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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조선왕의 거처 종묘 신실 (2024)

동방박사님 2024. 9. 2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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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종묘의궤」에 수록된 황실의례와 종묘 신실 제구
신이 된 조선왕의 거처 종묘 신실!
향후 종묘 소장 제구의 원형 보존 및 복원 복제 방향 등에 크게 기여!
대한제국황실 부묘의례의 변화양상, 현존 종묘 소장 제구 양식에 끼친 영향,
제구의 소재 등의 과학적 분석 규명!

종묘는 국가의례로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사회질서 구현을 위한 통치방법으로 정한 최고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종묘 의례를 길례로 규정하여 왕실의 조상신을 신격화하고, 제향 의례를 예제에 해당하는 대사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종묘의 위계도 승격되고, 유교적 보편적인 질서 속에 갖추어진 국가 사당으로 왕실의 권위와 신성성을 담보하고 있다. 고종은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지 34년 만에 국가체제를 바꾸어 황제로 등극하였다. 황제국의 위상과 역할을 다변적으로 대변하고, 조선과의 종통적(宗統的) 계승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국에 관련된 의례는 고례(古禮)를 쓰지 말고 조선의 의례를 우선적으로 참작하여 보탤 것을 더하여 간편한 것을 취하도록 하였다.

“국가에 처음 있는 전례(典禮)인 만큼 의절(儀節)을 행할 때 반드시 고례(古禮)만을 순전히 따를 필요는 없으니, 우리의 예에서 손익(損益)을 참작하여 간편한 것을 취하도록 하라.”(且國家初有之典禮也 基於儀節之問 不必純用古禮 而斟酌損益於我禮 取其簡便可也)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9월 8일 갑년 종묘 신실은 신실 한 칸을 기본으로 신주의 위계를 서상제에 입각하여 서쪽을 상위로 하여 태조를 제1실에 순종을 19실에 모시고, 영녕전 16개 신실에 선왕과 선후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종묘 신실에는 선왕과 선후의 신주를 봉안하고 이를 봉심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의례용 제구를 구비(構備)하였다. 신실의 내부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주이다. 신실은 신실을 모시는 방으로 내부 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 신주를 봉안하고 의례를 설행하기 위해 의절에 따라 내부 공간에 진설되는 제구의 위계가 정해졌다.

“천자는 칠묘 3소3목으로 하고. 제후는 2소2목으로 오묘로 한다. 신위는 독립된 묘를 갖추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天子七廟 三昭三穆 興大祖之廟而七諸侯五廟) 『禮記』卷5 「王制」

“건물은 같이 쓰고 그 안에서 실만 따로 하고, 서쪽에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차례로 이하의 신위를 모신다.”(同堂異室 以西爲上) 『종묘의궤』제2책 「종묘제도」

종묘 신실 제구는 국상 마지막 과정인 부묘를 통해 최종적으로 갖추어졌다. 국상을 당하면 도감을 설치하고, 도감 내에 각 공방을 통해 수보할 것과 개비할 것을 구분하여 종묘에 부묘할 때 최종적으로 마련하였다. 여기에 새롭게 제작하는 품목을 제외하고는 빈전과 혼전에서 마련하여 소용하였던 것을 전배잉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목차

책머리
주제어: 고종, 신실, 종묘의례, 부묘제, 신주, 배설제구, 포진제구 _10

Ⅰ 서론 _23

Ⅱ 대한제국 황실의례의 변천과 특징 _39

2.1 대한제국 선포의 역사적 배경 _44
2.2 『대한예전』 황실 의례의 제정 _58
2.3 고종대와 황실 의례의 특징 _70
2.4 소결 _100

Ⅲ 종묘 신실의 조성과 제구의 정비 _103

3.1 종묘 신실의 조성과 변천 _106
3.2 종묘 신실 공간 구성과 제구의 정비 _116
3.2.1 신실 공간 구성 _116
3.2.2 신실 제구와 정비 _130
3.3 신실 제구의 종별 추이와 운용 _148
3.3.1 신실 제구의 종별 추이 _148
3.3.2 신실 제구의 종별 운용 _164
3.4 소결 _180

Ⅳ 신실 포진·배설제구의 종별 현황과 변천 _183

4.1 신실 포진·배설제구의 종별 현황 _186
4.2 신실 포진제구의 종별과 변천 _196
4.2.1 면장(面帳) _196
4.2.2 주렴 _203
4.2.3 욕·석·건 _211
4.3 신실 배설제구의 종별과 변천 _219
4.3.1 장·상·탁 _219
4.3.1.1 장(欌) _220
① 신주장 _220 ② 책장 _222 ③ 보장 _223
④ 신탑 _224 ⑤ 답장(踏掌) _227
4.3.1.2 상(床) _229
4.2.1.3 탁(卓) _230
4.3.2 선·개·기 _231
4.3.2.1 선(扇) _234
① 봉선 _235 ② 용봉선 _239
4.3.2.2 개(蓋) _240
① 홍개 _243 ② 황개 _244
4.3.2.3 선개기(扇蓋機) _247
4.4 소결 _249

