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인물사 연구 (독서>책소개)/2.한국인물평전

정문부 평전 (2024) - 우리가 잃어버린 구국의 영웅 충의공

동방박사님 2024. 12. 29.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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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바다에 충무공이 있었다면, 땅에는 충의공이 있었다!

찬란하고 위대했던 역사는 존재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반드시 현재로 꺼내줘야 빛을 발한다. 

정한기 저자가 쓴 『정문부 평전』은 어둠 속에 사라져 가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라는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현재로 꺼내어 빛을 보게 한 작품이다.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훈련되지 않은 관북 의병군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 용맹함과 신출귀몰한 지략으로 왜군을 6전 6승으로 크게 무찔렀다.

 “북충의 남충무”로 불렸을 만큼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전쟁 영웅이었다. 

하지만 남북분단의 현실, 북관대첩비의 반출 등 여러 좋지 못한 상황에 엮여 현재에는 상당히 잊힌 상태였기에, 누군가가 장군의 전체 인생과 위업을 정리해주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작업의 결과물이 이 책 『정문부 평전』이다.

풍부한 사진과 지도를 정리한 저자의 상세한 저술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왜 우리가 정문부 장군을 기억해야 하는지 역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추천의 말
축사
들어가는 글 |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 장군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1장 정문부 장군과 임진왜란

엄친아로 태어난 조선의 천재
학문과 관직의 길
임진왜란 발발

2장 함경도를 지킨 의병장

전란에 시달린 북관민을 수호하다
해정창(海汀倉) 전투와 함경도 함락
함경도의 반란
의병장으로의 추대

3장 북관대첩 (1592년 9월~1593년 2월)

북에는 정문부, 남에는 곽재우
연전연승을 이어가다

4장 관북 평정 후 목민관으로 돌아가다

부사와 목사 시절
이어진 벼슬길과 시묘살이
광해군 시대의 장군

5장 억울한 죽음과 해원

인조(仁祖) 시대의 정문부 장군
후대에 이르러 장군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다

6장 북관대첩비

비석의 건립과 일본으로의 반출
북관대첩비 환수

7장 남으로 간 후손들

진주와의 인연
진주성 전투를 노래하다
장군의 가슴 아픈 사연이 서린 진주
면면히 이어지는 장군의 뜻

나오는 글 | 장군의 생애에 대한 평전을 마치면서

부록 1
조선국 함경도 임명 대첩비명
함경도 창의토왜(倡義討倭) 격문
정문부 신도비명 및 서문
부록 2
녹둔도(鹿屯島)
호류지(法隆寺)의 백제 관음불상

저자 소개 
저 : 정한기 
진주고등학교, 서강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 

서울신탁은행, 동화은행 등 은행업계에서 일했으나 1997년 IMF사태로 인해 은행이 통폐합되면서 증권업계로 이직했다. 

제일투신, 신흥증권, SK증권, NH증권 상무를 거쳐 유진자산운용 대표이사를 지냈다.

 은퇴 후 우리은행 사외이사와 (사)전국퇴직금융인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정앤유파트너스, 정앤유아카...

책 속으로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1592~1598)이라는 국난 속에서 함경도 길주를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훈련되지 않은 관북 의병군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 용맹함과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지략으로 왜군을 6전 6승으로 크게 무찌르며,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전쟁 영웅입니다. 

그분은 함경도 지역 토호 세력 반란군도 제압했고, 

북방 오랑캐(여진족)도 몰아내어 3란(왜란·호란·내란)을 평정하고, 

함경도 육진의 국토를 우리 영토로 회복(回復)시킨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킨 북방의 거목이었습니다.

역사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설계하는 중요한 작업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연대순으로 잘 정리된 북방의 영웅 정문부 장군 일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이 역사적인 책에서 장군이 보여주신 용기와 충의정신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함께 큰 교훈을 전해줍니다. 

그분의 용맹은 우리에게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힘을 주고, 그분의 충절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정신을 일깨워줍니다.
---「축사」중에서

영화 〈명량〉이나 〈한산〉 등 이순신 장군에 관련된 영화나 서적이 많이 나오는 대중문화에서 이순신 장군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것이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7년간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이었다. 조명을 받을 분이 이순신 장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문부 장군, 김시민 장군도 시선을 넓혀 새롭게 조명받길 기대해본다.

