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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첨단기술에 대한 무지,
미래에 대한 불안,
초라한 ‘나’에 대한 불만족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한 새로운 심리학이 시급하다
모두가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를 찬양하지만,
정작 심화될 인간의 외로움과 소외는 아무도 직시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이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렵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사용되고 있는 지금보다도 디지털 기술의 지배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 자명해 보인다. 게다가 현대인은 디지털 기기 없이는 일상을 하루라도 수월하게 보내기 어려워졌을 만큼, 깊이 종속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나의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지, 돌연 생계수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막연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그런 만큼 손바닥만한 화면에서 펼쳐지는 디지털 세계에 푹 빠져서는 내가 처한 ‘진짜’ 현실을 부정하기도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폭넓게 연구하며 사회적 소외 혹은 연대가 인간 사회와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꾸준히 논의해온 독일의 정신과 전문의이자 신경과학자 요아힘 바우어는 『현실 없는 현실』에서 이미 다가온 디지털 시대가 놓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을 진단하며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인류는 깊은 불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대체 누구인가 하는 확신을 더는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와 인공지능으로 촉발된 무의식적인 불안 가운데 하나는 도대체 인간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탓에 생겨난다. (…) 인간과 인공지능의 끊임없는 비교, 디지털 세계의 의심할 바 없이 기적적인 발전을 찬탄하는 찬양의 목소리는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언젠가 폐기되는 게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바탕에 깔았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직업을 잃고 말리라는 두려움은 실제로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공지능은 서로 비교될 ‘상품’이 아닐뿐더러, 비교되어서도 안 된다. _
미래에 대한 불안,
초라한 ‘나’에 대한 불만족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한 새로운 심리학이 시급하다
모두가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를 찬양하지만,
정작 심화될 인간의 외로움과 소외는 아무도 직시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이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렵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사용되고 있는 지금보다도 디지털 기술의 지배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 자명해 보인다. 게다가 현대인은 디지털 기기 없이는 일상을 하루라도 수월하게 보내기 어려워졌을 만큼, 깊이 종속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나의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지, 돌연 생계수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막연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그런 만큼 손바닥만한 화면에서 펼쳐지는 디지털 세계에 푹 빠져서는 내가 처한 ‘진짜’ 현실을 부정하기도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폭넓게 연구하며 사회적 소외 혹은 연대가 인간 사회와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꾸준히 논의해온 독일의 정신과 전문의이자 신경과학자 요아힘 바우어는 『현실 없는 현실』에서 이미 다가온 디지털 시대가 놓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을 진단하며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인류는 깊은 불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대체 누구인가 하는 확신을 더는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와 인공지능으로 촉발된 무의식적인 불안 가운데 하나는 도대체 인간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탓에 생겨난다. (…) 인간과 인공지능의 끊임없는 비교, 디지털 세계의 의심할 바 없이 기적적인 발전을 찬탄하는 찬양의 목소리는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언젠가 폐기되는 게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바탕에 깔았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직업을 잃고 말리라는 두려움은 실제로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공지능은 서로 비교될 ‘상품’이 아닐뿐더러, 비교되어서도 안 된다. _
목차
서문
1장 새로운 중세: 디지털 신화와 21세기의 퇴행
2장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3장 디지털 중독과 현실감 상실
4장 새로운 종교, 트랜스휴머니즘
5장 인공지능 vs. 인간의 두뇌
6장 디지털 나르시시즘, 자존감, 아바타
7장 인간성을 방어하라: 건강한 자아를 위한 새로운 심리학
감사의 말
참고문헌
주
1장 새로운 중세: 디지털 신화와 21세기의 퇴행
2장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3장 디지털 중독과 현실감 상실
4장 새로운 종교, 트랜스휴머니즘
5장 인공지능 vs. 인간의 두뇌
6장 디지털 나르시시즘, 자존감, 아바타
7장 인간성을 방어하라: 건강한 자아를 위한 새로운 심리학
감사의 말
참고문헌
주
책 속으로
현실을 가상의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는 배후에서는 권력과 비즈니스가 바삐 계산기를 두드리며 손익을 따져댄다. 현실에 충실하려는 자세야말로 인간다움을 지켜낼 전제조건이다. 이 책으로 나는 마치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우리를 미성숙함으로 퇴행시키려는 디지털화 과정, 계몽이 우리의 손을 이끌어 빠져나오게 한 미몽으로 다시 되돌려놓으려는 과정에 맞서 싸울 의지를 다지고자 한다.
