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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스투라,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

동방박사님 2022. 5. 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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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삶의 의미를 묻는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일생에 한 번쯤은 읽어 봐야 할 서양철학의 고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지만, 난해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여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니체가 죽은 지 1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곁에 남아 힘들고 지친 삶에 용기를 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도대체 어떤 책일까?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난해하게 쓰여 있는데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걸까?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기를 세워 나가라!”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통해 비수처럼 꽂히는 니체의 인생 강의!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하고 읽는 데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철학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고전을 서울대 철학과 박찬국 교수의 친절한 해설로 가장 쉽게 만나 보자.

목차

들어가며

Part 1. 차라투스트라를 만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떤 책인가

서양철학의 고전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니체의 생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 삶
꼬마 목사에서 적그리스도로
대학생 니체, 쇼펜하우어를 만나다
종합병원 니체, 사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고통이다
광인 니체, 죽어서 신화가 되다

Part 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의 하산
신은 죽었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초인은 누구인가
말세인은 벼룩처럼 가장 오래 산다
광대의 추락과 죽음

Ⅰ부: 낙타와 사자의 정신을 넘어 아이의 정신으로 살라
낙타와 사자의 정신을 넘어 아이의 정신으로
나는 전적으로 육체다
열정의 승화, 사나운 들개가 사랑스러운 새가 되다
창백한 범죄자
국가는 냉혹한 괴물이다
이웃사랑은 그대들 자신에 대한 나쁜 사랑이다
이웃사랑이 아니라 우정을!
제때에 죽어라!
천재는 인류에게 자신을 선사한다

Ⅱ부: 거대한 고통을 흔쾌히 견디는 훈련만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창조하는 자는 산모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동정은 왜곡된 권력 감정이다
평등을 떠드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타란툴라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힘을 추구한다
현대인들의 교양은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Ⅲ부: 영원회귀라는 뱀의 머리를 물어뜯으라
그것이 삶이었던가? 자! 그럼 다시 한번!
뱀의 머리를 물어뜯으라!
대도시에 침을 뱉으라!
세 가지 악덕
모든 위대한 것은 시장과 명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생겨난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

Ⅳ부: 나에게서 배우라! 웃는 것을!
가장 추악한 자는 누구인가
위에도 천민! 아래도 천민!
웃음은 신성한 것이다! 나에게서 웃는 것을 배워라

차라투스트라에게 여성과 정치를 묻다
여자에게 갈 때는 채찍을 들고 가라
새로운 귀족을 기다리며

마치며
 

저자 소개

저 : 박찬국 (Park,Chan-Kook,朴贊國)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이며 최근에는 불교와 서양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중요한 연구 과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청송학술상), 『니체와 불교』(원효학술상), 『내재적 목적론』(운제철학...
 

책 속으로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고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직접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색해 보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 p.16

니체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사상을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과 끔찍한 병고로 고통받았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사색과 저술에 몰두했습니다. 사색과 저술에 몰두하는 중에는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렸지요.
--- p.55

태양이 자신의 빛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사하듯이 차라투스트라 역시 자신의 넘치는 지혜를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고 싶어 합니다. 이를 위해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세상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을 차라투스트라는 몰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p.75

자신을 초극해 나가는 과정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기존의 자신을 해체한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의 가치에 얽매여 있는 사회와 갈등을 빚고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 있습니다.
--- p.98

아이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이 겪고 있는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으로부터도, 사자의 정신이 겪고 있는 삶의 허무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무구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 p.130

니체는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 곧 초인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 니체는 이렇게 자신을 완성하여 초인에 가까워진 인간만이 남도 제대로 도울 수 있다고 봅니다.
--- p.162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고난이나 곤경에도 불구하고 기쁘고 밝게 사는 사람만이 무기력과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위대한 사랑을 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 pp.207-208

힘에의 의지는 기존의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면서 자기 자신을 초극하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힘에의 의지는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시킵니다.
--- p.221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운명에 굴복하고 체념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자신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어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긍정하라는 의미입니다.
--- p.236

따라서 영원회귀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권태로운 모습으로 똑같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이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 p.257

니체의 귀족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니체에게서 귀족은 혈통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성취한 정신적 고귀함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귀족주의를 정신적 귀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p.328
 

출판사 리뷰

니체 사상의 정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명강의로 다시 태어나다!


누구나 한 번쯤 ‘니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책을 완독하고,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도 장바구니에 넣어 둔 채 선뜻 구매하지 못하고 있거나, 용기 있게 구입했지만 첫 장을 겨우 읽고는 바로 덮어 버린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책 읽는 능력이 부족해서 완독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K-MOOC에서 진행된 〈니체 읽기 ─ 인문고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강의 원고에서 시작됐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인생에 한번쯤 꼭 읽어 봐야 할 고전이지만, 난해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여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장을 읽다 좌절한 우리를 위해, 친절하고도 깊이 있는 해설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저자의 결심이 이 책을 완성시켰다. 이제 니체 전문가 박찬국 교수의 친절한 해설로 다시 살아난 차라투스트라를 만나, 힘들고 지친 우리 삶의 의미를 물어볼 시간이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너졌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는 ‘신’이 곧 세상의 진리였다. 모든 이들의 삶과 사상이 신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신의 뜻에 따라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과학과 철학의 발달로, 신의 존재는 점차 부정되어 갔다. 학자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아니었다. 삶의 단 하나의 진리, 신이 사라진다는 건 민중들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는 민중들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거대한 사건 뒤에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2020년,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거대한 혼란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제한당하고, 대면 시대에 적합했던 세상의 질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블루’라는 이름의 우울감을 겪으며 삶은 더욱 감당하기 힘든 것으로 변하고 있다. 신이 죽은 근대를 맞이한 민중들처럼, 우리도 대면 시대의 질서가 무너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혼란을 겪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뉴노멀(New-Normal)의 시대라고 말한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폐허에서, ‘나’ 자신이 새로운(New) 표준(Normal)이 되어 새로운 질서를 세워 나가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과거의 질서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기를 획득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은 세상에서 새로운 자기를 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는 무너진 질서 속에서 새로운 일상을 세워 나가야 하는 뉴노멀 시대의 우리에게도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자! 그럼 다시 한번!”
허무주의란 힘에의 의지로 충만한 삶


