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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치와 비전』은 미국의 살아 있는 정치사상가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학자로 꼽히는 셸던 월린이 1950~60년대 정치철학에 대한 실증주의의 비판과 규범적 정치철학으로의 회귀라는 당대의 시대 분위기에 맞서 정치적인 것의 독특성과 자율성을 재확언하고 있는 책이다.
첫 출간 후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물리면서 『정치와 비전』의 내용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으며, 이런 흐름은 부시 정부하의 현 미국 민주주의를 “전도된 전체주의”로 그려내는 데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정치사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다투는 하나의 방법으로 정치사상사를 기술하고 있다.
정치사상의 오랜 주제들이 우리의 현실적 문제와 얼마나 깊이 맞닿아 있는지 지적하며 1922년생의 월린은 여전히 청년 못지않은 열정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민중적 활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과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책이다.
첫 출간 후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물리면서 『정치와 비전』의 내용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으며, 이런 흐름은 부시 정부하의 현 미국 민주주의를 “전도된 전체주의”로 그려내는 데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정치사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다투는 하나의 방법으로 정치사상사를 기술하고 있다.
정치사상의 오랜 주제들이 우리의 현실적 문제와 얼마나 깊이 맞닿아 있는지 지적하며 1922년생의 월린은 여전히 청년 못지않은 열정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민중적 활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과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책이다.
목차
증보판 서문
서문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
1. 탐구 형식으로서 정치철학
2. 형식과 실질
3.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제도
4. 정치철학과 정치적인 것
5. 정치철학의 용어
6. 비전과 정치적 상상력
7. 정치적 개념과 정치적 현상
8. 담론의 전통
9. 전통과 혁신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
1. 정치철학의 발명
2. 철학과 사회
3. 정치와 지식 체계론
4. 사심 없는 도구를 찾아서
5. 권력의 문제
6. 정치적 지식과 정치 참여
7. 통일성의 한계
8. 플라톤의 모호성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
1. 정치적인 것의 위기
2. 공간의 새로운 차원
3. 시민됨과 이탈
4. 정치와 로마 공화정
5. 이익의 정치
6. 정치적 결사에서 권력 조직으로
7. 정치철학의 쇠퇴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
1. 초기 기독교에서 정치적 요소: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념
2. 정체政體로서의 교회: 정치 질서에 대한 도전
3. 교회-사회에서 정치와 권력
4. 정치화된 종교의 당혹스러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과제
5. 재강조된 교회-사회의 정체성: 시간과 운명
6. 정치사회와 교회-사회
7. 종교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 중세 기독교 사상에 대한 보충 설명
제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1. 정치 신학
2. 루터 사상의 정치적 요소
3. 제도에 대한 불신
4. 정치적 질서의 지위
5. 균형추 없는 정치 질서
6. 단순 소박함의 열매
제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
1. 질서의 위기와 시민성의 위기
2. 칼빈 사상의 정치적 특성
3. 교회 정부의 정치 이론
4. 정치적 질서의 복원
5. 정치적 지식
6. 정치적 직분
7. 권력과 공동체
서문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
1. 탐구 형식으로서 정치철학
2. 형식과 실질
3.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제도
4. 정치철학과 정치적인 것
5. 정치철학의 용어
6. 비전과 정치적 상상력
7. 정치적 개념과 정치적 현상
8. 담론의 전통
9. 전통과 혁신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
1. 정치철학의 발명
2. 철학과 사회
3. 정치와 지식 체계론
4. 사심 없는 도구를 찾아서
5. 권력의 문제
6. 정치적 지식과 정치 참여
7. 통일성의 한계
8. 플라톤의 모호성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
1. 정치적인 것의 위기
2. 공간의 새로운 차원
3. 시민됨과 이탈
4. 정치와 로마 공화정
5. 이익의 정치
6. 정치적 결사에서 권력 조직으로
7. 정치철학의 쇠퇴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
1. 초기 기독교에서 정치적 요소: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념
2. 정체政體로서의 교회: 정치 질서에 대한 도전
3. 교회-사회에서 정치와 권력
4. 정치화된 종교의 당혹스러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과제
5. 재강조된 교회-사회의 정체성: 시간과 운명
6. 정치사회와 교회-사회
7. 종교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 중세 기독교 사상에 대한 보충 설명
제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1. 정치 신학
2. 루터 사상의 정치적 요소
3. 제도에 대한 불신
4. 정치적 질서의 지위
5. 균형추 없는 정치 질서
6. 단순 소박함의 열매
제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
1. 질서의 위기와 시민성의 위기
2. 칼빈 사상의 정치적 특성
3. 교회 정부의 정치 이론
4. 정치적 질서의 복원
5. 정치적 지식
6. 정치적 직분
7. 권력과 공동체
책 속으로
