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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리앙쿠르인가, 다케시마인가? 독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과연 안전한가? 우리 시대 대표 ‘지식노마드’이자 해양문명사가인 주강현 박사가 그동안 수집해온 방대한 자료와 현장 조사의 기록을 엮어 한 권의 '독도 교과서'를 내놓았다. 320여 컷의 생생한 현장사진과 희귀자료, 각종 문헌을 집대성한 방대한 구성과 역사학, 지리학, 고고학, 생태학 등 학문의 장벽을 뛰어넘은 다양한 시각으로 독도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특히 에필로그에서는 독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연대기로 구성하여 독도 논쟁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정리를 돕는다.
목차
프롤로그-동해의 유토피아 : 현실로서의 울릉도와 이데아로서의 삼봉도
1 도동-모든 길은 도동으로 통한다 : 일본인들이 진을 쳤던 도방청
2 저동-모시개의 산과 바다 그림자 : 러일전쟁의 잔흔과 죽도의 초상
3 천부리-물마루에 떠오르는 독도 풍경 : 독도 목측과 장소의 정치학
4 나리동-생명의 풀, 명이로 이어가다 : 하늘이 숨겨놓은 별세계, 나리분지 개척사
5 성인봉-동해, 그 유일한 화산봉 : 환태평양 화산권의 신이 내린 산
6 현포리-우산국으로 가는 길 : 무덤에서 들려오는 왕국의 소리
7 태하동-왜구와 황토의 변증 : 공도정책과 수토정책, 울릉도 경영과 황토구미
8 사동과 남양동-전설과 물적 증거가 만나는 곳 : 우산국 우해왕의 추억
9 독도와 자연-그 아름다움에 관하여 : 웅장하고 영험스럽고 신엄하고 찬란하여라
10 독도와 사람들-어민·경비대·등대원·공무원과 관광객들 : 실효적 지배의 힘과 총성 없는 바다전쟁
11 시마네현과 다케시마-강치와 종의 멸종 : 독도는 일본 땅, 울릉도도 ‘본디’ 일본 땅
에필로그 : 울릉도·독도 연대기
1 도동-모든 길은 도동으로 통한다 : 일본인들이 진을 쳤던 도방청
2 저동-모시개의 산과 바다 그림자 : 러일전쟁의 잔흔과 죽도의 초상
3 천부리-물마루에 떠오르는 독도 풍경 : 독도 목측과 장소의 정치학
4 나리동-생명의 풀, 명이로 이어가다 : 하늘이 숨겨놓은 별세계, 나리분지 개척사
5 성인봉-동해, 그 유일한 화산봉 : 환태평양 화산권의 신이 내린 산
6 현포리-우산국으로 가는 길 : 무덤에서 들려오는 왕국의 소리
7 태하동-왜구와 황토의 변증 : 공도정책과 수토정책, 울릉도 경영과 황토구미
8 사동과 남양동-전설과 물적 증거가 만나는 곳 : 우산국 우해왕의 추억
9 독도와 자연-그 아름다움에 관하여 : 웅장하고 영험스럽고 신엄하고 찬란하여라
10 독도와 사람들-어민·경비대·등대원·공무원과 관광객들 : 실효적 지배의 힘과 총성 없는 바다전쟁
11 시마네현과 다케시마-강치와 종의 멸종 : 독도는 일본 땅, 울릉도도 ‘본디’ 일본 땅
에필로그 : 울릉도·독도 연대기
출판사 리뷰
1. 리앙쿠르와 다케시마―독도 명칭은 한일문제가 아닌 범지구적 해양사의 문제다
저자는 독도 문제를 국지적인 한일관계사의 맥락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인 외눈박이 시각이라고 말한다. 독도 문제는 해양제국의 논리가 적나라하게 적용된 첨예한 범지구적 해양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도가 세계에 ‘리앙쿠르’로 알려진 까닭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여 멋대로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원주민이 쓰는 지명을 무시하고 서구제국이 ‘발견’한 명칭을 쓴다는 것은 그 섬이 애초부터 무인도였으므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야 할 영토 획득의 대상물로 전락시킴을 뜻한다. 러일전쟁 와중에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비법적으로 독도를 편입시킨 일본의 행위는 기존의 역사적 연고권을 완전히 무시한 이러한 제국의 약탈 수법을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맞서기 위해 가장 먼저 마련해야 할 대응책은 무엇일까. 바로 역사적 근원을 증명하는 일이다. 예부터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독도를 일상적인 생활권으로 이용해왔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는 데 더욱 힘을 실어줄 것이다. 『독도견문록』은 독도가 버려진 무인도가 아닌 역사 이래뾔 한반도의 부속 도서였음을 명확히 밝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근거 없음을 증명해낸다.
2. 독도 이전에, 왜 울릉도인가?―역사적·현실적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열쇠
독도 문제에서 울릉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도와의 거리에 있다. ‘독도는 우리 땅’임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즉 누가 독도를 일상적 생활 터전으로 삼았는가빈고 할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목측(目測) 가능한 섬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어디서도 독도를 볼 수 없다. 가장 가깝다는 시마네현 오키제도와 독도의 거리는 159km인 반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8km에 불과하다. 가시거리에서 조업하는 울릉도민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오키 어민보다 역사적, 현실적 지배력을 지니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울릉도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도(石島)’의 연원을 밝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였음을 밝히는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인 〈칙령 41호〉에서는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할 건을 다루면서, 제2조에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명시하였다.
