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제국의 암살자들 :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

동방박사님 2022. 7. 2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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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한민국 광복 77주년에 만나는 특별한 이야기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
쫓고 쫓기던 날들의 독립운동사

일제와 밀정의 집요했던 암살 시도
끝내 살아남은 김구의 임시정부 이야기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을 거쳐 창사에 이르기까지,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로 시작해 한국특무대독립군을 결성하기까지,
일제의 집요했던 암살 시도를 뚫고 임시정부를 재건해 굳건히 나아간,
1930년대 김구의 임시정부 이야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침체돼 가던 1930년대 초, 일본이 중국 만주를 침략하면서 상하이 역시 급격한 정국 변화에 휩싸인다. 임시정부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통한 의열투쟁을 구상하고, 곧이어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실행하여 전 세계에 한국 독립의 목소리를 알린다. 이어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는 임시정부와 일시 결별, 독자 세력화에 나서고, 1935년 11월 해체 직전의 임시정부를 재건하여 마침내 ‘임시정부의 김구 시대’를 열었다.

이 책은 1929년부터 1938년까지 10년간 김구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 독립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제와 밀정들이 집요하게 시도했던 세 차례 ‘김구 암살 공작’을 다룬다. 그러면서 당시 상하이 정국의 변화와 이에 대한 임시정부의 대응, 김구와 임시정부의 관계, 김구의 독자 세력화와 임시정부 재건 과정 등을 함께 살펴본다.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되었던 쫓고 쫓기던 날들의 임시정부사 10년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목차

책을 내면서

1장 적의 요인을 암살하라

1. 반일 한중 연대를 결성하자
불타오르는 상하이의 반일 정국
항일, 같이 가지만 다른 방향
김구의 길, 한인애국단

2. 의열 투쟁으로
우가키 조선 총독 암살 계획
국제연맹조사단 앞에서 일제 요인들을 암살하라

3. 상하이를 탈출하다
아찔했던 한순간
1932년 4월 29일, 기나긴 하루
상하이 탈출의 전말

2장 임시정부와 멀어진 김구

1. 뒤쫓는 일제의 역공작
특고경찰을 강화하다
김긍호 사건
실패한 김구 체포 공작들

2. 김구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합작
밀정 옥관빈을 처단하다
옥관빈은 과연 밀정인가?

3. 김구, 임시정부와 결별하다
광둥인 장진구
증폭된 갈등, 그리고 일시 결별
뤄양 한인특별반 개설

3장 행방불명된 암살자 - 1차 김구 암살 공작

1. 나카노의 암살 계획
조선총독부 상하이 파견원, 나카노 가츠지
김구 암살 공작을 계획하다

2. 밀정 오대근의 실패
한인 공산주의자, 오대근
오대근, 밀정으로 변절하다
실패로 끝난 암살 공작

3. 김구의 독자 세력화
한국특무대독립군 결성
학생훈련소를 운영하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4장 3인의 수 싸움 - 2차 김구 암살 공작

1. 히토스키의 치밀한 계획
세 가지 공작 방안
암살 공작의 첫 단추를 꿰다

2. 암살 실행자로 나선 아나키스트 정화암
정화암, 임영창과 암살 공작을 진행하다
뜻밖의 공작 자금 요구
실패인가, 속은 것인가?

3. 2차 암살 공작의 진상
밀정 임영창은 누구인가?
이중 첩자, 위혜림
정화암은 과연 김구를 암살하려 했나?

5장 김구의 가슴에 박힌 흉탄 - 3차 김구 암살 공작

1. 임시정부 존폐의 기로에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유일당을 건설하자
김구의 임시정부 재건

2. 이운환, 김구를 쏘다
전장에서 창사로
김구, 이운환의 흉탄에 쓰러지다

3. 밀정이 된 독립운동가
혁명난류革命亂類, 박창세
황색 화살, 박제건
“내 심장에 박힌 왜적의 탄환”

맺는 글
덧붙이는 글

주註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윤대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석사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1919~1930)」를 주제로 199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근대사 전공으로, 주된 연구 분야는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고, 이 밖에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기에 이르는 민중운동사와 생활사 그리고 일제의 강제병합사를 함께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박사학위 주제인 대한민국임시정부사 가운데 상하이 ...
 

