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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현존 최고의 해군사학자가 집대성한
2차대전기 전 세계 해군과 해전의 모든 것
1939년에서 1945년까지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전 세계 모든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저작. 주요 교전을 둘러싼 전황과 여러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 규모와 상호 연관성을 유기적이면서 치밀하게 파고든다. 각국의 해군, 함정, 각종 무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부터 대규모 전투의 메커니즘과 거시적이고 글로벌한 조망까지, 가히 2차대전 해전사의 바이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해군과 해전이 어떻게 2차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보트 공격과 대서양 전투, 기적 같은 됭케르크 철수 작전, 노르웨이 피오르(협만)를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 전쟁 초기 이탈리아 해군의 위상과 몰락,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 해군의 압도적 전투력, 진주만 공습과 분수령이 된 미드웨이 해전,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 수많은 해전과 작전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또한 되니츠, 니미츠, 핼시, 야마모토 제독 등 해군 지도자들과 실제 작전 및 전투를 수행한 수많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살려낸다. 더불어 수록된 지도 20여 장과 사진 수십 장은 전황을 더욱 실감나게 전한다.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목차
들어가며
프롤로그: 1930년 런던
1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1장 잠수함
2장 포켓 전함
3장 노르웨이 전역
4장 프랑스 함락
5장 이탈리아 해군
6장 무역 전쟁 1
7장 비스마르크함
2부 전장 확대
8장 떠오르는 태양
9장 양면 전쟁에 처한 미국 해군
10장 진주만 공격
11장 폭주하는 일본군
12장 무역 전쟁 2
3부 분수령
13장 뒤집힌 판세
14장 두 섬에서의 격전
15장 양 대양 전쟁
16장 전환점
17장 무역 전쟁 3
4부 연합군의 반격
18장 항공기와 호송대
19장 시칠리아 상륙 작전
20장 두 해군의 몰락
21장 방어선 돌파
22장 ‘크고 느린 표적’
5부 종반전
23장 노르망디 상륙 작전
24장 임박한 결전
25장 레이테만
26장 조여드는 올가미
27장 대단원
에필로그: 1945년 도쿄만
맺으며
저자 소개
저 : 크레이그 L. 시먼즈 (Craig L. Symonds)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해군사와 미국 남북전쟁사를 연구하고 가르친 명예교수.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해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뒤 1976년 해군사관학교에 부임했다. 3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올해의 교수’(1988)와 ‘올해의 연구자’(1998) 모두에 선정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시민 봉사 공로 훈장을 네 차례 받았다. 평생의 공로를 인정받아 더들리녹스 메달(2014)과 프리츠커 ...
역 :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미국 현대사와 냉전 연구, 군사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아메리카학회, 한국군사사학회, 한국전쟁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주로 한국전쟁, 냉전시기 군사사, 한국군 역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전쟁의 역사》(공저), 〈한국전쟁 중 한국 육군의 재편성과 증강, 1951~53〉, 〈백마고지 전투의 ...
책 속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바다에서 전개된 전쟁의 역사는 상충하는 국익, 신기술, 수많은 인물이 서로 끊임없이 얽히고설킨 방대한 이야기다. 이를 일관된 시각에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오해를 부를 수 있다.
대서양에서의 전쟁, 태평양에서의 다른 전쟁, 지중해에서의 전쟁, 그리고 인도양이나 북해에서의 또다른 전쟁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쟁을 이러한 지리적 구분에 따라 기록하면 단순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이는 실제로 전쟁이 전개된 방식이나 전략 결정자들이 전황을 관리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대서양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운송 손실은 태평양의 과달카날로 향하는 수송에 영향을 미쳤고, 지중해의 몰타섬으로 향하는 호송대를 운용한 것은 대서양으로 향하는 호송대 수가 감소함을 의미했으며, 전함 비스마르크함을 추격하기 위해 영국과 아이슬란드, 지브롤터에서 전투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따라서 이 책의 서술 방식은 기본적으로 연대기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일어난 일을 매일 모조리 추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일뿐더러 유용하지도 않으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각 장에서 다루는 시간은 서로 겹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나는 되도록이면 역사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게 하려고 했다. 이 책에서 내가 세운 목표는 2차대전 해전사를 당시 사람들이 경험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 지도자, 전략 결정자, 함대 지휘관, 함정 승무원, 기관 정비사, 함포수, 조종사, 상선 선원, 해병 등이 참여한 하나의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이며, 세계사에 불균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전 지구적 인간 드라마다.
