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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청사초롱 불 밝힌 촉석루 밤축제와 남강 뱃놀이
진주화반, 천년의 시간을 담다
조정 인재의 절반을 차지했던 진주 사대부가의 손맛
-화려한 꽃상 위로 펼쳐지는 지리산과 남해 바다
-남도 특유의 서정적인 맛, 한양 관리들을 사로잡다
-이인좌의 난, 진주민란 등 흥미진진한 역사를 배경으로 맛보는 교방꽃상
진주는 고려 조선시대 서부 경남의 대표 도시였다. 실학자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진주에는 부유한 귀공자가 많다고 했다. 정자에서 즐기는 풍류 문화가 발달했다. 교자상 너머로, 기생들의 춤이 너울대고 음악이 울렸다.
진주성에는 경상도 육군본부인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도 진주에 있었다.수많은 관리들이 드나들었다. 접대식이 발달했다. 기생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교방』이란 조선시대 기생을 양성하던 지방 관아의 기관이었다. 진주 교방은 규모가 커 [백화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교방음식은 지리산과 남해에 인접한 진주의 풍부한 재료를 이용해 접대를 위해 차려졌던 음식이다. 큰 교자상 한 상 가득 차려낸다. 태態가 아름다워 꽃상이라 불렀다. 진주만의 독특한 교방문화다.
필자는 국내 최초로 대한민국 비빔밥의 모태인 진주화반을 복원한다. 전통 사족들의 부엌도 열었다. 진주성 전투의 혈전 이미지와 육회가 오버랩 되는 허구를 뒤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은 화반의 역사를 추적한다. 진주화반을 따라가 보면, 동아시아를 휩쓸었던 고대 유교문화를 만난다. 일제강점기, 화반의 자리를 차지한 진주 장터비빔밥 이야기도 흥미롭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식에 대한 열정을 지닌 MZ세대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자층에게 우리 식문화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꽃밭 한 상을 받는 듯한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진주화반, 천년의 시간을 담다
조정 인재의 절반을 차지했던 진주 사대부가의 손맛
-화려한 꽃상 위로 펼쳐지는 지리산과 남해 바다
-남도 특유의 서정적인 맛, 한양 관리들을 사로잡다
-이인좌의 난, 진주민란 등 흥미진진한 역사를 배경으로 맛보는 교방꽃상
진주는 고려 조선시대 서부 경남의 대표 도시였다. 실학자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진주에는 부유한 귀공자가 많다고 했다. 정자에서 즐기는 풍류 문화가 발달했다. 교자상 너머로, 기생들의 춤이 너울대고 음악이 울렸다.
진주성에는 경상도 육군본부인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도 진주에 있었다.수많은 관리들이 드나들었다. 접대식이 발달했다. 기생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교방』이란 조선시대 기생을 양성하던 지방 관아의 기관이었다. 진주 교방은 규모가 커 [백화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교방음식은 지리산과 남해에 인접한 진주의 풍부한 재료를 이용해 접대를 위해 차려졌던 음식이다. 큰 교자상 한 상 가득 차려낸다. 태態가 아름다워 꽃상이라 불렀다. 진주만의 독특한 교방문화다.
