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계국가의 이해 (독서>책소개)/5.중동이슬람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 (2016) - 세계사를 뒤흔든 중동의 거대한 바람

동방박사님 2023. 10. 1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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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슬람의 출현과 십자군 전쟁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 책을 통해 오랜 기간 중동 아프리카지역에서 직업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이슬람 연구를 계속해 온 저자의 폭넓은 역사적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아랍의 봄’으로 모든 세계인들이 바랐던 진정한 정치개혁의 기회를 뒤로하고 또다시 혼란에 빠진 중동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자들에게 중동, 즉 아랍 세계의 전반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중동을 뒤흔든 두 개의 큰 흐름인 이슬람의 출현과 십자군 전쟁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무슬림에 의해 빚어지는 참혹한 테러 등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절실히 깨닫게 해준다.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이슬람

제1장 이슬람의 탄생
무함마드의 출현과 코란/ 무함마드는 누구인가?/ 이슬람의 확장
제2장 정통 칼리프 시대
이슬람의 지배 정책/ 첫 번째 피트나(시련기)와 시아파의 태동
제3장 우마이야 시대
두 번째 피트나(시련기)/ 우마이야드의 전성시대/ 우마이야드의 몰락
제4장 압바스 시대
절대 왕조의 출현과 문화의 융성/ 이슬람 법학의 발달과 시리아/ 칼리프 쇠퇴와
이방인의 출현/ 수피즘/ 셀주크 왕조의 몰락/ 시아파의 유전(流轉)
제5장 몽골 시대 이후 이슬람의 확대
오스만제국의 출현과 이슬람의 확장
제6장 시아파제국 사파비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의 등장
제7장 인도의 무굴왕조
무굴제국의 흥망성쇠
제8장 오스만 투르크제국
오스만의 황금기/ 와하비즘과 사우디아라비아/ 오스만의 쇠퇴와 유럽의 부흥
제9장 이슬람의 약세와 개혁운동
이슬람의 개혁운동/ 정통 이슬람교의 박해
제10장 원리주의
이슬람의 행동주의 ‘지하드’/ 원리주의자 호메이니
제11장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 Islamic State)/ 주요 무장단체
제12장 아랍의 봄과 중동의 미래
독재정치의 악순환

2부, 십자군

제13장 오! 예루살렘
십자군의 예루살렘 지배
제14장 제 1차 십자군 원정
십자군의 핵심인물/ 군중 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니케아 점령/ 안티오크 점령/
트리폴리 점령과 모자이크 국가 수립
제15장 이슬람의 반격
영웅의 탄생
제16장 살라딘
살라딘의 등장/ 예루살렘 탈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살라딘의 마지막 세월/ 살라딘 이후의 십자군
제17장 몽골의 침입
루이 9세와 마지막 십자군/ 맘룩 왕조와 몽골의 패퇴
제18장 십자군의 종말
템플기사단의 최후/ 세계질서의 재편
 

저자 소개

저자 : 류광철
직업외교관 출신이다. 오랜 시간 중동에 관심을 갖고 관찰과 연구를 계속해왔다. 외교부 중동과에서 근무했고 주 이라크 대사 대리 시절 바그다드와 암만을 오가며 외교적 경험을 쌓았다. 주 아제르바이잔 대사, 주 짐바브웨 대사,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 등을 지냈으며 현재 신한대학교 석좌교수 겸 국제교류원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아프리카의 극과극 만델라와 무가베』, 『아프리카를 말한다』, 『외교를 생각한....