‘역사적 위인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다’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남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아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선조들이 남긴 다양한 기록을 참고하고 틈틈이 답사한 내용을 정리하였기에 전문 역사 서적이 아닌, 요즘의 세대들이 좀 더 다가가기 쉽게 한자 사용도 최대한 줄이고 정리한 책으로 받아들여 주면 감사하겠다.

정문부 장군의 서거 400주년을 맞아 이 책이 나오게 되어 더욱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4월 14일에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불과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강을 건너 선조의 어가를 추격하였다. 

5월 27일 개성에 이른 이들은 어가가 함경도 쪽으로 향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진로를 나누어 맡기로 결정한다. 

1592년 6월 10일 황해도 안성역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로 향하고, 

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향한다.

평양성마저 함락당하고, 선조는 6월 20일경 의주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명으로 가려고 마음먹었으나 류성룡 등 중신들의 반대로 명으로 가지는 못했다. 

그즈음 명에서도 지원군을 보내고 전국 각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들불처럼 의병들이 일어나 줄곧 당하기만 하던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의령에서 곽재우가 1592년 4월 처음으로 의병을 조직하였고 경상·전라·충청·경기·황해도에서도 이름 없는 민초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민심이 가장 흉흉했던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장군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돼 지역을 사수하고 의병을 조직하자마자 임해·순화 두 왕자를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반역을 꾀한 국세필·국경인 무리를 먼저 처단하였다.
---「1장 정문부 장군과 임진왜란」중에서

장군은 맹주를 처음에는 정현룡에게 양보하였으나 정현룡은 굳이 사양하였고 합류했던 모든 이들도 장군을 따르기를 원하였다. 

이리하여 장군은 정현룡을 부장, 이붕수를 별장, 강문우를 척후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100여 명의 조직으로 시작하여 의병 군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장군의 나이는 27세였다. 장군의 문집인 『농포집』에 실린 장계(狀啓)14에는 이희당 등 창의를 같이했던 60여 명의 동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9월이 되면서 명나라 원군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경도의 민심도 바로 잡히기 시작했다. 

더욱이 의주 행재소에서 보내온 방문(榜文)은 의병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내용은 전국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일본군을 토벌하고, 명군 10만이 며칠 안에 평양에 도착할 것이며 그 절반은 이미 설한령(雪罕嶺)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사람은 물론이고 반민(叛民) 중에서도 의병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진용을 갖춘 의병 군은 비록 숫자는 적지만 피로써 서로 맹세하고 인근 지역에도 의군이 되어 왜적을 치자고 격문도 보내는 등 사기충천하였다.
---「2장 함경도를 지킨 의병장」중에서

북관대첩의 승리 요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기존 서열을 무시하고 직급으로는 정문부 장군이 아래였으나 오로지 능력 위주로 군을 재편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함경도 의병들을 결사대로 구성하여 기습전과 게릴라 작전을 펼친 것이다.

셋째, 천시(天時)와 지리(地理)가 일본군보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함경도의 혹독한 겨울 날씨와 험준한 지형으로 후방에서 병참을 단절시켜 연락병과 첨병들을 철저히 차단한 것이었다.

때마침 들려온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수복소식과 남해안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보급선이 끊기면서 전황이 일본군에게 수세로 돌아서면서 기습전에서 계속 패하여 결국 군사 절반도 데려가지 못한 채 패주하게 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일본의 치욕이라 하였고 일본군은 이후 함경도 의병이라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일개 성을 지켜 낸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도 전체를 적과의 전투로부터 승리하여 수복에 성공한 큰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승리는 의주에 피신해 있는 선조를 보호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전투는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2번대 전체 병력 2만 7,800명 중 약 40%인 8,700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파악된다.
---「3장 북관대첩」중에서

박내장 등이 광해군을 다시 옹립하려는 역모를 논의하면서 “정모(鄭某-정문부 장군을 지칭)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므로 대장으로 적당한데 의원 이대검(李大儉)이 종기 치료차 그 집에 왕래한다 하니 그를 시켜 거사를 말하게 하자”고 자기들끼리 논의하였다.

