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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패망의 잿더미에서 일본의 지성들이 써 내려간 참회록!
쇼와공황에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이르기까지
파시즘과 군국주의, 제국주의 침략의 구조와 허상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전쟁에 반대하며 숨죽이고 있던 진보적 학자들이 태평양전쟁 패망 직후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역사학연구회도 그중 하나였다. 동경대 사학과를 중심으로 ‘과학적 역사’와 ‘유물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를 표방해 오던 일단의 연구자들이 주요 멤버이다. 이들은 전쟁 전부터 일본의 천황제와 배타적 침략주의 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천황제와 파시즘, 그리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집대성했다. 그 결실이 바로 1953년부터 1954년에 걸쳐 출간된 “태평양전쟁사”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당대 최고의 연구자 약 50여 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이 책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엄밀하게 분석한 최고의 역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번 1권에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다루었고 2권에서는 진주만공격에서부터 패전까지, 3권에서는 전후 일본과 세계의 정서를 담아 완간할 예정이다.
쇼와공황에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이르기까지
파시즘과 군국주의, 제국주의 침략의 구조와 허상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전쟁에 반대하며 숨죽이고 있던 진보적 학자들이 태평양전쟁 패망 직후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역사학연구회도 그중 하나였다. 동경대 사학과를 중심으로 ‘과학적 역사’와 ‘유물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를 표방해 오던 일단의 연구자들이 주요 멤버이다. 이들은 전쟁 전부터 일본의 천황제와 배타적 침략주의 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천황제와 파시즘, 그리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집대성했다. 그 결실이 바로 1953년부터 1954년에 걸쳐 출간된 “태평양전쟁사”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당대 최고의 연구자 약 50여 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이 책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엄밀하게 분석한 최고의 역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번 1권에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다루었고 2권에서는 진주만공격에서부터 패전까지, 3권에서는 전후 일본과 세계의 정서를 담아 완간할 예정이다.
목차
펴내는 글
들어가며 일본군국주의의 성격
제1절 압박 받는 나라에서 압박하는 나라로
제2절 제국주의 확립
제3절 전반적 위기
제4절 파국: 다시 압박당하는 국가로
제1편 만주사변
제1장 세계의 변모
제1절 중국혁명과 열강
제2절 세계공황과 국제정세의 변모
제2장 공황 속의 일본
제1절 금융공황과 산둥출병
제2절 이노우에(井上) 재정과 시데하라(幣原) 외교 9
제3장 만주사변
제1절 절박한 만몽문제
제2절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
제3절 5·15사건
제4절 국제연맹 탈퇴와 탕구(塘沽)정전협정의 체결
제4장 비상시국
제1절 군수 인플레이션과 농업 공황
제2절 파시즘의 진전
제3절 비상체제와 언론탄압
제4절 만주 경영과 화베이 침략
제2편 중일전쟁
제1장 파시즘과 인민전선
제1절 베르사유체제의 붕괴
제2절 반파시즘 인민전선
제2장 2·26사건과 준전시체제
제1절 2·26사건
제2절 준전시체제화와 일독방공협정
제3절 인민전선운동의 전개
제4절 하야시(林) 내각에서 고노에(近衛) 내각으로
제3장 중일전쟁의 발단
제1절 전쟁 전야의 중국
제2절 중일전쟁의 발발
제3절 전쟁의 전개와 그 영향
제4장 중일전의 장기화와 국내정세
제1절 장기전 속의 중국
제2절 전시경제와 독점자본
제3절 문화탄압과 저항
제5장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일본
제1절 일독군사동맹 문제와 국제대립의 격화
제2절 뮌헨협정
제3절 아베(安部)·요나이(米?) 내각의 동요
마치며
들어가며 일본군국주의의 성격
제1절 압박 받는 나라에서 압박하는 나라로
제2절 제국주의 확립
제3절 전반적 위기
제4절 파국: 다시 압박당하는 국가로
제1편 만주사변
제1장 세계의 변모
제1절 중국혁명과 열강
제2절 세계공황과 국제정세의 변모
제2장 공황 속의 일본
제1절 금융공황과 산둥출병
제2절 이노우에(井上) 재정과 시데하라(幣原) 외교 9
제3장 만주사변
제1절 절박한 만몽문제
제2절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
제3절 5·15사건
제4절 국제연맹 탈퇴와 탕구(塘沽)정전협정의 체결
제4장 비상시국
제1절 군수 인플레이션과 농업 공황
제2절 파시즘의 진전
제3절 비상체제와 언론탄압
제4절 만주 경영과 화베이 침략
제2편 중일전쟁
제1장 파시즘과 인민전선
제1절 베르사유체제의 붕괴
제2절 반파시즘 인민전선
제2장 2·26사건과 준전시체제
제1절 2·26사건
제2절 준전시체제화와 일독방공협정
제3절 인민전선운동의 전개
제4절 하야시(林) 내각에서 고노에(近衛) 내각으로
제3장 중일전쟁의 발단
제1절 전쟁 전야의 중국
제2절 중일전쟁의 발발
제3절 전쟁의 전개와 그 영향
제4장 중일전의 장기화와 국내정세