책 속으로

선지자가 후계자에게 물려준 이슬람식 법과 행정은 주로 베두인으로 구성된 아랍 군대를 통솔하는데 진가를 발휘했다. 코란을 바탕으로 한 법과 행정은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았으나 군대를 통솔하고 군인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아랍인은 점차 사막의 야만적인 종족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도덕심이 있고 기독교나 유대교와 견줄 수 있는 종교적인 교리를 갖춘 선진 민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슬람은 점령지의 문명을 파괴하지 않았다. 이슬람 정복자들은 오히려 여러 점령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문화들 상호간의 조화와 융합을 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에 있어서도 정복자와 피정복민 간에 차이가 드러났다. 아랍적인 요소가 페르시아 또는 비잔틴적인 요소를 제치고 피정복민들의 삶에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정복시대에 이슬람 군의 관용적이고 개방된 태도가 눈부시게 빠른 확장을 가능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와 비잔틴의 오랜 학정에 시달려 온 주민들에게 이슬람 군의 절제 있는 태도는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을 테니까.
사실 피정복민들에게는 아랍이 자신을 통치한다고 해서 전에 비해 엄청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군주가 바뀐 것에 불과했고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아랍의 관용적인 태도가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정복 초창기에 관용을 베풀었다고 해서 아랍인이 전혀 자기 몫을 챙기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사막 내 경작이 가능한 좁은 지역에 모여 살던 아랍인은 점령지가 생기자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아랍인은 곧 점령지의 지배계급이 되었다.
---「제2장 정통 칼리프 시대」중에서

아랍 세계에서 두 번째 피트나(시련기)가 시작된다. 야지드의 칼리프 취임에 대해 쿠파의 알리 파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Husain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알리 파라고 해도 다수는 우마이야 측의 위협에 이내 잠잠해졌으나 후세인은 70여 명에 불과한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메디나로부터 이라크로 향했다. 아마 쿠파에 있는 친 알리 세력을 결집하여 우마이야드와 일전을 벌리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은 쿠파에 도달하기도 전에 야지드가 보낸 우마이야 군에 포위되어 이라크의 케르발라Kerbala 평원에서 전멸하고 만다.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어린 아들 알리를 품에 안은 후세인은 맨 마지막으로 죽었다. 형편없이 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은 후세인은 순교자의 표상으로 등장했고 지지자들은 이를 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이 사건은 이슬람교를 수니와 시아로 갈라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리의 죽음으로 인해 비통함에 잠겨있던 알리 파는 이 사건으로 인해 비 알리 파와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시아파는 알리 이전의 칼리프 3명을 권력 찬탈자로 규정하며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아파의 이맘은 알리를 필두로 큰 아들 하산, 작은 아들 후세인 그리고 후세인의 아들 알리 자인 알 아비딘Ali Zayn al-Abidin 등으로 선지자의 핏줄을 따라 내려간다. 시아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개의 분파로 나뉘게 된다. 그 이유는 알리의 후손이나 친척 중에서 누구를 이맘으로 삼을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추종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시아파가 많은 분파로 나뉜 것은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놓고 분쟁이 벌어진 때문이다. 오늘날 시아는 전체 이슬람교도의 10-15%를 차지하는 소수파이다. 대부분이 이란, 이라크 및 인도아대륙에 몰려있다. 아프리카에는 시아가 거의 없고 레반트에서는 레바논 인구의 약 30%가 시아이다. 예멘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자이디Zaydis도 시아파에 속한다.
사실 수니와 시아에 교리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이들의 차이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역사적, 정치적인 것이다.
수니의 세계관은 시아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다. 수니는 ‘순나의 사람들people of the sunnah'이라는 뜻이다. 즉, 선지자와 그의 추종자인 정통 칼리프들의 언행과 정책으로 만들어진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오서독스orthodox 무슬림이다. 수니파는 4명의 라쉬둔을 모두 인정하고 경배한다. “신은 갈등과 시련의 시기에도 늘 움마와 함께 하므로 움마의 단결은 신성한 것이다. 비록 칼리프들이 인간적 약점을 가졌다고 해도 움마의 대표이므로 칼리프를 섬기는 것이 이슬람인의 도리이다” 이러한 것이 수니의 주장이다. 수니와 시아는 종교가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역사가 갈라놓은 것이다.
---「제3장 우마이야 시대」중에서

