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중앙교회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
부산 동래중앙교회(정성훈 목사. 부기총 대표회장) 예람비전센터 내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은 세게교회협의회 부산교회 총회 ㅜ개최에 맞추어 세계 각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행사 참가자들에게 한국교회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위해 2013년 10월에 개관했다. 2015년 3월에 부산시 17호 박물관으로 등록되어 전문 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 박물관은 한국 및 세계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이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유산인 고성서를 비롯해 잡지, 사진, 세계각국에서 발산된 성서와 찬송가 등 4,00여 점을 비롯해 희귀한 일반 유물들을 전시 중이다. 전시실은 한국관, 세계관, 민속관, 특별 전시실 등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묵시록 주석 동양서원간행 (1913)
부산지역의 기독교전래
19세기말 복음의 파장이 한반동에 미쳤을때, 중국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북쪽관문이 의주 였다면 부산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복음의 남쪽 관문이었다. 부산은 서울보다 일찍 복음전도자가 들어 왔다. 먼저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 톰슨 이 보내온 매서인 (賣書人) 나가사카가 1883년 7월24일 군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그 후 약 2개월간 부산 원산 등지를 순회하며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 (Jhon Ross)가 만주에서 번역한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서]와 [예수셩교 누가복음전서]와 [예수셩교요안나복음젼서]를 반포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부산선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일본을 거쳐 내한하는 선교사들의 중간 기착점 이기도 했다. 1885년 3월31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와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4월5일 부활절 인천에 도착에 앞서 4월2일 아침 부산항에 기착했다. 그들은 배가 하루 정박하는 사이 반나절 무산을 산책했다고 한다. 그 해 11월에는 영국성공회 선교사 울프 (Jonn R Wolfe)가 중구인 전도자 두 명과 함께 내항하여 전도했다. 다만 이들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1889년 8월 서울의 아펜젤러 존스 선교사와 함께 선교 탐색 여행 차 워주-문경-대구를 거쳐 8월31일 부산에 들렀다. 이어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였던 게일( jamees gale 기일) 과 하디 (robert a hardie. 하리영)가 가가각 1-2년씩 부산에 체류했다. 게일은 최초의 부산거주 선교사였고, 하디는 부산의 영국세관 전속의사로 일했다.
그 무렵 부산에서 활동한던 울프 선교사는 재정 지원 중간으로 부산을 떠나기 앞서 그 안타까운 사정을 글로써서 호주 교인들에게 알렸다. 그 소식을 접한 테이비스는 호주 장로교에 한국선교를 자원하여 목사안수를 받은후 무나 메리데이비스와 함께 1889년 10월 내한 하였다. 서울에서 5개월가량 한구어를 배운 그는 부산을 선교지로 정하고 육로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사이 천연두에 걸려 도착 하루만인 1890년 4월5일 게일의 집에서 운명하였다. 부산선교 최초의 희생자인 그의 유해는 복병산 공동묘지 (지금 남성여고 주차장 자리)에 묻혔다.
그런데 호주장로교회는 데이비스 죽음에 충격을받아 오히려 더욱 한국선교를 후원하기로 하고 다시 1891년 10월 멕케이목사 부부와 3명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페리 퍼셋: 맥부인)등 모두 5명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그후 부산진 좌천동에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부산지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는 이보다 약 한달 앞선 1891년 9월 초량 인근 영주동에 선교부지를 확보한후 이듬해4월 선교 주택을 짓고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했다. 그 결과 베어드는 1893년 6월4일 자신의 사랑채에서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시작 할수 있었다. 이렇게 부산선교를 시작한 베어드는 그 후 평양으로 전임하고 그 뒤를 이어 브라운, 어빈(어을빈), 아담스(안의와) 로스(노세영) 사이드보탐(사보탐) 윈(인노절) 등이 부산을 거점으로 경상도 선교에 나섰다.
부산은 이렇게 선교 처음부터 호주선교부와 북장로교선교부가 함께 선교를 시작 했지만 1909년부터 호주 선교부와 북장로교선교부가 함께 선교를 시작했지만 1909년부터 부산을 둘로 나누어 부산진과 고관, 동래등 동남부 지역은 호주 선교부가, 초량지역은 북장로교가 선교를 담당 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1913년 말 북장로교 선교부가 이곳에서 철수함에 따라 부산은 호주선교부의 전담 선교지역이 되었다. 호주 선교사들은 1892년 매입한 좌천동 686번지 일대의당에 교회(부산진 교회)와 학교(일신여학교)그리고 선교사 주택을 잇달아 세워 선교의 거점으로 삼은 다음 점차 그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부산의 호주 선교사들은 대표적인 이는 아담슨(손안로 1894~1909) 엥겔 ( 왕길지 1900~1919) 메켄지 (메켄시 1910~1938) 라이트 (예원배 1928~1942) 등이 있다.
