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마르크스주의는 과학과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과학이란 오늘날의 경제학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부르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과학 즉 경제학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결국 『자본』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하게 많이 논의해 왔지만 정작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해 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두 저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버려 두고 마르크스주의 과학만을, 즉 경제학만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이러한 작업에도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자본』 또한 올바른 방식으로 독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없이 『자본』을 읽는다면, 과거의 독자들처럼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교조화라는 잘못된 길 말이다.
자연과학이 과학철학의 도움을 통해 이해되듯, 마르크스의 『자본』 또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통해 더욱 적합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이 책은 그래서 필요하다. 노동의 문제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자본』을 읽기 위해 이 책의 독서에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목차
3판 편자 서문 _ 에티엔 발리바르 외/ 배세진 옮김ㆍ9
『“자본”을 읽자』를 읽자 _ 에티엔 발리바르/ 배세진 옮김ㆍ26
동료시민 모리스 라 샤트르 씨에게/ 칼 마르크스ㆍ57
서장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ㆍ59
루이 알튀세르/ 진태원 옮김
1장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자본』까지의
비판 개념과 정치경제학 비판ㆍ177
자크 랑시에르/ 김은주 옮김
I.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서의 정치경제학 비판ㆍ183
II. 『자본』에서의 비판과 과학ㆍ219
III. 결론을 대신할 비고ㆍ334
2장 『자본』의 서술방식에 대하여(개념의 노동)ㆍ343
피에르 마슈레/ 김은주 옮김
I. 출발점과 부의 분석ㆍ360
II. 상품 분석과 모순의 현상ㆍ371
III. 가치 분석ㆍ381
3장 『자본』의 대상ㆍ409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Ⅰ. 머리말ㆍ411
Ⅱ. 마르크스와 그의 발견들ㆍ426
Ⅲ. 고전파 경제학의 이점ㆍ436
Ⅳ. 고전파 경제학의 결점: 역사적 시간 개념 개요ㆍ457
Ⅴ.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ㆍ527
Ⅵ. 『자본』의 인식론적 명제들(마르크스와 엥겔스)ㆍ591
Ⅶ. ‘정치경제학’의 대상ㆍ622
Ⅷ. 마르크스의 비판ㆍ640
Ⅸ. 마르크스의 거대한 이론적 혁명ㆍ676
부록. ‘이상적 평균’과 이행의 형태에 관하여ㆍ705
4장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에 대하여ㆍ717
에티엔 발리바르/ 안준범 옮김
I. 시기구분으로부터 생산양식으로ㆍ734
II. 구조의 요소들과 이 요소들의 역사ㆍ764
III. 재생산에 대하여ㆍ816
Ⅳ. 이행이론을 위한 요소들ㆍ851
5장 『자본』의 플란에 대한 시론ㆍ915
로제 에스타블레/안준범 옮김
I.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 자신의 제시ㆍ933
II. 『자본』의 절합들ㆍ939
III. 1권과 2권의, 세공되지는 않지만 정확히 측정되는
이론적 장과 그 이름: “경쟁”ㆍ972
IV. 절합 2의 두 번째 부분의 대상에 대한 정의,
이 대상에 대한 선취들과 이 대상이 맺는 관계ㆍ979
V. 절합 2의 두 번째 부분의 하위절합들에 대한 연구ㆍ981
VI. 절합 2의 정의ㆍ994
VII. 결론ㆍ996
해제 『“자본”을 읽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ㆍ1001
진태원
1. 미지의 책, 『 “자본”을 읽자』ㆍ1002
2. 알튀세르의 이론적 슬로건
: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ㆍ1005
3. 『자본』을 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ㆍ1009
4. 『자본』에 대한 철학적 독서의 네 가지 범주ㆍ1020
5. 『 “자본”을 읽자』 이후 또는 『 “자본”을 읽자』에 대한
증상적 독서를 위하여ㆍ1063
6. 증상적 독서의 몇 가지 쟁점ㆍ1072
감사의 말ㆍ1147
책 속으로
마르크스가 인식생산 과정에 대해, 곧 인식이 인식의 ‘양식’에 따라 정확히 전유하려고 하는 현실대상과 구별되는 인식대상에 대해 그것은 전적으로 인식 안에서, ‘머릿속’에서 또는 사고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우리에게 말할 때, 그는 단 한순간도 의식, 정신 또는 사고의 관념론에 빠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사고’는 초월론적 주체 내지 절대적 의식이 지닌 직능, 현실세계가 물질로서 그것에 대면하게 될 그러한 직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또한 심리적 주체의 직능도 아닌데, 비록 인간 개체들이 이러한 사고의 행위자라고 해도 그렇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정초되고 분절되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고장치의 체계다.