Ⅴ 신실 포진·배설제구의 구조와 기술적 특징 _253

5.1 포진제구의 구조와 특징 _256
5.1.1 면장(面帳) _256
5.1.1.1 내면장 _260
5.1.1.2 외면장 _264
5.1.1.3 격장(황포면장) _266
5.1.2 주렴(朱簾) _269
5.1.2.1 신주주렴(神主朱簾) _270
5.1.2.2 격렴(隔簾) _274
5.1.2.3 외주렴(外朱簾) _280
5.1.2.4 부속재 및 충전재 _282
① 대올(시누대) _282 ② 장첩목 _284
③ 동도리, 낙영, 유소, 가선, 면령 _286
④ 두석 _290 ⑤ 귀갑문렴 짜기 _294
5.1.3 욕·석·건 _297
5.1.3.1 욕·건 _297
(1) 욕 _297
① 신주자욕 (神主藉褥) _297
② 신탑욕(神榻褥) _299
③ 신주독 받침내욕 _300
(2) 건 _301
5.1.3.2 석 _302
5.2 배설제구의 구조와 특징 _314
5.2.1 선 _316
5.2.1.1 봉선 _316
5.2.1.2 용봉선(龍鳳扇) _318
5.2.2 개(蓋) _320
5.2.3 선개기(扇蓋機) _329
5.3 소결 _333

Ⅵ 신실 포진·배설제구의 재질별 과학적 분석 _339

6.1 포진·배설제구의 소재 분류 _343
6.1.1 포진제구의 소재 _343
6.1.2 배설제구의 소재 _345
6.2 포진제구의 구조와 특징 _347
6.2.1 직물분석 _347
6.2.2 제사분석 _357
6.2.3 충전재 _359
6.3 목재류 분석 _362
6.3.1 목재분석 _363
6.3.2 비목재분석 _366
6.3.2.1 초본류 _366
6.3.2.2 지류 _371
6.4 안료와 도료 분석 _375
6.4.1 안료분석 _376
6.4.2 도료분석 _382
6.5 소결 _385

Ⅶ 신실 제구의 보수 운용과 보존 방안 _389

7.1 신실 제구의 보수 운용 _390
7.1.1 신실 포진제구의 보수 운용 _393
7.1.2 신실 배설제구의 보수 _401
7.2 신실 제구의 보존 방안 _412
7.3 소결 _416

Ⅷ 결론 _419

참고문헌 _434
ABSTRACT _440

저자 소개

저 : 박현주 (Park, Hyun-Ju,朴炫珠)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와 한서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사단법인 한복기술진흥원 원장을 역임하고, (주)한웨이브리미티드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종묘를 비롯하여 왕실 공예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주요경력] · (재)소상공인시장진흥재단 역량강화 평가위원 · 국가브랜드위원회 한복부문 자문위원 · 국가이미지위원회 전통문화산업분과 위원 ...

책 속으로

본고에서는 대한제국기 황실의례 중 길례의 설행공간인 종묘의 신실에 현재 구비(具備)되어 있는 배설제구와 포진제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제구에 함의되어 있는 개념과 그 의미를 확인하고자 조선왕실에서 대한제국 황실로 국체가 전환되면서 변화된 황실의례의 내용을 살펴보고, 왕실과 황실 부묘의례의 변화양상을 비교한 다음 이것이 현존하는 종묘 소장 제구의 양식에 끼친 영향을 밝힐 뿐 아니라 그러한 제구를 제작한 소재 등의 과학적 분석을 규명하여 향후 종묘 소장 제구의 원형 보존 및 복원 복제 방향 등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대한제국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는 제국주의적 기존 질서가 근대화의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극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선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주 국가의 위상과 자긍심을 표방하기 위한 국면 전환이었다.
--- p.24

의궤에 의하면 신정왕후의 부묘 의례는 신정왕후의 삼년상이 끝나고, 1892년(고종 29) 6월 10일에 거행되었다. 왕후의 부묘 의례는 왕후가 먼저 승하한 경우는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도 신주는 계속 혼전에 있다가 왕의 삼년상을 기다려 왕과 함께 부묘되었다. 왕이 먼저 승하한 경우 상기가 끝나고 왕의 신주가 봉안된 신실에 함께 봉안되었다. 신정왕후의 부묘 의식은 6월 9일 혼전인 효모전(孝慕殿)에 신주의 이봉(移奉)을 고하는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지내고 6월 10일에 종묘 정전 익종의 신실에 함께 봉안됨으로써 완료되었다. 신정왕후의 부묘 의례는 담제(?祭)를 먼저 지내고 한 달을 기다려서 종묘의 하향대제(夏享大祭)와 겸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사이에 윤달이 있어 두 달을 기다리게 되어 담월에 거행하게 되었다.
--- p.170