---「들어가며」중에서
1930년 런던 조약이 체결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1924년에는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선거에서 승리한 덕분에 나치 정당의 총리로 추대되었다. 그뒤 히틀러가 일련의 비상조치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자 바이마르 정부는 사실상 소멸했다. 2년 후인 1935년 3월, 히틀러는 공개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철폐했는데, 여기에는 독일 해군의 규모 제한 조항도 포함되었다. 히틀러의 일방적 발표에 어떤 반대도 제기되지 않았고, 히틀러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무능함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던 신념을 재차 확인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철폐도 중요했지만, 독일 해군의 부활에서 결정적 순간은 3개월 뒤에 성사된 영국-독일 해군 협정의 체결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많은 영국인이 독일과의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영국 외교관들은 히틀러 정권을 스탈린주의가 장악한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유용한 완충재로 간주하며 영국과 독일의 친선 관계를 환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영국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상의하지 않은 채,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부과했던 해군 관련 제한을 대부분 해제하는 데1 935년 6월 18일에 동의했다.
이 새 협정에 따라 독일이 건조할 수 있는 함정의 규모는 영국 해군 전투력의 35퍼센트에 해당했다. 이 비율은 독일이 여전히 영국에 열세임을 보여주는 수치이지만, 장차 독일 해군이 더 크게 성장할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린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심지어 독일은 이 협정을 근거로 1918년 이후 처음으로 잠수함까지 건조했다. 협정의 제한에 따라 독일은 영국군 잠수함 전력의 45퍼센트까지 보유할 수 있었는데, 국가적 위기가 발생할 경우에는 영국과 동등한 수준의 잠수함 전력을 건조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규모 확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기가 무엇인지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한편 독일 해군의 명칭은 새로 명명되었다. 1차대전까지는 제국해군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때는 국가해군(Reichsmarine)이었는데, 히틀러 통치기에 접어들어 전쟁해군(Kriegsmarine)으로 변경되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부활시킨 독일육군(Wehrmacht)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같은 날, 독일 군함이 그단스크(단치히)의 폴란드 수비대에 포격을 가하면서 바다에서의 전쟁도 시작되었다. 이틀 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폴란드에서 독일군을 철수하라고 요구한 영국과 프랑스의 최후통첩에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므로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태라고 히틀러에게 통보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체임벌린의 구슬픈 어조는 전쟁 재개를 두려워하는 영국 정부의 각료들과 국민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했다.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 총리의 노력은 인상적이었으나, 히틀러가 지닌 야망의 크기와 이념의 왜곡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지 겨우 20년이 지나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1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도입글」중에서
동쪽을 바라본 사람이 히틀러만은 아니었다. 지구의 절반쯤 떨어진 섬 제국에서 일본인들은 드넓은 태평양 건너 미국을 불안하고 계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서양 정책, 특히 미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는 경제와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제 문제의 핵심은 석유를 위시해 철, 구리, 주석, 아연, 고무 등 현대 산업 경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원자재의 대부분이 일본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들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구입해 들여올 수 있었지만, 많은 일본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미국에 의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이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이들 품목의 지속적 판매에 조건을 부과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일본의 외교 및 군사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과 유사했다. 1930년대까지 많은 일본인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를 구매할 수 있는 특권의 대가로 미국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원자재를 다른 곳에서 찾음으로써 일본만의 경제적 독립을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의 국가 정책에 포함된 문화적 구성 요소에는 훨씬 미묘한 요소가 반영되었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19세기 말에 반(半)봉건 체제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빠르게 전환한 것은 흥분되지만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그 변화의 일환으로 메이지 천황(1867~1912)은 일본의 근대적 해군의 발전을 위해 영국인을 초대해 지도를 받게 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일본의 군함, 무기, 제복, 계급 구조, 감시 의정서, 일본 제국 해군의 많은 요소를 영국 해군에서 수용했다. 