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6.국립중앙박물관

10.지도의 제작

동방박사님 2018. 10. 21.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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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지도의 제작

1454년 수양대군은 도성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 산줄기의 형세와 물줄기의 맥 脈을 살핍니다. 이때 산천의 形勢형세에 밝은 정척, 그림을 잘그리는 강희안, 지도에 밝은 양성지가 수양대군과 함께 했고, 또한 상지관 相地官, 화원, 산사算士 등이 참가했습니다.이렇게 전문 분야의  관리들이 지도를 만드는데 참여 했다는점은 조선시대 지도가 갖는여러 특성을 보여 줍니다. 산천의 형세에 밝은 정척과 상지관이 함께 참여한 것은 도성의 자리가 풍수상의 吉地길지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지도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도성 주위의 산봉우리를 아름답게 그릴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문인화가로 유명한 강희안과 유능한 화원이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리와 방위 등 실측 자료를 확보하는 것도 좋은 지도를 만드는 데 필수적 이었습니다. 거리를 측량하는 데는 주로 보측步測이나 줄을 이용 했는데, 세종 때에는 10里리를 가면 북이 울리도록 고안한 마차인 기리고차 記里鼓車를 발명해서 썼습니다. 또한 세조 때에는 일종 평판 측량기구인 印地儀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경주 지도

 

 

 

 

영국에서 펴낸 한국과 일본지도

 

 

조선왕국지도 

로버트 세이어 (1725~1794) 영국,1970 종이에 동판인쇄. 증6237, 국립박물관에 기증

영국의 유명한 지도제작자 로버트 세이어가 일본지도에 한국지도를 합성하여 만든 것입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한국해 Corean Sea라는 해역 명칭을 표기했습니다. 한국부분은 당빌의 한국지도를 활용했는데, 이는 유럽 각국의 지도 제작자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로 평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 지도의 경우, 당빌의 지도를 그대로 수록했지만, 일본지도에는 여러 버전의 다른 지도를 참고하여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지도

한국과 일본 왕국지도

당빌 (1697~1782)ㅣ. 프랑스,1737ㅣ종이동판인쇄ㅣ51.0x 41.4cm l 구 4295

당빌(1697~1782)이 1737년에 펴낸 중국.타타르.티벳 신 지도책 속에 실린 지도로,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요동과 만주, 몽골, 연해주와 사할린까지 수록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출처에서 구한 일본 지도를 합성하여, 동아시아 세 나라를  모두 수록한 지도를 만든 점이 흥미롭습니다.

 

 

청 제국 지도 속의 <조선도> 를 담은 프랑스의 지도

 

조선 왕국 지도

당빌 (1697~1782)ㅣ. 프랑스,1737ㅣ종이에 동판인쇄ㅣ서울역사박물관 (서정철 기증) 소장

프랑스의 지리학자 겸 지도제작자인 당빌 이 1737년에 펴낸 중국.타타르.티벳 신 지도책 속에 실린 지도 입니다. 이 지도책의 지도를은 청 제국 지도인 <황여전람도黃與전全覽圖 >를  바탕으로  프랑인 당빌이 편집한 것입니다. <황여전람도>에 실린 <조선도>는 천문관측 결과에 기초해 압록강과 두만강의 윤곽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지만, 이외의 지역은 전반적으로 부정확 합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이 지도는 유럽의 인식 수준을 크게 개선하는 역할을 했으며,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에서 제작하는 우리나라 지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외국에서 만든 조선지도

 

조선왕조가 만주와 중국의 사정을 알기 위해 지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처럼, 중국도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여 자신의 지도를 반영했습니다. 이는 18세기 초 안정기에 접어든 청이 조선과의 경계를 확정하려 하면서 정점에 이릅니다. 청은 예수회의 서양선교사를 활용하여 전국지도를 만들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일대를 실측했습니다. 청나라 전체를 그린 <황여전람도黃與전全覽圖 > (1718) < 조선도 朝鮮圖>에는 그결과가 반영 되었습니다. 이지도는 처음으로 경도와 위도를 표시한 조선지도이지만, 전반적으로 오류와 왜곡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회선교사가 이 지도를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 당빌에게 전했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 지도는 근대적인 측량에 의한 지리정보가 전달되기 전까지 유럽사회에서 표준적인 조선지도로 정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