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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남도 지방의 삼천 석지기 명문가, 철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다
전남 보성 출신으로 호남 명문가를 이룬 봉강 정해룡(鳳崗 丁海龍, 1913~69) 집안은 조선 선조(宣祖) 당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이순신을 모함에서 구해내는 직언을 했던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의 후손들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에 공덕을 세워 일제시대 이전까지 남도 일대에서 손꼽히는 삼천 석지기 부농(富農)을 이루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다시금 나라의 운명이 촌각을 다투게 되자, 정해룡은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에 거액을 희사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토지를 무상분배하고, 기근으로 고통받는 빈민들에게 수백 석의 구휼미를 풀어 스스로 빈한한 가구가 되었던 덕망 높은 가문의 종손이었다. 자연스레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남은 자식들이 학비가 없어 국비로 운영되는 목포 해양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이렇듯 자신과 가문의 영달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 백성들을 위해 모든 재산을 내놓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5대에 걸친 반외세투쟁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으로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역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되뇌이게 하는 봉강 정해룡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작가 문영심의 펜 끝에서 되살아났다.
목차
프롤로그 5
1. 식민지의 백성으로 태어나다 13
2. 종손의 운명 27
3. 일찍 어른이 된 해룡 39
4. 봉강의 성인 신고식 47
5. 지역사회의 기대를 받는 모범적 청년 57
6. 형제가 뜻을 합쳐 해방을 준비하다 81
7. 해방 직전과 해방 직후 109
8. 봉강리에서 맞이한 해방 131
9. 보성의 건준과 정해룡 141
10. 좌우대립의 격랑 속에서 155
11. 분단을 막으려던 사람들 167
12. 여운형의 죽음과 정해룡 183
13. 전쟁 전야 197
14. 한국전쟁 237
15. 진보정치 탄압과 정해룡의 시련 253
16. 4.19혁명과 5.16쿠데타 265
17. 대중당 활동과 3선개헌 반대투쟁 287
18. 나의 아버지 봉강 정해룡 303
19. 준비되지 않은 이별 313
20. 1980년 보성가족간첩단 사건 329
21. 당신들은 생물이 아니다 343
22. 꽃상여 355
에필로그 363
지은이의 말 369
봉강 정해룡 연보 375
부록: 아부하고 고개 숙여 정승 판서 나오면 뭐하냐 379
해제: 가훈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를 몸소 실천한 정해룡과 그의 후손들(한홍구) 395
참고문헌 417
저자 소개
저 : 문영심
27년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썼다. 수백 편의 방송 원고 중 2006년에서 2011년까지 매달렸던 ‘물은 생명이다’(SBS 다큐)를 대표작으로 여긴다. 유신 말기에 청춘을 보낸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렇듯이 유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괴로워한다. 다큐멘터리의 사실 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시켜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평전)』을 썼다. 『간첩의 탄생』을 쓰면서 민주주의는 ‘법 치’가 제대...
출판사 리뷰
가훈: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勿爲歷史罪人)
정해룡은 흔히 이야기하는 보수와 진보의 잣대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인물이다. 보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보적이고, 진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수적인, 그래서 한마디로 그를 일러 ‘양반 빨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양반’과 ‘빨갱이’라는 서로 어울리지는 않지만, 봉강의 인격 안에서는 이 둘이 아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비록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선비였지만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특히나 동생 정해진은 경성제대 학부와 동경제대 대학원을 나온, 당시로서는 최고 학벌을 지닌 신식 인텔리겐치아이자 급진적 공산주의자였다. 형제는 같으면서 달랐고 다르면서 같았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해주면서 똑같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헌신했다는 데 있다.
정해룡은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앞서 언급했듯이, 집안의 종들을 풀어주고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또한 그는 몽양 여운형과 함께하면서 혁신정당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을 대기도 했다. 김성수가 고려대학교를 설립할 때에도 거금을 희사헸다. 무엇보다 향리에 남았던 그는 양정원(養正院)을 세워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끝까지 고향을 지켰다. 이른바 민족교육운동에도 헌신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동생 정해진은 좀 더 급진적인 사상에 경도되어 사회주의 사상을 철저히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이렇듯 전 재산과 자기 한 몸 돌보지 않고 헌신했던 나라의 운명은 결국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 마주 서게 되었고, 이들 형제 앞에는 더 큰 시련이 닥쳤다. 현실 정치에서 이렇다 하게 뜻을 펼치지 못했던 봉강은 고향에 남아 지속적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고, 동생 해진은 북으로 올라갔다.
1980년 보성가족간첩단 사건과 집안의 풍비박산, 그러나...
비극은 1980년 전두환 정권 시절에 터지고야 말았다. 이른바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이 그것이다. 비극의 씨앗은 15년 만에 갑자기 북으로 올라갔던 정해진이 고향 보성에 형을 만나러 1965년 8월 어느 날 밤에 나타나 동반입북을 권유했던 것이다. 이때 형 해룡은 해진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셋째아들 정춘상을 함께 북으로 보냈다. 해진은 2년여 후에 다시금 고향마을을 찾아와 다녀갔지만 이렇다 할 만한 간첩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허약한 자신들의 기반을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정해룡-정해진 일가의 은밀한 접촉을 적발해, 1981년 1월 20일 국가안전기획부를 통해 고정간첩 3개망 15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집안사람 37명이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결국 해진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던 해룡의 셋째아들 정춘상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빨치산 경력이 있던 정해룡의 숙부 정종희는 무기징역(대법원에서 12년형), 여섯째 아들 정길상에게는 12년형(대법원에서 7년형)이 선고되었다.
이러한 정씨 가문의 비극은 결국 분단된 조국이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좌냐, 우냐를 떠나 같은 민족으로 살게 하고자 하는 염원은 이들 형제의 현실적 삶을 완전히 파괴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정해룡의 생가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보성 ‘거북정’의 사랑채에는 아직도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勿爲歷史罪人)는 가훈이 적힌 족자가 걸려 있다. 이 글귀는 아마도 임진왜란 때 나가 싸워 나라를 구한 먼 선조(先祖) 반곡 정경달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가문다운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명문가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봉강 정해룡 및 그 집안사람들만큼 이를 철저히 실천했던 이들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풍전등화의 국운 속에서 이를 과감히 실행했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의 희사만이 아닌, 앞서 언급한 가훈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가 더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6448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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