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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 무슬림-기독교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은 적지 않다. 이 해묵은 불편감은 21세기의 이라크 전쟁에서 ISIS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크게 악화된 것이지만, 19세기 이슬람권의 역사 전체를 통해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미 쌓여 온 집단 감정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 더욱 휘발성이 강하다.
이 책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신민들 모두에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다양한 인구의 공존을 이루어 내는 데 상당히 성공했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오랜 시간에 걸친 서구적 근대성의 지배에 의해 참혹하고 폭력적인 단절과 분리로 끝난 역사를 서술한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은 우리가 막연한 이슬람 공포증에서 벗어나 ‘문명의 충돌’로 이해하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갈등들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 무슬림-기독교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은 적지 않다. 이 해묵은 불편감은 21세기의 이라크 전쟁에서 ISIS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크게 악화된 것이지만, 19세기 이슬람권의 역사 전체를 통해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미 쌓여 온 집단 감정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 더욱 휘발성이 강하다.
이 책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신민들 모두에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다양한 인구의 공존을 이루어 내는 데 상당히 성공했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오랜 시간에 걸친 서구적 근대성의 지배에 의해 참혹하고 폭력적인 단절과 분리로 끝난 역사를 서술한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은 우리가 막연한 이슬람 공포증에서 벗어나 ‘문명의 충돌’로 이해하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갈등들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오스만국가의초창기
더 살펴보기 / 변방의 영웅 서사시
2장 고전 시대(1450~1550년대)
더 살펴보기 / 이베리아 유대인의 오스만 제국 이주
3장 분권화의 시대(17~18세기)
더 살펴보기 / 카드자델리 운동
4장 동방 문제의 대두
더 살펴보기 /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5장 탄지마트의 국가 개조
더 살펴보기 / 탄지마트 시대의 개혁 관료
6장 압뒬하미드 시기의 무슬림 내셔널리즘
더 살펴보기 / 선교사들의 관점 헨리 해리스제섭
7장 20세기 초 청년 투르크 집권기
더 살펴보기 /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와 종교
1장 오스만국가의초창기
더 살펴보기 / 변방의 영웅 서사시
2장 고전 시대(1450~1550년대)
더 살펴보기 / 이베리아 유대인의 오스만 제국 이주
3장 분권화의 시대(17~18세기)
더 살펴보기 / 카드자델리 운동
4장 동방 문제의 대두
더 살펴보기 /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5장 탄지마트의 국가 개조
더 살펴보기 / 탄지마트 시대의 개혁 관료
6장 압뒬하미드 시기의 무슬림 내셔널리즘
더 살펴보기 / 선교사들의 관점 헨리 해리스제섭
7장 20세기 초 청년 투르크 집권기
더 살펴보기 /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와 종교
책 속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21세기를 맞아 창의적인 인문학 연구를 고취하고 인문학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소통하여 그 내실을 다지며 사회와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시선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옛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되살리고 변화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심화된 교양과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인문학 의 위기를 걱정하고 그 미래를 고민하며 시대를 헤쳐 나갈 인문학의 지혜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정작 ‘대중인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저술들은 턱없이부족하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창의적 학술성을 지닌 인문학적 지식이 가독성과 깊이를 겸비한 저술을 통해 학계 및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인문학 주제들을 발굴해 내고 인문학 스스로 대중 및 사회와의 접점을 능동적으로 찾아나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대중과 함께하는 인문학의 향연”이라는 취지에서 2010년 시작된 ‘서울대학교 인문강좌’의 성과를 저술로 묶어 낸 것이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교양서와 학술서라는 진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품격 있는 고급 교양서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의 소장 교수들이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문사철(文史哲)의 경계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펼쳐 보이고자 한다.
서울대인문강의위원회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창의적 학술성을 지닌 인문학적 지식이 가독성과 깊이를 겸비한 저술을 통해 학계 및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인문학 주제들을 발굴해 내고 인문학 스스로 대중 및 사회와의 접점을 능동적으로 찾아나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대중과 함께하는 인문학의 향연”이라는 취지에서 2010년 시작된 ‘서울대학교 인문강좌’의 성과를 저술로 묶어 낸 것이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교양서와 학술서라는 진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품격 있는 고급 교양서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의 소장 교수들이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문사철(文史哲)의 경계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펼쳐 보이고자 한다.
