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7.독립운동사

비겁한 근대, 깨어나는 역사(2023) - 기억되지 않은 독립운동가, 기록되지 않은 독립운동사

동방박사님 2023. 11. 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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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삼일만세운동, 그 뜨거웠던 함성을 다시 일깨우다!

문명과 야만의 시대,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
그 치열하고 처절한 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독립군!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그들을 보듬어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역동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땅의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관련 자료도 많지 않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내용이 대단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이 지워지거나 축소 또는 왜곡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관련 신문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활동을 정리했다. 일제강점기, 야만의 시대에 독립을 향한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불러내어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목차

책머리에

1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다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_이진룡
무장한 장정들이 압록강을 건너다│황해도를 대표하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다양한 전술과 전략을 구사하다│일제 관헌도 근절할 수 없음을 시인하다│의병전쟁의 고조기를 맞이하다│국내에서 항일 의병투쟁의 막이 내리다│독립군 양성과 전투력 향상에 관심을 기울이다│거액의 현상금과 밀정까지 동원하다│왜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구함이 나의 직업이다

광복 후에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다 _우재룡
거액의 세금 운반 마차를 습격하다│만주로 망명하다│국내에 활동 근거지를 구축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다│밀정의 계략에 빠져 군산에서 체포되다│재판부도 그의 당당함에 당황하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가 되다 _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박웅세, 김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건이 발생하다│나무 찍는 마음마다 원수 찍는 마음이요│15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강탈하다│‘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웃음으로 최후를 맞다│비록 완전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통쾌함을 전하다│일제의 정보에 ‘우리 밀정’이라고 기록하다│밀정인가, 기회주의자인가│피를 토하고 죽으며 한마디 말을 남기다

2부 3·1운동, 삶을 송두리째 바꾸다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3·1운동을 준비하다 _이종일
철통 보안 속에서 윤전기가 돌아가다│파고다 공원과 함께 역사의 숨은 주역이 되다│교육과 신문을 통한 계몽운동에 적극 나서다│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벌이다│천도교에 주목한 이유는│대규모 민중항쟁을 준비했으나│연이어 위기를 넘기고 3· 1운동 준비를 끝내다│「독립선언서」가 극비리에 전국으로 배포되다│조선인 형사, 마약 중독으로 사망하다│우국지사는 장례 비용도 없습니다

베일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미국으로 가다 _박노영
동양의 마크 트웨인으로 불리다│계동 43번지로 청년들이 모인 이유는│경성에 남아 3 · 1운동을 지휘하다│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좀 더 먼 앞날을 위해 결단을 내리다│우리나라 최초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다│미국에서 지식인으로 활동하며 자리 잡다

3·1운동과 서대문형무소의 여성 독립운동가들 _동풍신, 어윤희, 김향화
아버지를 대신해서 만세운동에 참가하다│동풍신의 피 묻은 치마를 상기하라!│개성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다│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우느냐!│옥중에서 3· 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역사적 의미와 뿌리가 깊은 ‘애국창가운동’을 이어가다│흙 한 줌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다│일본 놈들에게 술 치지 마라!

3부 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져라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다 _안경신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적은 이유는│갓난아이와 산모가 체포되어 압송되다│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다│재판이 3년이나 걸리다│관련자들이 체포될 때마다 사건이 확대되다│신의주지방법원이 생긴 이후로 드물게 보는 사건이라더라│사건 발생 15년 만에 또 한 사람이 체포되다

감옥 대장, 거짓말 대장, 배포 대장이라고 불리다 _한훈
육혈포 암살단, 세상을 놀라게 하다│어찌하여 부모의 육신을 깎고 형제의 피를 빠는가│관련자들이 계속 체포되며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다│5척 단신 소년, 의병 투사가 되다│가장 어린 나이로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다│철저하게 비밀의 원칙을 지키다│소문만 무성했던 ‘육혈포 암살단’ 배후들│19년 6개월의 긴 수감 생활을 하다│감옥 대장, 거짓말 대장, 배포 대장이라는 별명을 얻다│독립운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죽어서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다

대구 중심가에서 폭탄이 터지다 _장진홍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이 배달되다│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나다│진범 검거가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지다│나의 현주소는 대구형무소 제6감방이다│형무소에서 갑자기 사망하다│또 하나의 의문, 과연 단독 범행이었나│3· 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조사에 나서다│가족에게도 시련이 이어지다

