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65년전 '해방공간'에 존재하는 우리의 오늘!
1945년 6월에서부터 1946년 12월까지 '해방공간' 전반기를 다룬 '상'편 전 5권이 세트로 나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 건국이 되어야 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그 책임은 민족사회의 내부 때문이었을까? 외부 때문이었을까? 분단과 우리 민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담았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그야말로 '허울만의 해방'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뀐 것일 뿐,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이책은 문명사가의 관점, 저널리스트의 관점 외에도 수많은 질문을 통해 풍부한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저자는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독자에게 그 장면을 생중계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의 독자와의 연대감을 쌓고, 나아가 독자와 같은 입장에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했다.
독자들이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해방공간의 정치상황은 지금까지 '좌우대립'위주로 풀이되어 왔지만, 저자는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보여준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안의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처럼 그의 해방일기 상은 65년적의 민족적 모습과 정치적 상황들을 세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속에서 우리의 '오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1945년 6월에서부터 1946년 12월까지 '해방공간' 전반기를 다룬 '상'편 전 5권이 세트로 나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 건국이 되어야 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그 책임은 민족사회의 내부 때문이었을까? 외부 때문이었을까? 분단과 우리 민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담았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그야말로 '허울만의 해방'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뀐 것일 뿐,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이책은 문명사가의 관점, 저널리스트의 관점 외에도 수많은 질문을 통해 풍부한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저자는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독자에게 그 장면을 생중계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의 독자와의 연대감을 쌓고, 나아가 독자와 같은 입장에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했다.
독자들이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해방공간의 정치상황은 지금까지 '좌우대립'위주로 풀이되어 왔지만, 저자는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보여준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안의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처럼 그의 해방일기 상은 65년적의 민족적 모습과 정치적 상황들을 세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속에서 우리의 '오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목차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출판사 리뷰
광복 68주년, 대한민국 건국 65주년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건국으로 치달은 것이 우연이었는가, 필연이었는가? 그 책임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분단과 민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 떠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가 1945년 6월에서 1946년 12월까지 ‘해방공간’ 전반기를 다룬 『해방일기 상편』이 전5권으로 완성하였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허울만의 해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이 가져다준 상황은 암담한 것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독립’이 저절로 보장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김기협 교수는 해방이란 좋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분단건국과 전쟁의 참극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시각에 대해 “그렇게 좋은 기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전쟁 승리는 미국과 소련의 힘이 거둔 것이었고, 두 나라는 그 힘으로 승리의 상품을 거머쥐고 있었다”고 단언하면서도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같은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난다”고 소회했다.
당시 정국을 지배한 것은 극좌와 극우의 대립으로 보이기 쉽다. 극좌와 극우는 분단건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 사람들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가운데 이승만, 조병옥, 김일성, 박헌영 등 극우와 극좌가 주어진 상황에 편승했을 뿐 역사 전개에 능동적 공헌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노력이 좌절된 것은 주어진 상황이 너무 엄혹했기 때문이지만 그 자세에 우리가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중간파의 가르침이 무시되어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당시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밀려난 것과 같은 상황이 수십 년간 분단-대립 속에 계속된 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대립의식이 크게 완화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그들을 제대로 살피는 눈길이 적은 것은 승리자만을 받드는 극한 경쟁사회의 속성 때문 아닐까? 다음은 해방공간 전반기를 살핀『해방일기』상편의 주요 주제이다.
-조선 독립의 약속 카이로선언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은 겉으로는 인도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의 항복 후 연학국의 오스트리아와 조선 점령에 있어서도 겉으로는 ‘해방’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전리품으로서 ‘정복’의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준비
항일투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한국인의 주관이다. 연합국의 눈에는 일본 패망에 대한 조선인의 공헌이 무시할 만한 정도였다. 1930년대까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도 전쟁 중에는 밀려나 있었고 화북의 조선의용군도 전투에 참여할 수준이 못 되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내에서 항일의 자세를 지킨 사람들은 좌익과 우익에 있었지만 일제 말기 전쟁 중에는 아무런 조직 활동도 없는 상태였다. 여운형의 ‘건국동맹’만이 조직 활동을 주장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치 못하다.