압바스 왕조의 군주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으며 종교보다는 힘에 의존해 열방을 통치했다. 신하들은 칼리프 앞에 서면 엎드려 먼저 땅에 입을 맞추어야 했다. 페르시아 식으로 칼리프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왕 옆에는 항상 사형집행인이 배석했다. 왕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무언의 암시인 셈이다. 칼리프는 더 이상 움마의 일에 직접 간여하지 않고 총리vizier가 대신했다. 도저히 조정이 불가능한 일에만 직접 개입했다. 칼리프가 점점 일상적인 국정에서 멀어질수록 총리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총리는 칼리프의 대리로서 제국의 운영을 위임받은 존재가 되었으며 그의 권위도 칼리프에 버금갈 만큼 커졌다. 칼리프는 가장 큰 행사인 금요일 오후 예배를 직접 주재했으며 군사를 이끌고 주요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군대는 더 이상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왕의 군대였다. 무슬림이면 누구나 군인이 될 수 있었으나 페르시아 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군의 핵심이었다. 압바스 왕조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운 페르시아 부대는 왕의 근위병과 비슷했다.
유명한 칼리프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 786-809년 재위) 시절이 되면 압바시드의 골격이 모두 갖추어진다. 하룬이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천일야화]가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소개되면서 하룬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하룬은 학식이 풍부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가난한 백성에 귀를 기울여주었던 자비로운 군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학문과 예술을 적극 장려하여 문화적 르네상스기를 꽃피웠다.
---「제4장 압바스 시대」중에서

IS(Islamic State)는 1999년 요르단 출신의 알 아부 무사브 자르카위가 만든 ‘일신교와 성전’이라는 단체에서 시작한다. 이 단체는 2004년 자르카위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라크 알 카에다(AQI)’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2004년 김선일을 납치하여 살해함으로써 한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조직이다. 자르카위는 빈민가에서 자란 잡범으로 그가 이끈 조직은 과격하고 잔인한 행동으로 세인의 이목을 끌며 성장했다. 자르카위는 2006년 6월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지만 이후 이 조직은 그와 함께 활동했던 알 바그다디를 중심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수차례 이름을 바꿔 IS로 정착되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아랍 세계의 혼란과 느슨해진 통치 체제 그리고 시리아 내전을 기회로 삼아 IS가 세상에 얼굴을 나타낸 것이다. 바그다디는 후세인 정권에서 장교를 지낸 인물로 이라크 수니파 무장 세력을 흡수하여 조직을 확대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 카에다가 간섭을 일삼자 2013년 알 카에다의 특사를 살해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시리아 내전을 틈타 IS는 시리아 동부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한 뒤 2014년 이라크 유전도시 모술을 장악하고 국가수립을 선포했다.
---「제11장 무장단체」중에서

11세기 초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쪽으로 이주를 시작한 유목민 셀주크 투르크인들은 곧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투르크인의 침입은 이미 그전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바그다드 압바스 칼리프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1055년이 되면 이미 압바스 칼리프는 아무런 힘이 없는 셀주크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1070년 파티미드로부터 시리아를 빼앗았으며 1071년 소아시아의 만지커트Manzikert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나톨리아 반도 깊숙이 쳐들어가 비잔틴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셀주크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당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수스Alexius Comnesus가 1091년 로마교황 우르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1095년 11월 28일, 프랑스 중부 알프스의 작은 마을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회에서 우르반 2세가 이슬람에 대한 성전을 벌이자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전 유럽이 적극 호응했다. “신이 그것을 원한다(Deus vult)"라는 교황의 말이 사람들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귀족과 기사들은 물론 농부, 수공업자, 순례자, 심지어는 여인들까지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고 희생자에게는 천국을 약속했다.
---「제14장 제1차 십자군 원정」중에서

