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과학의 이해 (독서)/2.동물탐구

정상동물 (2024) - 동물은 왜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되었나

동방박사님 2024. 5. 8. 06:39
728x90

책소개

“동물은 ‘고기’로 태어나지 않았다”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넘어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로,
동물권 변호사 김도희가 다시 쓰는 동물의 권리와 비거니즘의 윤리

도축당하는 소, 돼지, 닭, 실험대에 올려진 토끼와 쥐,
동물원과 수족관에 감금된 사자, 코끼리, 돌고래…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동물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반려동물 1,500만’의 시대가 되었지만 해마다 ‘도축’되는 동물의 수는 800억이 넘고, 동물원 철창 너머에는 생기를 잃은 동물이 갇혀 있으며, 실험실에서는 5억 명의 동물이 인간을 위해 죽는다. 우리는 왜 어떤 동물은 ‘가족’으로 삼고, 어떤 동물은 ‘고기’로 먹으며, 어떤 동물은 감금하여 구경할까? 동물을 대변하는 변호사 김도희는 은행나무에서 출간한 저서 『정상동물』에서 개와 고양이는 반려동물, 소와 돼지는 농장동물, 토끼와 쥐는 실험동물, 코끼리와 돌고래는 전시체험동물 등으로 인간의 기준에 따라 동물을 분류하는 것을 ‘정상동물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하며, 이로 인해 동물이 ‘죽여도 되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정상동물』은 기후·생태·식량위기의 시대에 지구를 공유하는 공동생활자인 동물의 권리를 재구성하고, 동물과 인간이 공생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비장애인 백인 남성을 시작으로 여성, 아동, 유색인종, 성소수자, 장애인 등 타자를 포괄하며 확장해온 ‘인권’ 담론이 인간-동물이라는 종차(種差)는 넘어서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동물을 인간과 동등하고 고유한 존재로 바라보았던 피터 싱어, 톰 레건 등의 동물철학을 통해 오랫동안 연결되지 못했던 ‘동물’과 ‘권리’ 개념을 잇는다. 나아가 수족관에서 구출되어 바다를 누비는 ‘제주 남방큰돌고래’,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뉴질랜드의 ‘환가누이강’, 농장에서 구조되어 ‘고기로 태어나지 않았다’며 고양된 울음을 들려주는 ‘꽃풀소’ 들로부터 동물이 인간의 편의, 쾌락을 위해 죽임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한다.

목차

들어가며: 정상동물 이데올로기와 편들기

제1장 고통받지 않을 권리 너머
‘안락사’는 없다 | 고통을 느끼지만 않으면 | 고통 중심의 동물권, 그 뿌리는 | 동물의 고통에서 동물의 기쁨으로, 인간과 동물의 공동체로 |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

제2장 동물을 대리한다는 것
한없이 노트북에 가까운 |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 자연물은 당사자 능력이 없
다 | 세계 동물의 삶과 법 | 의인화라는 함정 | 의인화의 해체 | ‘투명한 어둠’에
갇힌 동물 | 대리의 조건들 | 대리의 정치들 | 동맹과 책임으로서의 자연-권

제3장 일하는 동물: 《자본론》 다시 쓰기
책임과 호혜를 묻다 | 인간의 노동에 가려진 동물의 노동 | 왜 하필 노동인가 | 응답하는 힘: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라 | 다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제4장 동물원, 복지원, 보호소
갇힌 존재들 | 동물원, 수족관이라는 시설 | ‘보호’라는 이름의 정치 | 예시적 정치, 공생과 돌봄의 공동체 | 대항배치로서의 공생과 돌봄의 공동체로

제5장 동물권과 포식의 정치
‘고기’는 무엇을 가리고 있나 | 육식주의와 정상동물 이데올로기 | 자본은 자연을 직조한다 | 인간-비인간의 동맹 맺기, 비거니즘 | 배양육과 비거니즘 | 자본주의의 대항배치로서 비거니즘 | 실천으로서의 비거니즘

제6장 위기들의 시대, 동물과 공생하기
기후위기와 동물권은 어떻게 만나나 | 기후, 정의를 말하다 | 왜 기후문제는 부정의한가 | 기후정의와 만나는 노동, 젠더, 빈곤, 난민, 평화 | 그런데 동물은 없다 | ‘채식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이 아닌 ‘채식해야 하는 세상’으로 | “소”여야 해: 동물과 기후와 지역이 만나는 곳

저자 소개)

저 : 김도희
 
동물권 변호사. 인권운동에 법이라는 무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변호사가 되었다. 정신장애인, 홈리스 등 소수자 인권운동을 이어오다가 2017년 고양이 선생님들을 모시게 되면서 동물권 활동을 시작했다. 산천어축제, 돌고래쇼, 개 경매도살장, 수의대 실험실 등을 고발했고, 개 식용 종식, 생태법인 도입, 동물의 비물건화 등을 법제화하기 위해 동료들과 분투하고 있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센터장을 지냈으며, [동물...