-해방공간 속의 친일파
일본 통치의 종식으로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 될 입장이었고 실제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처단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총독부를 계승했으므로 이민족 통치에 협력하던 친일파의 역할이 계속될 수 있었고, 미군정이 총독부보다 통치 능력이 못한 만큼 친일파의 역할은 오히려 더 커졌다. 친일파는 미군정의 비호 아래 세력을 더욱 키워 친일파를 처단할 만한 민족국가가 세워지지 않도록 획책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친일파의 이런 노력을 ‘반공’의 명분으로 정당화해 주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추구했다.
-해방공간 속의 좌익
좌익의 성장에는 두 갈래의 힘이 뒤얽혀 작용했다. 하나는 식민지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 인식에 기초한 자생적 깨달음이었고, 또 하나는 소련과 코민테른, 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이었다. 전자가 범 좌익 형성의 토대였고, 후자는 해방 후 ‘공산당’의 간판을 걸었다. 소련군의 이북 진주에 따라 이북에서는 공산당 중심으로 범 좌익이 북로당을 결성한 반면 이남에서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으로 이북의 공산당-북로당이 실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남로당을 위시한 이남의 좌익 정파들은 이북 지도부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해방공간 속의 민족주의자
친일파-대지주 정당인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짜였고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둘러싸고 가짜와 진짜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경계선이 분명해졌다.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은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1947년 7월 좌측 핵심인물 여운형의 암살을 비롯한 좌우 양측의 견제 속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중간파’로 불린 이 집단은 분단건국의 길로 접어든 1947년 말부터 통일건국을 위한 남북협상 운동을 벌이나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미국과 소련의 역할
연합국 중 실세이며 전후 질서의 중심축이 될 두 나라가 조선을 전리품으로 챙긴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의 좌익과 민족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를 통해 자치 체제를 최대한 빨리 갖추도록 도와준 반면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총독부이 이민족 지배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차이는 해방된 조선 사회의 추세가 미국보다 소련에 유리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자연스런 추세에 편승하면 되고 미국은 가로막아야 되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었다. 분단건국에 대한 동기도 미국 측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건국이 되어서는 소련 측에 유리한 결과가 될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소련도 통일건국에 집착하지 않고 절반을 확보하는 데 만족했는데, 압도적 경제력을 가진 미국이 핵무기까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찰국가 남조선
미군의 남조선 지배는 일본 식민통치보다 더 많이 폭력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 자신은 물론 제국주의 일본에서조차 시행하지 않았던 국가경찰 제도를 남조선에 도입하고 파시스트 성향의 인물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미군정 3년 동안 남조선 경찰 인원은 일제 말기의 3배 가까이 늘어났고 식민지경찰 출신자들이 그 중핵이 되었다. 경찰은 식민통치의 폭압적 측면을 해방 조선에 증폭 재현하고 건국 후에도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을 규정하는 강력한 조건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건국으로 치달은 것이 우연이었는가, 필연이었는가? 그 책임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분단과 민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 떠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가 1945년 6월에서 1946년 12월까지 ‘해방공간’ 전반기를 다룬 『해방일기 상편』이 전5권으로 완성하였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허울만의 해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이 가져다준 상황은 암담한 것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독립’이 저절로 보장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김기협 교수는 해방이란 좋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분단건국과 전쟁의 참극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시각에 대해 “그렇게 좋은 기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전쟁 승리는 미국과 소련의 힘이 거둔 것이었고, 두 나라는 그 힘으로 승리의 상품을 거머쥐고 있었다”고 단언하면서도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같은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난다”고 소회했다.
당시 정국을 지배한 것은 극좌와 극우의 대립으로 보이기 쉽다. 극좌와 극우는 분단건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 사람들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가운데 이승만, 조병옥, 김일성, 박헌영 등 극우와 극좌가 주어진 상황에 편승했을 뿐 역사 전개에 능동적 공헌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노력이 좌절된 것은 주어진 상황이 너무 엄혹했기 때문이지만 그 자세에 우리가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중간파의 가르침이 무시되어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당시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밀려난 것과 같은 상황이 수십 년간 분단-대립 속에 계속된 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대립의식이 크게 완화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그들을 제대로 살피는 눈길이 적은 것은 승리자만을 받드는 극한 경쟁사회의 속성 때문 아닐까? 다음은 해방공간 전반기를 살핀『해방일기』상편의 주요 주제이다.