필자는 국내 최초로 대한민국 비빔밥의 모태인 진주화반을 복원한다. 전통 사족들의 부엌도 열었다. 진주성 전투의 혈전 이미지와 육회가 오버랩 되는 허구를 뒤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은 화반의 역사를 추적한다. 진주화반을 따라가 보면, 동아시아를 휩쓸었던 고대 유교문화를 만난다. 일제강점기, 화반의 자리를 차지한 진주 장터비빔밥 이야기도 흥미롭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식에 대한 열정을 지닌 MZ세대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자층에게 우리 식문화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꽃밭 한 상을 받는 듯한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목차
1장. 진주화반花飯, 천년의 베일을 벗다
16. “진주의 소울 푸드, 『진주화반』
19. 『진주화반』의 유래는 진주 강씨 혈식제례
23. 비빔밥 한 그릇이 쌀 한 가마니 값
27. 임금이 내리던 선물, 『소고기 육회』
30. 한 줄기 『황포묵』에 담긴 사연
33. 희귀한 진주 배추 『옥하숭』
36. 1915년 진주 삼도정육점과 『진주화반』
39. 일제강점기 요릿집과 『진주화반』
43. 화려하게 피어나 진주성을 수놓다, 『진주화반』
46. K 기업가 정신의 수도, 승산 부자마을 『진주화반』
50. 노기(老妓)들의 종착지, 상봉동 비빔밥촌
53. 대하소설 [토지] 속 『진주비빔밥』
57. 과방지기 외할머니와 『진주화반』
61. 과방지기 어머니와 『진주화반』
64. 『진주화반』을 뭉갠 주범, 1984년 [문화재관리국]
2. 촉석루에 올라보니, 잔치로구나
70. 『꽃상』, 풍류를 담다
73. 1780년 봄날 촉석루 잔치
76. 1884년 11월 24일, 미국인 관리 조지 포크가 받은 『꽃상』
80. 1890년 함안 군수 오횡묵이 기록한 『꽃상』
84. 진주 수령의 첫 번째 『진찬進饌』
87. 진주 수령의 초조반 『약선죽』
90. 수령의 생일, 쌀밥에 고깃국으로 관속들을 먹이다
94. “사또 납신다, 다섯 가지 차려라”
98. 진주 관아의 별미 『교방 꽃국수』
102, 『교방찜』, 과일향을 머금다
106. 명품 한우의 풍미, 『약갈비』와 『장산적』
110. 당나라 국수와 『조선잡채』
113. 고기보다 귀했던 귀족의 사탕, 『옥춘당』
3장. 계절 곳간 열리다, 제철 음식
120. 진주의 봄소식 『입춘채 꽃상』
124. 조선시대 여성의 날, 화전놀이 『꽃달임』
127. 맥을 살리는 여름 보약 『생맥산生脈散』
130. 수령의 수박 『밀전서과蜜煎西瓜』와 백성의 참외
133. 관아의 액막이 『동지팥죽』
137. 섣달그믐의 양로식, 『전약』과 『대구연포탕』
141. 운수대통을 기원하는 『정월떡』과 『섬만두』
144. 귀신 쫒는 퇴마술, 『도소주屠蘇酒』
148. 꽃처럼 살포시 썰어낸 『생치 생떡국』
152. 봄이 내어준 약선음식 『도다리쑥국』
155. 가을을 진상하다, 진주의 중양절
159. 가을이 익어가는 진주, 자색(紫色) 『석류편』
162. 꽃샘추위를 이기는 『향설고(香雪膏)』
166. 새 불을 기다리는 한식(寒食), 『백색 구절판』
4장. 오방색의 향연, 진주 꽃상
172. 아름다움에 반하고 맛에 취했던 기억
176. 한우의 조상 오키나와 물소
179. 진주성 전투, 일본 두부의 새 역사를 쓰다
182. 질박한 진주목 『이순신밥상』
185. 『남명 선생의 밥상』을 그리다
189. 『남명 선생의 주안상』을 그리다
193. 논개의 제향에 『사슴고기』를 올리다
196. 1895년 진주관아의 제례, 『헌관의 밥상』
200. 당나라에서 온 두텁떡, 『진주 유자 필라??』
204. 선비들의 술, 『추로주』와 『전복김치』
207. 진주 『은어밥』과 『매실소금』
210. 전통 그 이상의 가치, 『K샐러드 단자김치』
213. 진주 교방음식의 양념 공식, 미니멀리즘(minimalism)
5장. 조정 인재의 창고, 진주 명가 내림 손맛
220.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들과 『보양식』
224. 대하소설 토지의 실제 모델 『화사별서』의 음식 사치
228. 김해 허씨가의 명물 식재료 『대구』
232. 봄春 황후妃, 단목리 『명주(名酒)』 이야기
236. 맑은 강에 배 띄우다, 남강 뱃놀이
239. 진주의 누정 문화와 따뜻한 안주 『신선로』
242. 진주 『꽃상』에서 고려의 문화를 만나다
246. “술잔은 여섯 번 돌리고 안주는 다섯 번 올린다”
-『사대부 술자리 예법』
249. “은장도를 들어 만두피를 가르다”
252. 호수에 달 띄워 차(茶)를 달이다
6장. 근대를 거닐며 진주를 맛보다
258. 19세기 진주 중앙시장 먹자골목
262. 진주 백정들이 만든 『소 한 마리 탕』과 『서울 설렁탕』
265. 『진주냉면』의 원조는 진주 정씨 가문의 구휼 음식
269. 당대 최고의 예술원, 진주 권번의 『해삼통찌짐』
273. 『진주 거지탕』의 진화
276. 빈자(貧者)의 양식, 『진주 장어구이』
280. 1933년 진주, 요릿집만 1,300여 곳
283. 해방 전후 기생 놀이와 교자상
7장. 책 속에 맛이 있다
288. 팔도의 명물을 총집합시킨 고전 소설 속 주안상
291. 이인좌의 난과 『간장게장』
294. 한일간 음식 교류의 통로 조선통신사
297.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 정조의 금주령 해제
301. 『잡채』와 『더덕』, 왕실을 사로잡다
305. 송나라로 떠나는 교방음식 기행
309. “곰 발바닥을 좋아하세요?”