제1장 “정치철학과 철학”에서 월린은 정치철학을 다른 형태의 탐구 형식과 연결하고 구분하면서 정치철학의 특징을 조명한다. 아울러 정치철학의 일반적 특징을 철학에 대한 정치철학의 관계, 활동으로서의 정치철학이 갖는 속성, 그 주제와 언어, 관점 또는 비전의 각도, 그리고 전통이 작동하는 방식 등을 논하면서 밝히고 있다. 제1장은 정치철학이 무엇인가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읽어 보아야 할 장이다. 다만 이 장에 서술된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고 함축적이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주요 주제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에 익숙해진 연후에야 비로소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사상을 전공하는 자라면 두고두고 여러 번 음미해 읽으면서 그 깊은 뜻을 헤아려 볼 만한 소중한 장이다.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발명자로 제시하면서 그리스에서 정치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정치철학의 출현 조건으로 정치 현상이 여타의 다른 현상들로부터 ‘분화’될 것, 독립된 사유의 형태로서 정치적 ‘설명’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정치철학을 ‘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의 산물’이라고 할 때,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정치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린은 플라톤에 이르러 정치가 ‘독자적’인 현상으로서 ‘체계적’으로 인식되었지만, 동시에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는 ‘선의 이데아’라고 하는 철학적 비전이 정치를 조형하게 됨에 따라 정치(현상)의 자율성이 현저히 위축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로부터 월린은 다양한 관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월린의 비판은 서구 정치철학사에서 플라톤 정치철학에 내연(內燃)하는 정치와 철학의 원초적인 갈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붕괴시키고 등장한 로마제국 시대를 ‘정치적인 것’의 위기로 개념화하면서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의 정치사상을 다루고 있다. 월린은 정치적 삶의 새로운 구현체이자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광대한 영토로 구성된 로마제국과, 소수의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하여 출현한 그리스 사상의 정치적 기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가 ‘정치적인 것’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가 기독교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해석한다. 이와 함께 월린은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추적하면서 정치 공동체에서 용인될 수 있는 갈등의 한계, 이런 갈등을 봉합하고 규제하는 데 있어서 정치 제도가 수행하는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익에 근거하여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지닌 함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 장에서 월린은 스토아학파의 정치철학을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앞장의 논의를 이어받아 로마 제정 시기가 서구 정치사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빈곤한 시기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이 정치사상을 재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대신 그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사안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가 정치사상의 새로운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치사상을 재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원천은 기독교가 그 구성원들에게, 충만한 참여적 삶을 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새롭고 강력한 이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데서 기인한다. 월린은 또한 기독교의 괄목할 만한 확산과 복잡한 제도적 형태로의 진화가 행동과 언어의 양 측면에서 ‘교회의 정치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런 사태 전개가 기독교 본래의 의도와 달리 서구에서 정치에 관한 교육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정치화를 통해 정치적 사유와 행동 양식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월린이 해석하건대, 중세 기독교 시대가 남긴 아이러니한 유산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대체로 정치사상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독특한 기독교적 목표를 위해 봉사하도록 사용하는 데 만족하고 그 개념들 자체의 내용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기독교 및 교회의 정치화와 함께 정치사상의 주요 개념과 범주들이 오히려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월린은 자신의 이런 논점을 초기 기독교 사상, 교회제도의 발전과 정치화 과정,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과정 및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새롭게 주장하고 주조함으로써 근대 정치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7장에서 검토하기에 앞서, 월린은 5장과 6장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고 마무리한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인 루터와 칼빈의 정치사상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월린의 해석에 따르면 루터는 종교적 사유를 탈정치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교회적 정체(政體), 곧 중세의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는데 반해, 역설적으로 칼빈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새롭게 정치적?제도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마무리지었다.