책 속으로

두 사람이 아침 식사를 끝내자 벽시계가 땡! 땡! 울리며 7시를 알렸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윤봉길의 제의로 두 사람은 서로의 시계를 교환했다. 김해산의 집을 나온 윤봉길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차비만을 남기고 나머지 돈을 김구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자동차는 엔진 소리를 높이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훙커우공원으로 내달렸다.
--- p.78-79

아들 피치는 부인의 전화를 받고 급히 자동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하지만 ‘프랑스 총영사관에서 일본 경찰의 한인 체포에 적극 협조하고 있는데, 네 명의 한인을 한차에 태우고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에게는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박찬익이 모두 중국인 복장을 하여 정탐꾼의 눈을 속이자고 제안했다. 안공근도 미국인 여성이 함께 타고 있으면 의심을 덜 받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아들 피치의 부인도 고개를 끄떡이며 함께 차를 타기로 했다. 안공근이 운전석 옆에 앉고, 키가 가장 작은 엄항섭이 그 옆에 앉았다. 뒷좌석 가운데는 김구가, 양옆에는 아들 피치의 부인과 박찬익이 각각 앉았다. 드디어 이들이 탄 차는 베이당로를 빠져나와 쉬자후이천을 따라 난 길로 동쪽으로 가다가 한 인도교에서 멈추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중국 영토였다. 김구 등 네 사람은 차에서 내려 유유히 다리를 건너갔다. 피치 부부는 차 안에서 점점 어둠 속에서 사라져 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무사 탈출을 기도했다.
--- p.91

하루는 동문으로 가는 큰길 옆 광장에서 군대가 훈련하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군관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어디서 온 사람이냐?” “광둥 사람이오.” 하필 군관이 광둥 사람이었다. 김구는 보안대 본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으나 얼마 후 천퉁셩이 와서 보증을 서고서야 풀려났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추펑장은 김구에게, “과부로 나이 근 서른인 중학교 교원을 취함이 어떻겠소?”라며 안전한 피신 방안을 제안했다. 김구는, “중학교 교원이라면 즉각 나의 비밀이 탄로 날 테니 차라리 여사공인 주 씨 같은 일자무식이면 나의 비밀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추펑장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후 김구는 주아이바오가 젓는 배를 타고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는 선중 생활을 이어 갔다.
--- p.145-146

정화암은 1935년 8월 6일 오후 5시 남시 소서문 밖 서문채관에서 임영창을 만나 뜻밖의 이야기를 하고 사라졌다. “김구 처치에 대한 반대급부로 요구한 김오연의 석방을 깨끗이 취소하겠소. 안공근은 상당한 책사이기 때문에 그를 그대로 두면 김구를 처치하는 데 지장이 있소. 먼저 그부터 정리하고, 그런 후에 김구에게 가는 것으로 합니다. 우리가 결심한 이상 반드시 결행합니다. 단 시간문제요.” 임영창의 보고를 받은 히토스키는 일을 보다 확실히 하려면 김구·안공근에 대한 정화암의 복수심에 더욱 큰 불을 지를 수 있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241

위혜림은 해방 직전에 “상하이에서 아마가스 기관의 하부 조직인 무라이 기관의 기관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부 휘하 특수 공작 기관이던 캐논 기관에서 일했”고, 이 기관이 해산된 뒤에는 “이승만의 도쿄 주재 사설 기관인 경무대 기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위혜림과 김구의 질긴 악연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해방 전 김구 암살 공작에 밀정 노릇을 했던 위혜림이 해방 후에는 이승만 사설 기관의 부하가 되어,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와 함께 재일교포의 북송선 폭파 공작을 함께한 이 사실이.
--- p.277

