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저자에게 만해는 피해갈 수 없는 대상이었다. 저자는 말言語에 대한 무한 부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듯이, 선은 끝없는 자기반성과 부정 속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선禪의 본령인 전위前衛이고, 만해의 길도 그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의 길은 선에 있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고집스럽다. 그 고집스러움이 이 책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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