16. “진주의 소울 푸드, 『진주화반』
19. 『진주화반』의 유래는 진주 강씨 혈식제례
23. 비빔밥 한 그릇이 쌀 한 가마니 값
27. 임금이 내리던 선물, 『소고기 육회』
30. 한 줄기 『황포묵』에 담긴 사연
33. 희귀한 진주 배추 『옥하숭』
36. 1915년 진주 삼도정육점과 『진주화반』
39. 일제강점기 요릿집과 『진주화반』
43. 화려하게 피어나 진주성을 수놓다, 『진주화반』
46. K 기업가 정신의 수도, 승산 부자마을 『진주화반』
50. 노기(老妓)들의 종착지, 상봉동 비빔밥촌
53. 대하소설 [토지] 속 『진주비빔밥』
57. 과방지기 외할머니와 『진주화반』
61. 과방지기 어머니와 『진주화반』
64. 『진주화반』을 뭉갠 주범, 1984년 [문화재관리국]
2. 촉석루에 올라보니, 잔치로구나
70. 『꽃상』, 풍류를 담다
73. 1780년 봄날 촉석루 잔치
76. 1884년 11월 24일, 미국인 관리 조지 포크가 받은 『꽃상』
80. 1890년 함안 군수 오횡묵이 기록한 『꽃상』
84. 진주 수령의 첫 번째 『진찬進饌』
87. 진주 수령의 초조반 『약선죽』
90. 수령의 생일, 쌀밥에 고깃국으로 관속들을 먹이다
94. “사또 납신다, 다섯 가지 차려라”
98. 진주 관아의 별미 『교방 꽃국수』
102, 『교방찜』, 과일향을 머금다
106. 명품 한우의 풍미, 『약갈비』와 『장산적』
110. 당나라 국수와 『조선잡채』
113. 고기보다 귀했던 귀족의 사탕, 『옥춘당』
3장. 계절 곳간 열리다, 제철 음식
120. 진주의 봄소식 『입춘채 꽃상』
124. 조선시대 여성의 날, 화전놀이 『꽃달임』
127. 맥을 살리는 여름 보약 『생맥산生脈散』
130. 수령의 수박 『밀전서과蜜煎西瓜』와 백성의 참외
133. 관아의 액막이 『동지팥죽』
137. 섣달그믐의 양로식, 『전약』과 『대구연포탕』
141. 운수대통을 기원하는 『정월떡』과 『섬만두』
144. 귀신 쫒는 퇴마술, 『도소주屠蘇酒』
148. 꽃처럼 살포시 썰어낸 『생치 생떡국』
152. 봄이 내어준 약선음식 『도다리쑥국』
155. 가을을 진상하다, 진주의 중양절
159. 가을이 익어가는 진주, 자색(紫色) 『석류편』
162. 꽃샘추위를 이기는 『향설고(香雪膏)』
166. 새 불을 기다리는 한식(寒食), 『백색 구절판』
4장. 오방색의 향연, 진주 꽃상
172. 아름다움에 반하고 맛에 취했던 기억
176. 한우의 조상 오키나와 물소
179. 진주성 전투, 일본 두부의 새 역사를 쓰다
182. 질박한 진주목 『이순신밥상』
185. 『남명 선생의 밥상』을 그리다
189. 『남명 선생의 주안상』을 그리다
193. 논개의 제향에 『사슴고기』를 올리다
196. 1895년 진주관아의 제례, 『헌관의 밥상』
200. 당나라에서 온 두텁떡, 『진주 유자 필라??』
204. 선비들의 술, 『추로주』와 『전복김치』
207. 진주 『은어밥』과 『매실소금』
210. 전통 그 이상의 가치, 『K샐러드 단자김치』
213. 진주 교방음식의 양념 공식, 미니멀리즘(minimalism)
5장. 조정 인재의 창고, 진주 명가 내림 손맛
220.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들과 『보양식』
