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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혁명의 기록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동방박사님 2022. 7. 22.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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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작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짐은 빤한 일이다.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민중역사학자 이이화가 '발견'해 재조명한 전봉준 평전이다. 저자는 지난 1994년에 조직된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봉준을 새롭게 만났고 이 책의 집필을 계획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을 재조명하기에 문자로 남은 단편 기록은 자료로서 불충분했고, 구전되는 기록은 사실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웠다. 특히 민간에 전해지는 기록의 경우 '영웅'을 바랐던 민중의 바람이 개입돼 내용이 미화되기 일쑤였고,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조선 지배세력은 전봉준의 좋은 주장도 나쁘게, 바른 행동도 그르게 그렸을 뿐 아니라 아예 배제하곤 했다. 이런 탓에 전봉준의 삶을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나름의 해석을 내려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여러 이설이 나오게 됐다.

이이화는 오직 진실만을 추적하기 위해 의심하고 고증하기를 반복했다. 동학농민전쟁의 기억이 스민 현장을 수십 차례 답사하고 현지인을 증언을 수집하면서 얻은 진실부터 조선 관료들의 기록, 후대 연구자들의 평가와 일본의 기록물들까지 빠짐없이 살폈다. 특히 당시 일본 사람들이 밀정 노릇을 하면서 쓴 목격담과 신문 기사를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가난에 내몰려 떠돌이생활을 하며 민중의 삶을 목격했던 성장기부터 역적으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지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정의와 평등, 자유를 위해 저항한 인간 전봉준을 되살려냈다.

목차

여는 글 / 전봉준이 돌아왔다

|신념| 암울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

골목대장 녹두
이놈의 세상 빨리 망해야지
개혁사상가 정약용을 만나다
체구는 작았지만 눈빛은 형형하여

|봉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다

동학을 좋아한다
흥선대원군과 전봉준
그들은 왜 동학농민군이 되었을까
탐관오리 조병갑과의 기막힌 악연
사발통문을 돌리다

|저항| 지금 일어서라, 더 늦기 전에

첫 횃불, 고부를 달구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일어나면 백산, 앉으면 죽산
황토재 전투, 첫 승리를 거두다
왜 서울로 진격하지 않았을까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다

|개혁| 녹두꽃 피다

청일전쟁과 개화정권의 출범
누구든 접장, 신분을 해방하라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하여
흥선대원군의 밀서
마침내 연합전선이 이루어지다

|전투| 방관자들아, 이 외침을 들어라놀

닭고기와 개고기 먹지 마라
일본군 군화에 짓밟힌 공주
공주 대격전의 서막
우금재의 마지막 전투
방관자들아, 이 외침을 들어라
최후의 원평.태인 전투

|최후|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

피노리에서 끝내 잡히다
들것을 타고 나주에서 서울로
전봉준을 구하라
다섯 동지의 한날 죽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닫는 글\ 전봉준을 위하여

전봉준 생애
동학농민혁명 주요 유적지
관련 자료
미주
 

저자 소개

저 : 이이화 (Lee E-Hwa,李離和)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고전연구가 및 한문학자이다. 1937년에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했으며, 열여섯 살 되던 해부터 부산·여수·광주 등지에서 고학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후 서울에서 문학에 관심을 갖고 대학을 다녔으나 중퇴하고 한국학 및 한국사 탐구에 열중했다. 민족사·민중사·생활사 중심의 한...
 

출판사 리뷰

“차별 없는 세상을 허하라!” “과부의 개가를 허하라!”
백성은 나라의 근본…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주도한 휴머니스트 전봉준


전봉준은 1855년 12월, 전라북도 고창 당촌에서 태어났다. 작지만 용맹했던 소년, 가난으로 이 마을 저 마을 전전하며 산 까닭에 지배세력과 외세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목격할 수 있었던 청년기, 탐관오리 조병학의 복수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그 후 농민 봉기, 동학에 입교해 목숨 건 투쟁을 하다 결국 1895년 3월, 갑오년 농민전쟁의 책임을 지고 교수형에 처해진 비운의 혁명가로 기억된다.

