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일본학 연구 (학부전공>책소개)/3.일본근대사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동방박사님 2022. 7. 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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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왜 그들은 ‘천황과 국가를 위해’ 죽을 각오를 다지게 되었나?
왜 옥쇄 명령에 복종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게 되었는가?

근대국가의 사상통제, 주입된 이데올로기의 위력…
전쟁 수행에 ‘알맞게’ 폭력적인 개조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개인들
제국 시대 군인들의 생애사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되돌아보다

한국인이 제국 시대 일본군을 만나다

우리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 그야말로 자폭 공격이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 잔인함에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자살 공격을 해야만 했던 병사들의 심리에 관해서는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살 공격을 했을까? 왜 이 명령에 복종했을까? 이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까? 명령을 받은 순간 인간적인 동요는 전혀 없었을까? 무엇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했을까?

이 책은 제국 시대 일본군 병사를 직접 인터뷰해 이런 질문에 답한다. 제주도 토박이이자 해병대 장교 출신의 저자는 한국군에 스며 있는 일본군의 정신주의를 파헤치고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제국 시대 일본군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석사논문(〈총력전 체제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과 동요: 전 일본 군인·군속의 구술사를 중심으로〉)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 석사논문을 뼈대로 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옛 피식민지인이었던 한국인이 지배국 일본의 군 관계자들을 직접 인터뷰 조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실제 전쟁 체험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반도를 식민 지배했던 사람들의 의식과 심리, 사상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국가의 사회통치 시스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독창적인 저작이다. 전쟁 수행에 ‘알맞게’ 폭력적인 개조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개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입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인간 존재가 전쟁의 부속으로 가공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뒤틀림에 대해 들여다보며 전쟁의 본질과 인권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제국 시대 전쟁 체험자들을 통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한 번 더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목차

프롤로그 | 제국 시대 일본군을 만나다
제주 해안가에 있는 이상한 인공동굴 | 해병대의 ‘필사의 정신력’ ‘필승의 신념’ | 한국군에 남아 있는 일본군의 정신주의 |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1.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자라나다

‘폐하의 자녀’로 ‘나라를 위해 죽는’ 것 | 삶이 파탄 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다 | 교육의 군국주의화, 충성스런 신민 만들기 | 조선인의 ‘일본화’ 정책 | “천황은 일본의 상징일 뿐” | 사상통제의 위력, 복종하는 신민

2. 입대, 죽음의 운명공동체

만주사변, 15년 전쟁의 서막 | 그들에게 전쟁은 기회였다 | 총력전 시대, 죽음의 운명공동체 | 그들은 어떻게 입대하게 되었나

3. 군대교육, 천황의 군인으로 거듭나기

매일 밤 구타, ‘나 자신이 불쌍했다’ | 군인칙유, 천황제 국가관의 확립 |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각오를 다지다

4. 전쟁과 죽음

불침전함 야마토의 침몰 | 특공, 자살 공격을 명령받은 병사들 | “안심하고 죽어라,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질 테니” | 죽음을 앞둔 장병들의 심리 | “그래, 내가 제일 먼저 죽자” | ‘국가’에 ‘국민’은 없었다

5.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한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 “천황 폐하를 지켜야 한다” |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까”

6. 어제의 적, 오늘의 친구

“헬로, 헬로”, “땡큐, 땡큐” | 중국군의 관대한 대우

7. 새로운 세계에 드리워진 제국의 그림자

“폐하는 전쟁을 원치 않으셨어요” | 만들어진 천황의 이미지 | 야스쿠니만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 기억되지 못한 전쟁 체험 | 왜 과거사는 정리되지 못했을까

8. 그들에게 전쟁은 무엇이었나

국체사상이 일본 장병들에게 끼친 영향 | 일본군은 왜 옥쇄 명령에 복종했는가

에필로그 | 나 또한 ‘국민’으로 빚어진 존재
감사의 글

저자 소개 

저 : 박광홍
 
제주도 토박이. 제주대를 졸업하고 오사카시립대학(현 오사카공립대) 문학연구과에서 논문 〈총력전 체제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과 동요: 전 일본 군인·군속의 구술사를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서귀포 해안의 부자연스러운 구멍들이 나를 일본 유학으로 이끌었다. 그 구멍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자폭 공격을 위해 파놓은 인공동굴이었다. 국가나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신...
 

