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이데올로기 연구 (독서)/8.부루주아

부르주아전 (2005)

동방박사님 2023. 11. 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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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반적으로 부르주아에 대한 이미지는 노동계급을 착취한 자본가로 대표되는 ‘악인’이 아니면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문화적으로 진보와 혁신을 이룬 ‘선한 부르주아지’로 양분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게이는 이런 정형화된 부르주아 계급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평생 동안 써온 일기를 비롯해 당시의 편지, 소설, 그림, 신문 등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를 동원하여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그려낸다.

에로스, 불안, 공격욕 같은 부르주아의 은밀한 내면이나 신에게 경배하고 신비주의에 무릎을 꿇은 중간층의 모습, 자녀에 대한 비이성적인 체벌과 광폭한 대량학살 등 부르주아 계급의 다양한 모습을 흥미롭게 파헤치고 있다. 그 속에서 저자는 “노동의 복음”에 대한 숭배와 “사생활의 불가침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부르주아 계급의 공통된 특징으로 지적한다. 부르주아의 모습을 통해서 19세기가 현재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목차

서론
전주

제 1 부 부르주아지의 토대

1. 부르주아지(들)
부르주아지인가, 부르주아지들인가? | 권력, 꿈꾸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참정권 확대를 향하여 | “우리와는 판이한 평범한 사람들” | 부르주아지와 그 적들

2. “홈, 스위트 홈”의 그림자
오이디푸스 갈등극 | 동반자적 가족,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불평등
산아제한 - 불경한 지식의 확산 | 연애결혼을 위하여

제 2 부 욕망 그리고 방어

3. 에로스
이성애와 동성애 | 처녀성에 대한 집착 | 여성 불감증의 도그마 | 성생활의 즐거움

4. 공격성을 위한 변명
보편화된 공격성 | 어린이에 대한 폭력 | 공적 복수의 사악함
공격성의 공식화 -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 사형제도, 지속할 것인가?

5. 불안의 이유
불안 - 근대의 질병 | ‘신경쇠약’의 탄생 | 전통의 동요와 해체
자위에 대한 공포 | 불안과 안정 사이에서

제 3 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

6. 신의 죽음 그리고 부활
세속화의 진전 | 빅토리아 시대의 세속화? | 과학과 종교의 모호한 경계
근대 신비주의의 물결 | 과학적 합리주의를 거부하다
농민과 노동자의 탈신앙 - 부르주아의 사악한 동기

7. 의심스러운 노동의 복음
노동의 복음 | 노동 - 부르주아의 미덕 | 노동에 짓눌린 부르주아 여성
노동자 - 교환 가능한 노동 단위 | 부르주아, 양심과 싸우다

8. 예술적 취향
다양한 미적 취향 | 보다 쉽게 예술을 향유하다
경제적 여유로 예술을 즐기다 | 후원자와 평론가의 활약

9. 자기만의 방
사생활의 이데올로기 | 존중받아야 할 사적 커뮤니케이션 | 일기의 신성함
타인에 대해 문 닫을 권리 | 사생활의 이론화 | ‘자아’라는 수수께끼에 몰두하다

후주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주석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피터 게이 (Peter Gay)
 
유럽 근대 사상사와 문화사 분야의 권위자. 독일 베를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기업가이자 무신론자인 부모 밑에서 유대인이라는 자각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쿠바로 갔으며 1941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9년부터 예일대학 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계몽주의의 기원The En...
 
역자 : 고유경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교육과 선전 사이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슈투트가르트 노동자문화운동에서 아마추어 연극과 영화Zwischen Bildung und Propaganda. Laientheater und Film der Stuttgarter Arbeiterkulturbewegung zur Zeit der Weimarer...