후에 이 모의가 발각되어 이러한 말이 역적들의 입에서 나왔고 장군은 체포되어 이대검과 대질케 되었다. 

이대검이 말하기를 “이 말을 박내장으로부터 들었으나 한낱 종기나 고치고 침이나 놓는 의원이 어찌 친분도 없는 대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로써 장군의 억울함이 판명되어 석방을 논의하고 있을 때 대간(臺諫)들이 장군의 영사시(詠史詩)한 구절을 문제 삼아 국문을 다시 열었다. 

이때 장군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결국에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충신이 고문사를 당한 것이다.
---「5장 억울한 죽음과 해원」중에서

1667년(현종 8년) 5월에 장군에게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5위 도총부 도총관’을 추증하고 임란 때 의병으로 정문부를 도와 왜적을 물리친 

오응태에게는 병조판서, 이유일과 한인제에게는 병조참의, 

강문우에게는 군기시정, 최배천에게는 사복시 첨정, 

원충서에게는 군기사 부장, 이붕수에게는 지평,

지달원에게는 병조정랑, 허진과 김국신에게는 의금부 조사를 각각 추증하였다. 

장군을 비롯한 함경도의 영웅들은, 비록 늦었지만 어느 정도 명예 회복을 하게 된 것이다.

최창대가 북평사가 되어 장군과 여러 의병을 찬양하는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장군의 집 앞에 신도비를 세우고 장군의 사후 90년 만인 1713년 (숙종 39년)에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위대한 공적을 기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의의 뜻을 풀자면, “환란(患亂)을 맞아 나라를 잊지 않음을 ‘충(忠)’이라 하고, 과감하게 적을 무찌른 것을 ‘의(毅)’라 한다”는 것이다.
---「5장 억울한 죽음과 해원」중에서

2006년 2월에는 비석의 북한 인도에 관한 남북 협의를 거쳐 2월 28일 의정부 용현동에 있는 장군의 묘소 앞 충덕사 앞마당에서 ‘북관대첩비 충의공 제향 의식’이 있었다. 

해주 정씨 문중과 일부에서 통일될 때까지 북한 인도를 미뤄달라는 간절한 진정도 있었지만 결국 외교적 문제 등으로 북한으로 인도되었다. 

식은 충덕사 제례에 따라 문중 후손들에 의해 참신례·강신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사신례 순으로 진행됐으며 식전행사로 취타대 공연이, 식후행사로 태평무 공연과 묘소 참배가 이루어졌다. 

제향 의식이 끝난 후 2006년 3월 1일 삼일절 아침 7시에 서울에서 육로를 통해 북한 개성에 도착한 뒤 개성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서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을 치른 후 북측에 인도됐다. (중략)

유흥준 청장도 환송사에서 “모든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며 북관대첩비가 임란 중에 있었던 전승비 중의 하나지만 분단의 시기에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금의 우리에게 알려주었다는 의미에서 현대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말하였다. 

또한 “북관대첩비 반환은 이 시대의 문화 의병 운동”이며 “남북 간 문화재 교류·협력 확대를 위해 문화재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을 북측에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비석의 원본은 원래 있던 자리인 길주(현 김책시)에 안치되었다.
---「6장 북관대첩비」중에서

가호서원에는 정문부 장군과 함께 독립유공자 정규섭 선생의 위패도 모셔져 있는데, 

정규섭 선생은 1928년생으로 진주중학교 재학 중 독서 동아리 광명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하기를 결의하여, 

1944년 진주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진해비행장 건설 공사에 강제 노역하면서 독립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다 동지들과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2010년도에 대통령 표창을 서훈 받았다. 정규섭 선생은 농포 정문부 장군의 13대 장손이다.