위 [그림 28]은 봉안하고 있는 신주의 수량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제작된다. 전체 108개의 신주 가운데 선후가 한 분인 경우가 27개 실이고, 두 분인 경우가 5개 실이고, 세 분이신 경우가 2개 실이다. 신주가 세 개의 경우는 2450㎜×124㎝×255㎝(가로×세로×높이)이고, 네 개의 경우는 380㎝×124㎝×2550㎜(가로×세로×높이)로 실측되었다. 영녕전은 신주가 전실에 2부로 내면장의 크기는 2330㎜×1240㎜×2550㎜(가로×세로×높이)로 일정하게 실측되었다.
--- p.263~264

대한제국기인 1906년(광무 10) 효정왕후(孝定王后)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 용선(龍扇)과 봉선(鳳扇)은 종묘 신실 안쪽의 문 좌우에 세워 신실을 장엄하는 의장으로 갖추어져 있다.

개(蓋)는 두 종류의 산(傘, ?) 과 선(扇)과 유사한 기능과 구조를 가진 의장으로 상징적으로는 노부(鹵簿)에 해당한다. 개의 종류에는 보개(寶蓋), 화개(華蓋), 천개(天蓋)가 있다. 구조는 선과 동일하며 다만 산과 선이 형태는 다르나 대상을 외기로부터 가려주고 보호하는 의위로서 역할 하는 것과 최고의 존엄에 대한 상징적 제구로 역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종묘 신실 제구는 국장과정에 갖추어지는 제구 가운데에서도 마지막으로 부묘로 최종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국왕의 사후 산릉과 인산 제구의 웅장하고 화려한 흉례에 비하여 부묘 당시의 종별과 수량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리고 제구에 표현되는 장식과 기교는 정교하나 소박하고 간결하다는 것과 당시에 제공되는 최고의 소재와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337

본 연구자는 종묘 신실 제구의 현상과 자연 과학적 재질 분석에 대한 정보가 전통 왕조시대 의례용 기물을 보존하고, 이를 복원하는데 소중한 프럭시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국외로 반출되어 각국의 박물관에 소장된 의례용 유물과 공예품의 보존연구와 더불어 황실 의례용 제구에 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본 연구와 관련하여 분야별 기술을 바탕으로 한 유사 학문 간에 통섭적 연구가 절실한 견해이다. 이는 문헌적 고찰에서도 살펴본 바에서 하나의 제구를 조달하기 위해서 도감이 설치되고 하부기관을 두어 종별 업종의 전문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운용하는 것을 참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문 연구자들의 분야별 전문성이 유기적으로 상생함으로써 본 연구범위의 확대로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
--- p.442~443

출판사 리뷰

대한제국은 1897년에 선포하여 1910년 일본에 병합되기까지 12년간 존속한 제국체제의 국가이다. 당시 조선은 왕위승계와 관련한 예송(禮訟)과 붕당정치로 인해 왕권의 실추와 민심의 도탄으로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면이었다.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전통적 질서수호와 새로운 세계질서를 함께 수용해야 할 시점이었다. 선제적으로 통치자의 위상과 역할을 다변적으로 대변하고, 정통성 확립을 위해 종래 선왕의 통치를 계승하여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규범을 실행해야 했다. 이에 대한제국은 유교적 통치 체제를 집대성한 조선의 국가 전례를 천자국의 예제에 맞게 규모와 체계를 정비하여 『대한예전(大韓禮典)』을 편찬했다.