구약사기, 조선야소교회 출간, 지은이 미국인 소안륜목사 (1921)
찬송이란 무었인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기독교인의 찬송에는 3가지 형태의 분류가 가능합니다. 고대 그리스어 살모이스는 악기를 연주한다는 의미로 악기를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흄노이스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송시나 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다이스는 영적인 노래로 다양한 찬송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우리들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1908년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 (현재대한기독교서회) 찬송가위원회에서 [찬송가]를 발행 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 찬송가로서, 23년동안 하나의 찬송가로 사용되었습니다. 1931년에는 한국인 창작가사 6편등을 더하여 [신정찬송가]를 출간하여 감리교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장로교에서는 400여곡을 모아 1935년 [신편찬송가]를 출판하였습니다.
해방이후 1949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3교파에서 힘을 합쳐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1981년 한국찬송가공회가 조직되면서 찬송가 통일작업을 시작하여, 1983년 12월[통일찬송가]가 탄생하였. 558장으로 구성된[통일 찬송가]는 2007년 [21세기 찬송가]가 발간되기 까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명작 찬송가 강화. 조선야소교회 출간 (1930)
신정찬송가
조선야소교서회 발행,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결의하여 찬송가개정위원회에서 개정. 편집찬송가
(1931)
신편찬송가
조선에수교장로회총회에서 출간한 장로교 자체의 새찬송가 (1939)
마누엘성가
서울 임마누엘사 출간. 지은이 이성봉목사. 성결교회총회장. 서울신학교교장
이명직목사 추천서수록 (1951년)
배낀 찬송가
중국 문화대혁명시기 종교탄압을 받던 재중동포들이 필사하여 사용하던 한글찬송가 (1970년대)
침례교 찬송가
미국 필라델피아 침례교 출판사 출간 (1871년)
감리교 찬송가
미국에서 출간된 감리교 찬송가 (1800년대)
장로교 찬송가
미국필라델피아에서 출간 (1874년)
찬미가
일본 도쿄 찬미가위원회 출간 (1930년대)
찬송가
스위스로자에서 출간한 프랑스어 찬송가 (1888년)
양피지에 기록한 그레고리 성가 (13세기)
그레고리안 성가
그레고리안 성가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부르는 단선율의 라틴어 전레성가를 일컫습니다. 로마전례양식에서 사용하는 무반주의 종교음악으로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유럽 지역에 구전되던 음악들을 모아 악보로 옮겨 적은 것을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릅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성령의 힘으로 직접 작곡 하였다는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카롤링거왕조 (50~887년에 서유럽을 통치한 프랑크왕조) 시대에 로마와 갈리아의 성가를 통합하여 편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합니다. 그레고리 성가는 남성 성가대가 라틴어 가사로 된 단선율의 노래를 반주없이 부르는 것이 특징입니다.
포교자격증명서 (布校資格證明書)
일제강점기, 최세헌 조사에게 발행한 전도자격 증명서
1941년/ 조선야소교장로회 발급
일제는 종교의 자유를 [제국헌법] 에 명시하면서 천황의 신성불가침을 강조하는 헌법상에 모순되는 조항을 삽입하였다, 식민지 한국에서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 1920년 [개정포교규칙]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종교 자유를 억압 하였고, 1939년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종교단체법안]을 통과 시켰다. 1940년 4월1일부터 [종교단체법안]을 [종교단체법안]을 적용하여 종교의 어용화와 교회 교단의 통합을 강요 하였다.
특히 한국교회는 일제에 대항한 민족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 유럽과 미국 출신 선교사들의 활동은 세계 여론에도 영향을 미쳤으므로 일제가 통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의 활동을 배척하거나 한국인들의 포교활동을 가로막기도 하였다.
1941년 조선야소교장로회에서 발급한 포교자격증명서오 당시 경남노회장이던 김길창목사의 서명이 있다. 부산 기장군 철마면에서 출생한 최세현조사가 1941년 12월 19일 발급받아 포교활동당시 사용한 증명서이다.
최세현조사는 해방이후 미군정시기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수여받은 면장 임명장도 함께 전시하였다.
신학지남
1918년 3월 평양의 조선에수교장로회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호주선교사인 엥겔이 편집인으로 참여하여 출판한 신학연구지 1918년
활전
1922년에 창간된 성결교의 월간 잡지, 성결교의 목회자 양성 및 신앙훈련의 지침서로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성결교의 기관지로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을빈 제보 보재약. 만병수안내서
미국북장로교선교사 찰스어빈이 설립한 어을빈제약주식회사에서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만병수를 판매하여광고를 목적으로 제작한 소책자이다 1919년
찰스어빈 (한국명: 어을빈)
찰스 어빈 (1862~1935)은 1862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미국 북장로교 (PCUSA)소속 의료선교사로 1894년 3월 부산으로 건너와 의료활동과 지역 순회 전도운동으로 1911년 까지 약17년간 선교사로 일하였다. 1903년 9월 부산과 경상남도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병원 정킨기념병원이 초량에 건립되었다. 이병원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병원의 적극적인 의료활동을 주도한 인물이 찰스어빈이다.
그는 부산과 ~
동래중앙교회주보
1957년 1월20일 동래중앙교회에서 발행한주보, 당시 학생회 회장이었던 강영석장로가 등사판으로 인쇄하였다 1957년
교인증명
6.25 한국전쟁시 피난할 수 있도록 후면에 영어표기. 1951.장기교회 윤병식목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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