-조선 독립의 약속 카이로선언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은 겉으로는 인도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의 항복 후 연학국의 오스트리아와 조선 점령에 있어서도 겉으로는 ‘해방’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전리품으로서 ‘정복’의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준비
항일투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한국인의 주관이다. 연합국의 눈에는 일본 패망에 대한 조선인의 공헌이 무시할 만한 정도였다. 1930년대까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도 전쟁 중에는 밀려나 있었고 화북의 조선의용군도 전투에 참여할 수준이 못 되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내에서 항일의 자세를 지킨 사람들은 좌익과 우익에 있었지만 일제 말기 전쟁 중에는 아무런 조직 활동도 없는 상태였다. 여운형의 ‘건국동맹’만이 조직 활동을 주장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치 못하다.
-해방공간 속의 친일파
일본 통치의 종식으로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 될 입장이었고 실제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처단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총독부를 계승했으므로 이민족 통치에 협력하던 친일파의 역할이 계속될 수 있었고, 미군정이 총독부보다 통치 능력이 못한 만큼 친일파의 역할은 오히려 더 커졌다. 친일파는 미군정의 비호 아래 세력을 더욱 키워 친일파를 처단할 만한 민족국가가 세워지지 않도록 획책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친일파의 이런 노력을 ‘반공’의 명분으로 정당화해 주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추구했다.
-해방공간 속의 좌익
좌익의 성장에는 두 갈래의 힘이 뒤얽혀 작용했다. 하나는 식민지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 인식에 기초한 자생적 깨달음이었고, 또 하나는 소련과 코민테른, 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이었다. 전자가 범 좌익 형성의 토대였고, 후자는 해방 후 ‘공산당’의 간판을 걸었다. 소련군의 이북 진주에 따라 이북에서는 공산당 중심으로 범 좌익이 북로당을 결성한 반면 이남에서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으로 이북의 공산당-북로당이 실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남로당을 위시한 이남의 좌익 정파들은 이북 지도부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해방공간 속의 민족주의자
친일파-대지주 정당인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짜였고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둘러싸고 가짜와 진짜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경계선이 분명해졌다.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은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1947년 7월 좌측 핵심인물 여운형의 암살을 비롯한 좌우 양측의 견제 속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중간파’로 불린 이 집단은 분단건국의 길로 접어든 1947년 말부터 통일건국을 위한 남북협상 운동을 벌이나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미국과 소련의 역할
연합국 중 실세이며 전후 질서의 중심축이 될 두 나라가 조선을 전리품으로 챙긴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의 좌익과 민족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를 통해 자치 체제를 최대한 빨리 갖추도록 도와준 반면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총독부이 이민족 지배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차이는 해방된 조선 사회의 추세가 미국보다 소련에 유리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자연스런 추세에 편승하면 되고 미국은 가로막아야 되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었다. 분단건국에 대한 동기도 미국 측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건국이 되어서는 소련 측에 유리한 결과가 될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소련도 통일건국에 집착하지 않고 절반을 확보하는 데 만족했는데, 압도적 경제력을 가진 미국이 핵무기까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찰국가 남조선
미군의 남조선 지배는 일본 식민통치보다 더 많이 폭력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 자신은 물론 제국주의 일본에서조차 시행하지 않았던 국가경찰 제도를 남조선에 도입하고 파시스트 성향의 인물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미군정 3년 동안 남조선 경찰 인원은 일제 말기의 3배 가까이 늘어났고 식민지경찰 출신자들이 그 중핵이 되었다. 경찰은 식민통치의 폭압적 측면을 해방 조선에 증폭 재현하고 건국 후에도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을 규정하는 강력한 조건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추천평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통쾌하면서 낄길댔던 부분이 바로 대담한 해석과 과감한 추측입니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에 주목한 것입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대한민국사』저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대한민국사』저자)
저자가 해방 정국을 통해 찾아낸 것은 오늘의 비이성적인 정치의 기원이었습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한국전쟁』저자)
박태균 (서울대 교수·『한국전쟁』저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후 근 20년 동안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장정일 (소설가)
장정일 (소설가)
'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 > 1.해방전후.미군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일기 7권 (0) | 2021.11.28 |
---|---|
해방일기 6권 (0) | 2021.11.28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대한민국 이야기 (0) | 2021.11.27 |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길 (0) | 2021.11.01 |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0) | 2021.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