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서 월린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사상을 초기 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감으로써 종교적 체험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다. 이를 위해 루터는 조직화된 중세 교회의 권력 구조와 복잡하고 정교한 중세 신학, 곧 교회 중심주의와 스콜라 철학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종교의 탈정치화를 시도했다. 월린은 이런 루터의 사상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루터가 추구한 ‘교회의 탈정치화’가 결과적으로 세속 권력의 강화와 민족적 특수주의의 출현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에서 월린은 초기 종교개혁의 급진적인 종파들이 수많은 제도적 통제와 전통적 제약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를 계기로 분출된 원심적 에너지로 말미암아 서구 사회가 질서와 시민성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종파들이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정치 질서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부정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아노미 상황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월린이 정교한 해석을 통해 보여 주는 칼빈의 사상적 공헌은 그처럼 점증하는 위기의 와중에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시민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사상체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치 질서에 대한 신망을 회복시키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인간 본성의 정치적인 면을 깨닫게 함으로써 정치적 교육의 기초를 가르치려고 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칼빈의 교회론은, 교회-사회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조절할 제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때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이라는 통찰을 체계적으로 정교화한 작업이었다. 칼빈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권력이라는 추가적인 요소가 그 집단의 단합과 연대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최선의 교회 정체(政體)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동시에 교회에 강력한 리더십과 지도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칼빈의 기독교 사상에서 개인은 종교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라는 이중의 질서 속으로 재통합되었고, 그 질서들은 공동의 통일체 속에서 연결되었다.
제2장 “플라톤: 정치철학 대 정치”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발명자로 제시하면서 그리스에서 정치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정치철학의 출현 조건으로 정치 현상이 여타의 다른 현상들로부터 ‘분화’될 것, 독립된 사유의 형태로서 정치적 ‘설명’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정치철학을 ‘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의 산물’이라고 할 때,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정치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린은 플라톤에 이르러 정치가 ‘독자적’인 현상으로서 ‘체계적’으로 인식되었지만, 동시에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는 ‘선의 이데아’라고 하는 철학적 비전이 정치를 조형하게 됨에 따라 정치(현상)의 자율성이 현저히 위축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로부터 월린은 다양한 관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월린의 비판은 서구 정치철학사에서 플라톤 정치철학에 내연(內燃)하는 정치와 철학의 원초적인 갈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제3장 “제국의 시대: 공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붕괴시키고 등장한 로마제국 시대를 ‘정치적인 것’의 위기로 개념화하면서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의 정치사상을 다루고 있다. 월린은 정치적 삶의 새로운 구현체이자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광대한 영토로 구성된 로마제국과, 소수의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하여 출현한 그리스 사상의 정치적 기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가 ‘정치적인 것’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가 기독교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해석한다. 이와 함께 월린은 로마 공화정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추적하면서 정치 공동체에서 용인될 수 있는 갈등의 한계, 이런 갈등을 봉합하고 규제하는 데 있어서 정치 제도가 수행하는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익에 근거하여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지닌 함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 장에서 월린은 스토아학파의 정치철학을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4장 “초기 기독교 시대: 시간과 공동체”에서 월린은 앞장의 논의를 이어받아 로마 제정 시기가 서구 정치사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빈곤한 시기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이 정치사상을 재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대신 그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사안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가 정치사상의 새로운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치사상을 재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원천은 기독교가 그 구성원들에게, 충만한 참여적 삶을 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새롭고 강력한 이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데서 기인한다. 월린은 또한 기독교의 괄목할 만한 확산과 복잡한 제도적 형태로의 진화가 행동과 언어의 양 측면에서 ‘교회의 정치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런 사태 전개가 기독교 본래의 의도와 달리 서구에서 정치에 관한 교육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정치화를 통해 정치적 사유와 행동 양식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월린이 해석하건대, 중세 기독교 시대가 남긴 아이러니한 유산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대체로 정치사상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독특한 기독교적 목표를 위해 봉사하도록 사용하는 데 만족하고 그 개념들 자체의 내용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기독교 및 교회의 정치화와 함께 정치사상의 주요 개념과 범주들이 오히려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월린은 자신의 이런 논점을 초기 기독교 사상, 교회제도의 발전과 정치화 과정,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과정 및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새롭게 주장하고 주조함으로써 근대 정치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7장에서 검토하기에 앞서, 월린은 5장과 6장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고 마무리한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인 루터와 칼빈의 정치사상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월린의 해석에 따르면 루터는 종교적 사유를 탈정치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교회적 정체(政體), 곧 중세의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는데 반해, 역설적으로 칼빈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새롭게 정치적?제도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마무리지었다.
