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이데올로기 연구 (독서)/8.부루주아

그리스도교, 부르주아의 종교인가 민중의 종교인가 (2015)

동방박사님 2023. 11. 7. 20:42
728x90

책소개

독일 신학계에서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논쟁적인 신학자

도서출판 삼인에서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그리스도교, 민중의 종교인가 부르주아의 종교인가』가 출간됐다. 메츠는 그리스도교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져 온 정치신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메츠는 아흔 살에 가까운 지금도 그리스도교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제자들과 토론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부르주아 종교를 넘어서 ― 그리스도교의 미래에 대한 연설』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메츠는 그리스도교가 지금 전환점에 서 있으며, 부르주아 종교로서 부패해 갈 것인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메츠는 새로운 출발선이 될지 과거를 답습하는 회귀선이 될지 모를 이 전환점 앞에서 “부르주아가 어떤 추종자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혹하다”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곱씹는다. 그리고 신중하고도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교는 부르주아의 종교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이 주장은 당장 독일 신학계의 뜨거운 화두가 됐다. 얼마나 뜨거웠느냐 하면, 그 후 메츠가 뮌헨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뮌헨의 추기경 라칭거와 바이에른의 문화교육부 장관이 합심해 가로막았을 정도였다.

목차

옮긴이의 말
서문
1장. 종교는 구원의 희망인가, 부르주아의 욕망인가?
2장. 아우슈비츠 이후의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 부르주아 종교의 파국에 대한 고찰
3장. 생존의 떡 ― 인간학적 혁명의 전조로서 그리스도인의 성만찬
4장. 제2종교개혁을 향한 과정 ― 부르주아 이후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미래
5장. 그리스도교와 정치 ― 부르주아 이후의 종교
6장. 부르주아의 변화를 위한 기초교회의 탄생
7장. 개혁가의 신앙
맺음말
출처
추천 도서
요한 밥티스트 메츠 연보
주요 저서
 

저자 소개

저자 : 요한 밥티스트 메츠
Johann Baptist Metz 1928년 독일 바이어른 주 오버팔츠 출생. 밤베르크대학교, 인스브루크대학교, 뮌헨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52년 철학박사학위(뮌헨대), 1961년 신학박사학위(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를 취득했다. 195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뮌스터대학교 가톨릭신학부에서 기초신학 정교수로 봉직했고, 그 후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봉...
 
역자 : 이석규
1962년생으로 개신교 목사이자 정치신학자다. 한국에서 석사까지 졸업한 후, 독일 뮌스터대학교 가톨릭신학부에서 메츠의 정치신학 세미나 등에 참여했고, 독일 뮌헨대학교 개신교신학부에서「독일의 정치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과정(지도교수 헤르만 팀)을 졸업했다. 귀국 후 호남신학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사회정치윤리, 정치신학, 민중신학 등을 강의했다. 현재는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책 속으로

이제 성서 속 구원의 희망은 부르주아가 욕망하는 대상이 돼버렸다. 이 같은 판단은 단순히 부르주아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또한 유럽과 북미 교회가 교회 생활을 일상에 그대로 각인하는, 이른바 소시민과 부르주아에 의해 탄생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부르주아의 욕망과 구별되지 않는, 따라서 자신을 비판해야만 하는 그리스도교를 걱정하는 표현이다. --- p.22~23

부르주아의 종교 안에 욕망(Hoffnung)은 약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발적 연약함을 은폐한다. 부르주아가 꾸민 헛된 기다림에서 만들어진 희망이 치러야 할 희생은 크다! (……) 예수의 사랑 역시 부르주아의 욕망 속에 감춰진 사랑이 됐다. 예수의 사랑은 당파적이고, 그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사회 하층민이었다. 이런 보편적인 사랑은 당파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이 어느 당파를 어떤 식으로 붙잡느냐 하는 데 달렸다. 즉 십자가의 어리석음(Torheit)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이 없는 조건을 말한다. 부르주아의 욕망이 투사된 종교는 보편적 그리스도교의 사랑, 개념, 긴장감이 사라지고 안일함만 가득하다. 이런 사랑 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윤리학이 보존될 수 없다. --- p.27~28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역사가 부족한 한편, 세속 정치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가? 아우슈비츠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그 신학 자체에 대한 반복적인 질문이다. 이 점은 중요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단초들 가운데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함께 박해당한 경험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박해는 서서히 끝나갔지만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박해는 수백 년을 지나는 동안 점점 심각해졌다. 이러한 차이의 역사적 과정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여러 분야에서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모두가 그리스도교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그리스도교와 신학을 비판할 준비가 됐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언어로 모든 신학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앞서서 이런 내면화와 개인화를 정치적 관계와 결탁하고 현실의 정치적 권력과 화해하도록 본래 모습을 바꿨다. --- p.67~68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나는 아우슈비츠에 직면해 동요를 일으키고 침묵하지 못하게 추동하는 질문을 하고 싶다. 이 질문은 나로 하여금 “정치신학”을 만들게 했다. 정치신학은 바울의 전통보다 예수의 복음서에 주목한다. 정치신학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인간의 물적·영적인 탈사유화(Entprivatisierung)를 강조한다. 정치신학은 구원(치유)의 엄격한 내면화가 생산하는 위험들과, 기존의 정치적 힘들과 결탁한 그리스도교의 무비판적인 화해에 반대하며 수행하는 것이다. --- p.69