심지어 에타지마 해군 사관 학교를 짓는 데 사용한 벽돌까지 영국에서 수입했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누르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승리를 결정적으로 이룩한 경험, 중국(1894~1895)과 러시아(1904~1905)를 상대로 연이어 거둔 승리를 통해 일본을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협력은 일본 국민의 이 같은 생각을 더욱더 확고하게 각인시켰다. 실제로 1930년까지 일본은 세계 3대 해군 강대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22년에 워싱턴에서, 1930년에 런던에서 체결된 해군 조약에서 일본은 명확하게 자신들이 서양 세력의 종속적 위치라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극도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젊은 장교들은 이런 사실을 수용하기 힘들어했고, 그들 중 다수는 워싱턴 조약에서 부과한 조건을 직접적인 고통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자칭 애국자들은 1930년의 런던 조약에서 일본의 열등한 지위를 재차 확인하자 폭력적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한편 해군 장교들은 상반된 두 분파로 분리되었다. 런던 조약을 합리적 타협으로 받아들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초강대국과 협력하고자 했던 이들은 ‘조약파’에 속했고, 조약 조건이 굴욕적이고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한 이들은 ‘함대파’에 속했다. 그뒤로 10년 동안 이 두 파벌 사이의 적대감은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위기를 염려할 정도로 가열되었다.
---「2부 〈전장 확대〉 도입글」중에서
연합국에게 1942년 상반기는 참담한 시기였다. 일본군은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5개월 동안 단 한 차례도 공격받지 않고 계속 전세를 확장했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동부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영국 해군의 주력함을 무력화했고, 몰타로 연결되는 보급선을 한계점까지 압박했다. 대서양, 특히 미국 동부 해안과 카리브해에서 연합군 선박의 손실은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졌다. 그리고 바렌츠해에서 호송선단 PQ-17이 파괴되면서 소련으로 향하는 노르카프곶 호송대 운용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모스크바 외곽에서 치러진 성공적인 반격에도 소련군은 여전히 약 200개에 달하는 추축국 사단과 대치해야 했다.
서방 언론들은 전체적인 전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조명했지만, 연합군의 전망이 너무 어두워서 영국과 미국 지도자들은 국내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반격할 방법을 시급히 모색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4월에 미국은, 일본에는 매우 위험하지만 전략적 효과가 의심스러웠던 일본 본토 폭격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고, 8월에 처칠은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해안 항구 도시 디에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사이 미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두 차례의 중요한 방어 작전에 나섰는데, 이 전투에서는 해상 전투의 핵심 장비 및 무기로 부각된 항공모함에 탑재된 항공기의 출현과 역할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942년 말까지, 영미 연합군은 태평양의 과달카날섬과 대서양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전쟁의 첫 번째 전략적 반격을 시작할 수 있는 전투력을 준비하기 위해 분발했다.
이런 사건들이 당시 추축국에는 치명적이거나 심각한 타격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일종의 분수령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후의 평가에 따른 것이다. 당시에 이런 사건들이 중요했던 이유는, 연합국이 개전 초기인 1940~1941년의 심각한 충격을 극복하고 이제 점차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양측 모두에게 명확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42년 말,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전황은 점차 회복되었는데, 향후 미국에서 거의 무제한의 물적 자원이 제공될 것이므로 결국은 연합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밝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완전히 암울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영국의 강한 정신력과 투지, 러시아의 풍부한 인력, 미국의 산업 생산성이 결합되어 언젠가 추축국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최종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파괴와 실망, 불붙었다 꺼지는 희망, 인명 손실과 비참함 등 전쟁은 앞으로 3년 이상 지속되어야 했다. 처칠이 1942년 11월의 연설에서 했던 말과 같았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도 시작의 끝일 것입니다.”
