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金敎臣
기타 별명은 양칼
개인정보
출생 1901년 4월 18일 / 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군 /사망 1945년 4월 25일(44세) / 일제 강점기 조선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병사 / 국적 대한제국 / 교파 개신교 / 부모 아버지 김염희(金念熙) / 어머니 양신(楊愼) / 재직 종교인, 교육가
학력 도쿄 고등사범학교 지리학과 전문학사
김교신(金敎臣, 1901년 4월 18일 ~ 1945년 4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에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한 종교인, 사상가, 출판인, 교육자이며 독립유공자이다.
생애
일본유학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김염희와 어머니 양신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하고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도쿄유학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조선성서연구회
귀국 후 당시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이 강의에 참석했던 김교신을 비롯하여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김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교회라는 조직과 그 속에서 유지되어 온 형식이 아닌, 예수와 성서 위에 세워진 조선을 위한 기독교 곧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배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얼에 따른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였다.
김교신은 양정고보, 경기고보, 송도고보 등에서 지리학, 박물학 교사로서 기숙학생 지도, "무레사네" 모임 등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와 전인교육에 헌신하였다.유달영, 윤석중, 손기정, 구본술 등 많은 제자들이 김교신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타고난 체력이 천하장사와 같이 강건하였으며, 그의 곧은 성격과 날카로운 외모로 인해 "양칼"이라는 별명을 가졌었으나, 수업이나 생활 속에서 자주 눈물을 흘릴 정도로 따뜻한 품성을 지녔었다.
성서조선 발행
김교신은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까지 잡지 발행에도 진력하였다. 당시 김교신은 잡지교정으로 눈이 충혈되고 학교일과 잡지발행일을 같이 하느라 과로하여 병이 날 정도로 무척 열심히 일했으며, 혼자서 수금, 주필, 사무, 배달, 취재, 교정, 교열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김교신은 서점에 배달하러 갈 때마다 “이것도 잡지냐, 팔리지도 않는 잡지를 왜 만드냐”와 같은 모욕을 겪기도 했으며, 같은 기독교인들과의 갈등, 총독부 검열로 인한 잡지 발간의 지연 등, 늘 폐간되기 직전의 위기와 싸워야 했다. 결국 1942년 이른바 성서조선의 권두문 "조와(弔蛙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라는 뜻)" 로 인한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1년 여의 옥고를 치르고, 성서조선은 폐간 당하였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조와" 사건이 일어난 1942년 이전에도 이미 조선 총독부의 감시하에서 돼지(군국주의 국가들), 북쪽 아이(나치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서쪽 어른(폴란드)을 찢는 미친 저먼 셰퍼드(나치독일) 미치기 시작한 불독(무솔리니 독재정권치하의 이탈리아) 등으로 빗댄 우화를 통해 비판하고 있었다.
죽음과 광복 이후의 영향
이후 흥남 비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945년 봄 발진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비료공장에서 김교신은 매우 성실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김교신의 일기 등 그가 저술한 글은 해방 직후 부족했던 한국어 교육의 교본으로 사용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 속에 담긴 김교신의 투철한 교육 철학과 교육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후배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기
김교신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기를 읽는 것이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에 〈일기〉를 연재했는데, 노평구의《김교신 전집》을 부키에서 책으로 만들 때에 3권의 단행본으로 만들어졌고, 익투스에서 김교신 선생의 일기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일기 내용 속에는, 지리·박물 수업을 위해 찾아간 광산에서 만난 가난한 청소년 노동자들에 대한 슬픔,애국심, 사회주의자였던 친구 한림과의 깊은 우정,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 사회주의 유물론의 늪에 빠진 제자에 대해 애통해 하는 모습,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잘 된다는 믿음,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복음을 고난으로써 따름이지 교회생활이나 살아서는 부귀영화 누리다가 죽어서 천당을 덤으로 얻으려는 값싼 기복신앙이 아님을 말하는 이야기, 동네 장로교회에 온 개신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말은 화려하나 내용은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문학에서의 언급
소설가 조정래는 《아리랑》과 《태백산맥》에서 김교신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소설에서 김교신 선생은 출연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인 개신교 선교사들의 편협성과 정복성에서 벗어나 조선민족의 기독교를 만들고자 한 기독교 사상가로 묘사된다. 조정래 작가는 아리랑과 태백산맥에서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천하려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두 사람 출연시킨다. 한 사람은 고서완, 한 사람은 서민영인데 고서완은 김교신 선생의 사상에 동의하여 성서조선을 구독하고, 서민영은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황순직에게 기독교를 선교사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민족의 종교가 되게 하려고 하였던 김교신의 사상을 소개한다.