책 속으로

나에게 ‘동물’은 경과적 개념이다. 코끼리와 연어와 개구리와 뱀과 제비와 오징어와 전갈과 모기와 지네와 해삼과 산호와 지렁이와 플라나리아를 ‘동물’이란 한 단어로 퉁칠 수 있다고? 동물은 동물의 실체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성의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물(정확히는 존재하는 존재자)은 동시에 최종적 개념이기도 하다. 자연과학, 그중에서도 계통분류학이라는 이성의 정점이 동물의 정상성을 만들었고 그 정상성에 기대어 지금의 인간중심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비인간동물은 더 이상 아무런 수식어 없이 정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농장동물, 전시동물, 반려동물, 실험동물, 야생동물 등 인간이 정의한 구획 안에만 동물이 존재하는 정상동물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든 동물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음식, 장난감, 사냥감, 장식품, 무기, 도구로 나뉘는 순간 정상동물 이데올로기는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중심적 분류에 따라 ‘정상적’으로 대하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심지어 죽이는 행위까지도.
--- p.11~12, 「들어가며: 정상동물 이데올로기와 편들기」 중에서

우리에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친숙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의 창조물이고, 윤회를 통해 인간도 동물이, 동물도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채식, 절제, 침묵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공동체에 입회하려면 수년간 채식, 절제, 침묵의 계율을 지키고 훈련해야 했다. 영혼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 없이 오간다고 생각했기에 지위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동물권 사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700년 뒤, 피타고라스의 유산을 이어받은 플루타르코스는 〈육식에 대하여(Of Eating Flesh)〉에서 “(잠시의 쾌락을 얻기 위한) 약간의 살점을 먹기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서 태양과 빛을, 즐기려고 태어난 삶과 시간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동물이 우리에게 보내는 비명소리는 불명확한 소음일 뿐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항의와 간청과 애원의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동물도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철학을 공유하며, 오히려 동물이 인간보다 용기·절제·지혜 면에서 나은 존재라고 설파했다.
--- p.35, 「고통받지 않을 권리 너머」 중에서

우리는 흔히 동물에게는 동물이 사는 고유한 방식이 있고, 그 습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인간의 생활과 너무 밀착되어 인간과 동일한 사회 구조에서 ‘유사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물들에게 당장 필요한 세계는 인간의 현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환경을 지속하자거나 동물복지를 증진하면서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마는 물론이고 낙농업과 축산업은 모두 종식되어야 한다. 다만 앞에서 보았듯 의인화는 다른 종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라는 종의 경험을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점과, 인간이라는 종은 많이 연구되었으므로 다른 동물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모델임을 상기하면, 이런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동물이 해방되고 동물권이 향상될수록 인간이 해방되고 인권이 향상될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200여 년에 걸쳐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인권의 유익함을 동물에게 적용하는 것을 주저할까? 생각해보면 지금의 현실도 전부 상상의 산물이었는데 말이다.
--- p.161~162, 「일하는 동물: 《자본론》 다시 쓰기」 중에서

돌고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괴롭다’, ‘아프다’라는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말로 표현해야만 그들이 괴로움과 아픔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인간의 지능과 교감능력을 얕보는 태도다. 공리주의 학자들이 고통에 천착한 것도 동물과 인간을 막론하고 가장 알기 쉽게 드러나는 감정이 고통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돌고래의 정형행동을 보고도 돌고래의 고통을 알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알 수 없다기보다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 p.176, 「동물원, 복지원, 보호소」 중에서

캐럴 애덤스Carol J. Adams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고기’라는 텍스트가 그 동물에 대한 제도화된 억압과 폭력을 가리는 훌륭한 언어적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죽은 소의 살을 ‘소고기(소+고기)’, 죽은 돼지의 살을 ‘돼지고기(돼지+고기)’라는 복합어로 가리키고, 영어권에서는 소의 살은 ‘cow meat’가 아닌 ‘beef’, 돼지의 살은 ‘pig meat’가 아닌 ‘pork’라는 전혀 다른 단어로 대체된다. 이뿐만 아니라 동물이 죽을 때의 연령과 성별, 조리법에 따라 수없이 많은 이름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소’와 ‘돼지’라는 독립된 실체를 망각한다. 소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소고기’는 ‘고기’의 이미지만 남기고 고기에 앞선 존재인 소의 이미지는 지운다. 학교에서는 소의 실루엣에 선을 그어 안심, 등심, 양지, 사태 등 해체된 부위로 나누어 가르친다. 게다가 갈비찜, 불고기, 제육볶음, 두루치기, 보쌈, 족발, 스테이크 등 메뉴판 속 이름들도 그가 한때 살아 있는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춘다. 애덤스는이처럼 도살을 경계로 안심, 등심이나 불고기, 제육볶음이라는 ‘고기’로 불리면서 지워진 동물을 부재 지시 대상absent referent이라 명명한다.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고기’에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동물이 없다면 고기를 먹을 일도 없고, 살아 있는 동물은 고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기’는 ‘고기화’ 과정(정확히는 대상화-절단-소비의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동물을 대체한다. 다시 말해 모든 육식 뒤에는 ‘고기’가 가리는 ‘동물의 죽음’이라는 부재가 존재한다.
--- p.221~222, 「동물권과 포식의 정치」 중에서