정규섭 선생의 아들 정기민 씨는 1970년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를 모아 가호서원을 설립하고 진주시민을 위한 가을 달빛 음악회, 논어학교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진주에 터를 잡은 장군의 후손들은 조선 시대에는 많은 문과급제자를 내고 

오늘날에도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정문부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계승하는 명문거족으로 자리 잡고 있다.
---「7장 남으로 간 후손들」중에서

정문부 장군은 북한에서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유명하지만,

 남한에서는 교과서에 몇 줄 정도의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충의 남충무(北忠毅 南忠武)’라고 할 정도로 정문부 장군의 공을 크게 기리고 치하했다. 

임진왜란에서 해상전과 육지전에서 전란을 제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전투로 ‘관군에서는 이순신, 민간군에서는 정문부’를 손꼽고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1등 선무공신을 뽑는다면 당연히 맨 먼저 이순신 장군이지만 

두번째로는 정문부 장군이고 세 번째로는 권율·김시민 장군 중 한 분이 아닐까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정문부 장군과 의병들이 혁혁한 전공을 세운 5개월간의 전투(1592년 9 ~1593년 2월)에서 연전연승으로 북관 지역을 수복한 이야기와 북관대첩비의 비화는 만화나 이야기책으로도 나오고 억울하게 박홍구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된 일이나 

초회왕〉 시로 인해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드라마나 영화의 좋은 소재로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장군의 위대한 일생이 오늘날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 

또한 장군의 곧은 기상과 충직한 마음이 후손들에게 큰 역사적 교훈이 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한다.

출판사 리뷰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잊힌 북방의 영웅,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충의공 정문부를 기억하라!

‘북충의 남충무(北忠毅 南忠武)’, 북에는 충의공이 있고 남에는 충무공이 있다는 뜻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충의공 정문부 장군을 칭송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른다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존재감은 막강하다. 

그런데 그에 견줄 정도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인물일 텐데 솔직히 충의공 정문부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 속에서 함경도 길주를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훈련되지 않은 관북 의병군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 용맹함과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지략으로 왜군을 6전 6승으로 크게 무찌르며,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전쟁 영웅이다. 

하지만 남북분단의 현실, 북관대첩비의 반출 등 여러 좋지 못한 상황에 엮여 현재에는 상당히 잊힌 상태다.

찬란하고 위대했던 역사는 존재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반드시 현재로 꺼내야 빛을 발한다. 

정한기 저자가 쓴 『정문부 평전』은 어둠 속에 사라져 가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라는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현재로 꺼내어 빛을 보게 한 작품이다.

『정문부 평전』을 쓴 저자의 이력과 집필 동기 또한 흥미롭다. 

진주 출신으로 오랫동안 금융권에서 일했던 저자는 우연히 고교 시절 TV에서 본 역사프로그램을 통해 정문부 장군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주(晋州) 남강댐 수몰로 정문부 장군 관련 시설을 옮기게 되었다는 내용을 보던 중 방송 말미에 동국대 남도영 교수라는 분이 “정문부 장군은 우리가 남북통일이 되어 있었으면 

오늘날 이순신 장군만큼 추앙을 받으실 분인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고, 이런 것을 보더라도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야겠다”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 머리에 남았다고 했다.

정한기 대표의 정문부 장군 탐구는 그렇게 평생을 연구해온 화두가 되었다. 

정문부 장군을 공부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같은 성씨의 조상님을 공부한다는 오해를 하곤 했는데,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정문부 장군은 해주 정씨이고 나는 진양(진주) 정씨로 같은 종친이 아님을 명시했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정문부 장군과 의병들이 5개월간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며 북관 지역을 수복한 이야기, 

길주에 세워졌던 북관대첩비가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남한과 북한 양국의 정부와 민간의 노력으로 2006년 한국으로 반환된 이야기, 

억울하게 박홍구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 등등 상세한 기록과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은 역사소설만큼이나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저자가 이 책을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 중 하나는 정문부 장군에 대한 자세한 연구나 자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포집』이 국역되어 있어서 상당히 많이 참고할 수 있었던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자는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기에 혹시 있을지 모를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전공한 김근하 박사와 해주정씨대종친회의 감수와 검토를 받았다.
2024년은 정문부 장군의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오랜 세월 잊힌 구국의 영웅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위대한 일생과 애국정신이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에게 알려지고 계승되기를 기대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0373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