홀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_이수흥
국내외를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벌이다│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하다│경성 시내 파출소에서 총격을 가하다│100명의 혐의자를 조사했으나 진범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다│나는 일제의 재판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구차하게 사는 것은 세상에 치욕을 남길 뿐이다│독립운동사의 한 면을 장식하다

4부 항공모함보다도 강한 무기가 있다

24년 만에 귀국한 유학파 마술사에 열광하다 _김문필
유학파 마술사의 귀국이 주목받은 이유는│마술 공연, 근대와 민족주의와도 연관이 있었다│대중오락의 전성기를 맞아하다│마술 공연에 열광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식민 통치의 홍보 수단으로 삼다│러시아와 유럽에서 활동하며 실력을 인정받다│우리 공연에 대한 자부심이 담기다│3년 후 러시아 유학생 마술사의 공연이 열렸으나

우리말과 글은 적의 항공모함보다 강하다 _정태진, 이극로
홍원역에서 불심검문으로 시작되다│비행기나 군함보다 밀정이 현대 전쟁을 좌우한다│영어 사용자는 영국과 미국의 스파이다│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이 시작되다│영화 「말모이」로 새롭게 주목받다│사전 편찬 작업을 서둘렀지만│집요하게 사건을 파헤치다│밥 먹는 것도 독립운동이냐│광복을 맞아 모두가 풀려나기는 했지만│사전 편찬이 다시 중단될 위기에 처하다│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슴에 묻고

밀고자에서 밀정 그리고 이중 첩자까지, 또 다른 적과 싸우다
독립운동에서 밀정은 또 다른 무기이자 강적이었다│해외에서 밀정들을 더욱 치밀하게 이용하다│독립운동 조직을 사분오열시키다│정치적 특권과 보상으로 활동을 독려하다│기회의 땅 만주에서 밀정이 양산되다│재판에서 스스로 밀정이라고 주장했지만│재판 이후에도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실제로 밀정이었나

참고한 자료
 

저자 소개

저 : 김진섭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인문콘텐츠를 공부하여 문화예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홍보·교육·도시빈민 간사 ’99강원국제관광엑스포 홍보제작전문위원, 강원인재육성재단 사무처장을 지냈다. 춘천교육대학교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만해마을 교육원 교수를 거쳐 춘천교육대학교,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인천대학교에 출강했다. 현재 한국미디어콘텐츠학회 이사로 있다....

책 속으로

이진룡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진룡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위풍당당했으며, 180센티미터의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가 “작전을 나갔다가 근거지로 되돌아오는 데 하루에 백 리를 마치 날아다니듯 민첩하게 달렸다”라고 하며, 사람들이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서 그를 ‘준족(駿足)’ 또는 ‘번개다리[飛毛腿]’라고 불렀고, “발바닥에 한 줌의 털이 나서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고 땅을 주름잡아 훨훨 날아다니듯 했다”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이진룡은 적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몇십 리나 되는 높은 절벽에서 압록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서 칭산거우의 근거지로 돌아올 정도로 수영도 잘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진룡이 압록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풍덩 하는 소리가 나면 어느새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오곤 했다”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 p.26

재판장이 “의병운동은 잘못된 불온 행동이다”라고 지적하자, 우재룡은 “지금 나라의 상태는 독립국이란 이름만 있을 뿐이고 실질은 없으며, 임금은 있으나 권한은 없으며, 군대가 해산당했으므로 일본인을 조선 내에서 전부 추방하여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으로 의병에 투신한 것이다. ……(독립이) 가능하다든가 불가능하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한 일이 없다. 조선인으로서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컨대 일을 도모함은 하늘에 있고, 일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라며 자신이 의병 활동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나는 일찍부터 남선 의병대장 정용기의 의제(義弟)이다. 의형(義兄)과 맹서하기를 이 나라를 구하는 데 생사를 같이하자고 했는데, 의형이 순국했으니 사상만은 변경할 수 없다”라며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 p.41

‘15만 원 사건’은 비록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대담하게 일제의 조선은행 자금을 무기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거금을 탈취했다”는 점에서 일제 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동포에게는 그야말로 통쾌한 소식을 전해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고, 광복 후에도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와 북간도 지역에서 일제강점기 무력투쟁을 회고할 때 자주 인용될 정도로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제의 적극적인 통제로 구체적인 내용이 보도되지 못했고, 관련자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일제의 감시 등으로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지 못하다가 광복 후 생존자들의 노력으로 구체적인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
--- p.53