조이는 육식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동물을 먹고 어떤 동물은 먹지 않는지 그 이유를 파헤친다. 캄보디아의 타란튤라 튀김, 이탈리아의 구더기 치즈 카스 마르주Cas Marzu, 아이슬란드의 숫양 고환 절임, 필리핀의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은 발룻Balut을 기꺼이 먹을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조이는 우리가 소, 돼지, 닭을 먹는 것은 실제로 영양과 편의 면에서 식용으로 적절해서라기보다는 사회적·문화적·역사적으로, 즉 후천적으로 습득한 스키마schema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스키마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고 분류하여 신념,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 일련의 범주이며, 스키마에는 당연히 동물에 대한 것도 있다. 조이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을 나누는 것을 이분화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사유의 범위를 더 넓혀 정상동물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인간은 일정한 시공간에서 인간과 맺는 관계에 따라(실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동물을 임의로 구획하여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믿는다. 개, 고양이는 반려동물, 토끼, 쥐는 실험동물, 소, 돼지, 닭은 식용동물, 돌고래, 원숭이는 전시체험동물, 기린, 사자는 야생동물 같은 식이다. 물론 중첩되는 동물들도 있다. 가령 원숭이는 거의 모든 분류에 해당하고, 야생동물이 전시체험동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하위 스키마 또는 교차 스키마로 범주화할 수도 있다. 반려동물로 범주화된 동물은 인간과 ‘가족’이 되고, 실험동물이 된 동물은 ‘값진 희생양’이 되며, 군견이나 경찰견처럼 특수목적 동물이 된 동물은 ‘숭고한 영웅’이, 전시·체험동물이 된 동물은 ‘훌륭한 교육 자료’가, 축산동물이 된 동물은 ‘맛 좋은 영양분’이 된다.
--- p.227~228, 「동물권과 포식의 정치」 중에서

‘달 뜨는 보금자리’의 다섯 소(미나리는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들은 이제 만 4살이 되었다. 농가의 남성 얼룩소들은 보통 24개월을 넘기지 않고 도살장에 보내지기 때문에, 동물해방물결 활동가의 말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축산업에 균열을 내는 우리 꽃풀소”들을 보면 뭉클하고 때로 웅장해지기도 하다. (실은 축산 피해 동물이라 칭하는 것이 더 걸맞는) 농장동물이 학대나 착취가 없었다면 살아갈 수 있었을 삶, 가질 수 있는 권리에는 ‘자연사할 권리’ 가 있을 텐데, 지금으로선 이 ‘꽃풀소’들이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연사할 수 있는 소들이다. 이들은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라고 온몸으로 외친다. 그래서일까, ‘달 뜨는 보금자리’에 찾아가 이들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그저 한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감동했다가 슬퍼졌다가 결연해진다.
--- p.300, 「위기들의 시대, 동물과 공생하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사랑에는 인종도 피부색도 상관없다면,
어떤 종인지도 지워질 수 있다”
동물과 함께하는 유대와 사랑의 정치, 동물권


저자는 동물도 인간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피타고라스와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육식을 죄악시한 플루타르코스부터 동물철학의 역사를 짚어가며 동물권을 정립해나간다.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들의 쾌락과 고통을 인간의 것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본래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선천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본 톰 레건의 ‘동물권리론’은 동물권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물에게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필요하다고 선언하여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입증하는 데 집중했을 뿐, 인간중심적 사회에서 동물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권리를 부여하는 인간-권리를 부여받는 동물’이라는 위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덕윤리학’은 인간의 유덕함을 기반으로 한 동물과 인간의 상호 존중을 강조했고, ‘동물정치공동체’는 이미 사회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물에게 특수한 ‘시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사회에서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는 동물이 해방되려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동물과 인간이 각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유지한 채 공생 관계를 맺으려면 새로운 윤리와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정치·권리의 객체였던 동물을 주체에 자리에 놓으려는 시도들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동물권 담론에 부족했던 ‘유대’와 ‘사랑’을 강조한다. 인간이 국적, 인종, 성별 등의 차이를 넘어서 유대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종을 넘어선 유대와 사랑의 관계를 맺을 능력도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종차에 얽매이지 말고 인간-동물이 함께하는 유대와 사랑의 윤리를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동물에 대한 존중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고통받지 않을 권리,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를 넘어 인간과 동물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이를 만들어가기 위한 정치를 ‘동물권’이라고 정의한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동물을 먹는다는 것”
-육식주의와 정상동물 이데올로기


