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National Memorial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79-24 (현저동) / 개관일 2022년 3월 1일 / 운영자 대한민국 국가보훈부 /설립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위원장: 이종찬) / 관장 김희곤 / 웹사이트 www.nmkpg.go.kr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념하기 위하여 2022년 3월 1일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건립된 국립 기념관이다. 맞은 편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설립
2017년 7월 건립이 결정되었으며,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2022년 3월 1일 개관하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이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서대문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옛 서대문구의회 터에 세워졌으며, 개관 기념식을 겸하여 2022년 3·1절 기념식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신민회(新民會)
신민회(新民會)는 상동감리교회 부설 공옥학교의 교사들과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개신교 감리교회 및 장로교회 지원을 받은 항일 비밀결사단체다. 1907년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경희,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조직 발전되었다. 신민회의 표면적 활동은 교육 계몽, 신식 학교 설립, 신학문 수용 등이 주 목적이었으며, 활동지원은 상동감리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주변 시장 상인, 개신교계에서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또한 만주에 한국 독립군을 훈련할 신흥무관학교 훈련기관 설립에 뿌리를 마련하였고, 이후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창립 취지
1907년 4월,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의 교감인 이회영 중심으로 서울 지역의 인사들과 안창호(安昌浩)를 위시한 평양을 중심 서북지역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당시, 국내의 상황은 통감부 및 일제의 감시와 신문법, 보안법 등의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치활동의 합법성의 한계를 느껴 애국계몽의 틀을 일부 벗어나 투쟁적,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고자 결성한 단체가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표방하였고, 사회각층인사를 망라하여 조직하였는데, 비밀단체임에도 그 활동은 거의 대부분 합법성을 띄고 이루어졌었다.
신민회는 교육 계몽, 신식 학교 설립, 신학문 수용을 주 목적으로 하였고, 만주에 한국 독립군을 건설할 훈련기관 설립 및 훈련기관의 훈련장 마련과 식량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는 토지 확보 등을 추진하였다.
신민회는 경성에 와 있는 지방 인사들을 통해 각지의 개혁 운동가들을 회원으로 가입하게 하였다. 신민회가 조직된 이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다. 근대 이후의 공화정체를 제창한 대표적 조직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과 공화정체의 근대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즉, 신민회는 실력 양성론+독립 전쟁론에 입각하여 공화정제를 이상향으로 두었다. 이는 근대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이상향으로 지향했다는점에서 의의를 두고있으며, 민족 교육 계몽운동 및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신민회 4대강령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신민회의 취지문
러.일전쟁의 포성이 아직 그치지 않고, 마관(馬關)조약의 먹물이 아직 마르기 전에 외교권이 하루아침에 동쪽으로 넘어가고 정부의 차석(次席)에는 외국이 나란히 앉아서 군경과 법도를 낱낱이 인계하고 광산과 삼림과 토지를 마디마디 할양하여 빼앗기고 있다.
슬프다,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꿈을 깨였는가. 수 평의 초가집도 나의 집이 아니며, 수 무의 산소도 나의 땅이 아니며, 문전의 뽕나무와 석류도 나의 초목이 아니며, 동구 밖의 시냇물도 나의 물이 아니다. 오호라! 이 나라는 내 나라인데 내가 죽고자 하면 이 나라를 어디다 버려두며, 내가 숨고자 할진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어찌 일시적 비분으로써 분연히 자결을 기도하며, 또한 염세적 비판으로써 호연 은거함으로 돌아갈 바이랴.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요?
민습의 완고 부패에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미에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에 신제창이 시급하며, 원기의 쇠퇴에 신수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신윤리가 시급하며, 문화의 쇠퇴에 신학술이 시급하며, 실업의 조췌에 신모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신개혁이 시급이라. 천만 가지 일에 신(新)을 기다리지 않는 바 없도다.
무릇 우리 대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이것이 신민회가 원하는 바이며 신민회가 품어 생각하는 소이이니, 간단히 말하면 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 우리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사랑하며, 우리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보호하겠는가.
과거 4천년, 구한국의 말년에 망국혼을 지으려는가. 장래 억만년 신한국의 초년의 흥국민(興國民)을 지으려는가. 오라! 우리 대한신민이여!
신민회는 한국 독립의 기본으로, 개개인의 행동 개조와 사상 개혁을 중점 과제로 채택하였다.
활동과 해체
신민회는 민족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서구의 신문물과 신학문을 보급하고자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민회는 남녀 차별을 과거 4천년의 최대의 악습으로 규정하고, 여성 교육, 여성에게 신문물,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도 중점과제로 채택했다. 이어서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평양에 자기회사 설립과 대구에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고, 민족문화를 양성하고자 대한매일신보 발간작업과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고전문학등을 간행하였다.
