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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2016)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동방박사님 2024. 3. 2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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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에게 정치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토록 잔인하고도 불확실한 시대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
우리는 무엇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특별한 대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그리스의 사회인류학자 아테나 아타나시오우가 그리스 판테이온 대학교에서 나눈 대화, 이메일을 통한 토론과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한 대담집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를 출간했다. 이 책은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오래된 좌파 정치학이 불확실한 삶의 조건에 저항하는 최근의 페미니즘, 퀴어 등의 이슈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논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쓰였다.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좌파 정치학은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진단이 있는 이 시점에, 《박탈》은 2011년 이집트 자스민 혁명, 2012년 그리스 재정 위기 및 ‘점거하라’ 시위 등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에 의해 삶의 터전 혹은 시민권 등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 민중 시위의 형태로 이 전 지구적 프로젝트에 저항해왔는지에 주목한다.

이 사건들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논하기 위해 이들은 헤겔과 하이데거, 라캉, 아렌트, 푸코와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끌어오며, 이를 통해 좌파 정치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특히 이들의 대담이 내놓는 무엇보다 유의미한 열매는 이들의 작업이 비단 정치학이나 정치철학적 사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등이 거두어온 성과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해 정치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차

서문

1장 아포리아로서의 박탈, 혹은 박탈이라는 개념의 곤란함
2장 (실체의 형이상학 비판 이후의) 박탈의 논리, 그리고 인간이라는 질료
3장 “경제 우선주의”에 대한 제동
4장 섹슈얼리티와 박탈
5장 (트랜스)포제션, 혹은 육체 너머의 육체들

6장 자아 생성의 사회성: 인정 폭력에 대한 응수
7장 인정과 생존, 혹은 인정을 견디어내기
8장 자기-박탈로서의 관계성
9장 집계되지 못한 육체들 혹은 시신들, 그리고 계측할 수 없는 수행성
10장 책임감으로서의 반응성
11장 수행성에 대한 비전유
12장 박탈된 언어, 혹은 단수적 존재들의 이름
13장 수행성의 정치적 전망
14장 “위기”의 통치성,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들
15장 또 다른 취약성을 보여주기: 빚지고 있는 것과 소유하는 것에 관하여

16장 경계 횡단에 대한 감응적 폐제와 국가적 차원의 인종주의
17장 공적 애도 가능성과 추모의 정치
18장 복수적 수행성의 정치적 감응
19장 연대라는 이름의 난제
20장 대학, 인문학, 그리고 북 블록
21장 출현의 공간들, 노출의 정치

저자 소개

저 : 주디스 버틀러 (Judith P. Butler)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철학자, 젠더 및 퀴어 이론가,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학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의 비교문학과 석좌교수. 1990년 젠더 수행성 이론을 발전시킨 『젠더 트러블』을 발표하며 페미니즘 담론 안팎을 뒤흔들었고 퀴어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정치철학, 윤리학, 그리고 퀴어 이론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능성과 공동체의 윤리적 관계성을 모...

저자 :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그리스 아테네 판테이온 대학교 사회문화학과 교수. 아테네 대학교, 테살로니키 대학교, 뉴욕 소재 뉴스쿨 등에서 역사학과 철학 등을 공부하고 사회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생명 정치, 감응 이론, 민족주의 연구와 기억의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 주제와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연구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역자 : 김응산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 후 동 대학원 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영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워싱턴 대학교 영문학과와 영화학 프로그램에서 동시대 영화 이론과 퀴어 연구를 중심으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책 속으로

우리는 왜 어떤 특정한 형태의 탈취와 착취가 “박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소유했다가 나중에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소유물이 있는 것일까요? 때로는 그렇기도 하지요.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개개인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인간도 재산의 한 형태일까요? 만일 노예제라는 역사적 조건이라든가 자본주의의 부산물인 소유 개인주의의 형태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소유권이라는 법률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소유권이 없는 곳에 개인도 없다는 적절한 주장을 하고 있는 맥퍼슨은 소유하는 개인의 생산과정에 대한 중요한 계보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저는 우리가 토지 강탈과 영토 박탈에 반대할 때 동시에 자본주의를 이루는 주요한 구조에도 역시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저로 하여금 소유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도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박탈에 반대하는 윤리적이고도 정치적인 방법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포리아로서의 박탈, 혹은 박탈이라는 개념의 곤란함」중에서