그러나 우리 사회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유대와 사랑은커녕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 ‘육식’이 당연하고 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마트에 포장된 ‘고기’를 무심하게 집어 들지만, 그 ‘고기’가 동물의 시체라는 사실은 좀처럼 인지하지 못한다. 가령 돼지의 시체는 부위나 조리 방법에 따라 제육볶음, 족발, 보쌈 등으로 다르게 불리고, 이러한 ‘고기’의 어휘들은 ‘고기’가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동물의 죽음을 의식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생명을 죽이고/먹고’ 있다는 죄책감을 지운다.

동물을 죽여 ‘고기’로 만드는 잔인한 과정은 의사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가 ‘고기’를 먹어야 건강하다고 설파하고 ‘고기’가 주는 미각적 만족을 찬양하는 육식주의(carnism)로 정당화된다. 육식주의는 고기를 먹는 것이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고 말하며, ‘고기’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죽음을 가리고 ‘고기’를 만드는 축산업이 기후위기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러한 육식주의는 ‘공장식 축산’으로 대표되는 축산업이 낳는 막대한 이윤으로 지탱된다.

육식주의 사회의 믿음과 달리, 우리가 어떤 동물을 먹는지 선택하는 기준은 맛도 영양소도 아니다. 가령 한국인은 아무리 맛있고 영양소가 풍부하더라도 중국의 원숭이골 요리, 안데스 지방의 기니피그 구이를 쉽게 먹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 ‘원숭이’와 ‘기니피그’는 ‘먹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먹는 동물’이라는 분류도 필요가 아닌 인간중심적 기준과 선호에 의해, 즉 정상동물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해진다.

“인간에게는 동물의 고통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기후·생태·식량위기의 시대, 동물과 공생하는 법


인간은 수천 년전부터 동물을 먹고 자연을 이용해왔으며, 특히 근 200년 사이에는 환경을 파괴하면서 매년 수백억의 동물을 죽이는 ‘공장식 축산’을 개발하고 동물을 먹일 사료를 만들기 위해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까지 베어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기후·생태·식량위기는 동물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취급하며 그들을 희생시켜온 것에 대한 청구서나 다름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세계 곳곳에서 신음하는 동물의 고통에 유대와 사랑이든, 윤리와 정치든,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동물권으로든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동물을 ‘고기’, ‘실험체’, ‘전시물’로 보지 않고 지구에 함께 사는 공생자로서 동물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우리가 마주한 위기들의 시대를 넘어서는 중요한 첫걸음일 것이다.

추천평

‘정상’ 동물. 동물이란 단어 앞에 흔히 붙는 형용사는 아니다. 그러고 보니 “가난한 동물”, “노동하는 동물” 모두 낯설다. 익숙한 건 기껏해야 “귀여운” “불쌍한” “영리한” “포악한” 또는 “맛있는” 동물뿐. 이토록 단순하게 고착된 우리 사고를 깰 수만 있다면! 재판에서 동물을 전략적으로 대변하는 변호사면서, 동물해방운동에 투신한 활동가이자, 앎/삶을 조화시키는 연구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이고, 무엇보다 두 ‘고양이 선생님’을 모시는 집사인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설득력으로, 《정상동물》은 우리의 낡은 지식·인식·감각을 일시에 바꿔준다. 동물과 함께 사는 ‘법’(들)이 개선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다.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치열한 과정에서 마주치는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들을 《정상동물》은 하나도 피하지 않는다. 그렇게 탄생한 ‘유대와 사랑의 동물정치공동체’라는 이상은 더 이상 꿈이 아닌, 지금 여기서 만들어가는 어엿한 현실이다.
- 김한민 (작가·시셰퍼드코리아 활동가, 《아무튼, 비건》 저자)
팬데믹과 기후재난을 통해 동물들은 이미 우리의 정치공동체로 뛰어들었고 인류 가운데 함께 싸울 저항자를 찾고 있다. 중요한 것은 동물이 말할 수 있는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말을 어떻게 듣고 응답할지 모색하는 일임을 김도희는 치열하고 사려 깊게 보여준다. 내 안에 안개처럼 존재하던 막연한 느낌들이 선명한 언어를 찾은 기분이다.
- 홍은전 (인권·동물권 기록활동가, 《나는 동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