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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입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 싼 권력의 암투를 생생하게 듣는다. 박정희를 정치적 스승,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는 중학교 스승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장기 집권의 시도와 김재규·차지철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10·26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밝힌다. 분명 이 사건을 통해 김재규가 '배은망덕한' 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위해 저자는 당시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해 나간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초기에는 신문기자와 국가재건회의 의장으로, 후에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으로 관계를 유지해 온 저자는 당시의 일을 하나하나 회고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극한 현장 한 가운데 있던 이들의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특히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를 중심으로 10·26 사건을 회고하는 이야기는 당시 사건이 차지철의 독보적인 행동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담담한 어조로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풀어가는 저자의 이야기는 당시 사건을 잠잠히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초기에는 신문기자와 국가재건회의 의장으로, 후에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으로 관계를 유지해 온 저자는 당시의 일을 하나하나 회고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극한 현장 한 가운데 있던 이들의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특히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를 중심으로 10·26 사건을 회고하는 이야기는 당시 사건이 차지철의 독보적인 행동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담담한 어조로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풀어가는 저자의 이야기는 당시 사건을 잠잠히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목차
머리말 : 역사의 기록을 위하여
5·16 군사혁명과 동아일보 필화사건
박정희 의장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민정 불참’에서 ‘민정 참여’로 바뀐 역사적 순간
박정희 후보의 대선 유세를 지원
박 대통령, 김 장군 그리고 나, 청와대에서 자주 회동
박정희 의장, 제5대 대통령에 취임
혈육을 만나게 하자
사카린 밀수와 ‘국회 오물투척 사건’
‘3선 개헌’ 나는 처음부터 반대
“각하, 후계자가 잘하면 다시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3선 개헌의 선행조건으로 제시한 이후락·김형욱의 퇴진
박 대통령, 은밀히 약속한 이후락·김형욱 퇴진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체제 구축
한국 경제발전의 비결
10대 국회, 어렵게 등원
총선 1.1% 패배가 10·26 비극의 단초
김재규·차지철 사사건건 대립
10·26은 왜 일어났나?
10·26의 역사적 교훈
김재규의 최후진술
추천사 : 용기있는 정치인 이만섭 황소웅
이만섭의 정치인생 50년의 발자취
5·16 군사혁명과 동아일보 필화사건
박정희 의장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민정 불참’에서 ‘민정 참여’로 바뀐 역사적 순간
박정희 후보의 대선 유세를 지원
박 대통령, 김 장군 그리고 나, 청와대에서 자주 회동
박정희 의장, 제5대 대통령에 취임
혈육을 만나게 하자
사카린 밀수와 ‘국회 오물투척 사건’
‘3선 개헌’ 나는 처음부터 반대
“각하, 후계자가 잘하면 다시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3선 개헌의 선행조건으로 제시한 이후락·김형욱의 퇴진
박 대통령, 은밀히 약속한 이후락·김형욱 퇴진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체제 구축
한국 경제발전의 비결
10대 국회, 어렵게 등원
총선 1.1% 패배가 10·26 비극의 단초
김재규·차지철 사사건건 대립
10·26은 왜 일어났나?
10·26의 역사적 교훈
김재규의 최후진술
추천사 : 용기있는 정치인 이만섭 황소웅
이만섭의 정치인생 50년의 발자취
책 속으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나의 정치적 스승이었다. 그리고 김재규金載圭 부장은 나의 중학교 스승이었다. 김 부장은 또한 박 대통령의 고향[慶北善山] 후배였으며 육사 2기 동기생이었다. 우리 세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63년 나는 박 대통령의 민족의식과 자립경제, 자주국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공감하여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위해 내 몸을 던졌다. 보수 기득권 세력들의 악랄한 사상논쟁과 미국 측이 은근히 반대하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필승의 신념으로 이에 맞서 박정희 후보는 표차는 15만 표에 불과했으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선거 내내 박 대통령과 침식을 같이 하며 전국 유세를 다닌 나는 그 후 박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통령에 취임하신 후에도 나라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로 나를 불러 일일이 의논해 주셨다.
한편 김 부장은 나의 중학교 때 체육선생이었다.
나는 민족사학인 대구 대륜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으며 김 부장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약 1년간 나의 모교에서 체육교사로 봉직한 일이 있었다. 김 부장이 육사 2기 졸업 후 소위 시설 사정에 의해 군을 잠깐 떠나 있을 때였다. 학교에 계시는 기간은 짧았으나 김 선생은 정이 많아 제자들과 형제처럼 지냈으며 당시 농구선수이자 학업 성적도 우수한 나를 누구보다 좋아하셨다.
그래서 김 부장은 군에 복직한 후에도 대륜중학교 선생으로 있었다는 것과 특히 나를 제자로 두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나 자랑삼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김 부장은 군에 있을 때나 예편 후 민간인으로 정부 요직에 있을 때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면 나와 의논했고 특히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나를 통해 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대통령과 김 부장도 특별한 관계였다.