니체는 평생 병을 달고 살아서, 교수직마저도 10년 만에 내려놓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병상에서 보냈다. 살아생전에는 아무도 그의 사상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아서, 평생 고독한 시간을 보낸 비운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과연 니체는 삶의 무엇이 좋아서 끔찍한 생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걸까?
삶이 힘들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만 하느라,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업준비를 하느라, 취업하고 나서는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점점 멀어지는 내 집 마련의 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결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사회생활. 삶의 의미도, 목적도 잃은 채 하루하루 버티기만 하는 인생…. 생각해 보면 힘들고 지치는 일만 가득한 삶을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한다니?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신도 죽었다고 말했고, 원인 모를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도 말했다.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운 주장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모든 게 헛되다, 모든 게 부질없다, 모든 걸 체념한다” 등으로 귀결되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니체가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큰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생존하려는 본능에 따라 맹목적인 생존 의지를 갖고 살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힐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니체의 허무주의는 인간이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초인을 향한 힘에의 의지로 살아간다고 본다. 우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삶 앞에서도,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계속해서 극복하려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려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초인의 삶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왜 이런 힘든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고비를 넘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어려움이 불쑥 찾아온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따르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가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과 욕망을 따라 온몸으로 삶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아모르 파티(Amor Fati)’라고 불리는 운명애(運命愛)는 운명 앞에 굴복하는 마음이 아니다.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인생의 풍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아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인정하되,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넘치는 생명력으로 극복하는 자세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 힘에의 의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분출하여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사는 자세다. 영원히 반복하여 찾아오는 고난의 삶이 운명이라면, 이를 매번 극복하려고 힘을 내는 것 역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는 삶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 본문 중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사자-아이’라는 세 가지의 과정을 거쳐 성장한다고 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세 가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낙타’는 남이 시키는 대로, 종교나 사회, 부모님이 주입한 가치를 따라 사는 정신을 말한다.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사는 게 편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벌어진다. 이때 인간의 정신은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정신적인 자유를 얻고 자기 삶을 찾아 나서지만, 특별한 목표를 정하지 못해 허무함에 빠진 정신이다. 어떻게 사는 게 후회 없이 사는 삶인지, 내 욕망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지 고민하고 망설이는 정신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면 비로소 아이의 정신이 된다. ‘아이’는 반복되는 삶과 수많은 갈래로 갈린 선택지 앞에서도 고민하지 않는 정신을 말한다. 모래성을 쌓고 부수기를 반복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즐거워하며, 어떤 사회적인 시선이나 제약에도 거리낌 없이 욕망을 따라 자유롭게 산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낙타-사자-아이’의 과정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지나는 과정이 아니다.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아이가 되려면, 그 사이사이마다 철저한 ‘극복’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을 놀이하듯이 사는 아이의 정신이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초인의 정신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고 힘주어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 자연스러운 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의 의미를 잃고 허무함과 무기력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나의 무엇을 극복해야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나는 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자신을 극복하고 초인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어렵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일상을 스스로 깨는 일은 어려운 걸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새로운 길을 가 보려고 해도 선택지가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지내도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누군가 내게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려 준다면 괜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인생은 알 수 없는 돌발상황의 연속이라는데, 어떻게든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어서 인생에 벌어질 돌발상황을 줄이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마음을 ‘중력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신나게 뛰놀며 춤추듯이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과거의 평안을 지향하는 마음이 중력처럼 우리를 짓눌러서 땅에 딱 붙어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니체가 살던 시대에는 서양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인간의 여러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지금도 개성과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양심이나 신념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을 지우기도 한다. 양심은 지켰을 때 나에게도 행복을 주어야 한다. 만약 ‘착한 아이 증후군’처럼 지킬수록 나의 내면을 갉아먹는 양심이라면, 이것 역시 나를 억압하는 굴레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회에 편입되지 않으면, 내가 하던 대로 하지 않으면 배척당하고, 비난을 받을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 영원히 반복되고, 안락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짓누른다고 말한다. 몇 번을 마주쳐도 낯설고 두렵기만 한 세상 앞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고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나는 왜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렇게 사는 게 올바른 걸까?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늪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나를 괴롭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다가와 아예 절벽 끝으로 나를 내모는 것 같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디뎌 보자. 마음속에 혼돈이 가득한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마음속에 혼돈을 간직한 사람만이, 춤추는 별, 초인을 탄생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