제1절 장기전 속의 중국
제2절 전시경제와 독점자본
제3절 문화탄압과 저항
제5장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일본
제1절 일독군사동맹 문제와 국제대립의 격화
제2절 뮌헨협정
제3절 아베(安部)·요나이(米?) 내각의 동요
마치며
책 속으로
일본의 자본주의는 대공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감행한 만주사변을 통해 전시경제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일단 재기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심각한 모순과 위기를 내포한 것이었다.
‘재정의 베테랑’으로 불리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대장성 대신으로 임명한 이누카이 내각의 초기 경제시책은 금 수출 재금지였는데, 이것은 국제자본시장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엔화를 평가절하(환율인상)함으로써 덤핑 수출을 늘려 결국 미국·영국과의 통상 경쟁에 도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전쟁과 시국 수습을 위한 경비를 공채로 메워나가는 재정 인플레이션을 초래함으로써 침략을 위한 경제체제 굳히기에 들어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카하시 대장대신은 이전 내각의 긴축재정, 채권발행 자제 방침, 증세계획 등을 폐기했다. 1932년도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5억 엔이 늘었고, 공채 발행액은 이미 1932년도에 10억 엔에 달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은 직접군사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적자공채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다카하시 대장대신은 일본은행의 국채매수1와 공채시장 조작이라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것은 산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거대은행에 집중된 막대한 잉여자본에 국채라는 유리한 투자대상을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전쟁비용 조달이라는 군 부의 요구와 투자난에 고심하는 금융자본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한 이것은 직접적인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도자들은 이 방법을 ‘일석삼조’의 ‘묘안’이라고 자화자찬했으나, 결국 일본의 재정적 곤란을 해결할 수 없었고 인플레이션도 막지 못했다. --- p.236~237
류타오거우(柳條溝)에서 발생한 한 발의 폭음이 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된 것처럼 8년 동안에 걸친 중일전쟁의 발화점도 어처구니없이 용왕묘(龍王廟)에서 들려온 한 발의 총성이었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서남부 펑타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던 루거우차오 바로 옆의 용왕묘 부근에서 시위하듯 야간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긴장된 화베이 지역의 정세 속에서 야간에, 그것도 무장을 통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사건 발발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엄명을 내려 성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다시 도발적인 군사훈련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 종료 직전에 일본군 머리 위로 한 발의 작은 총탄이 날아갔다고 연습부대가 주장하고 나섰다. 총성을 듣고 부대장이 곧바로 부하들을 점호했는데 1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군이 완핑현성(宛平縣城)을 침략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행방불명되었다는 병사는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대오를 이탈했을 뿐이었다.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연대장 모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대좌는 이 사건을 구실 삼아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에게 무조건 즉각적으로 완핑현성을 비우라고 요구했고, 회답이 없자 곧바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루거우차오, 용왕묘 등을 점령하고 베이징에서 톈진, 바오딩(保定) 방면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인 융딩허(永定河) 좌안 일대를 제압했다. --- p.418~419
아시아에서 중일전쟁의 포성이 멈추었을 때 유럽에서는 독일의 전쟁준비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933~1934년도 독일의 군사비는 30억 마르크였는데 1936~1937년도에는 126억 마르크로 불어났다. 그리고 1936년 독일 공군의 작전용 비행기 수는 2,000기에 달해 영국의 공군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군사용 화학공업의 발전은 매우 급격히 이루어졌다. 이제 나치 독일은 침략을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나타난 침략프로그램은 유럽의 약소국을 희생양으로 삼는 확장정책과 소련 특히 우크라이나 점령과 프랑스 격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앞서 본 에티오피아, 스페인에 이어 유럽의 약소민족이 먼저 먹잇감이 된 것이다.