224. 대하소설 토지의 실제 모델 『화사별서』의 음식 사치
228. 김해 허씨가의 명물 식재료 『대구』
232. 봄春 황후妃, 단목리 『명주(名酒)』 이야기
236. 맑은 강에 배 띄우다, 남강 뱃놀이
239. 진주의 누정 문화와 따뜻한 안주 『신선로』
242. 진주 『꽃상』에서 고려의 문화를 만나다
246. “술잔은 여섯 번 돌리고 안주는 다섯 번 올린다”
-『사대부 술자리 예법』
249. “은장도를 들어 만두피를 가르다”
252. 호수에 달 띄워 차(茶)를 달이다
6장. 근대를 거닐며 진주를 맛보다
258. 19세기 진주 중앙시장 먹자골목
262. 진주 백정들이 만든 『소 한 마리 탕』과 『서울 설렁탕』
265. 『진주냉면』의 원조는 진주 정씨 가문의 구휼 음식
269. 당대 최고의 예술원, 진주 권번의 『해삼통찌짐』
273. 『진주 거지탕』의 진화
276. 빈자(貧者)의 양식, 『진주 장어구이』
280. 1933년 진주, 요릿집만 1,300여 곳
283. 해방 전후 기생 놀이와 교자상
7장. 책 속에 맛이 있다
288. 팔도의 명물을 총집합시킨 고전 소설 속 주안상
291. 이인좌의 난과 『간장게장』
294. 한일간 음식 교류의 통로 조선통신사
297.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 정조의 금주령 해제
301. 『잡채』와 『더덕』, 왕실을 사로잡다
305. 송나라로 떠나는 교방음식 기행
309. “곰 발바닥을 좋아하세요?”
책 속으로
진주는 가문마다 비빔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재료가 어찌나 많은지 밥에 꽃 피운 『화반』이라고 했다. 진주비빔밥이 화반이 된 것은 18가지 고명을 꽃처럼 올렸기 때문이다. 예나제나 귀한 재료인 송이버섯, 소고기 육회를 미리 비벼 모양을 망가뜨리기엔 아까운 재료가 아닐 수 없다. 일종의 과시이기도 했을 것이다.
진주 꽃상에는 어리굴젓, 잡젓, 대구알젓, 조기젓에 진석화젓까지 올랐다. 굴 삭힌 물에 간장을 넣어 3일 동안 가마솥에 달여 붓는 진석화젓은 어리굴젓보다 2배 이상 비쌌다. 교방음식은 작게 썰어 예쁘게 담아낸다. 주안상 위주로 차려져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 맛이다. 반드시 차려야 하는 정찬(正餐)과 사치스러운 음식상인 가찬(加餐)으로 나누어 차린다. 산과 바다가 결마다 곱게 내려앉은 꽃상은 진주의 풍류다.
촉석루에 꽃상이 차려지고 풍악이 울린다. 잔치의 시작은 음식이었고 그 다음이 소리요, 마지막이 춤이었다. 진주는 춤보다는 소리다. 동편제의 발상지가 남원이었다면 소비처는 진주였다. 꽃상 가운데는 신선로가 끓고, 조개구이, 별어탕, 대구전 같은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이 조화를 이룬다. 진주의 명품꿀로 빚은 박계(계수나무 이파리처럼 만든 약과)와 대나무 이슬로 담은 추로술이 일품이고 각양각색의 화전도 곱다. 진주성 병마절도사가 베푸는 진수성찬이 꽃상 가득인 날, 오늘은 잔치다.