이러한 사고는 이 사고를, 이러한 정식을 감히 사용하자면, 인식의 규정된 생산양식으로 만드는 현실조건들의 체계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사고는, 그것이 작업하는 대상 유형(원재료)과,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이론적 생산수단(그것이 지닌 이론, 방법 및 실험 기술이나 다른 기술), 그리고 그것이 그 속에서 생산하는 역사적 관계(이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를 결합하는(Verbindung) 어떤 구조에 의해 그 자체로 구성된다.
이런저런 사고하는 주체(개인)에게 인식들의 생산에서 그의 위치와 기능을 지정하는 것은 바로 이론적 실천 조건들에 의해 정의되는 이러한 체계다.
--- p.120~121
더 이상 『경제학-철학 수고』와 유사한 주체-대상의 쌍을 만날 수 없다.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Gegenstand’[대상]라는 용어는 감각주의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여기 『자본』에서 그것은 유령에 불과하다.
즉 구조가 갖는 어떤 성격의 발현일 뿐이다.
사물의 형태를 띠는 것은 주체의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인간 노동은 어떤 구성적 주체의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규정된 사회구조의 표식을 지니고 있다.
--- p.235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모순에 직면한다. 노동은 결코 상품일 수 없는데도 상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밝혀냈던 구조와 마주하게 된다.
곧 불가능한 어떤 것이 Wirklichkeit[현실성] 안에 실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우리로 하여금 부재하는 원인을, 생산관계를 참조하게 한다.
직접생산자를 생산수단에서 분리한 원시적 축적 이후, 직접생산자는 자기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도록 강제된다.
그들의 노동은 임금노동이 되며, 그리고 자본가는 그들의 노동력이 아닌 노동에 대가를 지불한다는 겉모습이 생겨난다.
노동가치라는 범주 뒤에 감춰진 노동력의 가치라는 범주를 드러내는 일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결정적 성격을 드러내는 일이다.
--- p.251
이제 역사적 시간 개념에 대해 다루어보겠다. 이 역사적 시간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조건을 우리의 수단으로 취해야만 한다.
규정된 한 생산양식에 속하는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지배관계 내의a dominante, 그리고 차이적 절합관계 내의a articulations differentielles 복잡한 구조에서 스스로를 정초할 수밖에 없기에, 이 역사적 시간 개념은, 그리고 이 개념의 내용은 그 전체ensemble에서 고려된 것이든 그 서로 다른 ‘수준들’에서 고려된 것이든 총체성의 구조에 따라서만 자신의 자리를 할당받을 수 있다.
특히, 역사적 시간을 고찰된 사회적 총체성의 실존의 특수한 형태로 정의함으로써만, 시간성의 서로 다른 구조적 수준들이 조응, 비-조응, 절합, 어긋남 그리고 꼬임이라는 고유한 관계들─전체의 총구조에 따라 이 전체의 서로 다른 ‘수준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유지하는─에 따라 개입해 들어오는 그러한 실존의 특수한 형태로 정의함으로써만, 이 역사적 시간 개념에 어떠한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p.502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 질문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다. 『자본』 내에서 마르크스가 정초한 경제학 이론의 고유한 대상은 무엇인가?