제2종교개혁은 “아래로부터의 종교개혁”, 즉 하층의 개혁이어야 한다. (……) 전통적인 교회 공동체가 이 개혁의 주체가 되리라고 믿지는 않는다. 북미와 중유럽, 특히 최소한 부르주아 종교의 폐해를 조직적으로 반성하는 “순수 종교적 사제 공동체”의 이상이 지배하는 독일도 아니다. 부르주아의 종교는 이런 개혁에 둔감하며, 그러면서도 스스로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독일 교회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가난한 교회들도 주목해야 한다. 가난한 교회에서야말로 개혁의 진정한 주체를 찾을 수 있다. 이 속에서 이른바 기초 공동체가 발전하며 가장 중요한 민중으로부터 발생하는 신비와 정치, 종교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이 어우러진다. 그리고 여기서 사회의 근본적인 충돌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성만찬의 밥상 공동체를 형성하게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사회와 교회가 보호해야 할 대상에서 벗어나 역사의 종교적·정치적 주체가 된다. --- p.133~134

스타니슬라프(Stanislaw)는“발생하지 않은 행위들은 종종 성과의 파국적 결핍을 일으킨다”라고 말했다. 만약 그들이 교회를 비판하려는 이해나 교회와의 변화에서 연속성을 가지는 “성숙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이런 변화가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의 역사적 정체성에 속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평신도”가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을 교회의 변화 속에서 이해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기만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판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비판하는 자유가 없는 것이 문제다. 이 결핍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 가운데 하나다.
--- p.187~188
 

출판사 리뷰

나는 이제 하나의 공포증에 대해 말하려 한다. 부르주아의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공개적인 선언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교회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공포증만이 아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마음에 회개가 꾸준히 일지 않고 습관적인 형식에 그쳐버린다는 점이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의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회개한다. 하지만 행함 없는 회개만 믿는 것 아닌가? 상징적인 예수 뒤따름만 믿고, 습관적인 뒤따름의 두터운 외투 아래 머무르지 않는가? ― 본문 25쪽에서

독일 신학계에서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논쟁적인 신학자

도서출판 삼인에서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그리스도교, 민중의 종교인가 부르주아의 종교인가』가 출간됐다. 메츠는 그리스도교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져 온 정치신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메츠는 아흔 살에 가까운 지금도 그리스도교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제자들과 토론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부르주아 종교를 넘어서 ― 그리스도교의 미래에 대한 연설』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메츠는 그리스도교가 지금 전환점에 서 있으며, 부르주아 종교로서 부패해 갈 것인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메츠는 새로운 출발선이 될지 과거를 답습하는 회귀선이 될지 모를 이 전환점 앞에서 “부르주아가 어떤 추종자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혹하다”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곱씹는다. 그리고 신중하고도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교는 부르주아의 종교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이 주장은 당장 독일 신학계의 뜨거운 화두가 됐다. 얼마나 뜨거웠느냐 하면, 그 후 메츠가 뮌헨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뮌헨의 추기경 라칭거와 바이에른의 문화교육부 장관이 합심해 가로막았을 정도였다.

가난한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급진적인 목소리라고 낙인 찍혀 여러 어려움을 겪었으나, 메츠는 한결같은 ‘신실함’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메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일으킬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메츠는 ‘부르주아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들은 매주 한 번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 ‘회개라는 두터운 외투’를 둘러쓰고 ‘행함 없는’ 기도를 올린다. 부르주아는 가난한 교회를 위한 모금에 동참하며 자신이 마치 정의로운 시민이라도 된 것 같은 자긍심을 느낀다. 교회가 부르주아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이해에 맞게 종교를 재단하고, 종교는 그에 발맞춰 돌아간다. 부르주아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을 통해 구출해 내야 할 ‘대상’이다.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와 유럽의 식민지 정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제3세계에 마구잡이로 쳐들어가 파괴하고, 착취하고, 입맛에 따라 이용해 왔다. 이러한 뿌리 때문에 오늘날에도 제3세계는 고통스러운 가난에 허덕인다. 메츠는 제2종교개혁의 주체가 바로 이 제3세계의 가난한 교회들이라고 적시하며, 오직 그들만이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밝게 비출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가난한 자들의 탄식이 제1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깊숙이 찌른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고통은 자신의 죄를 마주보게 한다. 이것은 제1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교회에서 평화로운 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는 대신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깨닫고 함께 괴로워하는 것, 이로써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제2종교개혁의 출발점이다.

제2의 종교개혁을 향하여

물론 이러한 전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만한 손쉬운 길은 아니다. 교회는 메츠가 기대하는 변화보다 더 빠르게, 점점 부르주아의 종교로 보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츠는 제3세계 교회가 제1세계를 향해 ‘삼투적(渗透的) 압박’을 끊임없이 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종교는 세상이라는 토대 위에 지어졌으므로, 그 토대가 변화한다면 종교 역시 변화의 시기를 맞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는 순간, 그리스도교의 혁신을 염원하는 자들이 방향키를 잡아야 한다.

메츠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둘러싼 논의들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토론과 비판은 신학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몫이다. 그들이 주체가 되어 제도권 교회 안에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 그 과정 역시 그리스도인 개개의 성찰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은 삶 구석구석을 파고들어야 한다. 메츠는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에 대한 욕망 역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묻는 도덕적 질문과 결부된다고 본다. 나사렛 예수가 그러했듯, 사랑이란 추상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라면 메츠의 이 책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작은 책에 응집된 단단한 무게감을 느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