책 속으로

달리 말하면 노동은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이상인 인격과 불가분의 동반자였다. 노동은 선량한 인격으로 가는 왕도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같은 남성성의 신봉자들은 빅토리아 후기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퇴폐적 경향을 우려했다. 그는 정신분석학자들로 인해 친숙해진 “거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게으름이 남성성에 초래할 중대한 위험을 걱정했다. 근면한 노동만이 이 병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이었다. 1910년 베를린 대학에서 그는 “문명이 내포한 주된 위험 중 하나는 남성적인 투쟁의 미덕, 즉 격렬한 투쟁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지나치게 안락하고 사치스런 삶을 영위한다면 그 유약함이 마친 산처럼 그들의 남성적 기질을 부식시킬 위험이 항존한다.”고 연설했다.
--- p.259~260 '의심스러운 노동의 복음' 중에서

출판사 리뷰

누가 슈니츨러의 일기를 훔쳐보았는가?

세기말의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14세부터 5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평생 파헤치고 또 파헤친 내면의 비밀은 19세기 부르주아의 은밀한 욕망과 복잡한 심리를 드러내는 소설과 연극으로 승화되었다. “정신분석에 의거한 ‘고생스런 연구’ 없이도 거의 본능적으로 이 모호하고 은밀한 영역에 침투할 수 있었던”(p. 101) 슈니츨러의 탁월한 능력은 동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로부터 부러움 어린 찬탄을 사기도 했다.
그런 슈니츨러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 있었다. 열여섯 살이었던 1879년 3월, 책상서랍 속에 깊이 감추어놓은 일기를 저명한 이비인후과 의사인 아버지 요한 슈니츨러가 몰래 꺼내어 읽은 것이다! 사춘기 소년의 소소한 연애사를 숨김없이 기록한 이 빨간색 작은 공책은 아버지의 분노와 우려를 자아냈다. 아버지는 왜 분노하고 무엇을 걱정했을까? 또 아들이 이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의 행위에 분개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전주” 부분에 소개된 이 사소한 에피소드는 아홉 개의 주제로 변주되면서, 19세기 부르주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역사학의 프로이트” 피터 게이, 부르주아의 전기를 쓰다

우리에게 열쇠를 쥐어주는 인물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역사가의 한 사람인 피터 게이다. 일찍이 프로이트로부터 학문적 자극을 받은 그는 부르주아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탐구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겨왔다. 저자는 이제 슈니츨러의 일기를 ―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 당당하게 펼치면서 슈니츨러 자신과 그가 그려낸 인간 군상, 곧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를 쓴다.
피터 게이가 시종일관 독자에게 주지시키는 것은 ‘복수’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존재다. 그가 그려낸 19세기 부르주아지는 다양한 의상을 입고 있다. 잡지에서 오려낸 그림으로도 만족했던 소시민층과 넉넉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세잔의 그림을 광적으로 수집했던 파리의 화상, 작위에 연연해하던 영국의 시인과 당당하게 귀족 칭호를 거부한 독일의 기업가, 권위에 복종하여 왕의 취향과 명령대로 미술관을 지었던 바이에른의 관리들과 오로지 애향심 하나로 자비를 들여 관현악단을 설립하고 후원한 맨체스터의 상공업자들이 그들이다.

“19세기 중간계급이 보여준 정치적 열망, 권위에 대한 태도, 미술과 음악의 취향, 경제적 상황의 놀라운 다양성, 나라마다 상이하게 발전한 중간계급의 존재는 복수적 중간계급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이 책의 단 한 문장이라도 내가 이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p. 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는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서로를 알아보았다.”(p. 372). 프로이트가 약혼녀에게 말했듯 부르주아지는 “우리와는 판이한 평범한 사람들”을 타자화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냈다. 경제적 토대나 정치적 자율성 같은 ‘일반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감정과 특정한 사고방식을 통해 부르주아를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의 프로이트”로서 저자가 택한 방법론이다. 저자는 동시대의 인상파 회화처럼, 분절되고 때로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한 점 한 점의 증거들을 엮어서 부르주아지의 영혼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부르주아, 베일을 벗다