한편, 종묘는 국가체제의 변경에도 여전히 유교 예제에 의한 종법적 질서로 계승되고 있었으나, 의제는 종전의 제후국가 제도인 《오묘제(五廟制)》를 제국에 맞게 《칠묘제(七廟制)》로 재정비했다. 따라서 종묘의 제례 공간인 신실도 종묘의례 규정에 따라 재정비되었으며, 의례용 제구 또한 의절에 따라 갖추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제도를 정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종묘 신실 내에 갖추어진 제구에 관한 연구이다. 따라서 기존의 국가체제를 통치하던 주체자가 체제를 바꾸어 통치를 이어가는 과정에 종묘의례 제도의 변화를 의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절목에 의해 마련된 의례용 제구의 정비와 기술적 특성을 연구하였다. 이에 연구범위를 고종이 조선 26대 왕으로 재임했던 34년간(1863년~1897년)과 대한제국기(1897년~1910년)에 더하여 일제강점기인 1921년 고종 부묘(?廟)와 1928년 순종 부묘 때까지로 설정하였다. 이는 동일한 통치주체자인 고종에 의해 변경된 국가 의례가 종전의 의례와 다른 점에 대한 배경과 그에 따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현전(現傳)하는 유물의 제(諸)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설정하였다. 특히 신실에 마련된 제구(諸具)에 관한 기록은 1866년(고종 3) 철종 부묘부터 1928년 순종 부묘에 이르기까지 『빈전혼전도감의궤』와 『부묘도감의궤』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국조오례의』와 『대한예전』에 규정된 의제(儀制)를 검토하고, 『종묘의궤』와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에 도설된 종묘 의절에 따른 제구와 관련된 내용을 참작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종묘 정전과 영녕전, 공신당, 재실에 있는 제구의 비품 장부도 추가하여 검토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 연구는 2009년부터 2022년까지 시행한 종묘 정전과 영녕전에 정비된 종별 제구의 보수, 교체사업 과정에 직접 참여한 실증적 경험과 이 과정에 얻어진 유물 시료의 자연과학적 분석정보를 토대로 종묘 신실 제구의 변천 과정과 기술적 특성을 도출할 수 있었음을 밝힌다.

Ⅱ장은 종전의 왕정체제와는 다른 제국체제에서 제도로 마련된 의례의 변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먼저 대한제국 종묘 신실의 조성과 변화 과정을 알아보고, 종묘 신실에 구비된 제구의 정비 과정을 살펴보았다.

Ⅳ장에서는 종묘 신실 제구에 대한 수리·보수·교체로 얻어진 결과물의 실증적 고찰과 『종묘의궤』와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에 기록된 의절에 따라 마련되는 제구의 종별 현황과 『부묘도감의궤』에 수록된 내용을 조사하여 제구의 종별 변화 추이를 살펴보았다.

Ⅴ장에서는 종묘 신실 제구의 구조와 기술적 특징을 포진과 배설의 기능을 가진 제구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 근거가 되는 자료는 『부묘도감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종별 물목과 『국조오례서례』와 『대한예전서례』에 도설된 도식과 내용을 검토하였다. 당시 사료에 기록된 물목에 들이는 재료와 물량을 분석하면서 구조와 형태를 추론하고 현전하는 유물의 현상을 비교하여 종별 제구를 제작할 때 기술방식을 도출하였다.

Ⅵ장에서는 제구의 물성에 대한 자연 과학적 분석을 검토하였다. 앞 장의 문헌 자료와 현전 유물의 현상 비교분석에 의하면 종묘 신실에 마련된 포진제구와 배설제구는 개별적으로 여러 종류의 재료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었다. 보수 교체 과정에서 살펴본 결과 각종 제구에 소용된 재료로는 직물류, 목재류와 비목재류인 초본류와 지류가 대표적으로 사용되었고, 철기류와 안료, 도료 등이 보조제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제구의 물성을 분석하기 위해 소재를 생물학적 분류로 구분하였다. 대분류로 직물류와 목재류, 안료와 도료를 분류하고, 목재류를 다시 비목재류 속에 초본류와 지류로 소분류하였다.

Ⅶ장에서는 종묘 신실 제구의 보수운영과 보존방법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현재하는 유물의 보존방법에 대한 과제를 모색할 수 있었다. 종묘 신실 종별 제구의 해체과정에 얻어진 조사로 유물 훼손 원인과 유형에 대해 관찰할 수 있었다. 포진제구와 배설제구의 훼손 원인과 오염의 유형이 종별 제구에 사용되는 소재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한제국기의 종묘 의제는 제국의 제도를 갖춤으로써 다른 국가 제도를 포괄하는 것으로 대한제국 체제의 정점을 함의하고 있었다. 이는 예치를 국가의 통치 질서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길례(吉禮)’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길례에서 대사는 종묘와 사직에 대한 의례이고, 조선왕실의 사당인 종묘는 가장 중요한 제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종묘 의례는 ‘선대왕과 선후’를 조상신으로 모시는 차원이 아닌 왕실의 신성을 교화하는 차원에서 의례가 설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신위를 봉안한 신주를 중심으로 한 의례와 의절로 규정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공간구성은 신주를 봉안하고 있는 신실이 중심이 되는 향사 공간과 제례를 수행하는 행례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전 내에 갖추어진 제구도 이것에 부합하여 마련되었다. 이 시기 종묘는 조선과의 영속성을 담보하고, 제국의 당위성과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기 위해 의제와 의절에 대한 재정비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열악한 시대 상황과 짧은 시간에 모든 제도를 다 갖추기에는 불가항력이었으나 다만 황제국 의례를 표출하기 위한 일부만을 갖출 수 있었다. 이마저도 제국이 병합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전하는 유물의 제 현상조차도 제국체제에 갖추어져야 하는 면모와는 현저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