『자본』의 대상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대상을 그 전임자들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특수한 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p.621
이 지점은,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의미에서는 부주의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경제적 대상에 대한 고전적 개념화의 결함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서 경제적 대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화가 비경제적인 어떠한 구조에 의해 바깥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극도로 중요하다.
구조는 경제적 현상들로부터 외부적인 하나의 본질(경제적 현상들의 양상과 형태들과 관계들을 수정할, 그리고 이 경제적 현상들로부터 외부적이라는 이유로 부재하는, 그러한 부재하는 원인으로서 이 경제적 현상들에게 효과성을 지닐[효과를 미칠])이 아니다.
구조의 자신의 효과에 대한 ‘환유적 인과성’241 내에서 원인의 부재는 경제적 현상들에 대한 구조의 외부성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이는 구조의 효과들 내에서의 구조의 내부성이 구조로서 취하는 형태 그 자체다.
따라서 이는 효과들이 구조에 외부적이지 않다는 점을, 효과들이 그 안에서 구조가 자신의 표지를 각인하게 될 선재하는 어떠한 대상 혹은 어떠한 요소 즉 어떠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함의한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이는 구조가 (그 용어의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자신의 효과들에 내재적인 원인으로서) 자신의 효과들에 내재적이라는 점을, 구조의 실존 전체는 이 구조의 효과들 내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간단히 말해 구조 자신의 요소들의 특수한 하나의 결합combinaison에 불과한 구조가 자신의 효과들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함의한다.
--- p.691~692
우리가 「서문」 텍스트 자체로 들어가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사회구성체”Gesellschaftsformation와 이것의 “경제적 토대” 즉 “경제적 구조”Struktur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술인데, 생산양식 연구가 후자의 해부학을 구성한다.
사회구성체란 계급들 사이의 일차적 “모순”의 자리이며, 마르크스는 이 모순을 투쟁, 전쟁, 대립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데, 이 모순은 “때로는 공공연하며 때로는 감춰질” 수 있는 것으로, 이 모순을 이루는 항들은 “한마디로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이다(『공산주의자 선언』의 정식들).
일차적 모순은 여기서 마치 자신의 본질과 관계를 맺듯 “모순”의 이차적 형태와 관계를 맺지만, 마르크스는 이 모순형태를 일차적 모순과 혼동하지 않으려고 언제나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심지어 용어법에서도 이 모순형태를 “개인적 의미가 아니라”(nicht im individuellen Sinn), 즉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적대적 구조라는 면에서 “적대”라고 명명한다.
이 모순형태는 경제적 토대에 내재적이고, 어떤 규정된 생산양식 특유의 것으로, 그 모순의 항들은 “생산력 수준”과 “생산관계”라고 명명된다.
--- p.723~724
이 텍스트는, 이 문제적 텍스트가 『자본』의 구조에 관해 조장할 수 있는 오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져왔다. 우리는 이 텍스트의 독자들이 범한 오해들에 대해 정작 이 텍스트가 져야 할 책임의 정확한 정도를 뒤에서 검토할 것이다.
당장 우리가, 이 텍스트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 덕택에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자본』의 순서는 온전히 이론적 순서라는 것. 따라서 추상으로부터 현실로 가는 것도, 단순한 현실로부터 복잡한 현실로 가는 것도 아니다.
─ 도식/현실 관계는 『자본』의 순서도, 그 각각의 단계도 규명하지 못한다.
─ 순서가 온전히 이론적이라면, 순서는 그 대상에 대한 형태 개념에만 의존할 수 있다.
─ 『자본』의 대상은 규정된 생산양식이기 때문에 『자본』의 순서는 생산양식에 대한 형태 개념에 본질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 p.931
출판사 리뷰
한국의 독자들, 마침내
『“자본”을 읽자』를 읽을 수 있게 되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초자 알튀세르
그가 제자들과 불러일으킨 지적 사건, 『“자본”을 읽자』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을 구성하는 중심 조류다.