서울대인문강의위원회
--- 출간사 중에서
출판사 리뷰
■ 오스만 제국 안에서 무슬림-기독교인이 공존하다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는 아직도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주제이고, 모든 관련 사항을 정면으로 다루기에는 껄끄러운 주제이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성역 없이 탐구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매우 핵심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여러 무슬림 제국들은 기독교인으로 대표되는 비무슬림들과의 공존을 실용적으로 이루어 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인구의 과반수가 기독교인이었던 발칸반도에서 기독교인 공동체에게 교회를 통한 자율을 보장해 주었다. 비록 17세기 경건주의 카드자델리 운동 당시에 종교 집단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그것이 종교 간 공존의 기본 바탕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 엘리트의 지위가 크게 상승해, 이들은 금융과 상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제한적이지만 관직에도 올라 오스만 정부와 돈독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자리 잡은 총대주교청의 권위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안정되었다.
■ 유럽 제국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기독교인 갈등을 어떻게 격화시켰는가
그러나 오스만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 있었던 평화 공존의 기조는 오스만 제국의 ‘긴’ 19세기(1774~1922) 동안 많은 사건이 누적되는 가운데 형성된 상호 인식과 집단 감정으로 인해 무너졌다. 유럽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입지에 섰고,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고 개혁을 지지한다는 미명 아래 오스만 기독교인의 추가적인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국내적으로는 유럽의 경제적 침투가 가시화되고, 내국인 기독교인이 부를 향유했으며 선교사들도 현지 기독교인에게 기술, 교육, 경제 면에서 혜택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탄지마트 개혁 시대에 중앙 정부가 유럽 외교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무슬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당시 무슬림들은 군과 관료계 외에는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크림반도, 카프카스 지역 그리고 발칸반도로부터 많은 무슬림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와 큰 고난을 겪었다. 이 가운데 무슬림들은 이슬람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2등 시민이 되어 역차별 당하고 있으며 온당한 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870년대부터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된 상황은 크고 작은 영토 상실을 거듭하게 만들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과정은 오스만 무슬림들에게는 극단적인 공포의 연속이었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은 그들의 정체성의 구심점이었던 이슬람에 대한 폄훼과 멸시, 희화화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서 이슬람은 만만한 조롱거리였고 그 후에도 근대성과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부분들이 과장되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은 무슬림에게 버릴 수 없는 종교적 정체성이므로 이는 이슬람권에서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서민층에게 종교적 소속과 실천이 중요함은 물론 세속주의 지식인도 전혀 종교적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살펴볼 때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관계의 기복이 있었지만 대체로 공존하고 협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국가 존립의 위기감과 공포 속에서 이 협력 관계가 추방, 강제 이주 그리고 학살로 파탄에 이르렀다.
역사학자 마셜 호지슨에 따르면 역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유용하다. 특히 한국의 교양 대중은 식민 지배를 겪은 경험으로부터, 유럽의 근대성에 감탄하고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한편 유럽의 제국주의와 경제적 침탈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 오스만 무슬림의 입장과, 수백 년간의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나 유럽으로부터 도래한 근대적 비전에 입각하여 독립을 얻고 싶어 한 오스만 기독교인 집단들의 입장을 똑같이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오스만 무슬림, 오스만 기독교인, 더 나아가 유럽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 등 당시의 역사를 살아간 집단들 중 하나에 동일시하여 한쪽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쪽의 입장을 죄악시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는 종합적인 이해를 했을 때, 왜 중동의 서구화된 무슬림 세속주의 지식인들이 종교를 독실하게 믿지 않으면서도 이슬람에 입각한 정체성을 꼭 붙들고 있는지, 왜 공화국 시대의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접고 교육 사업에만 집중했는지, 관련된 각 집단에게 역사의 불편한 대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기피해 왔는지 같은 여러 의문들에 깊이 있는 답이 주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가시적으로 눈에 띄는 끔찍한 국제 테러리즘의 악행을 비난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서구적 근대성의 지배가 중동에서 얼마나 편파적이고 잔혹하게 작동해 왔는가에 대한 성찰이 깊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문명의 충돌’로 이해되고 있는 많은 갈등들이 좀 더 쉽게 극복되지는 않을까. 아민 말루프는 무슬림 과격분자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짓밟히고 조롱당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서, 요즘의 테러리스트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역사 전체를 아는 것보다 식민주의의 역사를 아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설파한다. 적어도 그런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중동 지역에 대한 섣부른 기독교 선교를 자제할 것이며, 중동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를 더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흑백 인종 관계에 대한 것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은 무슬림-기독교인 관계에서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바보로 남아 모두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본문 중에서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는 아직도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주제이고, 모든 관련 사항을 정면으로 다루기에는 껄끄러운 주제이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성역 없이 탐구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매우 핵심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여러 무슬림 제국들은 기독교인으로 대표되는 비무슬림들과의 공존을 실용적으로 이루어 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인구의 과반수가 기독교인이었던 발칸반도에서 기독교인 공동체에게 교회를 통한 자율을 보장해 주었다. 비록 17세기 경건주의 카드자델리 운동 당시에 종교 집단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그것이 종교 간 공존의 기본 바탕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 엘리트의 지위가 크게 상승해, 이들은 금융과 상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제한적이지만 관직에도 올라 오스만 정부와 돈독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자리 잡은 총대주교청의 권위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안정되었다.