책 속으로

만약 일본의 군대문화를 정신주의라고 부른다면, 그 정신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형성된 것이며, 일본군 조직에 속했던 개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집합의식을 수용하기에 이른 것일까. 우리는 그때의 일본인들에 대해, 일본의 정신사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 p.20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나는 한국군의 정신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군의 정신론이 어떻게 빚어진 것이며 그것이 실제 일본군 장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현지에서 직접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20

이런 사회의 말로는 참담했다. 군부는 자기 자신의 출세와 보신을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전란의 수렁으로 끌고 갔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즉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벌였다는 ‘사상 탄압’이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파멸에 일조한 셈이었다.
--- p.51

이와 같이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빚어내는 작업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강도 높게 실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황국신민은 천황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을 요구받았다.
--- p.55

즈이카쿠가 침몰한 이날, 그 유명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던져 미국 함대에 격돌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등장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다. 가미카제는 일본어로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저 미끼로 쓰이다 침몰된 정규 항공모함, 전투기를 몰고 자폭하는 조종사들. 이날의 아비규환은 두 가지 사실을 방증했다. 일본군이 정상적인 작전으로는 더는 미군에게 유효타를 입힐 수 없다는 것, 정상적인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몰락했음에도 일본군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
--- p.112

특공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해군 군령부 내부의 자정 능력은 마비됐고, 광기에 찬 특공 병기 투입안이 쇼와 천황에게 곧이곧대로 보고됐다. 천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특공대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이 계획에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 p.115

이렇듯 특공은 이제 전 국민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자 의무가 됐다. ‘일억총옥쇄’ ‘일억총특공’과 같은 구호들 속에서, 누군가가 ‘항복’을 입에 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공은 적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전법을 넘어 전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는 도구가 됐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은 그렇게 지탱됐고 무의미한 희생은 늘어만 갔다.
--- p.116

그래서 우리로서는 실로 야스쿠니신사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굉장히 신성하니까, “죽으면 야스쿠니에 갈 수 있다고, 죽으면 모두 전우들과 만날 수 있다”고 했죠. 왠지 이제 꿈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식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네, 그러니까 뭐 야스쿠니신사에 들 테니까 무조건 이렇게 열심히 하라는 뜻이죠. 역시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신이라는 것은 실로 그렇죠. 신사라는 것은 무척 존귀한 것이라고 생각해버렸지요.
--- p.127~128

천황이나 국가를 위해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가운데 전우들과 재회할 수도 있다는 신앙은, 죽음에 직면한 장병들을 위로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야스쿠니신사의 존재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기시 씨의 이야기는, 장병들의 사생관에 야스쿠니신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다.
--- p.128~129

역시 말이죠. 명령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어요.
--- p.132

하지만 곧 또 출격할 테니까요. 어쨌든 곧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단 말이에요. 네, 이미 특공대로 정해지면요, 한 번 돌아와도 그다음에 또 나가게 되어 있어요. 비행기가 고장 난 경우라든가 여러 상황이 생기면 어쩔 수 없지만요.
--- p.136

어느 부대는요, 대원들을 쭉 정렬시키고서 공지했다는군요. “본 부대에서 특공대원 20명을 선발하기로 했다”고요. 제군들 중에서 20명을 특공대로서 저기 보내게 되었다고. 이 중에서 특공대원을 정하겠다고요. 계속해서 “넌 어떠냐?”고 묻는 거죠. 딱 지목해서 “히로오, 어때?”라고 하는 거죠. 거기에 대고 “지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 p.146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젊었을 때는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동안은 좋았습니다. 정말 이기고 있는 동안은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고 나서 보니 정말 아무 소용이 없는 허망한 것이네요. 한 사람 한 사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요, 안쓰럽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절대로 저거, 전쟁만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p.180

이걸 군국주의의 뿌리, 상징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라요. 다들 말이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거잖아요? 그렇죠? 어느 나라든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을 위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도조 히데키와 함께 모셨기 때문에 유감이라는 건데, 그게 이상하다니까요?
--- p.211
 

출판사 리뷰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진다”