우리에게 19세기 부르주아의 이미지는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진취적으로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적·문화적으로도 진보와 혁신의 세기를 선도해나간 ‘선한’ 부르주아지와, “피도 눈물도 없이” 노동계급을 착취하면서 양심보다는 이윤을 선택한 자본가들로 대변되는 ‘악한’ 부르주아지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두 이미지가 갖는 공통점은 부르주아 계급을 한 가지 색깔로만 칠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터 게이는 이런 정형화된 이미지를 부정하기 위해 슈니츨러를 비롯한 19세기 부르주아지의 일기, 편지, 소설, 그림, 신문광고 등 다양하고 풍부한 사료들을 동원한다.
그의 방식이 무엇보다도 빛을 발하는 곳은 특히 에로스, 불안, 공격욕 같은 부르주아의 내면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영역이다. ‘빅토리아적’이라는 형용사의 상징적인 의미와는 달리, 많은 중간계급 부부와 연인들은 성의 즐거움을 정열적으로 공유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애인들과의 정사와 오르가슴의 회수를 일기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합산했던 슈니츨러의 특수한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 범주에 포함된다.
한편 야만적인 폭력성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여겨지는 19세기에도 여전히 자녀에 대한 비이성적인 체벌과 광포한 대량학살은 존재했고, 그것은 이 시대에 치명적으로 증가했던 집단적 ‘신경증’을 반영한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신경증’이 특히 부르주아지의 질병이었음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계층 또한 나름대로 근심과 절망의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은 날마다 생계를 잇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신경쇠약이라는 사치를 누릴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귀족은 그런 중간계급의 소일거리에 대해 초연했다. 반면 적당히 여가를 즐기고 가정과 사회에서 의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양심의 위기를 겪는 부르주아지는 히스테리, 넌더리나는 권태, 끔찍한 상상과 같은 신경증에 굴복할 가능성이 높았다.”(p. 191)

나아가 과학과 이성의 승리가 공식화된 ‘세속화된 19세기’에도 여전히 신에게 경배하고 신비주의에 무릎을 꿇은 중간계급의 존재를 통해 저자는 이 시대의 종교성이 갖는 복합적인 면모를 지적한다. 이와 같은 다양성은 특히 부르주아의 예술적 취향에도 반영되어 수많은 전위적인 실험은 물론 거기에 대한 반감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를 ‘하나의’ 계급으로 묶을 수 있는 증거로서 피터 게이는 특히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그것은 “노동의 복음”에 대한 숭배, 그리고 사생활의 불가침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아들에 대한 요한 슈니츨러 박사의 불안과 분노는 바로 학업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고 근면이라는 “부르주아 10계명 중 하나”를 어긴 데서 나온 것이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분개는 바로 “자기만의 방”을 침입한 외부자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리하여 아버지가 몰래 읽은 슈니츨러의 일기는 피터 게이에 의해 다시 한 번 펼쳐져 19세기 부르주아지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19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피터 게이가 보여주는 나폴레옹 최후의 패전(1815)으로부터 제1차 대전의 발발(1914)에 이르는 한 세기는, 뒤이은 “디스토피아의 세기”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20세기 인종주의의 피해자 중 하나이기도 한 저자는 19세기의 주역이었던 부르주아에 대해 숨김없이 애정을 고백한다.

“실제로 20세기에 관철된 모든 진보적 주장은 이미 19세기에 상당히 유능하고 설득력 있는 대변인들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축, 회화, 조각, 소설, 희곡 등을 망라한 예술과 문학에서 우리가 20세기의 현상으로 알고 있는 모더니즘의 업적은 모두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예견된 것들이다. 빅토리아 인은 자신의 가장 좋은 유산을 모조리 배은망덕한 후대에게 남긴 듯하며, 우리 시대의 악덕은 우리 스스로의 발명품인 것 같다.”(p. 366)

물론 “디스토피아의 세기”를 가져온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러한 저자의 결론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를 주조해낸 모태로서 19세기가 갖는 각별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학과 정신분석학, 문학을 전공하는 전문 연구자들은 물론 19세기라는 진보의 세기, 나아가 근대와 근대성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지식을 원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즐겁게’(저자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명인 Frohlich를 같은 의미의 영어 Gay로 바꾸었다) 그 지적 여정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