“당지 총영사관 경찰부에서는 종래 ‘헤로인’ 밀매 관계로 출입하고 있는 박제도를 통해 아버지 박창세를 회유하고, 동인同人의 손에 의해 김구를 처치하려고 획책 중이다. 그리고 박창세는 소화 8년[1933] 이래 김구 일당에 가맹하였다. 그 후 김구의 특무대장이 되어 활약하고 있음으로써 김구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또 실행을 위한 이런 공작에는 진실로 적당한 인물이다. 소관[히토스키]도 크게 찬성하고 금후의 협력을 맹서해 두었다. 이미 동인의 차남 박제건이 여운형의 주선에 의해 권투선수가 되어 형 박제도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므로, 총영사관과 협력하여 동인 등의 조선 귀국에 편익을 주고 박창세 회유의 방법으로 삼으려고 협의 중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불령운동에 매진해 왔던 박창세가 곧바로 전향하여 눈앞의 이익보다는 의리를 먼저 생각하는 김구를 암살하려는 이런 공작을 담당하려고 할지는 의문이다.”
--- p.315-316

이운환이 한바탕 총질해 댄 조선혁명당 남목청 당사는 김구·현익철 등이 흘린 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급히 김구·현익철·유동열·이청천을 자동차에 태워 상아의원으로 달려갔다.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했다. 의사는 김구를 진단하고 가망이 없다고 하여, 입원 수속도 하지 않고 문간에서 명이 다하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 두세 시간이 흘러도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의사는 네 시간 동안만 생명이 연장되면 방법이 있을 듯하다고 하다가, 급기야 우등 병실에 입원을 시켜 치료에 착수했다.
--- p.329

김구는 남목청사건 이후 자신에 대한 밀정의 암살 공작에 대해, “단군 할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해하지 못하리라.”라며 동포애에 대해 굳게 믿었다. 하지만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짐으로써, 김구의 그 굳은 믿음은 안타깝게도, 그것도 해방된 조국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 p.334
 

출판사 리뷰

“특종 공작, 김구를 암살하라” - 세 차례 ‘암살 공작’의 관전 포인트

상하이의 급격한 정국 변화 이후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통해 의열 투쟁을 벌이기 시작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성공시키고, 이 외에 이덕주·유진만의 우가키 조선총독 암살, 최흥식·유상근의 일제 요인 암살 등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일제는 김구 제거 작업에 돌입하여, ‘특종 공작’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밀정들을 통해 김구 암살을 시도해 나간다.

1. 나카노의 밀정 오대근, 암살에 실패하고 행방불명되다

1935년 1월, 조선총독부 상하이 파견원 나카노 가츠지는 김구가 난징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산주의자에서 변절한 밀정 오대근에게 김구 암살을 은밀히 지시한다. 중국인 특별공작원 2명을 데리고 난징에 도착한 오대근은 먼저 가 있던 공작원 5명을 인계받고자 임 통역원을 만났으나, 그로부터 ‘김구가 난징에 오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는다. 난징에 김구가 없다니? 일이 틀어졌다. 그 시간 이후 오대근은 행방불명되는데….

2. 히토스키-위혜림-정화암, 고도의 수 싸움으로 진행된 암살 계획

1935년 2월, 나카노의 후임으로 부임한 히토스키 도헤이는 김구 암살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김오연을 체포하여 그와 친분이 깊은 무정부주의자 정화암을 끌어내고, 밀정 위혜림으로 하여금 김오연의 체포가 김구의 밀고 때문이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림으로써 정화암을 도발하여, 결국 정화암으로 하여금 김구를 암살한다는 계획. 그러나 히토스키의 머리 위에 있던 정화암은 오로지 김오연의 석방을 위해 김구 암살 공작에 말려드는 체하며 이 상황을 역이용하는데….