5장 “루터: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서 월린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사상을 초기 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감으로써 종교적 체험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다. 이를 위해 루터는 조직화된 중세 교회의 권력 구조와 복잡하고 정교한 중세 신학, 곧 교회 중심주의와 스콜라 철학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종교의 탈정치화를 시도했다. 월린은 이런 루터의 사상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루터가 추구한 ‘교회의 탈정치화’가 결과적으로 세속 권력의 강화와 민족적 특수주의의 출현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6장 “칼빈: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적 교육”에서 월린은 초기 종교개혁의 급진적인 종파들이 수많은 제도적 통제와 전통적 제약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를 계기로 분출된 원심적 에너지로 말미암아 서구 사회가 질서와 시민성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종파들이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정치 질서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부정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아노미 상황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월린이 정교한 해석을 통해 보여 주는 칼빈의 사상적 공헌은 그처럼 점증하는 위기의 와중에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시민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사상체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치 질서에 대한 신망을 회복시키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인간 본성의 정치적인 면을 깨닫게 함으로써 정치적 교육의 기초를 가르치려고 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칼빈의 교회론은, 교회-사회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조절할 제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때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이라는 통찰을 체계적으로 정교화한 작업이었다. 칼빈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권력이라는 추가적인 요소가 그 집단의 단합과 연대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최선의 교회 정체(政體)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동시에 교회에 강력한 리더십과 지도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칼빈의 기독교 사상에서 개인은 종교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라는 이중의 질서 속으로 재통합되었고, 그 질서들은 공동의 통일체 속에서 연결되었다.
---본문 요약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정치적인 것 그리고 ‘전도된 전체주의’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사회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 참여와 시민권은 독특한 자기 완성적 활동으로 제시되었다(“인간은 정치적인 동물”). 하지만, 18세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개념화는 상실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것’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을 표상하는 반면, 사회는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모임’을 상징한다는 믿음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공동체의 구성원됨의 의미는 주기적으로 투표하는 유권자로 축소되었으며, 정치 참여는 방어적인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서,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실증주의적 정치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 정치를 윤리적 판단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규범적 정치학(예컨대, 레오 스트라우스와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 정치철학), 정치를 부정하고, 이를 이윤 극대화의 원칙과 효율성의 논리로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들과 맞서,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를 보존하고, 이를 부단히 새롭게 재정의하고자 시도한다.
정치적인 것의 재활성화에 대한 월린의 강조는 미국에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위험할 정도로 압도하는 ‘전도된 전체주의’(전도된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은 첨부 자료 참조)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월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적인 것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임을 역설한다.
정치와 ‘비전’
『정치와 비전』에서 ‘비전’은 사실적인 차원과 상상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비전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記述的)인 보고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 ‘비전’은 미적 비전이나 종교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상상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월린은 정치철학에서 첫 번째 의미의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의미, 곧 상상력이 개입된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훨씬 더 중시한다. 정치철학자가 정치 현상을 개념화할 때 활용하는 비전은 ‘이론가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이론적 활동에서 비전의 역할이 다음 세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정치철학자는 비전을 통해 공상, 과장, 심지어 기상천외한 환상을 통해 때로 우리에게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명백하지 않았을 사물들을 보게 해 준다. 곧 이와 같은 공상적인 상(像)을 통해 그는 일반 사람들이 정치 질서가 기초해 있는 근본적인 가정을 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 홉스는 ‘사회계약’이라는 상상적 행위를 설정함으로써 정치질서가 궁극적으로 구성원들의 동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정치사상가는 정치현상을 지적으로 일관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 현상을 이른바 ‘정정된 온전함’(corrected fullness)으로 그려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상적 감수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또한 정치사상가는 정치적 삶에 대한 축소된 상, 사상가의 목표와 무관한 것들은 삭제된 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사상가 역시 직접적으로 모든 정치적 사물들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일정한 현상을 추상화하고 상호 연계성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사상사에서 상상력, 곧 비전의 역할은 단지 방법론적 편의 또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제공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전의 세 번째 기능은 사상가의 근본적인 가치━철학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를 표현하는 매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치 이론가가 역사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탈주하는 민주주의: 헌정주의 대 민주주의
월린은 현대 서구에서 민주주의로 이해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나 헌정적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적 정신을 질식시키고, 시민됨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 지극히 비판적인 급진 민주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민주주의 개념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활기에 넘친 참여와 숙의를 중시하는 참여 민주주의이다. 이 점에서 월린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기 이전까지 실현된, 기원전 5세기 경의 아테네 민주정과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민주적 반란기의 경험, 19세기 미국 민중주의자들의 경험, 그리고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경험 등을 진정한 민주적 경험으로 중시한다.