석도란 어디인가. 바로 독도다. 조선 정부의 오랜 수토정책과 공도정책 시절, 울릉도를 드나들던 개척민은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전라도나 충청도 일대의 남서해안에서는 ‘돌’을 ‘독’이라 발음한다. 가뽄 전통 어법인 돌살을 ‘독살’이라 발음한다. 당시 울릉도에 살던 다수의 전라도 사람들이 독도의 존재를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돌섬’, 즉 ‘독섬’이라 명명한 것이 공식 문서에서 ‘석도’로 명기된 것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한편, 울릉도 곳곳에서 발견된 고분군과 고대 유물들, 특히 우리나라 선사 시대의 전형적인 무문토기나 신라 토기편 등은 울릉도가 한반도 본토와 지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이다. 이처럼 울릉도와 독도는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니, 독도를 알기 전에 먼 길을 돌아 울릉도를 먼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독도·울릉도에 관한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 책으로 보는 독도 자료 박물관
『독도견문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동해 한복판에 와 있는 듯 생생하다. 독도 해저지형도나 독도의 수중세계 모습처럼 일반인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자료들도 한데 모았다. 독도·울릉도에 관한 고문헌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묵은 신문기사들을 다수 발굴하여 재정리하였으며, 일본 측 관련 문헌도 수록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비합리성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이 밖에도 시마네현 어민들의 독도 강치잡이 사진, 1920~30년대 울릉도 풍경 사진, 러일전쟁 관련 자료, 각종 유물 사진과 지도 등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사진이 곳곳에 펼쳐진다. 독도 문제가 전 국민의 관심사이자 국제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지금,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귀중한 책이다.
저자는 독도 문제를 국지적인 한일관계사의 맥락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인 외눈박이 시각이라고 말한다. 독도 문제는 해양제국의 논리가 적나라하게 적용된 첨예한 범지구적 해양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도가 세계에 ‘리앙쿠르’로 알려진 까닭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여 멋대로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원주민이 쓰는 지명을 무시하고 서구제국이 ‘발견’한 명칭을 쓴다는 것은 그 섬이 애초부터 무인도였으므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야 할 영토 획득의 대상물로 전락시킴을 뜻한다. 러일전쟁 와중에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비법적으로 독도를 편입시킨 일본의 행위는 기존의 역사적 연고권을 완전히 무시한 이러한 제국의 약탈 수법을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맞서기 위해 가장 먼저 마련해야 할 대응책은 무엇일까. 바로 역사적 근원을 증명하는 일이다. 예부터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독도를 일상적인 생활권으로 이용해왔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는 데 더욱 힘을 실어줄 것이다. 『독도견문록』은 독도가 버려진 무인도가 아닌 역사 이래뾔 한반도의 부속 도서였음을 명확히 밝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근거 없음을 증명해낸다.
2. 독도 이전에, 왜 울릉도인가?―역사적·현실적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열쇠
독도 문제에서 울릉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도와의 거리에 있다. ‘독도는 우리 땅’임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즉 누가 독도를 일상적 생활 터전으로 삼았는가빈고 할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목측(目測) 가능한 섬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어디서도 독도를 볼 수 없다. 가장 가깝다는 시마네현 오키제도와 독도의 거리는 159km인 반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8km에 불과하다. 가시거리에서 조업하는 울릉도민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오키 어민보다 역사적, 현실적 지배력을 지니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울릉도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도(石島)’의 연원을 밝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였음을 밝히는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인 〈칙령 41호〉에서는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할 건을 다루면서, 제2조에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명시하였다.
석도란 어디인가. 바로 독도다. 조선 정부의 오랜 수토정책과 공도정책 시절, 울릉도를 드나들던 개척민은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전라도나 충청도 일대의 남서해안에서는 ‘돌’을 ‘독’이라 발음한다. 가뽄 전통 어법인 돌살을 ‘독살’이라 발음한다. 당시 울릉도에 살던 다수의 전라도 사람들이 독도의 존재를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돌섬’, 즉 ‘독섬’이라 명명한 것이 공식 문서에서 ‘석도’로 명기된 것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한편, 울릉도 곳곳에서 발견된 고분군과 고대 유물들, 특히 우리나라 선사 시대의 전형적인 무문토기나 신라 토기편 등은 울릉도가 한반도 본토와 지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이다. 이처럼 울릉도와 독도는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니, 독도를 알기 전에 먼 길을 돌아 울릉도를 먼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독도·울릉도에 관한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 책으로 보는 독도 자료 박물관
『독도견문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동해 한복판에 와 있는 듯 생생하다. 독도 해저지형도나 독도의 수중세계 모습처럼 일반인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자료들도 한데 모았다. 독도·울릉도에 관한 고문헌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묵은 신문기사들을 다수 발굴하여 재정리하였으며, 일본 측 관련 문헌도 수록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비합리성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이 밖에도 시마네현 어민들의 독도 강치잡이 사진, 1920~30년대 울릉도 풍경 사진, 러일전쟁 관련 자료, 각종 유물 사진과 지도 등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사진이 곳곳에 펼쳐진다. 독도 문제가 전 국민의 관심사이자 국제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지금,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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