말씀하신 “할당된 처분 가능성”이라는 개념에 깊이 공감합니다. 처분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할당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을 이 개념은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동등하게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론적 범주로서의 불안정성과 어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야기된 불평등과 궁핍함의 상태로서의 불안정성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개념을 특히 중요한 것으로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기한 두 번째 불안정성은 존재론적 상황을 이용해 작동합니다. 이는 불안정성이 상처와 상실에 대한 일종의 취약함으로서 이해되면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는 불안정 상태(precariousness)라고 부르고자 했습니다. 허나 불안정성을 배분하고 처분 가능성을 할당하는 비균질적 방식들은 분명히 신자유주의적 형태의 사회적·경제적 삶이 목표하는 바이고, 또한 그 효과이기도 합니다.
---「(실체의 형이상학 비판 이후의) 박탈의 논리, 그리고 인간이라는 질료」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수십 년 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응했던 도전, 그리고 가사 경제, 노동의 재생산, 문맹과 가난의 차별적 양산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그런 도전에 또다시 직면하고 있습니다. “불안정성의 일상화”에의 고려를 포함하는 불안정성이라는 주제에 제가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이 사람들을 불안정한 상태에 적응하게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정성은 목표로 하는 인구 집단을 실업 혹은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극도로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노출시키고, 이로써 가난과 아울러 경제적 미래에 대한 불안전함을 초래하고, 또한 이러한 인구 집단을 완전히 내팽개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들을 소모가 가능한 사람들로서 호명하면서 작동합니다. 불안정성의 일상화의 이와 같은 감응적인 표지들은 불안정 상태를 몸소 느끼는 것을 포함하는데요, 이것은 미래에 대한 손상된 감각, 그리고 질병이나 인간의 유한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극도의 불안함을 포함합니다. 이는 특히 의료보험이 없다든가, 혹은 노동 조건과 극대화된 불안감이 한데 엮여 심신을 피폐화시킬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상태가 어떻게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을 가로지르는지에 대한 단지 한 가지 예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원론과 결정주의 모두를 피할 수 있는 새로운 횡단적 범주와 사고 형태라는 것을 제시해줍니다.
---「“경제 우선주의”에 대한 제동」중에서

저항하는 주체의 생존을 위한 안전한 방법으로서 너무나도 쉽게 칭송되곤 하는, 그리고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인정(에 대한 약속)을 정치의 최종 목표로 바라보고 있는 자유주의적 인정의 관점은 기실 인정의 조건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못합니다. 인정이, 그리고 인정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동화가 곧 주체의 자기-결정적 삶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들이 혹은 그저 규제적 권력이 제공한 자기-규정의 기반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 주체의 생존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주체의 위치를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성과 계급으로 각각 다르게 지정하는 정치적 기표들은 어떻게 미래에 재전유될 수 있는 불확정성(contingency)과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와 같은 질문들을 하는 것이 곧 우리가 인정과 그 인정이 필수적으로 전제로 하고 있는 규제적 권력을 어떻게 견디어내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열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유주의적 인정이 우리가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인정과 생존, 혹은 인정을 견디어내기」중에서

책임감을 취약하지 않으면서도 무책임한 자기 절제로 서 제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전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와 같은 전유와 반대로 여기서 우리는 반응의 성향은 그것이 갖고 있는 그 모든 불확정성과 경합 가능성 안에서 사회변혁의 정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향-으로서의-박탈(dispossession-as-disposition)은 따라서 반응성과 책임감이라는 사안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위치,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말입니다. 응답하라는, 책임을 떠맡으라는 타자의 부름에 영향받고, 허물어지고,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 공간이 가능하며 열리게 되는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성이 차별화된 세계에서, 만일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 외부에”,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타자에 매여 있고 타자에게 무장해제된 채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 외부에서 혹은 우리 자신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등장하는 요구들에 사로잡혀 있는 채로 존재한다면, 책임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와 같은 성향으로서의, 노출으로서의, 자기-타자화로서의 박탈이라는 생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감으로서의 반응성」중에서