때마침 정세는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오스트리아 문제로 인한 이탈리아와의 갈등은 이미 독일-이탈리아 추축 결성을 통해 제거되었다. 1937년 5월 성립한 영국의 체임벌린 내각은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유지했고 7월에 시작된 극동의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에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로써 독일의 오스트리아 점령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재정의 베테랑’으로 불리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대장성 대신으로 임명한 이누카이 내각의 초기 경제시책은 금 수출 재금지였는데, 이것은 국제자본시장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엔화를 평가절하(환율인상)함으로써 덤핑 수출을 늘려 결국 미국·영국과의 통상 경쟁에 도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전쟁과 시국 수습을 위한 경비를 공채로 메워나가는 재정 인플레이션을 초래함으로써 침략을 위한 경제체제 굳히기에 들어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카하시 대장대신은 이전 내각의 긴축재정, 채권발행 자제 방침, 증세계획 등을 폐기했다. 1932년도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5억 엔이 늘었고, 공채 발행액은 이미 1932년도에 10억 엔에 달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은 직접군사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적자공채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다카하시 대장대신은 일본은행의 국채매수1와 공채시장 조작이라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것은 산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거대은행에 집중된 막대한 잉여자본에 국채라는 유리한 투자대상을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전쟁비용 조달이라는 군 부의 요구와 투자난에 고심하는 금융자본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한 이것은 직접적인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도자들은 이 방법을 ‘일석삼조’의 ‘묘안’이라고 자화자찬했으나, 결국 일본의 재정적 곤란을 해결할 수 없었고 인플레이션도 막지 못했다. --- p.236~237
류타오거우(柳條溝)에서 발생한 한 발의 폭음이 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된 것처럼 8년 동안에 걸친 중일전쟁의 발화점도 어처구니없이 용왕묘(龍王廟)에서 들려온 한 발의 총성이었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서남부 펑타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던 루거우차오 바로 옆의 용왕묘 부근에서 시위하듯 야간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긴장된 화베이 지역의 정세 속에서 야간에, 그것도 무장을 통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사건 발발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엄명을 내려 성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다시 도발적인 군사훈련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 종료 직전에 일본군 머리 위로 한 발의 작은 총탄이 날아갔다고 연습부대가 주장하고 나섰다. 총성을 듣고 부대장이 곧바로 부하들을 점호했는데 1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군이 완핑현성(宛平縣城)을 침략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행방불명되었다는 병사는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대오를 이탈했을 뿐이었다.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연대장 모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대좌는 이 사건을 구실 삼아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에게 무조건 즉각적으로 완핑현성을 비우라고 요구했고, 회답이 없자 곧바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루거우차오, 용왕묘 등을 점령하고 베이징에서 톈진, 바오딩(保定) 방면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인 융딩허(永定河) 좌안 일대를 제압했다. --- p.418~419
아시아에서 중일전쟁의 포성이 멈추었을 때 유럽에서는 독일의 전쟁준비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933~1934년도 독일의 군사비는 30억 마르크였는데 1936~1937년도에는 126억 마르크로 불어났다. 그리고 1936년 독일 공군의 작전용 비행기 수는 2,000기에 달해 영국의 공군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군사용 화학공업의 발전은 매우 급격히 이루어졌다. 이제 나치 독일은 침략을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나타난 침략프로그램은 유럽의 약소국을 희생양으로 삼는 확장정책과 소련 특히 우크라이나 점령과 프랑스 격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앞서 본 에티오피아, 스페인에 이어 유럽의 약소민족이 먼저 먹잇감이 된 것이다.