책은 제국 시대 일본군의 생애사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전쟁을 수행한 당사자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당시의 시대상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즉 개인의 세계관이 전쟁 전에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전쟁기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전후에는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평범한 어린이가 ‘황국신민’으로 사회화된 이후 국가라는 ‘죽음의 운명공동체’를 위해 군에 입대하고, 매일 반복되는 구타 등을 이겨내며 군인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총력전 체제 안에서 인터뷰이들은 철저하게 전쟁 수행의 부속품으로 가공되었다. 국가는 오직 ‘천황’만을 위해 존재했고, 국민의 안위는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았다. 사상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개인의식은 집단의식 안에 고립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개인의식의 동요도 있었지만 표출할 수는 없었다. 개인의 양심과 권리는 총력전 체제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야스쿠니신사’는 큰 위안거리였다. 천황이나 국가를 위해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가운데 전우들과 재회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죽음에 직면한 장병들을 위로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야스쿠니신사의 존재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장병들의 사생관에 야스쿠니신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귀에 꽂혔던 단어였다. 야스쿠니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야스쿠니 신앙은 일상화된 죽음의 동요를 억제하는 강력한 장치였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127쪽) “그래서 우리로서는 실로 야스쿠니신사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굉장히 신성하니까, ‘죽으면 야스쿠니에 갈 수 있다고, 죽으면 모두 전우들과 만날 수 있다’고 했죠. 왠지 이제 꿈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식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네, 그러니까 뭐 야스쿠니신사에 들 테니까 무조건 이렇게 열심히 하라는 뜻이죠.”(127~128쪽)

책은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형성된 아이덴티티가 전후에도 개개인의 삶에 계속해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주목한다. 이를테면, 기시 우이치 씨는 천황은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천황 덕분에 일본이 성장했다는 신념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생각도 전몰자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천황은 일본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하던 히로토 아키라 씨 또한 야스쿠니신사의 존재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신사는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을 위령하는 시설”이므로 이를 트집 잡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합리하게 강요된 장병들의 죽음을 미화하면서 국민을 통합하는 사상전의 도구로 쓰였던 야스쿠니신사의 기능은 여전히 이들의 삶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자라나다

“전쟁 중이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만, 그 당시의 교육이란 결국 말이지요. ‘너희는 폐하의 자식이다. 그러니까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라는 식의 교육이었어요.”(27쪽)

제국 시대 일본은 국민의 생명보다 천황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나라였다. 인터뷰이들의 증언에서 개개인을 황국신민으로 빚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광범위한 영역에서 시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제국 일본의 교육 이념은 ‘천황 주권의 절대성’에 기초한 ‘황도주의 국체론’이었다. 학교에서부터 천황과 국체의 신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이뤄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890년에 포고된 ‘교육칙어’였다. 이를 통해 천황의 신성성을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유사시 나라와 천황을 위해 헌신할 것을 주문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시베리아 출정 등 대외전쟁이 진행되면서 국가주의 교육은 더욱 성행했고, 이와 함께 학교를 넘어 일상에서도 이런 교육이 실시되었다.

국체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은 단순히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로 사상통제의 영향도 컸다. 제국 일본은 천황 숭배·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저해하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조선독립론과 같은 ‘위험 사상’을 철저히 걸러냈다. 치안유지법의 제정과 특별고등경찰의 등장이 이런 사회의 분위기를 더욱 옥죄는 역할을 했다. 이로써 목소리를 내는 시민은 거의 사라졌고, 복종하는 ‘신민’만이 남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황국신민은 천황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을 요구받았다. “이런 사회의 말로는 참담했다. 군부는 자기 자신의 출세와 보신을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전란의 수렁으로 끌고 갔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즉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벌였다는 ‘사상 탄압’이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파멸에 일조한 셈이었다.”(51쪽)

천황의 군인으로 거듭나기

“이제는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71쪽)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계속해서 침략전쟁을 일으키며 대외 팽창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진주만공습 이후 연전연승이 이어지긴 했으나 곧 전황은 악화되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의 치명적인 패배와 뒤이어 벌어진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일본의 국운은 급격히 기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 지도자들은 국민의 생명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것을 쥐어짜 어떻게든 전쟁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 시기에 기시 씨와 히로토 씨는 조국 일본이 만주사변 이래 10년 넘게 치르고 있던 대외전쟁에 동원되었다.