---「3부 〈분수령〉 도입글」중에서
1943년 초부터 연합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2월에 과달카날에서 마지막 일본군 부대가 철수했고, 같은 달에 독일 제6군의 굶주린 잔여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했다. 5월에는 이탈리아와 독일 병사 25만여 명이 튀니지에서 항복하자 북아프리카 전역도 끝났다. 당시에도 앤드루 커닝햄 제독은 “역사학자들은 1943년 4월과 5월을 진자가 흔들리는 시기로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체적으로 이 사건들은 전쟁의 성격을 바꾸었고, 연합국에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논쟁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부터 연합국의 주요 동맹 세 나라는 독일이 ‘최우선 적국’이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특히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이후 생존이 위태로워진 러시아인들에게 이런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독일과의 투쟁에 모든 노력과 에너지를 집중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독일 우선 전략을 계속 지지하면서도 여러 전선에서 세계적 규모의 전쟁에 직면한 영국과 미국으로서는 훨씬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서방 연합국은 여전히 훈련된 병력, 무기, 특히 유럽에서 독일군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해상 수송 능력이 부족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것이다. 횃불 작전 이후 지중해는 과달카날과 마찬가지로 물류의 블랙홀이 되어 병력과 자원을 탐욕스럽게 흡수했고, 결국 1943년에 이르자 유럽 대륙을 공격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했다. 한편 미국은 남태평양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계속 진격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이제 방어적 성격이 아니었다.
동시에 유럽에서의 전쟁은 폭력의 새로운 정점 혹은 밑바닥에 도달했다. 그해 7월, 독일군은 80만여 명의 병력과 3000여 대의 전차를 투입해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애썼다(시타델 작전). 소련군은 8월에 200만여 명의 병력과 8000여 대의 전차로 반격했다. 영어권 연합국은 대규모 공습인 ‘고모라 작전’으로 함부르크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다. 7월 24일에서 31일까지 일주일 동안 영국과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가 9000톤의 폭탄을 투하해 4만 2000여 명이 사망했고, 비스마르크가 건설한 블롬과 포스의 조선소를 위시해 도시의 많은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이 수행되는 동안 수십만 명이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해상에서는 영국과 미국 군대가 지중해와 남태평양 양쪽에서 공세를 취했다. ‘허스키 작전’을 통해 튀니지에서 지중해를 건너 시칠리아에 상륙했으며, ‘카트휠 작전’으로 솔로몬 제도의 섬들을 오르내렸는데, 이 작전 지역들의 지형을 고려해가면서 연합국은 상륙 공격을 여러 차례 실시했다. 이 모든 노력과 과정에서 공통의 관심사이자 병참의 구심점이 된 사항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수륙 양용 선박에 대한 수요였다.
---「4부 〈연합군의 반격〉 도입글」중에서
1941년 베를린의 아돌프 히틀러와 도쿄의 일본 군부가 내린 각자의 독자적 결정에 따라 독일과 일본의 군대는 소련과 미국의 군대에 대항해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1944년부터 이들의 어리석은 결정의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유럽에서는 300만여 명의 강력한 병력을 보유한 소련의 붉은군대가 독일군을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고, 태평양에서는 미국 제5함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 내부 방어망을 돌파할 태세를 취했다.
소련군은 2년 넘게 유럽에서 지상전을 수행하는 부담을 감당했고, 이 기간에 영어권 국가 연합군은 바다에서 독일군 잠수함 부대를 저지했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지중해를 장악했다. 스탈린이 처음에 의심했던 대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지상군을 저지하는 데 필요한 진정한 제2전선 형성을 등한시하는 사이, 소련군의 전세는 점차 확대되었다.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 연합군이 처음에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다음에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그리고 마침내 미국이 하나가 아닌 두 방향에서 태평양을 공격하는 것을 간신히 경멸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관망하고 있었다. 독일을 먼저 격파한다는 것이 연합군의 공식 방침이었는데도 미국은 북아프리카에 앞서 과달카날을 공격했고, 허스키 작전에 앞서 카트휠 작전에 착수했다. 심지어 1944년 여름에 영국과 미국이 마침내 노르망디에서 히틀러가 자랑하는 대서양 방벽을 뚫을 준비를 하는 시점에서조차 미국군은 태평양에서 새로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는 연합군의 물질적 우위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향상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였다. 노르망디 해안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에 미국은 태평양에서 새로운 작전 수행을 검토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미국의 거대한 산업 생산 능력은 천천히 작동하기 시작해서, 1년이 넘도록 수송력 부족은 주요 작전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점차 상황이 호전되면서 미국의 많은 공장과 조선소가 완전히 가동되어 거기서 생산된 무기들이 각각의 작전 전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한편 연합군이 양적 측면에서만 우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1941년에는 독일의 전차와 항공기가 질적으로 연합군의 무기에 비해 우위였고, 일본의 전투기와 어뢰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1944년에 이르면 이러한 평가는 달라진다.
