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李韓烈) (1966년 8월29일 ~1987년 7월5일 전남화순출생)
이한열은 대한민국 학생운동가이다. 연세대학교 동아리 "만화사랑"회원으로 활동 하였으며. 반 전두환 운동에 가담, 1987년 6월 시위에 참여 중 전경이 쏜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쟁과 6.29선언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그는 어린시절 대부분이 전남화순에서 지냈으며,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 동산 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를 나왔다.중학교 2학년 재학중에 벌어진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도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입시험에서 낙방하였다. 그뒤 1년간 종로학원에서 재수후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6월항쟁
1987년6월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22살 어린나이에 사망했다. 일부전경ㅇ; 시위진압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도서관학과)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타통신 사진기자 였던 정태원이 촬영 하였고 중앙일보 뉴옥 타임즈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났다.
장례.사후
1987년 7월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본관->신촌로터리->서울시청앞->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 되었다. 당시추모인파는 서울100만, 광주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조된 학생운동의 분위기는6.10항쟁과 사실상 군사정권의 항복선언인 6.29 선언을 이끌어내개 되었다. 한편 29주기가 되는 2016년 6월9일에는 추모하는 동판이 연세대학교 정문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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