월린에게는 아마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이 구성한 자치적 공동체, 곧 단명에 그친 ‘광주 공화국’의 경험 역시 1871년의 파리 코뮌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주적 체험으로 이해될 법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월린의 비전은 제도화된 정치권 내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질서정연한 참여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민중들(빈민, 노동자, 농민, 흑인, 여성 등) 또는 시민들이 기성의 제도 밖에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생존을 타개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는 (단편적인?)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즉 그 비전은 그들이 투쟁하면서 정치공동체에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것에 관해 숙의하고, 그 숙의의 결과를 다시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action)로 옮길 때 일어나는 탈제도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월린에게 미국은 물론 현대 서구의 선진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따라서 고대부터 근대 정치사상까지를 주로 다룬 『정치와 비전』의 초판(1960년)에서는 당대의 정치에 관해 비교적 초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비판적 언급을 삼갔던 반면, 2004년에 출간된 증보판의 16장과 17장에서는 현대 미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월린의 평가에 따르면 미국은 ‘초강대국 민주주의’(superpower democracy)라는 형용 모순적 실체로 변모하고 있으며, 신보수주의 정책 결정자들은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 국가━파시즘이 내포하는 많은 함의와 더불어━로 전환시키고 있다.
월린에게 전도된 전체주의는 상호 대조적인, 그러나 반드시 대립적이지 않은 두 가지 경향의 특이한 조합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이다. 2차대전 이후 많은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시민들을 단속하고, 처벌하고, 측정하고, 지시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능력이 증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통제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자유민주적 변화들, 예를 들어 인종, 젠더, 종족 또는 성적 취향에 근거한 차별적인 관행을 폐지하고자 하는 조치들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들 및 다른 개혁들이 시민들의 권력 강화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했다면, 그것들은 또한 민주적인 반대 진영을 분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데도 이바지했고, 이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다수를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분할을 통해 통치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런 비판으로 인해 미국 정치학계에서 월린은 강경 좌파(hard-Left) 또는 좌파 자유주의자(left-liberal)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처럼 월린의 급진 민주주의적 비전은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의 형태로 개념화하는데, 그 정치적 판단은 우리의 판단이 자유주의적 거대 국가의 포획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정치제도 바깥에 소재하는 존재양식이며,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월린은 자신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탈주적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로 명명한다. 월린은 ’탈주적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재형성적 능력, 국지(지방)적이고 특수한 정치참여 양식을 고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정치참여를 고무하는 탈주적 민주주의를 국가의 밖과 옆에서 활성화시킴으로써 국가주의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사회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 참여와 시민권은 독특한 자기 완성적 활동으로 제시되었다(“인간은 정치적인 동물”). 하지만, 18세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개념화는 상실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것’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을 표상하는 반면, 사회는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모임’을 상징한다는 믿음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공동체의 구성원됨의 의미는 주기적으로 투표하는 유권자로 축소되었으며, 정치 참여는 방어적인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서,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실증주의적 정치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 정치를 윤리적 판단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규범적 정치학(예컨대, 레오 스트라우스와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 정치철학), 정치를 부정하고, 이를 이윤 극대화의 원칙과 효율성의 논리로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들과 맞서,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를 보존하고, 이를 부단히 새롭게 재정의하고자 시도한다.
정치적인 것의 재활성화에 대한 월린의 강조는 미국에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위험할 정도로 압도하는 ‘전도된 전체주의’(전도된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은 첨부 자료 참조)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월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적인 것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임을 역설한다.