기시 씨는 당시 제국 일본의 중요한 전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입대를 결심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공습을 성공시켜 일약 영웅이 되었으나, 1943년 미군기의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소년 기시 우이치는 자신이 전장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위해 입대를 선택한 기시 씨에게 국체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은 ‘죽음의 운명공동체’였다. 히로토 씨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원래는 징집유예 대상이었으나 전황이 악화하면서 그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에 따라 학도출진하게 되었다.

근대국가가 출범한 이후 전쟁 규모가 확대되었고 동시에 전쟁의 양상 역시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총력전’으로 변화했다. 총력전 체제는 전쟁에 대한 전 국민 규모의 동원이 전제된다. 그야말로 ‘죽음의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이 죽음의 운명공동체는 군대 내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지배하는 사실상의 종교가 되었다. 때문에 인터뷰이들은 입대와 전쟁 수행에 관해 어떤 이견도 낼 수 없었고,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구성원들이 가지는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전쟁 동원에서 발생하는 동요나 반발을 억제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히로토 씨는 장교로서의 책임감, 국민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죽음의 각오를 다지기까지 했다. 자신의 임무를 ‘죽는 것’이라고 강하게 인식했던 그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이를 억제하게 했다. ‘죽음의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이 전쟁에 동원되는 개인의식에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특공, 죽음을 명령받은 병사들

“‘예! 예! 예!’ 하고 모두 지원해요. 10명 있으면 10명 모두 지원하니까…… 그러면 ‘누구 누구’라고 지목하죠. 대략 정원이 3명뿐이라고 하면, 3기만 출격하게 되겠죠? 어쨌든 손을 안 드는 사람은 없을걸요? 이제 전부 다. 그 점은 뭐랄까, 역시 지원하는 게 올바르다는 분위기죠.”(137쪽)

이른바 특공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4년 10월 레이테만해전에서였다. 일본 해군과 미국 해군 사이에 벌어졌던 레이테만해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필리핀을 빼앗기면 일본은 말라죽고 만다’는 절박함에 일본 해군이 사활을 걸고 총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이 해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차츰 패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특공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해군 군령부의 광기에 찬 특공 병기 투입안이 쇼와 천황에게 곧이곧대로 보고됐고, 천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특공대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이 계획에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1944년 8월, 인간어뢰 카이텐과 자폭 보트 신요가 신병기로서 정식 채용됐다. 1944년 10월 25일에는 첫 가미카제 공격이 시행되었다.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 특공이 ‘군대’와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에 따라 특공을 찬미하는 영상과 출판물들이 쏟아졌다. 특공은 이제 전 국민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자 의무가 됐다. 전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지만, ‘일억총옥쇄’ ‘일억총특공’과 같은 구호들이 난무했고, ‘항복’을 입에 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특공은 적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전법을 넘어 전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는 도구가 됐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은 그렇게 지탱됐고 무의미한 희생은 늘어만 갔다.
육해군을 합쳐 5,000여 명의 장병들이 특공에 출격했다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동원된 대원들은 대부분 10대 중반에서 20대에 이르는 소년들과 청년들이었다. 제국의 지도부는 어린 청춘들을 자폭으로 내몰고도 패전을 막아내지 못했고, 이에 대해 책임도 지지 않았다. 특공은 당시 제국 일본에 횡행했던 인명 경시 풍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장병들은 제국 일본이 항복하는 그날까지 각자의 위치를 지켰다. 이들은 어떻게 최후의 순간까지 전쟁 수행의 부속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특공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명령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죽지 않으면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교육을 받아왔고, 이것이 ‘의무’였기 때문이다. 학교교육과 군대교육의 목적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의지를 배양시키는 데 있었다. 개인의 자기의지대로 생과 사를 선택할 수 없었다. 기시 씨는 ‘일단 명령을 받게 되면 절대 싫다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일본 군인들의 심리를 ‘교육’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그 교육을 통해 세뇌된 그들은 결코 ‘옥쇄’나 ‘특공’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항복한 날, 만들어진 천황의 이미지