--- p.8
젊은 세대는 다양한 이유로 현실을 갈수록 힘겨워한다. 많은 젊은이가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고 인터넷 가상공간, 이른바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트리밍, 그마저 시들해지면 ‘메타버스’에 빠져든다. 이런 추세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불보듯 빤하다. 인간 냄새가 나는 현실세계를 지켜주고 그 생태를 구해줄 사람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해진다.
물론 기후 보호를 외치는 운동가가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기는 하지만, 이들은 젊은 세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혁명을 선도해 막대한 돈을 버는 첨단기술 기업의 최고경영진은 현실세계가 이미 구조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서 모든 힘을 동원해 현실세계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디지털·미디어 기업에 별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 p.15
현실의 삶을 하찮게 보라는 요구를 감수하고 피안을 우러르며 위로를 구하는 대신, 인간은 서로 연대하며 운명을 스스로 감당하려 노력하면서 현실세계의 곤궁함을 직시하고 더 나은 세상, 살 만한 가치를 가진 세계로 바꾸려 힘을 모아야 한다는 깨달음 역시 계몽이 베푼 선물이다.
물론 이런 혁명적 변화를 위해서는 달콤한 이야기가 주는 위안에 빠져 ‘어딘가 다른 곳’에 기대는, 시대를 막론한 인간의 성향을 떨쳐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각성을 위해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용기 있게 감언이설을 떨치고 이성을 회복해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 p.21
인간을 두뇌로만 보려는 시도는 디지털 광팬과 몇몇 철학자가 특히 선호하는 상상, 숱한 논란을 불러온 상상에 불을 지폈다. 이른바 “통 안의 두뇌”는 자양분을 풀어놓은 수조 안에 둥둥 떠서 생존하는 두뇌를 그린다. 자연의 생물적 몸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 인공지능 기계와 다르게 인간은 생물로 살아가기 위해, 또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늘 외부 현실과 교류해야 한다. 반대로 컴퓨터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도 몇 년이고 잘 작동한다. 인간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 컴퓨터는 전혀 다르다. 컴퓨터는 다른 컴퓨터가 없어도 잘 작동한다.
--- p.36~37
과거에 다른 사람과 했던 경험은 인간의 내면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런 경험은 오래가는 후유증처럼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 그 상대가 이미 오래전에 주변에서 사라졌거나 심지어 사망했어도 영향력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사회관계는 뜨거운 공기처럼 훅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회관계는 인간이 생물로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이다.31 다른 사람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유전자를 달리 활성화한다. 물론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친절함은 스트레스 유전자를 진정시킨다. “인간은 많은 것이 없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더불어 사는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p.45
다른 사람과 교류를 나누고 싶다는 갈망이야말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매달리게 만드는 결정적 동기이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이 갈망을 충족시키기는커녕 정반대의 불행을 부른다. 의학과 심리학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연구를 통해 이런 부작용을 확인해왔다.
어째서 디지털 기술은 우리를 불행에 빠뜨릴까? 어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작동하는 스마트폰은 우리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무의식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마주 앉은 상대는 나에게 온통 주의를 집중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의 관심은 확실히 내 것이라고 믿는다. 그 관심은 잃을 리도 없고, 발이 달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들어오는 메시지 또는 통화의 수신음은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렵다. 놓쳐서는 안 되기에 나는 조바심부터 낸다.
--- p.75
데이비드 차머스는 우리가 시뮬레이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이것이 사실이라고 명확히 선포한다. “아마도 우리 자신이 시뮬레이션인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 일론 머스크 역시 같은 의미의 발언을 한 바 있다. (…) 인간이 시뮬레이션 현실에서 살면서 동시에 나름대로 시뮬레이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면, 창조에도 여러 단계의 위계질서가 성립해야 한다. 데이비드 차머스 역시 이런 위계질서의 성립을 부정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사는 시뮬레이션 세계는 상위의 시뮬레이션 세계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최고 레벨의 주민”뿐이다.