때마침 정세는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오스트리아 문제로 인한 이탈리아와의 갈등은 이미 독일-이탈리아 추축 결성을 통해 제거되었다. 1937년 5월 성립한 영국의 체임벌린 내각은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유지했고 7월에 시작된 극동의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에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로써 독일의 오스트리아 점령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 p.536
출판사 리뷰
일본 천황제와 군부, 정재계, 우익의 이합집산과 모략을 드라마틱하게 묘사
이 책은 강단 사학의 따분한 이론적 분석이 아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일본 내 다양한 세력과 정파, 파벌들 간의 이합집산과 암투, 모략과 경쟁을 생생하게 그려 낸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원로와 귀족, 중신들의 막후 정치, 여야 정당들 간의 권력투쟁, 정치인과 재벌의 결탁, 정치세력과 군부세력의 견제와 힘겨루기, 우익세력과 군부의 결탁 뿐만 아니라, 구 재벌과 신흥 재벌 간의 경쟁, 우익세력 내부의 경쟁과 분화, 군부 내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결, 관동군의 폭주와 군 수뇌부의 기괴한 협조, 육군과 해군의 반목과 경쟁, 혁신세력과 노농운동의 부침, 분열 등을 보여준다. 각 세력 내에서의 다양한 파벌과 암투가 상세히 묘사되고 있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경제구조, 문화예술 분야에 관한 세밀한 분석과 논평
이 책은 각 시대별, 단계별, 지역별 경제구조에 관한 세밀한 분석과 통계 자료를 담고 있다. 세계적 공황과 통화, 금융 등의 거시경제 분석부터 중화학공업, 군수공업, 면방직 등 산업구조의 변화와 조선과 일본 서민들의 생필품 가격에 대한 묘사까지 총망라한다. 또한 국제적 환경의 변화가 각 지역의 사회변화와 서민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한다.
문화와 예술, 일상에 대한 천착은 가히 선구적이라고 할 만 한다.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 엘리트들의 사상적 동향은 물론이고, 문학작품과 연극, 예술과 교육, 과학계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일제의 규제와 군국주의의 폭압이 강도를 더해갈수록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어떻게 저항했고 탄압당하고 투항하고 전향했는지, 또 그런 가운데 명멸해 간 수많은 테제와 선언, 명저와 걸작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감회가 새로울 수 있다.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라 일본과 조선, 중국 등 동아시아의 시대상과 문화, 예술 분야에 관한 통사적 성격의 ‘문화사’로서 손색이 없다.
유럽과 아시아의 파시즘과 제국주의, 해방운동
이 책은 비단 ‘태평양’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사”는 신해혁명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쳐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에 걸친 일제의 중국침략과 지배, 혁명과 전쟁의 역사를 끈질기고 치밀하게 분석한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 파시즘 대 반파시즘 전쟁의 하나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전쟁, 해방운동을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룬다.