“박: 높은 사람들은 그 본토결전이라는 것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요?
기시: 아니요, 이미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박: 전혀 안 된다는 걸 알았다고요?
기시: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요, 싸우지 않으면 도리가 없잖아요?”(158~159쪽)

전쟁에 가망이 없다는 것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느끼고 있던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전쟁 지도부는 전쟁에 대한 집착을 거두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1945년 8월 9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전쟁 종결을 결단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10일. 도쿄 궁성에서 모인 제국 일본 전쟁 지도부들은 일분일초가 촉박하던 그때, 천황제 유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지루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천황의 존재는 국가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본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국민의 안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항복선언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날 일부 과격파 장교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항복 찬성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8월 15일에 예정되어 있던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을 저지한 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했다. 1945년 8월에 벌어진 이 난리의 중심에는 ‘천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310만의 국민이 전쟁으로 희생된 시점이었지만, 항복 논의에 있어 국민의 안위는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았다. 항복파와 항전파를 막론하고 오직 천황제 유지가 가능하냐, 아니냐에 대해서만 핏대를 세웠을 뿐이다. 즉 천황 한 사람의 존재가 ‘일억 국민’의 생명보다도 우선시된 셈이다. 제국 일본은 국민을 위한 일본이 아닌 천황을 위한 일본이었다.

전후 이뤄진 도쿄재판에서도 천황은 면죄부를 받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천황이 재판에 넘겨지면 일본을 통치하는 자신들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진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천황에게 죄를 물으면 일본의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한 연합군사령부는 천황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당시 사형 선고를 받은 이는 7명뿐이었다. 실권 없이 무력하며 또한 그렇기에 전쟁책임에서 무결해 보이는 천황의 이미지가 도쿄재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군은 왜 옥쇄 명령에 복종했는가

이 책에는 일본의 군인 및 군속이었던 3명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총력전 체제로 형성된 개인의식이 그들의 생애에서 변모하는 양상을 살폈다. 제국 일본은 국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국가·민족 정체성을 개인에게 주입했고, 이는 죽음의 운명공동체를 전제로 한 국민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인터뷰이들은 학교교육이나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죽음의 운명공동체로 설정된 일본 국민으로 자각하게 됐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제 안에서 그들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야 할 천황의 자식들, 일본의 국민이었던 셈이다.

이 일본 국민으로서의 의식은 전쟁 체험에서도 강하게 작용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에 지원한 기시 씨의 사례는 어린 소년이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자기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전사하는 것을 “일본을 위한, 모두를 위한 죽음”으로 믿고 옥쇄를 각오했던 히로토 씨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형성된 일본 국민으로서의 일체감이 죽음까지도 전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국체사상이라는 집합의식의 압력에 눌려 있던 이들의 개인의식은 전쟁이 강요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국가에 의한 사상통제의 위력은 전시는 물론 전후에도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시의 관념이 전후에도 개인의식에 작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은 사상통제의 위력이 새삼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총력전 체제의 사상통제는 개인의식을 완전히 잠식하지는 못했지만, 그 그림자는 각 개인의 생애에 걸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추천평

옛 피식민지 지역 출신자가 지배국의 군 관계자였던 이들을 인터뷰 조사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매우 획기적이다. 거기에 저자가 군 정신교육의 대상이자 주체였다는 점은, 다른 연구자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관점을 가능하게 했다.

식민지 시기에서 현대를 관통하는 역사사회학의 관점으로 군의 정신교육에 대해 검토함으로써 사상통제의 형성을 가능케 한 근대국가의 연속적인 사회통치 시스템을 밝히고자 한다는 것, 실제 전쟁 체험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상통제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전쟁 체험이 제도적인 종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삶에 계속해서 끼치는 영향에 주목한 점, 군대만의 특수한 경험으로 간주되곤 하는 정신교육이 일본이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사상전을 넘어 세계 각지의 전쟁/분쟁 현장과 갖는 연속성/비연속성을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짚었다는 점에서 이 글은 매우 독창적이다.

이 글이 한국에 출판된다는 데에는 큰 의의가 있다. 독자들은 한반도를 식민 지배했던 사람들이 어떤 의식을 품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전쟁 당시의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시대나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들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저자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평화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이 소박한 사실을 여러분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학연구과 교수, 문화인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