--- p.146~47
의학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도식적인 진단과 처방으로 외려 치료를 방해할 수 있다. 더욱이 환자와 의사 또는 간호사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가 인공지능 탓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치유 과정은 환자와 의사의 약해진 관계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지금 거론한 모든 분야에서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인공지능이 개인들을 특정 집단으로 분류하고 어떤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 이익을 줄지 불이익을 줄지 결정한다는 점이다. 특정 집단만 우대하고 다른 집단은 차별하면서 개별 사례를 고려하지 않는 인공지능은 사회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 p.178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불안한 나머지 외려 자신을 부풀린다. 나르시시즘의 핵심 문제는 바로 이 불안한 자존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애써 깎아내리고, 자연보호라는 중요한 의제를 외면하면서 종말의 분위기를 퍼뜨린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인간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믿으라고 나르시시즘은 윽박지른다. 그 뒤에 숨겨놓은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디지털 상품을 소비하고 디지털 기술에 사로잡히는 군중심리를 조장해야만 우리의 처지가 개선될 수 있다!
군중이 혹할 장관을 연출하기 위해 ‘디지털 교황들’은 디지털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부풀린다. 이보다 더한 나르시시즘이 또 있을까.
--- p.8
젊은 세대는 다양한 이유로 현실을 갈수록 힘겨워한다. 많은 젊은이가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고 인터넷 가상공간, 이른바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트리밍, 그마저 시들해지면 ‘메타버스’에 빠져든다. 이런 추세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불보듯 빤하다. 인간 냄새가 나는 현실세계를 지켜주고 그 생태를 구해줄 사람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해진다.
물론 기후 보호를 외치는 운동가가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기는 하지만, 이들은 젊은 세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혁명을 선도해 막대한 돈을 버는 첨단기술 기업의 최고경영진은 현실세계가 이미 구조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서 모든 힘을 동원해 현실세계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디지털·미디어 기업에 별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 p.15
현실의 삶을 하찮게 보라는 요구를 감수하고 피안을 우러르며 위로를 구하는 대신, 인간은 서로 연대하며 운명을 스스로 감당하려 노력하면서 현실세계의 곤궁함을 직시하고 더 나은 세상, 살 만한 가치를 가진 세계로 바꾸려 힘을 모아야 한다는 깨달음 역시 계몽이 베푼 선물이다.
물론 이런 혁명적 변화를 위해서는 달콤한 이야기가 주는 위안에 빠져 ‘어딘가 다른 곳’에 기대는, 시대를 막론한 인간의 성향을 떨쳐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각성을 위해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용기 있게 감언이설을 떨치고 이성을 회복해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 p.21
인간을 두뇌로만 보려는 시도는 디지털 광팬과 몇몇 철학자가 특히 선호하는 상상, 숱한 논란을 불러온 상상에 불을 지폈다. 이른바 “통 안의 두뇌”는 자양분을 풀어놓은 수조 안에 둥둥 떠서 생존하는 두뇌를 그린다. 자연의 생물적 몸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 인공지능 기계와 다르게 인간은 생물로 살아가기 위해, 또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늘 외부 현실과 교류해야 한다. 반대로 컴퓨터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도 몇 년이고 잘 작동한다. 인간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 컴퓨터는 전혀 다르다. 컴퓨터는 다른 컴퓨터가 없어도 잘 작동한다.
--- p.36~37
과거에 다른 사람과 했던 경험은 인간의 내면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런 경험은 오래가는 후유증처럼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 그 상대가 이미 오래전에 주변에서 사라졌거나 심지어 사망했어도 영향력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사회관계는 뜨거운 공기처럼 훅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회관계는 인간이 생물로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이다.31 다른 사람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유전자를 달리 활성화한다. 물론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친절함은 스트레스 유전자를 진정시킨다. “인간은 많은 것이 없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더불어 사는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p.45
다른 사람과 교류를 나누고 싶다는 갈망이야말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매달리게 만드는 결정적 동기이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이 갈망을 충족시키기는커녕 정반대의 불행을 부른다. 의학과 심리학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연구를 통해 이런 부작용을 확인해왔다.
어째서 디지털 기술은 우리를 불행에 빠뜨릴까? 어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작동하는 스마트폰은 우리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무의식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마주 앉은 상대는 나에게 온통 주의를 집중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의 관심은 확실히 내 것이라고 믿는다. 그 관심은 잃을 리도 없고, 발이 달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들어오는 메시지 또는 통화의 수신음은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렵다. 놓쳐서는 안 되기에 나는 조바심부터 낸다.