그러나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은 전 세계에서 힘을 잃었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도 힘을 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현대 프랑스 철학 전체와 프랑스 인문사회과학에 강한 효과를 생산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장-폴 사르트르가 언급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이론적 기여에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현상학을 주창했고, 그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려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알튀세르와 갈라선다.
알튀세르가 단독으로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제자들과 함께 쓴 『“자본”을 읽자』는 현대 프랑스 철학 내에서, 그리고 당대 서방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초한 책이다.
두 권의 저서는 1965년에 몇 주 간격으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후 이 두 책은 현대 프랑스 철학, 더 넓게는 프랑스 지성계, 심지어는 전 세계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50~1960년대는 현대 프랑스 철학계 내에서 구조주의가 유행하던 때였는데, 이와 평행하게 프랑스 지성계 내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구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지적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렇게 알튀세르와 그 제자들은 프랑스 지성계 내에서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정초했고, 현대 프랑스 철학 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구조적인 견지에서 구축했다.
『“자본”을 읽자』 덕에 알튀세르는 물론 그의 제자들 모두 젊은 나이에 굉장히 유명해졌다.
이후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키거나 비판한다.
이들 중에는 알튀세르를 떠난 이도 있고, 알튀세르에게 충실히 남은 이도 있다.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를 떠난 인물로는 자크 랑시에르가 대표적이다.
여하튼 지식인 개인에게든 당대 프랑스 지성계 전체에든 1965년 출간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말 그대로 하나의 ‘지적 사건’이었다.
여전히 『“자본”을 읽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현재성 때문이다!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그러나 새로운 사조들이 등장하면서 퇴조했다.
각국의 지성계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지적 헤게모니를 잃으면서 알튀세르의 철학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굳이 왜 이 질릴 정도로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사이토 고헤이의 ‘자본론’ 입문서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르크스가 붙잡고 씨름했던 노동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는 노동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는 이론, 특히 철학이 거의 없다.
그리고 당연히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이도 거의 없다. 경제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사정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동 문제는 AI를 비롯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더욱더 우리의 사유를 요청하고 있다.
고헤이도 지적하듯 이 문제를 정면으로 성찰한 마르크스주의만큼 적절한 사유의 도구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날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 마르크스주의
그렇다면 마르크스를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할까? 일본에서 사이토 고헤이가 수행했듯, 독일에서 미하엘 하인리히가 수행했듯, 미국에서 낸시 프레이저가 수행했듯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이 현실에 적합한 마르크스를 빚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미 그러한 작업을 매우 깊이 있게 수행했던 것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이 생산한 작업뿐 아니라 한국, 독일, 일본, 미국 등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작업 중에서 여전히 알튀세르가 정초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강한 현재성을 느낄 수 있다.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사상가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표 역자 진태원의 해제를 참조할 것을 권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화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사상들과 혼종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차원에서 개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사상들과 교차할 수 있도록 마르크스주의의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연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튀세르는 1960년대 당시에 현대 프랑스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결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번 열린 문은 쉽게 닫히지 않기에,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한 사상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도 1993년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지나 미하엘 하인리히와 낸시 프레이저의 작업을 거쳐 오늘날의 사이토 고헤이의 생태사회주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가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알게 모르게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알튀세르가 개방한 이 문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올바르게 독해되지 못했던 『“자본”을 읽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언급해 보면,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과학과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과학이란 오늘날의 분과 학문으로는 경제학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부르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과학, 즉 경제학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결국 『자본』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하게 많이 논의해 왔지만 정작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해 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두 저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버려 두고 마르크스주의 과학만을, 즉 경제학만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이러한 작업에도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자본』 또한 올바른 방식으로 독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과학철학 간 관계를 떠올려 봐도 좋다. 물론 이는 알튀세르가 이후에는 멀리하게 되는 관념이지만, 자연과학의 성과를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 자연과학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이라는 과학적인 경제학 저서를 집필했지만 이를 올바르게 향유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러한 철학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 이외의 철학사 내 사상가들의 도움으로 그 철학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였다.