박 대통령은 고향 후배인 김 부장을 끔찍이 생각하여 군 인사 때마다 그를 뒤에서 챙겨 주었으며 김 부장이 예편한 후에도 그를 믿고 정부 요직을 맡기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기 전 1960년대까지는 나와 김 부장을 자주 청와대에 불러 세 사람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일도 많았다. 그 당시 박 대통령이 김 부장을 믿는 것과 같이 김 부장의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한결같이 깊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979년 김 부장이 박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다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었다.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의 흉탄에 맞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그만두고 차지철 씨가 경호실장 자리에 앉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차 실장은 군의 대선배인 김 부장과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을 철저하게 견제하였으며 심지어 김 중앙정보부장이 보고차 대통령을 만나는 것까지도 ‘경호상의 이유’를 핑계로 방해할 정도였다.
차 실장은 경호실 조직을 강화하여 정부와 여당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국회 안에도 비밀리에 자기 조직을 심어 놓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정국을 강변일변도로 끌고 갔으며 온건파인 김 부장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
부마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차 실장은 “각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탱크로 확 밀어붙이면 됩니다”라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당시 차 실장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김 부장은 나를 만나 “차지철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고 한탄한 일이 있고, 심지어 아주 가까운 군 동기들에게는 “차지철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다. 차지철을 없애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박 대통령이 온건한 김 부장보다 강경한 차 실장을 더 신임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차 실장은 박 대통령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여 마치 2인자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김재규 부장이 재판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습니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김 부장은 박 대통령을 쏘았으니 분명 ‘야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김 부장은 본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왜 ‘야수’가 되었을까? 그것은 차 실장의 안하무인격인 횡포 때문이었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김 부장이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은망덕한 패륜아’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대신 그 총에 맞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극적 사건을 ‘패륜’으로만 덮어두고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여 이를 기록에 남겨야 한다.
…올바른 역사의 평가를 위해서도, 그리고 다시는 이러퇇 역사적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하다.…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2009년 8월
靑江 이만섭
1963년 나는 박 대통령의 민족의식과 자립경제, 자주국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공감하여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위해 내 몸을 던졌다. 보수 기득권 세력들의 악랄한 사상논쟁과 미국 측이 은근히 반대하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필승의 신념으로 이에 맞서 박정희 후보는 표차는 15만 표에 불과했으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선거 내내 박 대통령과 침식을 같이 하며 전국 유세를 다닌 나는 그 후 박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통령에 취임하신 후에도 나라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로 나를 불러 일일이 의논해 주셨다.
한편 김 부장은 나의 중학교 때 체육선생이었다.
나는 민족사학인 대구 대륜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으며 김 부장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약 1년간 나의 모교에서 체육교사로 봉직한 일이 있었다. 김 부장이 육사 2기 졸업 후 소위 시설 사정에 의해 군을 잠깐 떠나 있을 때였다. 학교에 계시는 기간은 짧았으나 김 선생은 정이 많아 제자들과 형제처럼 지냈으며 당시 농구선수이자 학업 성적도 우수한 나를 누구보다 좋아하셨다.
그래서 김 부장은 군에 복직한 후에도 대륜중학교 선생으로 있었다는 것과 특히 나를 제자로 두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나 자랑삼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김 부장은 군에 있을 때나 예편 후 민간인으로 정부 요직에 있을 때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면 나와 의논했고 특히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나를 통해 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대통령과 김 부장도 특별한 관계였다.
박 대통령은 고향 후배인 김 부장을 끔찍이 생각하여 군 인사 때마다 그를 뒤에서 챙겨 주었으며 김 부장이 예편한 후에도 그를 믿고 정부 요직을 맡기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기 전 1960년대까지는 나와 김 부장을 자주 청와대에 불러 세 사람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일도 많았다. 그 당시 박 대통령이 김 부장을 믿는 것과 같이 김 부장의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한결같이 깊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979년 김 부장이 박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다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었다.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의 흉탄에 맞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그만두고 차지철 씨가 경호실장 자리에 앉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차 실장은 군의 대선배인 김 부장과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을 철저하게 견제하였으며 심지어 김 중앙정보부장이 보고차 대통령을 만나는 것까지도 ‘경호상의 이유’를 핑계로 방해할 정도였다.
차 실장은 경호실 조직을 강화하여 정부와 여당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국회 안에도 비밀리에 자기 조직을 심어 놓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정국을 강변일변도로 끌고 갔으며 온건파인 김 부장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
부마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차 실장은 “각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탱크로 확 밀어붙이면 됩니다”라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당시 차 실장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김 부장은 나를 만나 “차지철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고 한탄한 일이 있고, 심지어 아주 가까운 군 동기들에게는 “차지철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다. 차지철을 없애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박 대통령이 온건한 김 부장보다 강경한 차 실장을 더 신임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차 실장은 박 대통령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여 마치 2인자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김재규 부장이 재판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습니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김 부장은 박 대통령을 쏘았으니 분명 ‘야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김 부장은 본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왜 ‘야수’가 되었을까? 그것은 차 실장의 안하무인격인 횡포 때문이었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김 부장이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은망덕한 패륜아’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대신 그 총에 맞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극적 사건을 ‘패륜’으로만 덮어두고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여 이를 기록에 남겨야 한다.
…올바른 역사의 평가를 위해서도, 그리고 다시는 이러퇇 역사적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하다.…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2009년 8월
靑江 이만섭
--- 「머리말 - 역사의 기록을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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