■ 유럽 제국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기독교인 갈등을 어떻게 격화시켰는가
그러나 오스만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 있었던 평화 공존의 기조는 오스만 제국의 ‘긴’ 19세기(1774~1922) 동안 많은 사건이 누적되는 가운데 형성된 상호 인식과 집단 감정으로 인해 무너졌다. 유럽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입지에 섰고,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고 개혁을 지지한다는 미명 아래 오스만 기독교인의 추가적인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국내적으로는 유럽의 경제적 침투가 가시화되고, 내국인 기독교인이 부를 향유했으며 선교사들도 현지 기독교인에게 기술, 교육, 경제 면에서 혜택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탄지마트 개혁 시대에 중앙 정부가 유럽 외교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무슬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당시 무슬림들은 군과 관료계 외에는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크림반도, 카프카스 지역 그리고 발칸반도로부터 많은 무슬림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와 큰 고난을 겪었다. 이 가운데 무슬림들은 이슬람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2등 시민이 되어 역차별 당하고 있으며 온당한 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870년대부터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된 상황은 크고 작은 영토 상실을 거듭하게 만들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과정은 오스만 무슬림들에게는 극단적인 공포의 연속이었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은 그들의 정체성의 구심점이었던 이슬람에 대한 폄훼과 멸시, 희화화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서 이슬람은 만만한 조롱거리였고 그 후에도 근대성과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부분들이 과장되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은 무슬림에게 버릴 수 없는 종교적 정체성이므로 이는 이슬람권에서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서민층에게 종교적 소속과 실천이 중요함은 물론 세속주의 지식인도 전혀 종교적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살펴볼 때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관계의 기복이 있었지만 대체로 공존하고 협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국가 존립의 위기감과 공포 속에서 이 협력 관계가 추방, 강제 이주 그리고 학살로 파탄에 이르렀다.
역사학자 마셜 호지슨에 따르면 역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유용하다. 특히 한국의 교양 대중은 식민 지배를 겪은 경험으로부터, 유럽의 근대성에 감탄하고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한편 유럽의 제국주의와 경제적 침탈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 오스만 무슬림의 입장과, 수백 년간의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나 유럽으로부터 도래한 근대적 비전에 입각하여 독립을 얻고 싶어 한 오스만 기독교인 집단들의 입장을 똑같이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오스만 무슬림, 오스만 기독교인, 더 나아가 유럽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 등 당시의 역사를 살아간 집단들 중 하나에 동일시하여 한쪽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쪽의 입장을 죄악시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는 종합적인 이해를 했을 때, 왜 중동의 서구화된 무슬림 세속주의 지식인들이 종교를 독실하게 믿지 않으면서도 이슬람에 입각한 정체성을 꼭 붙들고 있는지, 왜 공화국 시대의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접고 교육 사업에만 집중했는지, 관련된 각 집단에게 역사의 불편한 대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기피해 왔는지 같은 여러 의문들에 깊이 있는 답이 주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가시적으로 눈에 띄는 끔찍한 국제 테러리즘의 악행을 비난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서구적 근대성의 지배가 중동에서 얼마나 편파적이고 잔혹하게 작동해 왔는가에 대한 성찰이 깊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문명의 충돌’로 이해되고 있는 많은 갈등들이 좀 더 쉽게 극복되지는 않을까. 아민 말루프는 무슬림 과격분자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짓밟히고 조롱당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서, 요즘의 테러리스트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역사 전체를 아는 것보다 식민주의의 역사를 아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설파한다. 적어도 그런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중동 지역에 대한 섣부른 기독교 선교를 자제할 것이며, 중동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를 더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흑백 인종 관계에 대한 것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은 무슬림-기독교인 관계에서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바보로 남아 모두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본문 중에서
'43.서양사 이해 (독서>책소개) > 2.서양고중세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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