우리는 또한 단식투쟁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단식투쟁을 감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육체를 정치적 힘의 원천으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계속하는 수감자는 감옥 운영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단식하는 수감자는 그 시스템과 감옥 현실의 비인간성을 노출하는 것이고, 언어적 발화의 형태를 취할 수도, 혹은 취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육체적 행동을 통해 “아니오”라는 표현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단식투쟁은 수감자의 죽고자 하는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주는데요, 이는 그의 생명이 재생산되는 조건들이 그 생명을 죽음과 불가분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옥에의 예속과 감옥의 통제는 대개 감추어져 있는 형태로 간과되기 일쑤인데 반해 단식투쟁은 또한 인도주의적인 도덕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킵니다. 단식은 이 경우 일종의 저항의 한 형식입니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스캔들과 같은 기삿거리에 언제나 몰려드는 언론의 도움으로 단식은 공적인 저항의 한 형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자살과 방치, 감금 혹은 강요된 고립 등을 통한 공적으로 자행되는 죽음의 거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삶을 특징짓는 것으로서 “죽음”에 대해 고민해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만, 또한 단식투쟁을 통해서 저항의 의지를 이해하도록 요구받습니다. 방치, 감금, 강요된 고립과 같은 체제 중 한 가지 조건 아래에서 어엿한 한 명의 주체로 구성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유일한 저항이란 주체 그 자체를 허무는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한 생명으로서의 스스로를 박탈하는 것은 강압적이고도 탈취적인 힘으로부터 그와 같은 형태의 권력을 박탈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성의 정치적 전망」중에서

출판사 리뷰

“우리에게 정치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토록 잔인하고도 불확실한 시대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
우리는 무엇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특별한 대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박탈(dispossession)’이다. 버틀러와 아타나시오우가 내놓은 박탈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다. 두 사람은 박탈이 단순히 위력에 의해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기는 상태만을 의미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소위 탈취적 속성을 지닌 박탈과 관계적 박탈, 그리고 탈-소유로서의 박탈을 구분하고, 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토대로 어떤 윤리적인 자세를 이끌어낸다. 즉, 탈취적 속성을 지닌 박탈을 경험하거나 타자가 박탈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성’을 인식하고 타자의 취약성에 허물어지는 반성의적 차원의 박탈을 통해 타자와의 연대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박탈당한 이들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박탈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민족주의,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적 규범성 등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민중에 대한 박탈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질서 가운데 인간의 육체가 단기간에 도구화되고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폐기되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무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정의 논리 역시 이해 불가능성을 양산하는 폭력적인 박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위험함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탈과 인정 폭력의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타자들과 함께 서투르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것’, 타자들을 향한 ‘관계성’을 인식하면서 윤리적 자세로 나아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다양한 차원의 박탈의 경험이 민중의 거리 정치로 이어지는 점을 논하며 이야기하는 ‘육체 정치를 통한 수행성의 정치’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취약성에 대해 반응하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갖는 것의 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사례는 서구나 중동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두 저자가 예로 드는 대상자들의 모습은 그 형태만 다르게 한 채로 우리나라의 어제와 오늘에 여전히 드러나고 있고,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정리해고제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등 신자유주의적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드러나는 폐해, 최근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 혐오나 남성 혐오 논쟁,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겨냥한 인종차별, 성소수자 혐오 문제, 그리고 ‘세월호’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문제의식에 따라서 ‘박탈당한’ 이들의 자리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합의된 사항이라고 여기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정확한 언어로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것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타자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이 정당성을 갖는지를 고려하고,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용인되기 쉬운 주장의 허점을 찾아 의문을 던지는 저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입장과 배경을 지닌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면서 각자의 의견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대담자들은 각자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타협하는지, 그리고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두 사람이 어떻게 사유의 실험을 행하고 있는지를 조금씩 확인해갈 수 있을 것이다.

추천평

“풍부하고도 독보적인 철학 지식과 끊임없는 참여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를 선도하는 두 명의 페미니스트 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명철하고도 흥미진진한 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오늘날과 같이 잔인하고도 불확실한 시대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민중의 형태란 무엇인지, 또한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어떤 부분이 이런 민중의 형태를 찾는 과정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준다.”
- 린 시걸 (런던 대학교 버크벡 칼리지 심리학 · 여성학과 교수)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는 편안하게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박탈의 개념에 대해 통찰하고, 또한 이 개념이 주체성과 관계성, 점거, 불확실성. 생명 정치, 그리고 시민들의 집단적 시위에 대해 갖는 관계를 보여준다. 책에서 이들은 서로의 주장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이에 따른 사례들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들은 소위 ‘수행적 정치’가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낸다.”
비키 벨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