3. 밀정이 된 독립운동가 박창세, 이운환을 사주해 김구를 쏘다

1938년 5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재건 한독당은 조선혁명당 당사인 남목청에 모여 3당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로 한다. 남목청으로 간 김구가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행사가 열릴 즈음, 낯익은 한 청년이 들이닥쳐 권총을 난사한다. 첫발에 김구 중상, 제2발에 현익철 중상, 제3발에 유동열 중상, 제4발에 이청천 경상. 현익철은 절명했으나, 김구와 유동열은 한 달간의 입원 치료 끝에 기적적으로 소생하는데, 이는 과연 이운환 단독의 무모한 범행이었을까?

“일제가 밀정을 동원하여 김구를 체포 또는 암살하려던 공작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들 공작은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관내 등지에서 밀정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 체포하고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과 내홍을 획책했던 수많은 공작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 「맺는 글」 중에서

9·18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까지, 김구의 의열투쟁에서 임시정부 재건까지,
임시정부 10년사(1929~1938)를 이야기로 읽는다


· 일본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은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는 상하이를 어떻게 탈출했을까?
· 김구는 이봉창·윤봉길 의거 외에 어떤 의열투쟁을 계획, 실행했을까?
· 임시정부가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등으로 계속 옮겨야 했던 이유는 뭘까?
· 임시정부와 김구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해 갔을까?
· 김구가 뤄양에서 개설한 한인특별반의 정체는?
· 김구는 난징에서 어떻게 한국특무대독립군을 결성하게 되었나?
· 존폐의 기로에 있던 임시정부를 김구는 어떻게 재건했을까?
· 오대근·위혜림·박창세 등이 밀정이 된 이유는 뭘까?

이 책은 ‘김구 암살 공작’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나, 세 차례 암살 공작의 전후 상황 또한 세밀히 살펴보고 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임시정부가 바라던바 일본과 중국의 전쟁 구도가 만들어졌으나 왜 쉽사리 한국 독립운동의 물꼬는 트이지 않았는지,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 김구 일행은 삼엄했던 상하이를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두 의거 후 다른 의열투쟁은 없었는지, 상하이를 빠져나간 이후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관계가 왜, 어떻게 악화되어 갔는지, 김구가 독자 세력화하면서 만들어진 뤄양 한인특별반이나 한국특무대독립군은 어떻게 결성되어 운영되었는지, 임시정부를 폐지하자는 주장에 맞서 김구가 임시정부를 재건한 과정은 어떠했는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세 차례 ‘김구 암살 공작’ 사이사이에 채워지면서, 김구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10년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임시정부사 최고의 권위 윤대원 교수가 이 이야기를 오늘의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

저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시정부사의 권위자이다. 그는 「책을 내면서」에서 ‘2019년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 문제를 구실로 경제보복 조치를 취한 것’이 ‘1907년 고종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사실이 알려진 뒤 열린 대한제국 내각회의에서 이완용과 송병준 등이 고종의 책임을 물으며 일본 왕에게 사죄하고 황제에서 물러나라고 다그친 일’과 데자뷰 같다고 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비틀어 기억을 왜곡시킬 때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어 결국 현실을 오도하는 결과를 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어서 “1907년의 현상이 당시 식민지를 개척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사상인 ‘사회진화론’과 그 아류인 일제의 ‘동양평화론’에 현혹되어 일제의 침략을 ‘역사 발전’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면, 최근의 현상은 해방 후 반공 이데올로기, 1965년 한일협정 이후 경제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서 ‘역사수정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역사적 진실을 비튼 것일 뿐”이라면서, “이 두 현상을 관통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전진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저항, 그리고 지난 한 세기여 동안 몸에 밴 ‘정신의 식민지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결과”라고 말한다.

77번째 광복절을 맞는 지금,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여 잊지 말고 기억할 때, 현재나 미래에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잘못이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임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