특히 이번 《태평양전쟁사 1》은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서는 나치와 파시즘 세력이 점차 침략노선을 노골적으로 전개함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책임 있는 서방 국가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가해국 일본에 대한 내재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승전국과 연합국들의 탐욕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속성과 오만이 어떻게 세계적 차원의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유발하는 데 기여하고, 또 전후 질서의 계속된 왜곡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비판한다. 중국과 유럽의 현대사 속에서 태평양전쟁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공허한 반성
일본의 침략주의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조선과 만주, 타이완 등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식민지인들의 비참한 현실과 고통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공감하고 연민의 시선을 드러냈다.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배에 따른 조선의 농촌과 민중들의 고통을 상세히 서술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을 반제국주의 운동의 동류로 인정하기도 했다. 만보산사건 역시 만주 지역에서 조선 농민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던 점을 지적했고, 중일전쟁 이후 총동원법 시행에 따라 만주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노예와 같이 강제동원’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밖에도 일본의 공황 등 경제적 위기를 탈피하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강화했다는 것을 치밀하게 입증하고 있다. 흥남의 조선질소비료, 수품댐, 부전강댐, 장진강댐 등을 건설해 막대한 부를 쌓은 일본 신흥재벌들의 성장배경에 관해서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 자체를 철저히 반성하고 그에 따른 실천과 행동에 나선 지식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 책은 강단 사학의 따분한 이론적 분석이 아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일본 내 다양한 세력과 정파, 파벌들 간의 이합집산과 암투, 모략과 경쟁을 생생하게 그려 낸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원로와 귀족, 중신들의 막후 정치, 여야 정당들 간의 권력투쟁, 정치인과 재벌의 결탁, 정치세력과 군부세력의 견제와 힘겨루기, 우익세력과 군부의 결탁 뿐만 아니라, 구 재벌과 신흥 재벌 간의 경쟁, 우익세력 내부의 경쟁과 분화, 군부 내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결, 관동군의 폭주와 군 수뇌부의 기괴한 협조, 육군과 해군의 반목과 경쟁, 혁신세력과 노농운동의 부침, 분열 등을 보여준다. 각 세력 내에서의 다양한 파벌과 암투가 상세히 묘사되고 있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경제구조, 문화예술 분야에 관한 세밀한 분석과 논평
이 책은 각 시대별, 단계별, 지역별 경제구조에 관한 세밀한 분석과 통계 자료를 담고 있다. 세계적 공황과 통화, 금융 등의 거시경제 분석부터 중화학공업, 군수공업, 면방직 등 산업구조의 변화와 조선과 일본 서민들의 생필품 가격에 대한 묘사까지 총망라한다. 또한 국제적 환경의 변화가 각 지역의 사회변화와 서민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한다.
문화와 예술, 일상에 대한 천착은 가히 선구적이라고 할 만 한다.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 엘리트들의 사상적 동향은 물론이고, 문학작품과 연극, 예술과 교육, 과학계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일제의 규제와 군국주의의 폭압이 강도를 더해갈수록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어떻게 저항했고 탄압당하고 투항하고 전향했는지, 또 그런 가운데 명멸해 간 수많은 테제와 선언, 명저와 걸작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감회가 새로울 수 있다.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라 일본과 조선, 중국 등 동아시아의 시대상과 문화, 예술 분야에 관한 통사적 성격의 ‘문화사’로서 손색이 없다.
유럽과 아시아의 파시즘과 제국주의, 해방운동
이 책은 비단 ‘태평양’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사”는 신해혁명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쳐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에 걸친 일제의 중국침략과 지배, 혁명과 전쟁의 역사를 끈질기고 치밀하게 분석한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 파시즘 대 반파시즘 전쟁의 하나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전쟁, 해방운동을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룬다.
특히 이번 《태평양전쟁사 1》은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서는 나치와 파시즘 세력이 점차 침략노선을 노골적으로 전개함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책임 있는 서방 국가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가해국 일본에 대한 내재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승전국과 연합국들의 탐욕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속성과 오만이 어떻게 세계적 차원의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유발하는 데 기여하고, 또 전후 질서의 계속된 왜곡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비판한다. 중국과 유럽의 현대사 속에서 태평양전쟁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공허한 반성
일본의 침략주의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조선과 만주, 타이완 등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식민지인들의 비참한 현실과 고통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공감하고 연민의 시선을 드러냈다.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배에 따른 조선의 농촌과 민중들의 고통을 상세히 서술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을 반제국주의 운동의 동류로 인정하기도 했다. 만보산사건 역시 만주 지역에서 조선 농민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던 점을 지적했고, 중일전쟁 이후 총동원법 시행에 따라 만주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노예와 같이 강제동원’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밖에도 일본의 공황 등 경제적 위기를 탈피하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강화했다는 것을 치밀하게 입증하고 있다. 흥남의 조선질소비료, 수품댐, 부전강댐, 장진강댐 등을 건설해 막대한 부를 쌓은 일본 신흥재벌들의 성장배경에 관해서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 자체를 철저히 반성하고 그에 따른 실천과 행동에 나선 지식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추천평
『태평양전쟁사』는 패전 직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써 내려간 참회의 기록이다.
천황제를 주축으로 한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동아시아와 세계사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한 명저이다.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은밀하게 열독하며 번뇌하게 만들었던 책이다.