아직 1년 이상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정황을 감안할 때 전쟁의 최종 결과는 의심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같은 현실은 독일과 일본을 절망에 빠뜨렸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끔찍한 결론으로 연결되는 ‘최종 해결책’을 채택했고, 일본은 태평양에서 수많은 ‘자살 전술’을 채택했다. 한편 뉴멕시코주 산타페 산지의 로스앨러모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과학자들이 비밀 실험실에서 상상을 초월한 파괴력을 갖춘 무기를 개발했다. 독일과 일본은 잔풍을 내뿜으며 휘몰아치는 회오리를 피하고자 했다.
---「5부 〈종반전〉 도입글」중에서
출판사 리뷰
현존 최고의 해군사학자가 집대성한
2차대전기 전 세계 해군과 해전의 모든 것
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폭력이 사용된 크나큰 재앙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시 세계 인구의 3퍼센트인 약 6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러 나라 학자들과 회고록 저자들의 노력으로 이 전쟁을 기록한 책은 수십만 권에 이른다. 그중 많은 책에서 해전사를 다루었지만, 모든 국가의 해군이 담당한 포괄적인 궤도와 전쟁 결과에 미친 영향을 평가한 책은 없었다. 그런 광범하고 포괄적인 시각으로 보아야만, 해양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전쟁의 향방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 책 《2차대전 해전사》는 최고의 해군사학자로 평가받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크레이그 시먼즈가 1939년에서 1945년까지의 시기에 전 세계 모든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을 집대성한 보기 드문 저작이다. 주요 교전을 둘러싼 전황과 여러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 규모와 상호 연관성을 유기적이면서 치밀하게 파고든다. 각국의 해군과 함정, 각종 무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부터 대규모 전투의 메커니즘과 거시적이고 글로벌한 조망까지, 가히 2차대전 해전사의 바이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해군과 해전이 어떻게 2차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크레이그 시먼즈의 필생의 역작
이 책의 지은이 크레이그 시먼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해군사와 미국 남북전쟁사를 연구하고 가르친 명예교수다. 재직한 30여 년 동안 그의 수업은 언제나 학생들로 가득 찼고, 시먼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사상 ‘올해의 교수’(1988)와 ‘올해의 연구자’(1998) 모두에 선정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시민 봉사 공로 훈장을 네 차례나 받고 평생의 공로를 인정받아 더들리녹스 메달(2014)과 프리츠커 군사저술상(2023)을 받았다.
시먼즈는 10여 권의 전쟁사·해전사 책을 집필하고 다수의 책을 총괄 편집하거나 공저자로 참여하여 링컨상, 대니엘·매릴린 레이니상, S.A.커닝햄상, 시어도어·프랭클린 루스벨트상, 존라이먼 도서상 등 많은 저술상을 수상했다. 그중 《미드웨이 해전》, 《니미츠 제독 평전》, 《넵튠 작전》 등 2차대전 시기의 특정 해전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저서도 다수 펴냈는데, 이러한 평생의 연구 성과를 망라하여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2차대전 해전사》다.