관아에서는 팥죽상을 작은 상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연회상인 교자상은 큰상이었고 팥죽상과 떡국상은 작은 상이었다. 동지에는 소나무 가지에 팥죽을 묻혀 관아의 이곳저곳에 칠했다. 액막이 행사인 동지제사다. 아전은 부임하는 수령에게 관아에 귀신이 산다고 겁을 주기도 하였다. 악귀를 피하려면 길을 돌아가라느니, 재임 중 죽은 수령의 혼령이 나타난다느니 하는 말로 신임 수령을 현혹하기도 했다. 흉년이 들거나 기근이 들면, 수령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도 돌렸다. 수령의 동지제는 관아의 엄중한 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1942년까지에 진주의 나무전은 명물거리였다. 수정동과 봉곡동에 있었다. 인근 산골에서 밤새 걸어 새벽에 나무를 팔아 생필품을 교환했다. 일을 마치고 장터에서 비빔밥 한 그릇을 먹고 돌아가는 것이 나무꾼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산해진미의 교방음식이 탕, 찜, 고음, 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발달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풍족한 땔감 덕분이었다. ‘꽃을 씹는 것보다 나았다’는 교방음식을 풍요롭게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무꾼들의 무거운 어깨였다.
고려 문화의 잔재는 진주의 토성(土姓)인 강, 하, 정 외에도 무신정권의 일인자였던 최충헌이 주인공이다. 4명의 국왕을 갈아치우며 최씨 천하 시대를 열었던 그는 무려 4대에 걸쳐 60년간이나 진주 일대를 사유화하였다. 고려의 문화는 음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경의 모약과가 유명하듯, 진주를 대표하는 유과는 박계(朴桂)다. 박계는 밀가루를 꿀과 조청으로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빚은 다음, 계수나무 이파리처럼 빗살 무늬를 넣어 참기름에 튀기듯 지진다. 주로 제사상이나 연회상에 올렸다. 진주의 박계는 17세기 국문조리서인 『주방문』의 레시피보다 참기름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진주냉면의 시작은 진주 정씨 가문의 구휼식이었다. 정문(鄭門)은 대대로 사봉면과 이반성면에 거주했다. 흉작을 들 때마다 메밀을 잔뜩 심었다. 오이와 김치를 얹은 소박한 냉면으로 구휼사업을 펼쳤다. 진주비빔밥이 그렇듯, 냉면도 외식 메뉴가 되어 중앙시장으로 진출했다.
진주 꽃상에는 어리굴젓, 잡젓, 대구알젓, 조기젓에 진석화젓까지 올랐다. 굴 삭힌 물에 간장을 넣어 3일 동안 가마솥에 달여 붓는 진석화젓은 어리굴젓보다 2배 이상 비쌌다. 교방음식은 작게 썰어 예쁘게 담아낸다. 주안상 위주로 차려져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 맛이다. 반드시 차려야 하는 정찬(正餐)과 사치스러운 음식상인 가찬(加餐)으로 나누어 차린다. 산과 바다가 결마다 곱게 내려앉은 꽃상은 진주의 풍류다.
촉석루에 꽃상이 차려지고 풍악이 울린다. 잔치의 시작은 음식이었고 그 다음이 소리요, 마지막이 춤이었다. 진주는 춤보다는 소리다. 동편제의 발상지가 남원이었다면 소비처는 진주였다. 꽃상 가운데는 신선로가 끓고, 조개구이, 별어탕, 대구전 같은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이 조화를 이룬다. 진주의 명품꿀로 빚은 박계(계수나무 이파리처럼 만든 약과)와 대나무 이슬로 담은 추로술이 일품이고 각양각색의 화전도 곱다. 진주성 병마절도사가 베푸는 진수성찬이 꽃상 가득인 날, 오늘은 잔치다.
관아에서는 팥죽상을 작은 상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연회상인 교자상은 큰상이었고 팥죽상과 떡국상은 작은 상이었다. 동지에는 소나무 가지에 팥죽을 묻혀 관아의 이곳저곳에 칠했다. 액막이 행사인 동지제사다. 아전은 부임하는 수령에게 관아에 귀신이 산다고 겁을 주기도 하였다. 악귀를 피하려면 길을 돌아가라느니, 재임 중 죽은 수령의 혼령이 나타난다느니 하는 말로 신임 수령을 현혹하기도 했다. 흉년이 들거나 기근이 들면, 수령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도 돌렸다. 수령의 동지제는 관아의 엄중한 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1942년까지에 진주의 나무전은 명물거리였다. 수정동과 봉곡동에 있었다. 인근 산골에서 밤새 걸어 새벽에 나무를 팔아 생필품을 교환했다. 일을 마치고 장터에서 비빔밥 한 그릇을 먹고 돌아가는 것이 나무꾼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산해진미의 교방음식이 탕, 찜, 고음, 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발달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풍족한 땔감 덕분이었다. ‘꽃을 씹는 것보다 나았다’는 교방음식을 풍요롭게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무꾼들의 무거운 어깨였다.