전봉준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 시선으로 나눌 수 있다. 민중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을 개혁할 희망이었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에게는 ‘역적’이었으며, 일본에는 조선 침략의 ‘도구’로 이용 가치가 높았다. 여기에 전봉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욕망이 더해질 수 있겠다. 저자가 재조명한 전봉준은 불평등과 부자유에 시름하던 온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으로서 농민 봉기를 주도한 ‘휴머니스트’다. 혁명 과정에서조차 폭력에 앞세우기보다 설득하고 논의하려 노력했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혁명가 전봉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장 12가지는 당시 봉건사회의 분위기에서 보자면 특히 개혁적이다. 첫째,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계할 것. 둘째, 노비와 칠반천인과 백정의 신분 차별을 없애거나 개선할 것. 셋째, 고른 인재 등용. 넷째, 청춘과부의 개가. 다섯째, 무명잡세와 공사 채무의 해소. 여섯째, 토지의 분작 등. 봉건제도의 골간인 신분제도와 토지 문제를 대대적으로 뒤집는 요구들이다. 특히 ‘과부의 개가’는 당시 가부장제의 기준에서 나오기 힘든 혁명적일 정도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 요구조항들을 수용해 시정을 건의하기로 약속했다.

의문 1. 교수형 뒤 전봉준의 수급이 서울 거리에 효수되었다?

일본의 메사마시신문에 동학당 효수 사진이 처음 실리고,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이 사진을 수록하면서 사진 속 수급의 주인공이 전봉준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수급의 실제 주인은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서울 동대문 옆 수구문 밖 남벌원에서 참수된 최재호와 안교선이다. 전봉준이 교수형에 처해지자 조선의 지배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역적을 목 베어 조리돌리지 않았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개화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생전 전봉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호송 장면을 찍은 사진 단 한 장뿐이다.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텐신이 일본 영사인 우치다의 허락을 받아 1985년 3월 27일(양력)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사진을 찍었고 2개월이 지난 5월 10일 발매된 《사진화보》 제14권에 게재됐다. 그러나 3월 12일자 오사카매일신문이 전봉준의 호송 기사를 내보내면서 ‘압송당하는 전봉준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삽화를 함께 게재했는데, 이는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을 삽화로 그리고 다시 목판으로 만들어 찍은 것이다. (231~232쪽 참고)

의문 2. 흥선대원군과 전봉준,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가?

일본은 전봉준을 체포된 뒤 특별대우를 했다. 조선의 권설재판소로 옮겨진 뒤에도 신문 과정에서 집요하게 둘의 관계에 대해 추궁당했다. 전봉준의 입으로 흥선대원군의 동학농민전쟁 개입 사실을 확인해 정치적 타격을 입히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전봉준은 심문과정에서 일관되게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흥선대원군은 유세한 사람이어서 상관이 없었다”는 대답에서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봉준이 상경했을 때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둘이 비밀리에 반역을 모의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밀사를 보낸 적은 있었다. 두 사람은 일정한 관계를 맺긴 했지만 서로 지향하는 정치적 목적이 달랐던 만큼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저자의 말

예전 나라 안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전봉준을 ‘역적’으로 몰아서 좋은 주장도 나쁘게, 바른 행동도 옳지 못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바른 행동도 일부러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흉악한 인간’으로만 몰아갔습니다. 특히 일본사람들은 전봉준을 친일파로 끌여들여 이용하려고 온갖 회유와 음모를 꾸몄으나 전봉준은 “내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는데 나만이 목숨을 구걸할 수 없다” “당신네들이 우리나라를 도와준다고 하지만 내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얼마든지 살릴 목숨을 대의를 위해 버렸던 것입니다. 올해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날 전봉준이 바라던 평등과 자주의 세상이 열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