--- p.75
데이비드 차머스는 우리가 시뮬레이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이것이 사실이라고 명확히 선포한다. “아마도 우리 자신이 시뮬레이션인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 일론 머스크 역시 같은 의미의 발언을 한 바 있다. (…) 인간이 시뮬레이션 현실에서 살면서 동시에 나름대로 시뮬레이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면, 창조에도 여러 단계의 위계질서가 성립해야 한다. 데이비드 차머스 역시 이런 위계질서의 성립을 부정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사는 시뮬레이션 세계는 상위의 시뮬레이션 세계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최고 레벨의 주민”뿐이다.
--- p.146~47
의학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도식적인 진단과 처방으로 외려 치료를 방해할 수 있다. 더욱이 환자와 의사 또는 간호사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가 인공지능 탓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치유 과정은 환자와 의사의 약해진 관계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지금 거론한 모든 분야에서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인공지능이 개인들을 특정 집단으로 분류하고 어떤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 이익을 줄지 불이익을 줄지 결정한다는 점이다. 특정 집단만 우대하고 다른 집단은 차별하면서 개별 사례를 고려하지 않는 인공지능은 사회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 p.178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불안한 나머지 외려 자신을 부풀린다. 나르시시즘의 핵심 문제는 바로 이 불안한 자존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애써 깎아내리고, 자연보호라는 중요한 의제를 외면하면서 종말의 분위기를 퍼뜨린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인간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믿으라고 나르시시즘은 윽박지른다. 그 뒤에 숨겨놓은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디지털 상품을 소비하고 디지털 기술에 사로잡히는 군중심리를 조장해야만 우리의 처지가 개선될 수 있다!
군중이 혹할 장관을 연출하기 위해 ‘디지털 교황들’은 디지털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부풀린다. 이보다 더한 나르시시즘이 또 있을까.
--- p.191
출판사 리뷰
지독한 자기혐오와 상실감에 시달리는 ‘진짜’ 현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짜’ 현실 사이에서
성인이 되어 디지털 기기를 접한 이들도 ‘오프라인’ 세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를 마치 자연처럼 접한 세대는 디지털 세상 ‘바깥’이 더 낯설 수밖에 없다. 직접 만나 대화하고 눈빛을 교환하고 온몸으로 부대끼는 시간과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그에 따른 부작용인 현실감 상실, 우울증, 불안, 대인기피 같은 증상도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현실을 외면하며 가상세계에 몰두하게 하는 디지털 시대를 유럽 중세의 암흑시대와 비교한다. 중세의 기독교는 고통스러운 현실 자체를 뒤바꿔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대신, 천국이라는 피안의 세계를 제시했다. 당장은 힘들지만 내세의 삶은 다를 것이라고 믿게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신심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압박하며 피지배 계층이 순응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21세기 현재의 우리는 어떨까. 저자는 거대 글로벌 IT기업이나 데이비드 차머스 같은 트랜스휴머니즘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을 21세기의 디지털 ‘추기경’ 무리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들이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트리밍과 게임, 메타버스 등의 서비스를 판매하며 현실에서 발을 떼고 디지털 세계로 투항하라고 무분별하게 유혹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는 소셜미디어에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갈 수도, 온라인 게임 세계 속에서 유능한 나에 도취되어 살 수도 있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유혹 앞에 우리는 ‘알면서도 당한다’. 우리가 알림창에 쌓이는 ‘좋아요’에 도취될 때, 비윤리적으로 설계된 게임일지라도 그 쾌감에 열광할 때, 디지털 기업들은 개인정보와 돈(‘앱 내 구매’)을 남몰래 갈취해간다. 이 모든 것을 넋 놓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메타버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어떤 것도 안전을 보장받는 기밀이 아니다. 거기서 소통하는 모든 것, 이용자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기업이 들여다본다. 저커버그의 발상이 현실이 된다면, 언젠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메타버스, 당연히 그의 메타버스에 가입해야 한다. 왜? 모든 다른 사람이 그곳에 머무니까. 그때가 되면 인류는 그 어떤 것에도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 아마도 그런 권력의 전횡은 중세에 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리라. _본문 128쪽
인간다움을 수호하는 최후의 저지선이 무너지고 있다
: “인간관계가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디지털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담론의 극단에 트랜스휴머니즘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유한하고 병드는 존재라는 태생적인 약점을 지녔으며 ‘철 지난 모델’인 인간을 기술로써 보완, 개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 지지자들은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진 특성, 즉 노화나 질병, 죽음 등을 혐오하며 극복 대상으로 여긴다. 이러한 혐오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이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증폭되는 디지털 나르시시즘은 불안한 내면을 편집된 자아로 대체하며 무너지기 쉬운 현실의 불안한 자아를 외면하게 만든다.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못하다, 기술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디지털 세계에 안전하게 머무르며 편집된 자아를 즐겨라.”