고려 문화의 잔재는 진주의 토성(土姓)인 강, 하, 정 외에도 무신정권의 일인자였던 최충헌이 주인공이다. 4명의 국왕을 갈아치우며 최씨 천하 시대를 열었던 그는 무려 4대에 걸쳐 60년간이나 진주 일대를 사유화하였다. 고려의 문화는 음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경의 모약과가 유명하듯, 진주를 대표하는 유과는 박계(朴桂)다. 박계는 밀가루를 꿀과 조청으로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빚은 다음, 계수나무 이파리처럼 빗살 무늬를 넣어 참기름에 튀기듯 지진다. 주로 제사상이나 연회상에 올렸다. 진주의 박계는 17세기 국문조리서인 『주방문』의 레시피보다 참기름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진주냉면의 시작은 진주 정씨 가문의 구휼식이었다. 정문(鄭門)은 대대로 사봉면과 이반성면에 거주했다. 흉작을 들 때마다 메밀을 잔뜩 심었다. 오이와 김치를 얹은 소박한 냉면으로 구휼사업을 펼쳤다. 진주비빔밥이 그렇듯, 냉면도 외식 메뉴가 되어 중앙시장으로 진출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조선시대 지방관의 밥상
인구의 90%가 노비였던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음식이 있었을까. 바가지의 밥과 김치, 간장과 된장이 전부였다. 반면 상류층의 음식 사치는 성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지방 수령들의 밥상은 궁중보다 더 화려했다. 궁중에서 사신 접대상을 받은 명나라 칙사가 지방만 못 하다며 화를 낸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를 통해 지방 수령들의 음식이 중국 황제의 밥상보다 열 배는 더 크다고 쓴 소리를 한 바 있다.
조선시대 음식이 발달할 수 있는 지역적 요건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관청이 밀집해 있어 드나드는 관리들이 많은 곳이고, 두 번째는 부유층들이 많아 음식을 풍족히 차리는 곳이며, 세 번째는 산과 바다가 인근에 있어 식재료의 유통이 원활한 곳이다.
진주는 드물게도 이 세 가지 요인을 모두 갖춘 요지였다. 진주에는 경상도 육군본부인 병마절도영과 행정관청인 목아(牧衙)가 있었다. 조정 인재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전통 사대부가도 많았다. 지리산과 남해는 진주의 부엌이었다.
잔치는 주로 촉석루에서 열렸다. 진주교방문화는 진주의 풍류문화이고 교방음식은 잔치 때 차려진 접대식이다. 성대한 교자상을 교방꽃상이라 한다. 필자는 우리가 진주비빔밥으로만 알고 있는 진주화반에 대해 심도 있게 파헤친다. 『고려거란전쟁』의 영웅 강민첨 장군의 소고기 혈식(날 것 그대로를 올리는 유교식 제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유래를 끝까지 추적한다.
진주화반은 일제강점기 진주 중앙시장에 저렴한 개량소고기를 판매하는 정육점이 들어서면서 대중화되었다. 진주냉면도 진주 정씨 가문의 구휼식에서 출발해 외식업으로 인기를 끌었다.
교방꽃상은 한 상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거금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는 수군통제영의 박계(유과)는 진주 꿀로 제조했다. 박계는 정교한 다식과 같이 꽃상에 오르는 디저트였다.
대나무밭 새벽 이슬을 받아 담그는 추로주, 500근의 소고기, 남해바다가 그대로 펼쳐지는 생물 그대로의 안주들. 먹는 이를 배려해 작고 예쁘게 만드는 진주교방음식은 궁중음식과는 양념공식에서 차별화된다. 재료가 신선해 양념을 최소화하는 게 특징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한반도의 음식에는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있다. 필자는 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며 깊은 맛의 세계로 끌고 간다.