다행히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알튀세르 연구자 서관모의 번역으로 2017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을 읽자』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벼려 낸 철학적 개념들을 배경 삼아 ‘철학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자본』을 본격적으로 읽는다.
서문에서 그는 『자본』을 올바르게 읽어 내기 위한 여러 철학적 개념을 제시한다.
가령 ‘증상적 독서’, ‘문제 설정’, ‘읽기와 보기’, ‘지식 효과와 사회 효과’ 등이 그것이다.
이후 자신의 논문 「“자본”의 대상」에서는 『자본』을 어떠한 인식론적 관점에서, 결국 어떠한 철학의 견지에서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공저자인 그의 제자들은 어떠한 논의를 전개했을까?
자크 랑시에르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자본”까지의 비판 개념과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와 『자본』에서의 비판 개념을 비교하고, 이에 기반해 『자본』의 기획인 ‘정치경제학 비판’이 무엇인지 다룬다.
피에르 마슈레는 「“자본”의 서술 방식에 대하여(개념의 노동)」에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를 다룬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에 대하여」에서 ‘생산양식’, ‘구조의 요소들’, ‘재생산’, ‘이행’이라는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을 하나하나 해설한다.
『자본』이라는 과학적 저서는 하나의 경제학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과학적 사유를 형성하는데 이를 역사유물론이라고 부른다.
이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본 개념을 『자본』을 기초로 해서 철학적인 방식으로 벼려 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제 에스타블레는 이렇게 완성된 『자본』이 어떤 구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자본』이라는 광대한 저서를 탐험할 때 필요한 일종의 지도를 그린 것이다.
『자본』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자본”을 읽자』!
오늘날 노동의 문제가 더욱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진단에 동의한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마르크스가 씨름해 써낸 저작 『자본』을 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지적하듯 『자본』을 『자본』 그 자체로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는 『자본』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자본』을 『자본』 그 자체로 읽는 작업은 필요불가결하지만 『자본』만을 읽는다면, 그러니까 알튀세르식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 철학 없이 『자본』을 읽는다면, 과거의 독자들처럼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교조화라는 잘못된 길 말이다. 자연과학이 과학철학의 도움을 통해 이해되듯, 마르크스의 『자본』 또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통해 더욱 적합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이 책은 그래서 필요하다. 물론 일반 독자들은 앞서 언급한 고헤이의 책들을 포함한 여러 좋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입문서를 통해 『자본』에 접근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입문서가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통로를 구성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이로써 우리가 노동자로서 처한 현실을 더 입체적으로 보고 싶다면, 입문서에서 멈추지 말고 이후 반드시 『자본』을, 그리고 이와 나란히 『자본』에 관한 철학서를 읽어야 한다.
『“자본”을 읽자』가 일반 독자가 읽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책처럼 보이더라도 『자본』을 제대로 읽고 우리가 노동자로서 처해 있는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결론적으로, 독자들은 『“자본”을 읽자』를 읽음으로써 『자본』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효용이다.
『자본』에 관한 여러 입문서가 존재하지만, 입문서만으로는 『자본』의 진정한 가치를 향유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 그 자체를 읽는다고 해서 『자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본』을 해석하는 다른 책들, 그중에서도 철학책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본”을 읽자』는 『자본』이라는 과학책 또는 경제학책과 하나의 쌍을 이루어 『자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책이다.
노동의 문제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자본』을 읽기 위해 이 책의 독서에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0960474>
'29.이데올로기 연구 (독서>책소개) > 5.마르크스주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2025) - 프로메테우스의 꿈과 좌절 (0) | 2025.02.22 |
---|---|
카를 마르크스와 근대 사회의 탄생 1 (2025) - 마르크스의 생애와 저술 1권: 1818-1841 (0) | 2025.02.22 |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2024) (1) | 2024.10.05 |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 (2018) (0) | 2023.09.27 |
독일 이데올로기 2 (2019) (0) | 2023.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