1099년의 복사판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떠한 학살이나 약탈도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살라딘은 돈이 없어 인두세를 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그들이 자유롭게 성을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세금을 낸 사람이든 내지 않은 사람이든 원하는 사람은 모두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떠났다. 너무나 관대한 살라딘의 조치에 안달이 난 사람들은 재정담당관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으로 바닥이 난 국고를 점령지로부터 얻은 재화로 채우려 했다. 이들의 계획은 살라딘의 관대함으로 인해 빗나가고 말았다. 예루살렘 탈환은 살라딘의 자비로움을 만 천하에 알리게 된 사건이었다. 1099년 1차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정복 시 벌어진 그 야만과 폭력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1187년의 평화롭고 온건한 예루살렘 탈환이 마치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같이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살라딘은 애초부터 재물이나 복수를 위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 예루살렘 회복은 신에 대한 의무이자 그의 신념이고 생의 목표였다. 살라딘은 이 목표를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점일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 1주일 후 무슬림 성소인 알 악사 사원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공식 예배가 열렸다. 이 예배를 인도한 사람은 다마스쿠스의 대법관 이븐 알 자키이다. 알 자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슬람에게 승리를 내려주셔서 1세기 동안의 지옥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신께서 선택하셔서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하신 이슬람 군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이슬람 신민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살라딘이여, 그대에게 신의 자비가 있을 지어다.” 이 순간을 맞는 살라딘의 감회가 어땠을까? 아마 그의 어깨 위에 놓여있던 천근의 짐이 사라지고 가볍게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제16장 살라딘」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슬람의 출현과 십자군 전쟁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유구한 역사, 인류 문명의 요람, 수많은 제국들과 민족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요충지, 그리고 가장 강력한 세 가지 종교의 발상지 등과 같은 위상에 걸맞게 중동에는 수많은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중동에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건이 모두 종교와 관계가 있고 전쟁을 수반했으며 동서양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살아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십자군 원정이다.

평범한 한 상인이 광야에서 창시한 이슬람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사막에 갇혀 이름 없이 지내던 아랍인은 이슬람으로 인해 사막 밖으로 나왔고 거대한 제국을 창건한 민족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랍인의 손에서 잉태되고 성장한 이슬람은 아랍을 뛰어넘어 페르시아인, 투르크인(셀주크, 오스만) 몽골인, 아시아인 등에게 전파되었으며 이들은 이슬람의 힘을 빌려 거대한 제국을 속속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이슬람이 탄생한지 거의 5백년이 지나 발발한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관계를 영원한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규정지어 버렸다. 십자군 원정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두 종교가 적대적은 아니었다. 칼리프 국가 시절 아랍인은 점령지의 기독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신민으로 지내도록 했다. 제국의 팽창 시에도 그리고 팽창이 멈춘 후에도 두 종교가 심하게 충돌한 적은 거의 없었다. 두 종교는 서로를 경원시하면서도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관계는 1096년 십자군 기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발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십자군 원정은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으로 인해서만 발생한 사건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중동 정세 그리고 모험가들의 충동과 영토와 부를 차지하려는 일부 야심가들의 탐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자부심이 강한 이민족의 영토에 침입하여 2백여 년 동안이나 그들의 심장부를 지배하고 수많은 전투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으며 이슬람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 사건이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그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중동은 자신의 문명에 도취되고 자만과 아집에 빠져 외부와의 타협을 거부했고 유럽은 유연하게 중동의 문명을 흡수하여 이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이 유럽과 중동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당시는 거의 모든 면에서 유럽이 열등했지만 단 하나 확실하게 우월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유럽이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제도를 창설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유럽이 만든 체제는 민주적이 아니라 봉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전반에 걸쳐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규정했고 이를 지켰다. 귀족, 기사, 상인 및 농민은 모두 본분을 지킴으로써 사회적 질서가 명확하게 확립되었다. 왕의 권한에도 제한이 있었으며 권력 승계는 힘이 아니라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슬림은 이와 정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이 책을 통해 오랜 기간 중동 아프리카지역에서 직업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이슬람 연구를 계속해 온 저자의 폭넓은 역사적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아랍의 봄’으로 모든 세계인들이 바랐던 진정한 정치개혁의 기회를 뒤로하고 또다시 혼란에 빠진 중동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자들에게 중동, 즉 아랍 세계의 전반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중동을 뒤흔든 두 개의 큰 흐름인 이슬람의 출현과 십자군 전쟁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무슬림에 의해 빚어지는 참혹한 테러 등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절실히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