이 책은 한식이라는 키워드에 우리 고유의 오방색을 입힌 첫 번째 작업이다. 치킨, 떡볶이 같은 스트리트 푸드가 K푸드의 상징이 되고 있는 이때, 필자가 던지는 묵직한 화두가 한식 세계화를 향한 큰 울림이 되길 기대한다.
인구의 90%가 노비였던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음식이 있었을까. 바가지의 밥과 김치, 간장과 된장이 전부였다. 반면 상류층의 음식 사치는 성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지방 수령들의 밥상은 궁중보다 더 화려했다. 궁중에서 사신 접대상을 받은 명나라 칙사가 지방만 못 하다며 화를 낸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를 통해 지방 수령들의 음식이 중국 황제의 밥상보다 열 배는 더 크다고 쓴 소리를 한 바 있다.
조선시대 음식이 발달할 수 있는 지역적 요건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관청이 밀집해 있어 드나드는 관리들이 많은 곳이고, 두 번째는 부유층들이 많아 음식을 풍족히 차리는 곳이며, 세 번째는 산과 바다가 인근에 있어 식재료의 유통이 원활한 곳이다.
진주는 드물게도 이 세 가지 요인을 모두 갖춘 요지였다. 진주에는 경상도 육군본부인 병마절도영과 행정관청인 목아(牧衙)가 있었다. 조정 인재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전통 사대부가도 많았다. 지리산과 남해는 진주의 부엌이었다.
잔치는 주로 촉석루에서 열렸다. 진주교방문화는 진주의 풍류문화이고 교방음식은 잔치 때 차려진 접대식이다. 성대한 교자상을 교방꽃상이라 한다. 필자는 우리가 진주비빔밥으로만 알고 있는 진주화반에 대해 심도 있게 파헤친다. 『고려거란전쟁』의 영웅 강민첨 장군의 소고기 혈식(날 것 그대로를 올리는 유교식 제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유래를 끝까지 추적한다.
진주화반은 일제강점기 진주 중앙시장에 저렴한 개량소고기를 판매하는 정육점이 들어서면서 대중화되었다. 진주냉면도 진주 정씨 가문의 구휼식에서 출발해 외식업으로 인기를 끌었다.
교방꽃상은 한 상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거금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는 수군통제영의 박계(유과)는 진주 꿀로 제조했다. 박계는 정교한 다식과 같이 꽃상에 오르는 디저트였다.
대나무밭 새벽 이슬을 받아 담그는 추로주, 500근의 소고기, 남해바다가 그대로 펼쳐지는 생물 그대로의 안주들. 먹는 이를 배려해 작고 예쁘게 만드는 진주교방음식은 궁중음식과는 양념공식에서 차별화된다. 재료가 신선해 양념을 최소화하는 게 특징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한반도의 음식에는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있다. 필자는 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며 깊은 맛의 세계로 끌고 간다.
이 책은 한식이라는 키워드에 우리 고유의 오방색을 입힌 첫 번째 작업이다. 치킨, 떡볶이 같은 스트리트 푸드가 K푸드의 상징이 되고 있는 이때, 필자가 던지는 묵직한 화두가 한식 세계화를 향한 큰 울림이 되길 기대한다.
추천평
교방꽃상은 빛깔과 맛이 아름답다 하여 불리는 상차림입니다. 식재료가 풍부한 고장 진주의 산해진미를 담아냅니다. 정성을 다해 만들고 곱게 썰어 먹는 자를 배려합니다. 맵지도 짜지도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음식의 태態가 예뻐 ‘눈으로 먹고 입으로 한 번 더 먹는다’고 했습니다.
박미영 박사는 천년이 넘은 진주 화반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 자신의 뿌리인 진주 정신을 찾는 길이었으며 화반의 복원은 사명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진주를 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며 비법을 직접 듣고 재현했으며 30여 년간 천 번도 넘게 만들어 봤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격조 높고 빼어난 음식 솜씨는 한식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조후종 (前명지대학교 교수)
박미영 박사는 천년이 넘은 진주 화반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 자신의 뿌리인 진주 정신을 찾는 길이었으며 화반의 복원은 사명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진주를 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며 비법을 직접 듣고 재현했으며 30여 년간 천 번도 넘게 만들어 봤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격조 높고 빼어난 음식 솜씨는 한식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조후종 (前명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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