이러한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읽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 미츠이 다카시(三ツ井 崇) (동경대학 교수 | 동아시아, 조선·한국 전공)
한국에서 『태평양전쟁사』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이다.
이 책은 전후 일본의 지성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산맥 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에 걸친 일본의 현대사를 천황제와 파시즘, 제국주의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필연적인 패망의 역사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모여서 이론적 분석을 집대성했다는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아시아역사자료센터 소장, 일본 외무성 외교문서 편찬위원장, 전 쓰쿠바대학 교수 - 일본정치외교사)
천황제를 주축으로 한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동아시아와 세계사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한 명저이다.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은밀하게 열독하며 번뇌하게 만들었던 책이다.
이러한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읽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 미츠이 다카시(三ツ井 崇) (동경대학 교수 | 동아시아, 조선·한국 전공)
한국에서 『태평양전쟁사』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이다.
이 책은 전후 일본의 지성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산맥 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에 걸친 일본의 현대사를 천황제와 파시즘, 제국주의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필연적인 패망의 역사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모여서 이론적 분석을 집대성했다는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아시아역사자료센터 소장, 일본 외무성 외교문서 편찬위원장, 전 쓰쿠바대학 교수 - 일본정치외교사)
목차
펴내는 글
제3편 태평양전쟁 전기
제1장 유럽에서의 전쟁
제1절 프랑스의 항복
제2절 독·소전쟁의 개시
제2장 일본파시즘의 확립
제1절 고노에 신체제운동
제2절 전시경제와 식민지 수탈
제3절 중국지배의 교착
제3장 일·미 대립의 격화
제1절 중국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제2절 일·미교섭
제4장 태평양전쟁의 개시
제1절 도조 정권의 성립과 개전
제2절 서전의 성공과 그 파탄
제3절 도조의 독재와 익찬정치체제
제4절 전시경제의 모순 확대
제5절 전시하의 사상과 문화
제4편 태평양전쟁 후기
제1장 이탈리아와 독일의 항복
제1절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이탈리아의 항복
제2절 독일의 항복과 소련·미국·영국의 관계
제2장 일본군의 패퇴
제1절 태평양전선
제2절 중국전선
제3절 대동아공영권의 붕괴
제3장 전시경제와 국민생활의 파탄
제1절 경제의 붕괴
제2절 국민생활의 파탄
제4장 일본의 항복
제1절 연합군의 총공세와 도조정권의 붕괴
제2절 고이소·스즈키 내각과 종전공작
제3절 포츠담선언
제4절 소련의 참전과 항복
제5장 전쟁의 의의와 결과
제1절 국제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역할
제2절 국내 각 계급의 동향
마치며
제3편 태평양전쟁 전기
제1장 유럽에서의 전쟁
제1절 프랑스의 항복
제2절 독·소전쟁의 개시
제2장 일본파시즘의 확립
제1절 고노에 신체제운동
제2절 전시경제와 식민지 수탈
제3절 중국지배의 교착
제3장 일·미 대립의 격화
제1절 중국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제2절 일·미교섭
제4장 태평양전쟁의 개시
제1절 도조 정권의 성립과 개전
제2절 서전의 성공과 그 파탄
제3절 도조의 독재와 익찬정치체제
제4절 전시경제의 모순 확대
제5절 전시하의 사상과 문화
제4편 태평양전쟁 후기
제1장 이탈리아와 독일의 항복
제1절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이탈리아의 항복
제2절 독일의 항복과 소련·미국·영국의 관계
제2장 일본군의 패퇴
제1절 태평양전선
제2절 중국전선
제3절 대동아공영권의 붕괴
제3장 전시경제와 국민생활의 파탄
제1절 경제의 붕괴
제2절 국민생활의 파탄
제4장 일본의 항복
제1절 연합군의 총공세와 도조정권의 붕괴
제2절 고이소·스즈키 내각과 종전공작
제3절 포츠담선언
제4절 소련의 참전과 항복
제5장 전쟁의 의의와 결과
제1절 국제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역할
제2절 국내 각 계급의 동향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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