비판
김교신이 일본인 우찌무라 간조를 추종하였던 것에 대하여, 김린서 목사는 나라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판에 왜 영적으로도 일본의 식민지를 자처하느냐고 못마땅해 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친일 교회만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교회는 대부분이 신사참배등 반성서적인 일제에 열성 찬동하는 친일파였다.
반면에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등 일본제국주의 자체를 맹비난하며 반대해왔다.
나라 전체가 식민지화와 전쟁을 찬성하고 한국인을 개취급하는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우찌무라 간조가 한국식민지화와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것은 김교신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무교회주의에 감명 받았다기보다 제국주의 반대에 감명 받았다고 봐야 한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전쟁을 일으켜 타국민을 학살하고 남의 나라를 빼앗는 반성서적인 친 제국주의, 친일파였다. 일제는 한국에 친일, 친제국주의 교회만을 살려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 무교회를 실천한 것은 친일, 제국주의교회를 한정한 것이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김교신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5년 죽음을 맞이해 진정한 한국 교회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가 일평생 보아온 것은 친일, 친제국주의 교회였다.
성서조선
간행주기 월간지 /종류 기독교월간지 / 창간일 1927년 / 폐간일 1942년
성서조선(聖書朝鮮)은 기독교 사상가인 김교신이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1927년부터 1942년까지 발행한 무교회주의 기독교계 월간 잡지이다. 1942년 3월호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弔蝸)’ 조와사건으로 잡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일제는 김교신, 수제자 류달영, 함석헌, 송두용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장기려박사를 포함 전국의 독자 300여 명을 검거했다.
역사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을 배운 일본 유학생 6인조의 동인지로서 동경에서 시작한 성서조선은, 유학시절 스기나미 마을(일본어: 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진 ‘조선성서연구회’활동 중 연구한 기독교 지식인으로서의 깨달음들을 담았다고 창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곧 성서조선 잡지는 김교신 혼자서 원고 수집, 편집, 총독부 검열, 교정, 출판, 배포 등의 모든 일을 감당해 내는 일인(一人)출판물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성서연구, 성서해설,인생론,신앙론 등 다양한 제목을 담아 조선을 위한 기독교를 주장한 김교신과 그 동지들의 신앙과 신학 연구를 전파하였다.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권두언 "조와(弔蛙)"(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는 뜻)에서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조선을 개구리에 빗대었다고 본 조선 총독부는 성서조선을 강제폐간하였다. 이때 그동안 발간된 성서조선의 전편을 압수 폐기하는 조치의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김교신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중 가장 악질들이다.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 100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터전을 마련해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라며 맹비난했다
김교신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가장 더럽다 천대받던 흥남질소 비료공장에서 5천여명의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본인도 발진티브스에 전염돼 해방 백일전 유명을 달리했다.
독립을 보지 못한 김교신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도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에서 동양의 고난이 이 땅에 집중된 것은 한반도가 동양의 중심임을 증명하며, 따라서 동양의 가장 고귀한 사상 또한 한국에서 나올 것이라고 민족에 희망을 전했다.
교회사학자 민경배(연세대)는 “민족교회사를 공부할수록 그 주류와 명맥은 김교신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깊어가고, 그의 인품과 신앙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의 모습, 나라 사랑의 길이라는 생각이 더해 간다.”고 밝히는등 김교신이 성서조선에서 보여준 기독교적애국심은 한국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장기려박사는 평생 의료 봉사로 류달령은 새마을 운동의 전신인 국가재건운동 본부장으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을 선진국으로 재건했다.
조와(弔蛙) / 김교신 (1900-1945)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다. 층층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연못 속에서 솟아나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마련해 준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다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연못 속에서 바위의 색깔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 속에 큰일이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새로 온 손님에게 접근하는 친구 개구리들. 때로는 5,6 마리, 때로는 7,8마리.
늦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더니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날로 날로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연못의 투명함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소식이 막힌 지 무릇 수개월 남짓!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 찾아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세 마리가 연못 꼬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연못의 적은 물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현대어 번역 www.biblekorea.net)
신학적 저술 이외에도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일기 등은 해방 직후 부족했던 한국어 교육의 교본으로 사용될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 속에 담긴 김교신의 투철한 교육 철학과 교육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광복 이후 노평구 등의 노력으로 전편을 다시 수집하여 영인본과 전집의 형태로 재발간하였으며, 부키에서 전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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