이종일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손병희에게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손병희 역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을 통해 나름대로 민족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식민 지배를 받던 세계의 약소민족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말부터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내세우며 대중운동을 준비했다. 여기에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자 크게 자극을 받아 3·1운동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종일은 보성사를 중심으로 천도구국단과 함께 3·1운동 준비 및 진행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 p.75

박노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박노영은 어쩌다 그 이름만 언급될 뿐 그의 생애나 저서는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아프리카 오지처럼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다. (……)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문학에도 자질이 뛰어났던 그는 ‘동양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마크 트웨인은 특유의 해학과 기지를 발휘한 풍자문학가로 잘 알려진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박노영 역시 문학적 자질은 물론 재치와 유머가 뛰어났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침탈을 일삼던 암울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 p.90

어윤희의 경우 1929년 4월 18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재판 기록에 누구도 선뜻 「독립선언서」 배포를 하려고 나서지 못할 때 민족의 독립을 고취하는 전단을 배포하여 개성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죄가 크다”라고 보도했다. 또한 형사들이 어윤희를 체포하며 수갑을 채우려고 하자 “천하에 여자에게 수갑을 채우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에 있느냐?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갈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당당했다. 어윤희는 조사 과정에서도 형사가 “배후가 누구냐”고 캐묻자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우느냐?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한다”라고 훈계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 p.113

재판은 6~7차까지 이어지며 해를 넘길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신문에서는 “안경신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매번 수백 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어 재판소 마당을 가득 메웠고, 재판정 안에서는 방청객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모두 안경신에게 쏠렸다”라고 보도할 정도로 안경신과 재판 결과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몰려드는 방청객이 부담스러웠던 재판부는 다섯 번이나 공판을 연기했고, 1921년 10월 26일 최종 판결이 열렸다. 그날 재판부는 “일심 판결을 취소하고 다만 치안방해와 공모죄를 인정하여 징역 10년에 처한다”라고 판결했다. 이에 안경신은 재판장 앞으로 나가 “내가 무슨 죄가 있어 3년간이나 가두어 두었다가 10년 징역에 처하느냐고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다시 증인이라도 불러 심문하여 달라”고 거세게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폭탄 투척 사건이 모두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 p.132

한훈은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전라도 지역 책임을 맡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한훈은 구체적인 활동이 밝혀지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고, 대한광복회는 1917년 말 첫 번째 대상으로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에 대한 응징을 결행했다. 장승원은 의병이 봉기하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고 밀고까지 했던 경북 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물이었다. 이후 지역 주민을 괴롭히는 친일 면장으로 악명이 높았던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한 사건을 계기로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훈의 활동도 일부가 밝혀졌다.
--- p.157

“나의 현주소는 대구형무소 제6감방이다”라고 답했고, 재판장이 선고하기 위해 장진홍을 일으켜 세우자 그는 먼저 방청석을 향해 서서 “내가 잡힐 때까지 여러 사람에게 괴로움을 끼쳐서 대단히 미안하오”라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자 즉시 방청석에서 울고 있는 친족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서 “아무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퇴장했다. 이후 그는 가족과 친지들의 권유로 재심을 청구했으나 같은 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장진홍에게 적용된 죄는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미수 등이었다.
--- p.181

일찍부터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평소에 “우리 단이 노리는 곳은 도쿄와 경성 두 곳으로, 우선 조선총독을 계속해서 대여섯 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도쿄 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우리 독립 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라며 지속적인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수흥은 이를 직접 실행에 옮기며 입증했다. 한편 이수흥을 밀고한 후 경찰서장에게 금일봉을 받았던 이준성은 광복 후인 1949년 3월 인사동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때 이준성의 나이 마흔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석으로 풀려났고,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 p.209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영국의 스파이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박멸을 주장하는 등 전쟁을 방불케 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지식인과 사회 지도계층 그리고 유한마담 등 상류 계층에 영국을 배척하는 사상을 주입하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영어 사용은 유전 매독환자’라며 사회에서 최악의 암적 존재로 비판한 것은 영국을 배격하는 배영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심지어 일제는 “영어 사용은 영국이나 미국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라며 자기 나라 말, 즉 일본어에서 영어를 분리하여 국가의 독립과 새로운 건설을 주장할 정도로 그들도 식민 지배가 최악의 상태이며, ‘자기 나라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은 곧 독립의 근간이었고, 다른 나라 말의 침투는 나라가 소멸하는 지름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 p.238~239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으로 행세하면서 일제 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여 주목을 받았던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과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조선인 출신 일제 경찰 이정출은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을 받고 의도적으로 의열단에 접근한 밀정으로, 두 사람 모두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특히 황옥을 모델로 한 이정출은 현재까지 많은 연구 논문이 나왔지만, 그의 밀정 행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황만동’으로도 불렸던 황옥은 식민지의 청년 지식인이자 조선인으로는 오르기 쉽지 않았던 중간 간부까지 승진했던 일제의 관리였고, 1920년대 초기 사회주의 운동사와 의열단 투쟁에서 민족운동가들과 함께 등장하는 대단히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 p.270
 