이어서 만주지역에 독립군 병력 양성을 위한 훈련기지를 건설하였는데,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감리교회와 장로교, 개신교회의 지원으로 신민회에서 시작한 토지 확보 계획은 후일 남만주에 삼원보와 밀산부(서간도)에 한흥동,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일 병탄 이후인 1911년에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을 기도 했다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등 신민회 주요인사들이 검거되어 105인 사건등 일제에 의한 조작사건으로 인해 민족운동의 탄압을 받아 신민회는 해체된다. 체포된 인사들 중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거나, 고문을 피해 경성부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열차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승만, 김규식 등은 체포를 피해 망명한다.
신민회는 비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속에 해체되었지만, 이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계승하게 된다. 츨처위키백과
윤봉길
1932년 훙커우 공원으로 떠나기 전, 왼손에 수류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신상정보
출생 1908년 6월 21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현 예산군)
덕산면 현내면 조량리
사망 1932년 12월 19일(24세)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성별 남성
별칭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아호는 매헌(梅軒)
학력 1919년 충청남도 예산 덕산초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추서
종교 무종교
부모 윤황(부), 김원상(모)
형제 윤성의(친동생)
윤영의(친동생)
윤영석(친동생)
배우자 배용순
자녀 3남 1녀
(장남 윤종, 차남 윤경, 삼남 윤담, 딸 윤안순)
활동 정보
관련 활동 독립운동
주요 활동 훙커우 공원 사건
경력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한인애국단 단원
상훈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91년 충청남도 예산 덕산초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추서
윤봉길
한글 표기: 윤봉길
한자 표기: 尹奉吉
개정 로마자 표기: Yun Bonggil
매큔-라이샤워 표기: Yun Pongkil
예일 표기: Yun Pongkil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1932년 12월 19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1]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현 예산군) 출생이다.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훙커우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그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2]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2]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2]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농촌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중국의 만주로 망명하였다.
훙커우(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입니다.
김구와 윤봉길
일본 가나자와에 있는 윤봉길 선생 위령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를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3],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일본군 1만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든 급조폭발물이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천황탄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는데, 바로 그 허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하고 나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하고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하고 내빈은 퇴장하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그 틈에 노림수를 사용하여 수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키고 나서 힘차게 던진 찰나에, 단상으로 정확하게 명중이 되었다.[5] 그 틈을 노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폭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되는 그 찰나에 일본 헌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윤봉길을 덮쳐 제압하였다. 윤봉길은 제압을 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3],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여,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되는 등 일본 군 고위 간부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었는데, 당시 기념식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40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하면서, 윤봉길을 극찬하였으며,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된 것이다. 당시 쑨원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11월 2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반면, 일본 헌병대와 순사들이 조선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일제의 복수에 불과할 뿐 의사의 탓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당시 상하이에 위치해 있던 임시 정부 청사를 충칭으로 옮겨야만 했다.
순국
처형 직전의 윤봉길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8]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처절한 복수였다.
유언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사후
효창공원 삼의사의 묘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기념사업
노신 공원에 있는 기념비(2008년 )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
2012년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모욕적인 문구가 담긴 말뚝을 박는 사건이 벌어져 논란이 되었다.
기념관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이 4세 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의 장소였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 대해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던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제스의 이러한 감탄은 이 말이 가장 많이 나올 수 있는 백범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와 장제스 일기에서 사실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장제스 일기에서는 "옛 사람이 말하길 국가의 원수(怨讐)와는 한 하늘 아래서는 같이 살 수 없다 하였다. 공적을 쌓고자 무력을 앞세워 침략을 일삼는 자들이 깨달은 바가 있지 않겠는가?"고 의거를 굉장히 높게 칭송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김구 선생은 만주사변 발발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더욱더 위축된 상황으로 정무적 정세적 판단하에 과감한 결단이 윤봉길의 거사였으나,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논란
1932년 5월 1일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조작사진
당시 사진의 조작 논란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현재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오른쪽 사진)이 가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오른쪽 사진과 표제 사진의 인물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물론, 윤봉길은 중절모를 쓴 적이 없으며, 트렌치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작 판명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 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저서
《오추》(嗚推)
《옥수》
《농민독본》3권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가족 관계
증조할아버지: 윤재
큰할아버지: 윤헌영
두번째 큰할아버지: 윤필영
조부: 윤진영
큰아버지: 윤경
아버지: 윤황(? ~ 1950년)
어머니: 김원상(1889년 ~ 1952년)
부인: 배용순(1907년 8월 15일 ~ 1988년 7월 10일)
장남: 윤종(尹淙, 1927년 ~ 1984년 4월 22일)
자부: 김옥남(1936년 ~ )
손녀: 윤주경(尹柱敬, 1959년 5월 3일 ~ )
손녀: 윤주원
손자: 윤주웅(尹柱雄, 1971년 1월 26일 ~ )
증손자:윤행복
차남: 윤경(尹涇, 1928년 ~ 1929년) - 2살 때 홍역으로 사망
장녀: 윤안순(尹安順, 1929년 ~ 1929년) - 1929년 아직 만나이 한살바기도 채 아니 되어 홍역으로 사망
삼남: 윤담(尹淡, 1930년 ~ 1938년) - 덕산보통학교 1년 중퇴 후 9살 때 복막염으로 사망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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