인간을 중세의 미몽처럼 미성숙의 함정으로 빠뜨리는 이 강력한 외침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과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저자는 교육, 인간의 노동, 자연과의 관계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고, 이미 우리의 본성 속에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을 꾸릴 힘이 내재돼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타인과의 결속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인공지능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도록 친절함을 베풀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유망한 기회를 찾는 것이다. 디지털 중독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은 흔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다. 사랑, 전적으로 현실인 사랑, 전적으로 아날로그인 사랑이야말로 디지털 함정에서 구출해줄 묘약이다. _본문 205쪽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짜’ 현실 사이에서
성인이 되어 디지털 기기를 접한 이들도 ‘오프라인’ 세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를 마치 자연처럼 접한 세대는 디지털 세상 ‘바깥’이 더 낯설 수밖에 없다. 직접 만나 대화하고 눈빛을 교환하고 온몸으로 부대끼는 시간과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그에 따른 부작용인 현실감 상실, 우울증, 불안, 대인기피 같은 증상도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현실을 외면하며 가상세계에 몰두하게 하는 디지털 시대를 유럽 중세의 암흑시대와 비교한다. 중세의 기독교는 고통스러운 현실 자체를 뒤바꿔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대신, 천국이라는 피안의 세계를 제시했다. 당장은 힘들지만 내세의 삶은 다를 것이라고 믿게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신심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압박하며 피지배 계층이 순응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21세기 현재의 우리는 어떨까. 저자는 거대 글로벌 IT기업이나 데이비드 차머스 같은 트랜스휴머니즘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을 21세기의 디지털 ‘추기경’ 무리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들이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트리밍과 게임, 메타버스 등의 서비스를 판매하며 현실에서 발을 떼고 디지털 세계로 투항하라고 무분별하게 유혹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는 소셜미디어에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갈 수도, 온라인 게임 세계 속에서 유능한 나에 도취되어 살 수도 있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유혹 앞에 우리는 ‘알면서도 당한다’. 우리가 알림창에 쌓이는 ‘좋아요’에 도취될 때, 비윤리적으로 설계된 게임일지라도 그 쾌감에 열광할 때, 디지털 기업들은 개인정보와 돈(‘앱 내 구매’)을 남몰래 갈취해간다. 이 모든 것을 넋 놓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메타버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어떤 것도 안전을 보장받는 기밀이 아니다. 거기서 소통하는 모든 것, 이용자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기업이 들여다본다. 저커버그의 발상이 현실이 된다면, 언젠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메타버스, 당연히 그의 메타버스에 가입해야 한다. 왜? 모든 다른 사람이 그곳에 머무니까. 그때가 되면 인류는 그 어떤 것에도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 아마도 그런 권력의 전횡은 중세에 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리라. _본문 128쪽
인간다움을 수호하는 최후의 저지선이 무너지고 있다
: “인간관계가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디지털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담론의 극단에 트랜스휴머니즘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유한하고 병드는 존재라는 태생적인 약점을 지녔으며 ‘철 지난 모델’인 인간을 기술로써 보완, 개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 지지자들은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진 특성, 즉 노화나 질병, 죽음 등을 혐오하며 극복 대상으로 여긴다. 이러한 혐오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이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증폭되는 디지털 나르시시즘은 불안한 내면을 편집된 자아로 대체하며 무너지기 쉬운 현실의 불안한 자아를 외면하게 만든다.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못하다, 기술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디지털 세계에 안전하게 머무르며 편집된 자아를 즐겨라.”
인간을 중세의 미몽처럼 미성숙의 함정으로 빠뜨리는 이 강력한 외침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과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저자는 교육, 인간의 노동, 자연과의 관계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고, 이미 우리의 본성 속에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을 꾸릴 힘이 내재돼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타인과의 결속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인공지능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도록 친절함을 베풀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유망한 기회를 찾는 것이다. 디지털 중독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은 흔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다. 사랑, 전적으로 현실인 사랑, 전적으로 아날로그인 사랑이야말로 디지털 함정에서 구출해줄 묘약이다. _본문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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