출판사 리뷰

잊히거나 일제에 의해 왜곡되거나 축소된 우리의 독립운동사,
편린의 기록들을 엮어 치열했던 시대의 한 면을 채우다!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삼일절! 해마다 3월 1일을 맞이하면 누가 일깨워주지 않아도 으레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어서 태극기 휘날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 높이 외치는 장면에 일제의 총칼 앞에 무참히 쓰러져 간 우리의 선열들이 모습이 겹쳐진다. 어느덧 100년을 훌쩍 넘어섰음에도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컥 치미는 감정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암울했던 그 시대, 기억되지 않은 독립운동가, 기록되지 않은 독립운동사가 여전히 역사의 공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우리가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만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숱한 물음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 현재 우리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강의와 교양서 집필활동을 하는 저자 김진섭은 점점 잊히거나 왜곡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사에 주목하여 단지 연구 논문이나 자료로 남아 있는 기록들을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비겁한 근대, 깨어나는 역사』를 펴냈다.

이 책은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독립운동가들이 어떻게 일제에 항거했는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 그 뜨겁고 치열했던 시대의 조각조각을 모아 정리했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관련한 당시 신문 자료와 함께 그들이 펼쳤던 활동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강압적으로 국권을 탈취하여 식민 지배를 하고 있으면서도 대외적으로 “평화적으로 병합이 이루어졌고, 조선은 자립적인 국정운영의 능력이 없다. ……조선은 여전히 봉건적이다”라고 홍보했다. 또한 자립 능력이 없는 낙후된 조선을 부각시키면서 “병합 이후 다방면에서 발전하며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일제의 주장은 식민 지배의 수탈 목적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한 술책이며,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국제사회에 강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사를 계획하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철옹성 같은 일제의 무력에 맞서 추위와 배고픔,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을 하며 현실을 이겨내야 했던 이 땅의 독립운동가! 이 책이 앞으로 우리 후학들이 기억되지 않은 독립운동가, 기록되지 않은 독립운동사를 발굴, 연구하는 데 기폭제가 되어 마침내 역사의 공백을 메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무장투쟁과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그리고 밀정!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그들을 만나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의병’에서 1910년 독립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하지만 근대화와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의혈투쟁 등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에 비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접한 독립운동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 『비겁한 근대, 깨어나는 역사』에서 소개하는 독립운동가는 모두 20명이지만, 이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조금은 낯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다. 황해도를 대표하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한 이진룡, 국내에 활동 근거지를 구축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헌신했던 우재룡, 밀정의 계략에 빠져 비록 완전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현재의 15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강탈해 통쾌함을 안겨주었고,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가 되었던 ‘15만 원 탈취 사건’의 윤준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3·1운동과 관련하여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는데 중심적으로 활동했던 이종일, 불교계의 3·1운동을 지휘한 뒤에 좀 더 먼 앞날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노영,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유관순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8호 감방 여성 독립운동가 동풍신과 어윤희, 김향화에 얽힌 일화가 뜨겁게 다가온다.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은 안경신, 5척(152센티미터) 단신으로 투사가 되어 꺾이지 않은 기개로 ‘배포 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한훈, 대구 중심가에 폭탄을 터뜨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사형을 앞두고 형무소에서 갑자기 사망한 장진홍, 홀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이수흥이 독립운동사의 한 면을 장식한다. 무장투쟁만이 독립운동의 전부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24년 만에 귀국하여 마술사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도왔던 김문필,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적의 항공모함보다 강한 우리말과 글을 지켰던 정태진, 그리고 결은 다르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밀정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 관한 우리의 기억은 여전히 몇몇 독립운동가에 국한되어 있다. 독립운동사의 채워지지 않은 공백을 살펴보면서 뜨겁게 살다간 기억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가슴 벅차고 설레는 우리 역사 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