전 세계 해전을 포괄적·유기적으로 조감한 통찰력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장점은 글로벌한 거시적 시각으로 2차대전 시기에 전 세계 해양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투를 유기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대서양에서의 전쟁, 태평양에서의 다른 전쟁, 지중해에서의 전쟁, 그리고 인도양이나 북해에서의 또다른 전쟁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쟁을 이러한 지리적 구분에 따라 기록하면 단순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이는 실제로 전쟁이 전개된 방식이나 전략 결정자들이 전황을 관리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대서양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운송 손실은 태평양의 과달카날로 향하는 수송에 영향을 미쳤고, 지중해의 몰타섬으로 향하는 호송대를 운용한 것은 대서양으로 향하는 호송대 수가 감소함을 의미했으며, 전함 비스마르크함을 추격하기 위해 영국과 아이슬란드, 지브롤터에서 전투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물론 각 부나 장마다 특정 전장이나 어느 국가의 해군이 중심이 되곤 하지만, 시종일관 다른 전역에서의 상황과 연계하면서 사건을 전개해나가서 넓은 시야로 전황을 조감할 수 있다. 더불어 각국의 해군력과 특성, 그리고 전역마다의 지정학적 특수성이 전투와 전쟁의 승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촘촘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대서양 및 태평양 전역은 육지나 섬처럼 표식으로 삼을 만한 것 없이 너무나 드넓게 펼쳐진 대양이라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서도 추적에 실패하거나 아예 적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지척에서 서로 지나쳐 나아가곤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당시 레이더와 같은 장치는 막 개발되었고 초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반면 지중해 전역은 빠져나가기 어려운 갇힌 바다인 데다 어느 지점이든 육지와 가까워서 항공기의 지원을 받기 쉬웠다. 이러한 점은 세계 5위의 전력을 갖추고 있던 이탈리아 해군이 전쟁 초반에 순식간에 몰락하고, 일본 해군이 첫 태평양 전투인 진주만 공습에서 대승을 거둔 데에 부분적이지만 중요한 원인이었다.
“나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게 하려고 했다”
《2차대전 해전사》의 또 하나의 큰 미덕은 실제로 전투를 치른 수많은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생생하게 살려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내가 세운 목표는 2차대전 해전사를 당시 사람들이 경험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며 “되도록이면 역사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게 하려고 했다”고 서두에서 밝히는데, 이 같은 노력은 실제로 글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그래서 독자는 극적인 장면마다 등장인물에 이입되어 실제 전장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많은 군사 전문가와 지휘관이 어떤 마음과 구상으로 장기적이거나 규모가 큰 전략을 수립하는지, 혹은 급작스런 상황 전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명징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아군 내에서 각자의 위치와 이해관계에 따른 알력과 그것이 전투에 미친 영향 등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더불어 전황을 일목요연하게 시각화한 지도 20여 장, 그리고 주요 인물과 함정 및 전역 등을 담은 사진 수십 장은 당시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전한다.
제해권의 중요성과 해전사의 매력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바다에서 우위를 점하고 나아가 장악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2차대전’ 하면 우리는 으레 유럽 대륙에서 나치 독일의 공격과 점령, 러시아 침공과 소련의 반격,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항공 폭격 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2차대전은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역설했듯이 영국을 위시한 구 세계 제국에 도전한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 전쟁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쟁은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났다. 이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이 되어갈수록 중요했던 것은 지속적인 병참과 바다에서 육지로의 상륙이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바닷길을 이용한 호송이었다. 그것이 곧 대서양 전투의 태반이 상선을 공격하는 소위 ‘무역 전쟁’이었던 이유이며, 일본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태평양에서 미국군을 공습한 까닭이었다(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이후 즉시 남아시아 섬들을 점령해 생산 자원을 확보했다. 11장 참고).
또한 육지에서의 전쟁사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해전의 양상이 사뭇 생소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위치 파악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웃지 못할 해프닝, 바다라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전장에서 거의 운에 가까운 타격의 영향력, 전쟁 초기에 상대 선박 발견 시 탑승자를 모두 피신하게 하고 심지어 자신의 함정에 태운 뒤에 침몰시킨 ‘신사적’ 공격 행위 등, 싸움의 전개와 양상에서 그라운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591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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