정치와 ‘비전’
『정치와 비전』에서 ‘비전’은 사실적인 차원과 상상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비전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記述的)인 보고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 ‘비전’은 미적 비전이나 종교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상상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월린은 정치철학에서 첫 번째 의미의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의미, 곧 상상력이 개입된 비전이 수행한 역할을 훨씬 더 중시한다. 정치철학자가 정치 현상을 개념화할 때 활용하는 비전은 ‘이론가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이론적 활동에서 비전의 역할이 다음 세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정치철학자는 비전을 통해 공상, 과장, 심지어 기상천외한 환상을 통해 때로 우리에게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명백하지 않았을 사물들을 보게 해 준다. 곧 이와 같은 공상적인 상(像)을 통해 그는 일반 사람들이 정치 질서가 기초해 있는 근본적인 가정을 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 홉스는 ‘사회계약’이라는 상상적 행위를 설정함으로써 정치질서가 궁극적으로 구성원들의 동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정치사상가는 정치현상을 지적으로 일관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 현상을 이른바 ‘정정된 온전함’(corrected fullness)으로 그려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상적 감수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또한 정치사상가는 정치적 삶에 대한 축소된 상, 사상가의 목표와 무관한 것들은 삭제된 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사상가 역시 직접적으로 모든 정치적 사물들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일정한 현상을 추상화하고 상호 연계성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사상사에서 상상력, 곧 비전의 역할은 단지 방법론적 편의 또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제공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전의 세 번째 기능은 사상가의 근본적인 가치━철학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를 표현하는 매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치 이론가가 역사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탈주하는 민주주의: 헌정주의 대 민주주의
월린은 현대 서구에서 민주주의로 이해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나 헌정적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적 정신을 질식시키고, 시민됨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 지극히 비판적인 급진 민주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민주주의 개념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활기에 넘친 참여와 숙의를 중시하는 참여 민주주의이다. 이 점에서 월린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기 이전까지 실현된, 기원전 5세기 경의 아테네 민주정과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민주적 반란기의 경험, 19세기 미국 민중주의자들의 경험, 그리고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경험 등을 진정한 민주적 경험으로 중시한다.
월린에게는 아마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이 구성한 자치적 공동체, 곧 단명에 그친 ‘광주 공화국’의 경험 역시 1871년의 파리 코뮌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주적 체험으로 이해될 법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월린의 비전은 제도화된 정치권 내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질서정연한 참여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민중들(빈민, 노동자, 농민, 흑인, 여성 등) 또는 시민들이 기성의 제도 밖에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생존을 타개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는 (단편적인?)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즉 그 비전은 그들이 투쟁하면서 정치공동체에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것에 관해 숙의하고, 그 숙의의 결과를 다시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action)로 옮길 때 일어나는 탈제도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월린에게 미국은 물론 현대 서구의 선진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따라서 고대부터 근대 정치사상까지를 주로 다룬 『정치와 비전』의 초판(1960년)에서는 당대의 정치에 관해 비교적 초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비판적 언급을 삼갔던 반면, 2004년에 출간된 증보판의 16장과 17장에서는 현대 미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월린의 평가에 따르면 미국은 ‘초강대국 민주주의’(superpower democracy)라는 형용 모순적 실체로 변모하고 있으며, 신보수주의 정책 결정자들은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 국가━파시즘이 내포하는 많은 함의와 더불어━로 전환시키고 있다.
월린에게 전도된 전체주의는 상호 대조적인, 그러나 반드시 대립적이지 않은 두 가지 경향의 특이한 조합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이다. 2차대전 이후 많은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시민들을 단속하고, 처벌하고, 측정하고, 지시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능력이 증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통제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자유민주적 변화들, 예를 들어 인종, 젠더, 종족 또는 성적 취향에 근거한 차별적인 관행을 폐지하고자 하는 조치들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들 및 다른 개혁들이 시민들의 권력 강화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했다면, 그것들은 또한 민주적인 반대 진영을 분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데도 이바지했고, 이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다수를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분할을 통해 통치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런 비판으로 인해 미국 정치학계에서 월린은 강경 좌파(hard-Left) 또는 좌파 자유주의자(left-liberal)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처럼 월린의 급진 민주주의적 비전은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의 형태로 개념화하는데, 그 정치적 판단은 우리의 판단이 자유주의적 거대 국가의 포획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정치제도 바깥에 소재하는 존재양식이며,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월린은 자신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탈주적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로 명명한다. 월린은 ’탈주적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재형성적 능력, 국지(지방)적이고 특수한 정치참여 양식을 고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정치참여를 고무하는 탈주적 민주주의를 국가의 밖과 옆에서 활성화시킴으로써 국가주의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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